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과 떨어지지 않는 발을 질질 끌어가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늘 역시 어제와 다를 것 없이 버거운 하루였다 작년에 줄여 팽팽한 교복치맛단을 습관적으로 잡아내리며 걸었다 오늘 오늘 나 뭐했더라 오늘 뭔가 앉아서 뭘 하긴했는데 지문 풀고 문제 풀고 단어 외우고 그리고
그리고 맞아 학교에서 영수증 준거 - 하 뭘해준다고 40만원이나 맞아 나 버스카드에도 돈 없는데 그거 어떡하지 엄마한테 손 벌려야하나 엄마 아 엄마 지금 자려나 기다리고 있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소영이나 다혜 보면 돈 걱정 없이 이것저것 막 사던데 옛날에는 그런 애들이 철 없어보였는데 지금은 그냥 부럽다 나도 좋은 대학 가서 인생 역전하고 싶은데 근데
내가 좋은 대학 간다고 해서 뭐가 바뀌긴할까 아니 내가 대학을 갈 수는 있을까 내가
시간이 많이 늦었다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할줄 알고 설거지 또 미뤘는데 이러다가 진짜 바퀴벌레 나올거 같다 하 김팀장새끼 지가 와이프랑 싸운걸 왜 나한테 풀고 지랄이야 결혼한지 얼마나 됐다고 야근하고 싶대 미친인간이 야근할거면 혼자하던가 나는 이렇게 내 퇴근시간이 남의 퇴근여부에 흔들릴거라 생각해보질 못했는데
내 일이 아닐때는 그냥 다 호구들인줄만 알았다 이제 와서 보니 호구가 되지 않으면 그나마의 돈조차 나의 것이 아니다 대학 졸업한지 몇 년이 지났지만 학자금대출조차 밀려있었다 학자금은 무슨 대학에서 내가 배운건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과 이 사회가 얼마나 더러운지 밖에 없다 과탑보다 훨씬 못한 새끼가 빽으로 취업한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그 과탑은 이를 악물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잘 안다 내가 과탑이었으니까
학생 때는 닮고 싶은 선배 기대되는 아이였는데 사회에 던져지고 나니 그냥 어린애였다 애새끼 돈이 없으면 다 애새끼다
죽고 싶은건 아니지만 살기가 싫다 의미 없고 짜증나고 화나고 힘빠지고 뭘하고 있는걸까
담배 시발 이건 비싸긴 겁나 비싸면서 닳기는 엄청 빨리 닳네 전여자친구가 생각났다 몇년 간 열과 성을 다해 결국 그 비싼 여자와 만나게 되었더니 한 달쯤 날 지갑으로 쓰고 떠나버렸다 미친여자였다 난 호구였고
집 비밀번호를 누르려다 인기척이 보여 깜짝 놀랐다 캄캄해서 아무도 없는줄 알았는데 담뱃재 터는 소리가 들렸다 사삭 탁 휙 몸을 돌려 어둠 속을 보자 희미한 인영이 보였다
누구지 무섭다 도망가야되나 집 앞인데? 집으로 들어가면 더 큰일 나지 않을까 신고할까 지금 나는? 어떡하지
옆집 고딩이 집에 들어가려다 나랑 눈이 마주쳤다 움찔하고 가만히 있는걸 보면 어지간히 놀랐나본데 나도 사실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 들리기 전까지 걔가 있는지 몰랐다 내 생각에 익사하고 있었다
표정 보니까 좀 겁먹은거 같은데 야 안 들어가면 엄마 걱정해 고딩아
"학생 집 안 들어가요?"
말하고 보니 더 이상한 사람 같네 나 신고 당하는거 아냐?
"학생 집 안 들어가요?"
...왜! 왜 궁금한데!!!!! 머리를 굴리려고 했지만 별생각이 떠오르질 않았다 작게 숨을 뱉고 입을 열었다
"왜 남이 문 여는거 보고계시는데요?"
"왜 남이 문 여는거 보고계시는데요?"
"나 참, 나도 우리집 앞에서 그냥 담배 피고 있던거에요."
"아저씨 여기 살아요?"
"네. 여기. 너네 옆집이요. 섭섭하네, 나름 이웃인데."
"이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런가. 그럼 좀 미안한데. 어둠 속을 벗어나 조금 밝은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딩과 눈이 마주쳤다. 좀 익숙한 얼굴이냐? 캄캄한데 있어서 미안해요. 네, 하고 어색하게 대답한 고딩이 슬쩍 웃고 집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