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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거짓말
나의 환상은 현실을 위한 거푸집이라는 망상이 나를 찾아온다.
현실이 환상을 위한 거푸집임은 거의 확실하다. 횡설수설 안에서 나도 모르게 피어 오르는 환상만이 나에게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환상을 위한 기반이며 내 환상의 둥지를 짓는 새들이 나뭇가지를 물어오는 공허한 공터이다. 현실은 환상을 꿈꾸게 해준다는 측면에서만 가치 있는 것이다. 내가 현실에서 더 안주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더 많은 환상을 꿈꾸기 위해서일 뿐이다.
나는 현실의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하고자 노력한다. 나는 젠틀하고 평범한 페르소나를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이러한 사실을 숨기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어차피 인간 관계란 대부분 페르소나들의 투쟁과 화합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페르소나를 입고 나가야 한다면 나는 좋은 페르소나를 입고 나갈 것이다. 남들에게 해를 주지도 않고 이익을 주지도 않으며 동시에 그저 흘러가는 사람처럼 지내는 것. 이것이 내가 현실에서 바라는 전부이다.
이런 나의 페르소나를 위협하는 모든 것, 예컨대 분노와 같은 격렬한 감정이나 불안의 소용돌이는 잠시 치워 두고자 노력한다. 애써 나의 격렬한 증오나 불안을 남들 앞에 내세울 필요도 없으며 이런 것들을 남들에게 전이 시킬 생각도 없다. 왜냐하면 애초에 제대로 된 전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겉으로만 전이 시키고 전이 될 뿐이다. 근본적인 전이란 이해를 요구하는데, 아무도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언어를 동원하더라도 남들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 사이에 들어선 이해 불가능의 장벽을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나는 이 이해 불가능의 벽을 부수려고 하는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 스스로도 확신할 수는 없다. 나는 정말 이 이해 불가능의 벽을 부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이해 불가능의 장벽을 접하면 우선 크나큰 좌절감이 나를 찾아온다. 이것을 부숴야 할지 내버려 둬야할지 이전에, 소통 불가능하다는 사람들 사이의 선언이 나를 낙담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만약 이 장벽을 부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알 수 없다. 아마 그러한 능력을 갖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한참을 망설이게 되지 않을까? 소통이 가능해진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아니 애초에 소통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나 할까? 소통이란 본질적으로 불가능을 함축하는 개념은 아닐까? 많은 생각들이 나를 찾아오는 아침이다.
누군가에게 나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나에게 확인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모든 시와 소설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모든 시와 소설은 소통 불가능성의 벽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그 벽의 한 쪽에서 끊임없이 날카로운 못을 던지며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형상을 조각하는 것과 같다. 하면 할수록 자신 마음 안에 무엇인가가 명확해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벽의 저 편까지 다다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벽이 사라진다면 더 이상의 조각도 없다. 벽 저 편의 낯설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무한하고 공허한 춤자락만이 끊임없이 계속 될 것이다.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에게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개념이 너무 멀기 때문인지, 혹은 그것이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나는 그것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다. 완전한 공감이 가능하다는 것은 다만 한 순간 타인이 되어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를 완전히 공감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상대방이 되어야 한다. 상대방과 완전히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이상 완전한 공감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고로 현실에서의 모든 공감은 피상적이고 가볍고 불완전하다. 마치 아침의 환상처럼 명확하지 않으며 명확한지 아닌지 조차도 확인이 불가능한 종류의 관념인 것이다…… 우리는 완전히 서로 공감했다는 환상과 착각 속에서 글과 언어에 매달려 회의주의로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동물들일 뿐이다.
한 순간 타인이 되어 남을 공감한다 할지라도 대체 무엇이 남는다는 말인가? 다시 타인의 옷을 벗고 자신으로 되돌아 오는 순간 많은 것들이 다시 멀어질 뿐이다. 꿈에서 한 순간 타인이 되어 타인이 겪었던 사건과 정확히 동일한 사건을 경험했다고 해도 아침이 되면 모두 잊혀질 뿐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몇 자락의 환상과 환영, 착각과 오해와 거짓말뿐이다.
제가 혼자서 만든 잡지 '우다-환상으로부터 온 에세이' 에 수록될 에세이 중 일부입니다. 반응이 좋으면 미스테리 갤러리에 쭉 연재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