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뇨르 이야기 2.
집으로 돌아온 에스파뇨르는 약도 먹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은 자신이 미행했던 금발의 미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에스파뇨르는 머릿속으로 그녀를 처음부터 끝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위쪽 끝에는 금발의 머리카락이 머리에서 자라난 꿈과 추억인양 가득 피어났다. 다음으로 에스파뇨르는 그녀의 아래 쪽 끝에 있는 하이힐에 가려진, 단정하게 잘 정리된 매니큐어 칠해진 발톱을 상상했다. 그녀는 에스파뇨르의 취향도 아니었고 에스파뇨르가 그녀를 사랑하거나 한 눈에 반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를 어떤 충동으로 이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에스파뇨르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에스파뇨르는 어제 먹다 남은 피자를 먹으며 허기와 충동을 달랬다. 충동은 아꼈다가 한 번에 분출하는 것이 이치라고 에스파뇨르는 생각했다. 피자의 늘어지는 치즈가 그녀의 허리를 연상시켰다. 피자 끝에서 늘어지기 시작한 치즈는 곧게 뻗은 허리였다가 점차 아래로 쳐지며 엉덩이로 변했다. 에스파뇨르는 피자를 더 이상 먹지 못했다.
에스파뇨르의 집에는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그가 친구로부터 받은 선물들이나 언젠가 연인과 함께 먹었던 음료수 캔 등이 가득 차 있었다. 에스파뇨르는 그 모든 것을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그 모든 것들을 외우고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에스파뇨르가 세상에 남겨둔 미련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했다.
흥분이 가라앉자 에스파뇨르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니체였다. 우리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버틸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구절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사실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 만이 그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그 완전성이 신과 같은 절대적인 완전성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나의 일이라도 완전성을 갖추면 위안을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무척이나 소박한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결핍 내지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권태도. 완전하지 못한 모든 것은 권태로울 뿐이었다. 우리가 하나의 분야에 대해서도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 남들이 우러르는 괴물과 같은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이 그를 밤마다 괴롭게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어떤 분야에 대해서 자신이 완전해지는 것이 좋을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것을 이루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완전함에 이르는 길은 항상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어떤 완전함도 불완전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로 완전함에 이른다는 것은 수많은 불완전함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것을 버텨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고로 그는 쉽게 행동하지 못했다.
완전함! 그래 완전함이었다. 그가 간밤에 미행한 그녀에게는 어떤 종류의 완전함이 깃들어 있었다. 다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그녀를 되풀이하며 그는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알 수 없는 종류의 매력이 있으며 그것은 바로 완전함 일 것이라고.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완전함으로부터 피어난 가냘픈 꽃송이가 가득했다. 가냘프고도 위풍당당하게 자신을 뽐내는 그 꽃송이들을 생각하며 에스파뇨르는 꽃을 난생 처음 실재로 본 어린 아이처럼 동심에 잠기었다. 그녀의 머리카락만이라도 한 올 가질 수 있다면 하고 그는 바랐다. 상상 속에서만 보았던 그녀의 발톱에도 보라색 매니큐어가 사자에게 바치는 안개꽃처럼 경건하게 자신의 자태를 숨죽이고 있었다.
에스파뇨르는 그녀의 목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녀의 목을 바라보면 마치 목 자체가 그녀의 이름인 듯 했다. 그녀의 목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모든 부름을 무시하며 도도하게 거리를 지나친다…… 그녀가 죽더라도 그녀의 목 만은 수 백마리의 새 들이 입에 물어가고 어느 동굴의 입구 아래 새들의 둥지 아래 영원히 존재할 듯 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궁금해할 필요 조차 없다고 느꼈다. 그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름 없었다. 남은 피자를 다시 먹을 때, 신문을 볼 때, 책을 읽을 때, 모두 그녀의 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에스파뇨르는 어쩔 줄 모르는 상태에 처했다. 자신이 발견한 완전함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다는 말인가? 파괴할 것인가? 혹은 찬양할 것인가? 그러나 어느 쪽을 택하든 자기 자신은 그녀의 완전함에 대비해 불완전해질 뿐이 아닌가?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든 그녀의 목이 머리에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에스파뇨르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완전함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녀의 목은 끊임없이 생각났고 그는 갈 수록 자신이 초라해 지는 것을 느꼈다.
점 하나 없는 그녀의 목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욕지기가 일었다. 자신은 왜 그처럼 완전한 것을 표상하지 못하는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목을 바라보았다. 가냘프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에 깃든 꽃송이들처럼 수려하지는 않았다. 그저 메마르고 생기 없을 뿐이었다. 이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목이기는 한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은 목이라기보다는 무의식과 동기와 충동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육체에 약을 공급해주는 약 통로는 아닐지에 대해서.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고로 삶이라고 부르기조차 모호한 것은 아닐지에 대해서.
그는 자신의 인생 전반에 대해서 허무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비관주의자였다. 너무 많은 것들이 잘못되어왔다. 정확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꼽으라면 전부였다고 말할 것이다.
약을 먹으면 죽어나가지만 약을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시간이 찾아왔다. 에스파뇨르의 귓가에서는 새 머리를 한 남자 하나가 뭐라고 속삭였다. 불안에 빠진 에스파뇨르는 그것이 어떤 말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에스파뇨르는 화장실 변기에 엎드린 채로 숨을 헐떡였다. 화장실 안에는 새 머리를 한 인간도 있었고 쇼고스를 닮은 진흙 괴물도 있었다. 너무나 많은 환상들이 화장실 안에서만 우글댔다. 그는 문득 그녀의 목이 그리워 견딜 수 없었다. 간신히 일어나 거울을 보면 얼굴도 쇄골 아래도 없이 자신의 목만 덩그러니 놓인 것이 보였다. 그는 목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자신의 손은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그녀의 목에 대한 환상은 끝까지 떠오르지 않았다.
간신히 부엌을 기어가 약을 자신의 머리 아래에 있는 약 통로 안에 쏟아 부은 다음에야 그는 침착을 되찾았다. 소파에 앉아 에스파뇨르는 정면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밤의 어둠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딱히 말 할 거리도 없었다. 그는 잠에 들지도 못한 채로 환상 없음과 안절부절 사이를 거닐었다. 남은 것은 비참뿐이었다. 자신은 이런 생활을 지속해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목 만이 저 먼 곳에서 노을처럼 빗나고 있는 듯 했다.
제가 혼자서 만든 잡지 '우다' 에 수록될 단편 소설 중 일부입니다. 반응이 좋으면 공게에 결말까지 연재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