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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살인하는 이야기 1.
게시물ID : panic_921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ediac
추천 : 1
조회수 : 85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1/17 15:06:19

에스파뇨르 이야기 1.

스티븐 에스파뇨르는 그때 주점에서 나와 근처 담배가게에서 담뱃잎을 사는 중이었다

그는 아침약을 먹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은 참이었다담배가게 쇼윈도에서 그의 짧은 머리 한 가닥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짧은 머리카락 하나가 하나의 문장처럼 머리에서 떨어져 나와 에스파뇨르와 이별하는 것처럼 나풀거렸다권태와 고뇌 사이에서 방황하던 에스파뇨르의 머리에서 튕겨져 나온 머리카락이 도시의 불빛들을 반사 시켰다그 문장은 무언가 말해보기도 전에 닫혀진 입처럼 아무것도 표상하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졌다에스파뇨르는 그 광경을 모두 인식할 수 있었다그의 감정은 몹시 불안정했지만 정신은 이렇게나 또렷했다.

딸랑 하고 손님맞이 벨이 울리자 훤칠한 종업원이 에스파뇨르 쪽을 쳐다보았다그는 약간 비틀거리며 종업원을 무시한 채 지나가 담뱃잎 진열대 앞으로 갔다그는 말 없이 익숙한 담뱃잎 케이스 하나를 집어 들어 카운터 앞에 놓았다.

에스파뇨르가 나가는 길에는 외국인 두 명이 담배가게로 들어오고 있었다그는 거리의 많은 사람들과 같이 둘을 지나쳐 밖으로 나섰다.

밖은 찬 공기로 가득했다어제 비가 온 탓이었다에스파뇨르는 집에 두고 온 약에 대해서 생각했다그것을 먹으면 기분이 나아지리라기분이 나아지면 담배도 피리라약을 먹은 후에 무언가 기분 좋은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에스파뇨르의 오래된 습관이었다추운 거리에는 사람들의 입김이 몇 년 반에 피워보는 담배의 입김처럼 적막하고 차가웠다.

그는 집을 향해 걸었다그가 자꾸 비틀거리는 것이 거리의 쇼윈도들에 비추었고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거리에는 새도 있었고 사람들도 있었다.에스파뇨르의 환상도 있었다.

에스파뇨르는 그런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왜곡된 성벽이나 자신을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아무런 악의도 없이그는 무언가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는 법을 잘 모르는 듯 했다그것이 바로 나쁜 점이었다.

선의와 마찬가지로 악의도 인간을 키우고 자라나게 한다그리고 어쩌면 인간을 생존하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누구에게도 선의를 품지 않는 것보다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는 것이 더 나쁘다고 마음 속 한 켠에서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다른 법이다그는 아직까지도 남들에게 악의를 품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일단은 그의 권태가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악의를 품는 다는 것은 너무나 귀찮은 일인 것이다.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우선 인간 전체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바로 이것이 에스파뇨르가 인간에게 악의를 품지 않는 두 번째 이유였다누군가에게 악의를 품는 것은 한 편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는 아무도 사랑하기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함부로 사랑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그리고 함부로 남에게 잘 해주어 어떤 부담을 주거나 받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사랑에 다시는 배반당하고 싶지 않다면 누군가에게 악의를 품어서도 안 된다인류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하고 그것이 이후에 배반당했을 때 자신이 받을 상처에 대해서 그는 생각했다그리고 그 이후에 권태에 대해서도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지 그는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의 환상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거리의 마주본 쇼윈도 사이에 끼어들어 무수히 많은 거울상을 만들었다에스파뇨르는 그 남자에게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을 주었다그 남자와의 포옹이 자신에게 안식을 줄 것처럼 느껴졌다남자는 에스파뇨르의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고 쇼윈도에 비춘 남자의 상이 에스파뇨르의 눈 안으로 쏟아지는 중이었다.

거리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들에스파뇨르의 발에 환상 속의 나무 상자 하나가 발에 치었다그는 상자 위를 그대로 지나 앞으로 걸어갔다환상 속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기억 속의 열차 하나가 사람들 사이를 통과해 지나는 소리가 들렸다.

쇼윈도에 비추던 검은 남자의 상 하나가 튀어나와 에스파뇨르를 향해 걸어왔다에스파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하게 비틀비틀 거니는 중이었고 그가 지나쳐온 환상들만이 그의 위안이었다새들은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에스파뇨르의 앞 뒤로 푸드덕거렸다그 중에는 머리 아래로 인간의 몸을 가진 새도 있었다.

검은 남자와 가까워지는 동안 에스파뇨르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어제는 이상한 날이었다하기는 매일이 그에게 이상하고 괴이한 날이기는 했다아침에는 자신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중력이 약하게 적용되는 그런 꿈을 꾸었고 깨어난 뒤부터 그 꿈을 그리워하느라 버티기 힘들었다.꿈에는 언젠가 좋아했던 아이 하나가 자신과 공원을 내달리는 장면도 있었다공원에서 한참을 내달리다 뜀박질을 하면 자신과 그 아이는 약한 중력의 힘을 받아 풍선처럼 높게 떠오르고는 했다달에 있던 것처럼 그립던 꿈 속 풍경…… 실제로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워지는 것이 있다고 그는 믿었다그리고 그는 그리워할 수 없는 것들만 그리워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아침 식사로 먹은 시리얼부터 책상의 끝자락사람들의 발끝까지 가벼운 그리움이 흘러나와 약한 중력 속에서 천천히 떨어졌다왜 그리움은 가벼울수록 깃털처럼 마음 속 공중 안에 오래 머무는지에스파뇨르는 생각했다.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에스파뇨르의 마음 안에서는 어제의 그리움이 꺼둔 수도꼭지에서 한 방울 물이 넘치듯 흘러 넘쳤다그리고 에스파뇨르는 환상 속 검은 남자와 마주했다그는 누구라도 끌어안고 싶은 심정이 되어 팔을 힘차게 벌렸다자신이 서있는 거리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거리의 사람들 중에서 자신 앞에 선 환상 속 남자가 가장 익숙하고 친숙한 사람이었으며가장 자신을 불안하게 하지 않았고그만이 유일하게 자신을 안아줄 수 있다고이상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며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에스파뇨르는 생각했다.

다음 순간에 검은 남자는 에스파뇨르를 그대로 통과해 지나갔다거리를 지나는 동안 수없이 많은 기억 속의 기차들이 사람들을 통과해 지나갔듯이 무심하게 그리고 아무런 감정 없이에스파뇨르는 전생의 연인을 방금 막 지나친 것처럼 이유를 알 수 없이 슬퍼졌다너무 빨리 지나가버린 열차같이 검은 남자의 안에 무엇이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검은 남자에게로 전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그의 그리움이 허공의 팔짓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어제부터 곳곳에서 흘러나오던 그리움이 바닥에 철푸덕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을 에스파뇨르는 들었다에스파뇨르의 눈 안에 남자가 지나가고 남은 공허가 비추었다조금씩 글썽이는 눈물로 남은 공허가 흐려지고 있었다.

에스파뇨르는 뒤를 돌아보아 그를 끌어안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러나 거리의 쇼윈도에서는 이미 남자가 사라진 이후였다환상 속의 낙엽과 함께 그는 뒤 쪽을 돌아보면 남자가 서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즈려밟았다끝이었다.

그리고나서 길을 걷는 동안에 거리에는 에스파뇨르의 환상만이 가득했다역시 기억 속의 열차들이 사방에서 내달렸다에스파뇨르는 열차들을 피하느라 비틀거리며 거리는 것처럼 보였다환상속의 새들은 이제 모두 머리 아래로 인간의 몸을 하고 쓰레기를 쓸었고풍경에는 온통 서투른 그림의 잡선 같은 선들로 빽빽했다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인간의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내달리고 있었고 뼈만 남은 코끼리는 뒤로만 걸었다사람들의 입김 속에서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해골 무늬들이 끊임 없이 생겨났고 누군가 담배라도 피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두개골이 거리를 굴러다녔다고래 한 마리가 지느러미를 땅에 치며 저편으로 기어갔다.

문득 에스파뇨르는 자신의 환상들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끼었다그리고 약이나 약을 먹은 이후에 담배 필 생각도 천천히 사그라들었다그것은 에스파뇨르가 무언가 조짐을 느끼거나 무언가 생각해낼 때 일어나는 일이었다에스파뇨르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다시 어느 가게의 쇼윈도에서 그의 머리카락 한 올이 떨어지는 것이 비췄다그것은 바닥에 닿기 전에 에스파뇨르의 눈동자안에서 사라졌다그리고 추위도 새들도 사람들도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에스파뇨르는 뒤를 돌아 담배가게에서 막 나온 외국인 중 금발의 미인을 뒤쫓기 시작했다그건 뜀박질도 종종걸음도 아니었다약간 빠르기는 했지만 그의 평소 걸음걸이와 똑같았다그 속도 마저도 점점 느려져 평소의 것과 같아지는 중이었다.

에스파뇨르는 차분함과 침착함을 느끼며 그녀를 미행했다.


제가 혼자서 만든 잡지 '우다' 에 수록될 단편 소설 중 일부입니다. 반응이 좋으면 공게에 결말까지 연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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