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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터널 선샤인 감상평. 스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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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redi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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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120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1/21 02:2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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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 1.


기억은 유일하게 시간을 역행해 날아드는 관념이다.

모든 관념은 관념이 표상하는 대상과 우리의 지각 사이에 시차가 존재한다. 시각은 빛 입자가 물체에 반사되어 눈에 들어오기 까지의 시간이, 소리는 음파가 고막을 때리기까지의 시간이 들어 찬다. 아주 약간의 시간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관념은 관념이 표상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보다 늦게 지각된다.


그 중에서도 기억은 특히 먼 과거의 사건만을 표상한다. 우리가 기억을 통해 지각하는 대상은 언제나 과거의 것이다. 기억은 그렇게 과거로부터 건너온 사건에 대한 관념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는 대상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다.


얼마 전에는 이터널 선샤인을 봤다. 기억에 대한 영화였다.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나는 기억과 망각에 의한 행복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을 본다. 어떤 기억은 너무 쓰라리고, 그래서 우리는 기억을 망각하고 억제하고자 노력한다. 이런 노력은 무의식적으로도, 의식적으로도 일어난다.


어떤 기억은 기억이 날아오는 거리만큼 선명해진다. 이럴 때 기억은 작년에 날려보낸 상처 입은 가을새와 같다. 먼 거리를 비행하면 비행할수록 우리는 더 강렬하게 기억을 접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저질러 버린 상처에 대해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행복을 바란다면, 인간은 죽은 새를 잔뜩 끌어안고 행복을 향해 거니는 방랑자이다. 모두가 너무 바쁘다. 네가 그러지 않아도 난 이미 너무 바빠, 피곤해, 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사람들은 모두 이미 너무 바빠버렸고, 우리는 서로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러나 기억은 우리의 것이면서도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우리가 한 명의 방랑자로서 갈림길에 설 때, 우리가 다른 방랑자를 마주할 때, 우리가 언젠가 날려보냈던 가을새가 상처 속에서 죽은 눈을 희미하게 다시 뜨며 우리를 바라본다.


상처는 시간을 입고 흉터가 된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므로 우리는 상처가 입은 시간을 벗겨낼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죽은 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얼마 많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가진 선택권은 고작 죽은 새의 눈동자를 외면하는 것뿐이다.


영화 속의 조엘 역시 같은 상황에 놓인다. 조엘은 실연이라는 새를 끌어안고 슬퍼한다. 영화 초반 차 안에서 우는 장면은 조엘의 슬픔을 잘 드러내 주는 장면이다. 조엘의 눈물에서는 기억의 어쩔 수 없음이 잘 드러난다. 단순한 슬픔과 우울과는 다르게 기억에 의한 아픔은 무기력을 함축한다. 우리가 기억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거기에서 우리는 서러움을 느낀다. 아픈 기억들은 대부분 우리가 저지를 것이고, 고로 서러움은 더 커진다. 조엘 역시 자신이 클레멘타인에게 했던 말에 의해 클레멘타인과의 실연을 경험하고, 이것으로 인해 아파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기억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 이것은 우리의 장기기억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함부로 소중한 기억을 버리고 싶지 않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터널 선샤인은 이러한 기억의 특징을 뒤집는 영화이다. 클레멘타인도 조엘도 자신이 쥐고 있는 기억을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기억을 삭제하기로 다짐한다. 이런 다짐은 영화의 중심이 되는 라쿠나 회사에 의해 실현된다.


기억을 버릴 수 없는 두 이유 중, 전자는 영화를 관통하는 테마가 되고, 후자는 조엘이 기억과 데자뷰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이유이자 영화의 주요 갈등이 된다.


이터널 선샤인 2.


기억을 한 권의 책에 비유한다면, 우리의 기억 저장소는 책들이 무분별하게 날아드는 도서관과 같다. 우리는 그곳의 사서이지만 어느 책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도서관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지, 절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게다가 그 책들은 종종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우리의 책상 위에 놓이고는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도서관에 꽂힌 책들의 작가가 모두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마구마구 책을 집필하고, 다시 마구잡이로 책꽂이에 꽂아 두는, 혼란에 빠진 작가와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로 좋지 않은 작가이므로 우리는 모두 날아드는 책들을 보며 자괴감이나 후회스러움을 느끼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억을 버리기를 망설인다. 애써 완성한 책을 처분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버린다는 것은 상대방을 우리 인생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과 같다. 만일 상대방이 순수한 혐오가 아니라 애증의 대상이라면, 그래서 때때로 몇몇 기억들을 추억하고자 원한다면, 상대에 대한 기억을 말소해버린다는 것을 망설이기 마련인 것이다.


하지만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기억을 말소하기로 다짐한다. 클레멘타인의 경우는 본래 자신이 충동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조엘의 경우는 클레멘타인의 선택이 너무나 충격적이고 슬픈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과는 다르게 영화 속에는 기억을 말소할 수 있는 장치가 존재하고, 둘은 라쿠나 회사로 간다.


나의 작은 도서관 안에서 내가 바랐던 것은 나쁜 책을 남기지 않는 것뿐이었다. 나쁜 문장들이 나에게 날아든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 문장들의 작가가 모두 나라는 것을 깨달을 때, 나는 많은 자괴감을 느낀다.


나쁜 기억은 너무 괴롭다. 이것은 나의 완벽주의적인 성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억의 몇 가지 특징들 때문이기도 하다.


기억은 시간을 입고 흉터가 된다. 상처는 치료할 수 있지만 흉터는 되돌릴 수 없다. 깊은 흉터를 완전히 되돌린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SF영화에서나 일어날 법 한 일이다. 기억은 과거에서 시간을 거슬러 찾아온 관념이므로 우리가 이미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기억을 삭제하더라도 그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는 바꿀 수 없다.


모든 기억은 우리가 참가한 사건을 지시한다.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기계를 통해 주입된 기억이 아닌 이상 기억은 우리가 현장에 있었거나,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낸 기억만을 표상한다. 바로 이것이 나를 너무 괴롭게 하는 것 같다. 모든 기억은 내가 노력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사건이다. 그래서 기억은 항상 후회와 자책을 함축한다.


모든 기억은 주관적인 것이고 따라서 너무 쉽게 그 색깔이 변하고 만다. 작은 단서나 다른 작은 기억 하나에도 수십가지의 좋았던 기억들이 후회와 자책으로 남는다. 기억은 무거운 동시에 가벼운 것이다. 기억이 지시하는 사건이 과거에 일어났던 시간만큼 무겁지만 동시에 쉽게 변하고 만다는 측면에서 가볍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주인공 둘은 기억의 가벼움 때문에 힘겨워한다. 둘이 심각하게 다툰 이후로 클레멘타인은 조엘에 대한 모든 기억이 분노로 남게 되고, 클레멘타인이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조엘은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이 자책과 후회로 남게 된다. 둘은 기억의 무거움을 넘어 기억을 삭제하기로 결심한다.


이터널 선샤인 3.


조엘이 기억을 삭제하는 과정은 영화의 주요 내용이 된다. 조엘은 기억을 삭제하기를 멈추고자 부단히 노력하는데, 이것은 기억의 무거움 때문이다. 클레멘타인을 만났던 시간동안 기억은 쌓이고 쉽게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때 기억을 쉽게 변화시킬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장기기억이 강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일을 스스로 망설이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상처가 시간을 입고 흉터가 되듯이, 기억은 시간을 입고 추억이 된다. 그리고 추억은 함부로 지우겠다고 쉽게 다짐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조엘이 왜 기억을 삭제하겠다고 다짐했는지는 영화 내에서 자세하게 그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조엘의 선택이 충동적인 것임을 암시하는 것일 테다. 실제로 조엘은 긴 심사숙고 끝에 결단을 내리기보다는 라쿠나 회사의 존재를 알고, 그리고 클레멘타인이 기억을 삭제했다는 것을 알고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린다.


다음 장면에서부터, 즉 조엘이 기억을 삭제하기로 다짐한 순간부터는 조엘의 후회가 연속적으로 드러난다. 기억을 우리가 작년에 날려보낸 상처입은 가을새에 비유한 바 있다. 우리가 기억을 날려보내더라도, 잠시 잊으려고 결심하거나 아니면 조엘처럼 영원히 삭제해버리겠다고 결심하더라도, 우리의 가을새는 어느새 우리의 품 안에 들어와 죽은 눈을 치켜 뜨고 우리를 바라본다.


조엘이 기억을 삭제하는 과정은 이러한 죽은 새와의 눈 마주침의 연속이다. 개중에는 클레멘타인과의 싸움 등 좋지 않은 추억도 있지만 함께 천진하게 놀고 어울렸던 좋았던 추억도 있다. 전자의 기억은 후자의 기억에 비하면 사소한 것으로 지각되고, 조엘은 기억을 삭제하겠다는 다짐을 어떻게든 돌이키고자 한다. 이것은 조엘이 가진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의 무거움이 기억의 가벼움을 뛰어넘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억은 그 색깔이 쉽게 변하는 것이고 이것을 기억의 가벼움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쌓이고 누적되어 쉽게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기억의 무거움이라고 했다. 애써 기억을 지우겠다고 결단한 것을 다시 망설이게 된 것은 기억의 무거움이 가벼움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조엘의 기억을 삭제하는 과정은 조엘의 의식 세계 안에서 조엘을 쫓아다니는 검은 그림자로 묘사된다. 검은 그림자는 조엘의 기억 세계 안에서 사물이나 사건을 하나하나 지워나가게 되고, 조엘은 이로부터 도망치고자 노력한다. 영화 내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좋았던 추억은 주로 밝은 분위기를 띤다. 대표적으로 몬타우크에서의 눈이 쌓인 풍경이 있다. 이와 대비해 기억을 삭제하려고 다가오는 무언가는 검은색을 띤다. 라쿠나 회사 내의 풍경이나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싸우고 돌아갈 때의 풍경 등등은 모두 어두운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색깔은 조엘의 노력에 의해 서로 대립하게 되고, 끝내 기억 삭제의 어두움이 승리를 거둔다.


이터널 선샤인 4.


기억 저 편에 있는 우리의 경향성에 대해서.


기억이 쌓일수록 함께 형체를 이뤄가고 자라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경향성이다. 예컨대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면 그 상대방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기억과 함께 상대방을 향하는 경향성이 증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사랑에 있어서 잘 적용된다. 우리가 연인과 함께 기억을 쌓으면 쌓을수록,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연인을 더 좋아하게 되고 정이 쌓인다. 그리고 상대방과 연인을 끊는 것 역시 더 어려워진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 상대방을 향하는 경향성이 증가해 나가는 것이다.


기억을 걷어내더라도 경향성은 남게 된다. 우리가 연인과 헤어진 이후에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사진을 불태우고 선물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최종적으로 몇몇 개의 기억을 잊었다고 하더라도, 연인을 향해 다시 이끌리고 다시 몇 개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기억 저 편에 있는 우리의 경향성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정이라고도 표현해볼 수 있는 이 경향성은 기억의 저 편에서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좀 더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경향성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되살릴 수 있는 기억인 외현기억(장기기억과 단기기억이 이곳에 포함된다.) 아래에서 점점 쌓이고 자라는 암묵적 기억인 것이다. 연인과 헤어진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기억이 사라지더라도 연인과 함께 했던 기억 속의 습관들을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조엘 역시 이러한 경향성을 앓는다. 조엘의 기억의 가벼움과 기억의 무거움 사이의 싸움은, 조엘이 기억 삭제를 다짐하는 순간에는 가벼움이 우세했다가, 조엘이 자신의 정신세계 내에서 싸움을 벌이는 순간부터는 무거움이 우세한다. 하지만 조엘의 싸움은 결국 패배로 끝나게 되고 기억은 모두 삭제되고 만다. 결국에는 기억의 가벼움이 안타까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것은 기억의 가벼움을 한껏 증가시킨 영화 속의 장치인 라쿠나 회사에 기인하는 것이다.


조엘의 기억 뒤편에 남아있던 경향성은 기억의 무거움이 들고 있던 마지막 남은 카드 한 장과 같다. 그리고 이 한 장이 조엘과 클레멘타인을 다시 이으며 영화의 모든 것을 뒤집는다. “몬토크에서 만나라는, 조엘의 무너지는 정신세계 안에서 클레멘타인이 마지막으로 속삭인 말 한 마디는 기억 저 편의 경향성이 스스로에게 속삭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헤어진 연인과 거닐었던 거리를 다시 거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런 때와 마찬가지로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처음 보았던 장소로 다시 이끌리는 경향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때 몬토크의 풍경은 눈이 쌓인 풍경으로 무척이나 밝고 환한데, 이것은 영화의 제목인 영원한 햇빛Eternal sunshine을 암시한다. 몬토크로 다시 가는 길이 곧 기억의 가벼움과 즉각성을 넘어 영원히 지속되는 경향성의 세계로 가는 길인 것이다. 영화 중간에 매리가 읊은 알렉산더 포프의 시구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은 눈이 쌓인 풍경 아래에서 천진하게 뛰노는 둘의 모습을 잘 표상해준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경향성에 이끌려 다시 만나게 되고, 둘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터널 선샤인 5.


남은 이야기들.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다짐했다면 사소하고 가벼운 기억 따위는 잠시 미뤄두고 우리의 경향성에 의존해야 할 때가 있다. 경향성은 장기적인 것이고 기억은 금방 색깔이 변하는 것이므로. 오랜 사랑을 원한다면 기억보다는 경향성의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조엘의 마지막 말인 괜찮아요, 는 이런 태도를 잘 들어내 주는 말이다. 연인과의 관계에서, 클레멘타인의 마지막 말처럼 서로 싸우고 실증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일 정도는 눈 감고 무시해도 좋은 것이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다시 만난 이후에 조엘과 자신이 결혼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이나 기억에서라기 보다는 클레멘타인의 조엘을 향한 경향성이 속삭인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만큼 서로는 서로를 향해 강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경향성에 대한 의존을 지속한다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 이후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미래가 전보다 밝을 것이라고 예측되는 이유는 둘이 이미 한 번 기억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의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의 싸움은 좌충우돌을 통해 결국 기억의 무거움이 승리를 거둔다. 이것은 둘이 다시 몬토크에서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강력하게 보증하는 것이다. 고로 둘은 다시 쉽게 기억의 가벼움으로 빠지지는 않을 것이고 핑크빛 미래를 누릴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기억의 무거움이 기억의 가벼움에 대해 승리를 거두며 영화는 끝이 난다.


 


제가 혼자서 만든 잡지 '우다-환상으로부터 온 에세이' 에 수록될 감상평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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