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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글] 1분을 주었다 (하)
게시물ID : panic_921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속죄하세요
추천 : 20
조회수 : 1004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7/01/15 12: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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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오게나.”

 

 

건조하고 딱딱한 말투로 부장님이 나를 불렀다. 이미 소회의실 안에는 검은 그림자들이 일찌감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말없이 검은 형체만 일렁거리는 모습이 차가운 공기를 더욱 오싹하게 만들었다.

 

-

 

 

등 뒤로 부장님이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는 저 문 밖으로 되돌아 나갈 수 없다는 묘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저쪽에 앉게.”

 

 

내게 끝 쪽 소파를 향해 가리키고는 부장님도 단상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지난 번 저 소파에 앉아 바보처럼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짧은 신음 소리가 나왔다. 그래도 지난 몇 일간 수없이 다짐했던 나날을 생각하며 크게 한 숨 내쉬고 자리에 앉았다.

 

차갑게 내려앉은 소회의실 안에서 저 검은 그림자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다시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차라리 대화라도 하고 있었으면 저들에게 조금이라도 따스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에 잠긴 사이에 부장님이 입을 열었다.

 

 

그래. 어찌된 일인지 한 번 말 좀 들어보세.”

 

 

정적을 깬 부장님의 말에 검은 그림자들의 일렁거림이 순간 멈추었다.

 

 

사실 그 날은 조금 몸 상태가 안 좋았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언질이라도 좀 해주던가. 그렇게 아무 것도 못 하고서는...”

 

 

부장님은 검은 그림자들의 눈치를 보고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애꿎은 서류 종이들만 매만지며 끙- 소리를 내었다.

 

 

-괜찮습니다. 뭐 그동안 열심히 해주셨으니 그럴 수도 있는 거지요.

 

 

검은 그림자들 중 하나가 말했다. 부장님은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고는 누구의 입에서 나온 소리인지 눈알을 굴리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 죄송합니다. 제가 밑의 사람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아닙니다. 그동안 부장님의 노고에 대해서는 저희도 잘 알죠.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신이 난 아이처럼 부장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검은 그림자들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자네 뭐하고 있는건가. 얼른 일어나서 사죄드려.”

 

싫습니다.”

 

뭐라고!?”

 

 

짧게 뱉어낸 말 한마디에 부장님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또 다시 죄어오는 중압감을 피하기 위해 검은 그림자들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싫다고 했습니다.”

 

, 이 자식이...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하하하. 재밌는 분이시군요.

 

,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장님이 성난 몸을 이끌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살기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중압감과 살기를 곁들인 공간에 앉아 있으니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차분히 숨을 내쉬고 눈에 힘을 주어 부장님을 쳐다보았다. 굽히지 않는 내 모습에 놀랐는지 부장님의 눈빛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생겨났다.

 

 

도대체 왜 이래야 하는 겁니까?”

 

 

자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건가?”

 

대체 왜 이렇게 해야 하냐는 겁니다!”

 

 

나의 외침에 소회의실 안의 무거운 공기가 깨져나갔다.

 

 

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제 업무며 천국이라고 하는 다른 세상이며. 도저히 이해가 되지가 않습니다!”

 

 

, 이 친구가...”

 

왜 그 고객들은, 아니 그 사람들은 그렇게 되먹지도 못할 장난질을 당하게 하는냐는 말입니다!”

 

 

순간 검은 그림자들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것 같았다. 나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1분이요? 그렇게 되돌리고 되돌려서 누가 살아나기라도 했답니까? ? 대답해보세요! 영업이고 뭐고 그딴 짓거리에 고객이니 뭐니 말 붙이는 것도 같잖다는 얘깁니다!”

 

, 당장 그만하지 못해!?”

 

 

부장님은 어느새 내 멱살을 부여잡았다. 조금 전 살기를 내뿜던 눈빛은 이미 온 몸으로 퍼졌는지 당장이라도 나를 죽이러 들 것 같았다. 부장님의 이마에 곧게 선 핏대가 이를 말해주었다.

흥분한 숨을 내쉬며 노려보는 부장님 너머로 검은 그림자들을 쳐다보았다. 표정도 몸짓도 없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당최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허나 전보다 더 섬뜩할 정도로 무언의 압박이 발끝부터 천천히 내 몸을 잠식해 나갔다. 이러다 또 다시 아무 말도 못하는 바보머저리가 될까봐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일부러 그랬습니다. 지옥이 아닌 천국으로 보낼려고!”

 

 

다시 검은 그림자들의 움직임이 요동쳤다. 핵심을 찔렀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맞지요? 사실 그들은 지옥이 아닌 천국으로 갈 사람들 이었다는거...”

 

자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건가?”

 

 

멱살을 잡은 부장님의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하하하하.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단 말이군요.

 

-호호. 왠지 범상치 않을 것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검은 그림자들은 묘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예상과는 다른 그들의 반응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 마음을 들킬세라 다시 입을 열었다.

 

 

맞나보지요? 그렇게도 재밌으셨습니까? 그들을 유희거리로 삼는게?”

 

자네! 자네는 해고야! 진짜 미쳤구만!!!”

 

 

부장님이 내 멱살을 잡은 채로 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완강히 저항하는 젊은 사원의 힘을 막지는 못했다. 몇 걸음 가지 못한 채 땀을 흘리며 끙끙 대는 부장님의 팔을 있는 힘껏 쳐내었다. 매몰차게 숨을 내쉬는 부장님은 이미 살기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정리한 사람은 검은 그림자 중 하나였다.

 

 

-부장님은 잠깐 나가 계시죠.

 

?”

 

 

예상치 못한 말에 부장님은 놀란 눈치였다.

 

 

,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저 친구랑은 할 얘기가 좀 많을 것 같네요.

 

-. 저도 그러네요. 뭔가 좀 아는 듯한 눈치던데.

 

, 아니. ...”

 

-나가 계시죠.

 

 

그들의 말투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소름 돋는 중압감은 부장님도 나도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문 밖으로 도망가고 싶을 만큼 냉혹하고도 날카로웠다.

 

 

아아, ... , 그럼...”

 

 

부장님도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 밖으로 나갔다.

 

 

-

 

 

문 닫히는 소리가 이리도 끔찍하게 들릴 수 있을까. 어느새 소회의실 안에는 나와 저 검은 그림자들만 남아있다는 생각에 몸이 살며시 떨렸다.

 

 

-그래서요? 계속 해보세요.

 

-그래요. 그냥 내뱉은 말은 아니시겠죠.

 

 

검은 그림자들은 내 쪽을 향하여 가까이 들이댔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들의 분위기에 잠식될 것 같았다.

 

 

도대체 어째서! 저를, 아니 전 주임님도, 그리고 그 전전 사람들에게도 거쳐 갔을 그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벌이는 겁니까?”

 

-. 짓거리를 벌이다니요.

 

다시 살려준다는 그 말도 안 되는 거짓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잔인하고 참혹한 일들을 수없이 겪었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거기다가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구경거리로 삼고?”

 

 

격해진 감정을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을수록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중압감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자 더욱 힘 있게 말을 내질렀다.

 

 

당신들이 말하는 천국이라는 곳. 뭐가 어쩌고 저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그 사람들 모두 천국으로 갈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럴 자격...?

 

억울하게 죽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다시 살리기 위해 몇 번이고 그 지랄 맞은 사고를 수없이 반복하면서도 구하려고 했으니까.”

 

말을 마치고 그동안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갑작스런 사고에 아내를 구하기 위해 몇 번이고 폭발의 고통을 감내한 남편. 어린 딸을 부등켜 안고 트럭과의 충돌을 감수한 여자.

그런 사람들이었다. 구원의 기회를 본인이 아닌 다른 이에게 쏟아 부은 사람들. 그깟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주저하지 않고 몇 번이고 1분을 되돌린 사람들. 천국이라는 곳의 존재를 알기 전에는 모르겠지만 알게 된 이상 그들은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선인. 자기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아니면 천국은 대체 누가 가겠는가.

 

 

-호호. 재밌으시네요.

 

-하하하. 그렇게 생각하신단 말이죠...

 

-, 그럼.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하면 될려나.

 

-호호. 무슨 얘기를 하시려구요?

 

-, 저렇게까지 궁금해 하시는데.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지요.

 

-으음. 그래도 저 분이 다 알고 말씀하시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하하. 사실은 제가 저번에 저 친구에게 얘기한게 있긴 합니다.

-얘기요?

 

-제가 천국이 있다고 알려줬거든요.

 

-세상에. 그걸 알려줬단 말이에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하하

 

 

검은 그림자들은 서로 잡담을 주고 받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 좋아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천국에 대해서 궁금 하신거죠? 그리고 그 영업 고객들에 대해서도.

 

...”

 

 

엄한 긴장감이 이어질 줄 알았지만 사뭇 다른 그들의 태도에 조금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 쪽이 생각하시는 천국이란게 뭐죠?

 

제가 생각하는 천국이라니...?”

 

-뭐 이왕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아셨으니 거기가 어떤 곳인지 대충 짐작 하시는게 있지 않으신가요.

 

, 착한 사람들이 가는 곳 아닙니까?”

 

 

대답하고 나서도 너무나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소리에 아차 싶었다. 하지만 정확히 알 길이 없었다. 악한 사람은 지옥에 가고 선한 사람은 천국에 간다는 얘기를 살아 생전 수도 없이 듣고 자랐으니. 더군다나 죽은 세계가 지옥이 아닌 천국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터였다.

순수하리만치 짧은 내 대답에 검은 그림자 중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호. 요즘도 그런 생각을 가지는 분이 계실 줄이야.

 

-하하. 예나 지금이나 다른게 없네요.

 

 

비웃고 있었다. 그들의 묘한 웃음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창피하고 분노가 일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궁금했다. 대체 저들이 말하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빨리 대답해주기를 기다렸다.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에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니?”

 

-뭐 태생부터 선한 사람일수록 아름답게 꾸밀 수 있으니까요.

 

, 아름답게 꾸민다고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뭐 그건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천국이 어떤 곳이고, 그 당신이 영업한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서 뭘 어떻게 하실려고요?

 

, 그건...”

 

 

사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단순히 거짓된 구원의 기회 속에서 아무 것도 이룰 것 없이 지옥의 노예로 사라져간 사람들에 대한 분노심이었다. 그간 거쳐간 사람들에게서 끝없는 연민을 느꼈고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조금씩 쌓여만 갔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알게 된 또 다른 세상의 존재를 통해 무력감이라는 족쇄를 풀려고 했다.

더 정확히는 내가 알고 있지 못하는 퍼즐판의 조각을 끼워 맞추고자 했던 호기심. 그 호기심을 채우고 나서야 무언가 해야 할 일을 찾아낼 것 같은 꼬리 없는 자신감.

 

-뭐 됐어요. 어쨌든 나는 얘기를 해주고 싶으니까. 사실 이 세계는 천국밖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천국밖에 없었다니...?”

 

-당신들을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했던 신께서 그렇게 만든거지요.

 

신이라고?”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터져나왔다.

 

 

-그래요. 전지전능하신. 당신들이 목메어 우는 존재.

 

 

다른 검은 그림자가 말을 이었다.

 

 

-사실 신께서 당신같은 사람들을 빚어 만들 때에도 유독 그 애정이 남달랐지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저희도 모두 뜯어 말렸지요. 만물은 평등한데 어째서 이들에게만 그리 정성을 담는지 몇 번이고 여쭸지요. 그리고 신께서 돌아온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 그게 무업니까.”

 

-재밌으니까.

 

그게 무슨...”

 

-신께서 일 하시는게 따분하셨나 보죠. 그런 어처구니 없는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어쨌든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당신네들은 조금은 특별한 존재로 살아가게 된 거지요. 그리고 신께서는 항상 당신네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죠.

 

-꽤나 오랜 시간이었죠? 천 년? 아니 좀 더 될려나?

 

-신께서는 조금씩 성장해가는 당신 인간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마치 자기 자식을 바라보는 것처럼.

 

-에휴. 신도 참.

 

 

혀를 끌끌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어떠한 답문을 던져할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어쨌든 신의 잘못된 애정 속에서 당신들은 열심히도 살아갔지요. 서로 죽이고 교활한 혓바닥을 놀리면 말이죠.

 

-저희는 그런 당신들을 보면서 탐탁치가 않았답니다. 저리도 교만하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존재들이라니.

 

-하지만 신께서는 그런 모습 조차도 가여이 여기고 스스로를 자책하셨지요.

 

-신께서 잘못한게 뭐가 있다고 정말...

 

-그래서 신께서는 또 다시 무언가를 만들었죠. 바로 죽은 당신들을 위한 세상을요.

 

, 천국...?”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만들기 전에 당신 인간들의 속을 들여다 보았지요.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그리 피폐하고 그릇된 삶을 살아가는지.

 

 

나는 조용히 그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야 신은 깨닫게 된거죠.

 

-바로 영원한 삶. 고통도 고난도 없는 안식의 길.

 

-그 때 이후로 신께서는 또 다시 쉴 틈 없이 빚었죠. 천국이라는 세상을. 그리고 이 세상에는 저 당신들 세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당신들을 빚어냈습니다.

 

다른 모습?”

 

-사실 무질서하고 영악한 당신들이 살아가기엔 영원이라는 것은 분수가 넘치는 일이지요.

 

-암요, 그렇고 말고요.

 

-때문에 저희도 이번에는 가만히 넘어갈 수만은 없었지요. 저 세상에서도 저리 흉측하고 교만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원까지 베푼다? 이건 쉽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저희의 성화에 신께서도 모른 척 하고 계시지는 못하셨지요. 그래서 결국은 당신들을 꽃으로 빚어내기로 정하셨습니다.

 

...?”

 

-참으로 역겨운 비유가 아닐 수가 없네요. 꽃이라니...

 

-신께서는 저희의 반발에 적당한 선을 찾아내신 거라고 봐야지요. 당신들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도 남달랐으니.

 

-저희도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요. 하지만 당신네들 주둥아리만 닫을 수만 있다면...

 

-말씀이 너무 나가셨어요. 호호.

 

-하하. 그런가요. 어쨌든 당신네들을 위해 천국이라는 세상을 만들었고, 당신네들이 그토록 원하는 영원이라는 삶을 주었지요. 물론 주둥아리가 없는 꽃으로.

-당신들은 그 것 만으로도 감사해야 해요.

 

, 그런 말 같지도 않은...”

 

 

터무니없는 그들의 궤변을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다. 인간을 빚어내고 천국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어줄 만 했다.

 

허나 꽃이라고...? 영원을 주기 위해서라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허황된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풀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목을 죄어오는 저들의 중압감도 언제 계셨나는 듯 삽시간에 사라졌다.

 

 

-호호. 믿지 않는 눈치시군요.

 

-저들이 뭘 알겠어요. 신만 가여우시지.

 

-뭐 그래도 일단 이야기는 계속 해나가지요. 신의 가호 덕분에 당신들은 죽어서도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어요. 주둥아리 없이 바람에 산들거리는 당신들. 꽃들을 보고 있으면 뭐 경치는 나쁘지 않았죠.

 

-뭐 그건 인정하죠. 신의 정원이니까. 가끔씩 그 곳을 걷는 것은 나쁘지 않지요.

 

-하지만 신은 끊임없이 당신들에게 관심을 가졌지요. 그리고 이번에는 영원을 살아가는 당신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당신들은 정말 영약하고 이기적인 인간들이야.

 

-영원을 주었는데도 당신들은 그 것 조차 불만이었지요. 더 많은 것을 요구했어요. 꽃이 아닌 살았을 적과 똑같이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랐지요.

 

중간 중간 검은 그림자들 중 몇몇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신과 우리를 제외한 그 어떤 존재도 감히 영원을 품을 수 없는데 이 방자한 인간들은 더욱 욕심을 냈습니다.

 

-영원의 삶을 가진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이젠 우리 같은 삶까지 넘보려 하다니.

 

-신은 또 다시 우리를 불러 모았지요. 그리고 인간들에게도 똑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죠.

 

-우리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검은 그림자들이 물었다. 이야기하는 내내 인간들에 대한 혐오가 물씬 풍겨 나오는 말들을 들으니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지 짐작이 갔다.

 

 

물론 반대했겠지요...”

 

-맞아요. 맞아. 호호

 

-우린 또 다시 신에게 간청했지요. 저들은 이미 창조물로서의 정도를 넘어섰다고.

 

-우리는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인간들의 습성을 털어 놓았습니다. 간사함, 이기심, 허영, 탐욕... 다시 생각해보니 한 두 가지가 아니네요.

 

-어쨌든 간곡하게 청하는 우리를 뒤로 하고 신은 또 다시 독단적으로 결정했지요.

 

-아아... 신이시여.

 

-신께서는 인간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하나 더 만들었어요. 그리고 나서 당신들에게 말했지요.

 

-의지를 갖고 저 세상처럼 살아가고 싶은 자들을 위해 또 다른 세상을 만들었노라고.

 

-그리고 천국에 있던 인간들, 그 꽃들 중 대부분이 다른 세상으로 옮겨갔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뭐 안 봐도 알겠지요?

 

혹시, 그 세상이라는게...”

 

-맞습니다. 당신네들이 살고 있는 그 지옥.

 

 

점점 호기심을 채워주는 그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제는 거짓인지 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저 이 끝없는 의구심이라는 갈증을 해소해 주기만을 바랐다.

 

 

-당신네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주니 이제는 거기서도 똑같이 그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생활을 시작하더군요.

 

-신만 가엾지. 당신들이 뭐라고 정말...

 

-사실 당신들의 세상, 지옥도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었지요. 천국처럼 비옥진 땅에 청명한 하늘에.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신께서 천국 그대로 지옥을 빚었으니까.

 

-당신들이 그렇게 만든거야.

 

-당신들의 오만함에 하늘은 제 빛을 잃어갔고, 당신들의 끝없는 굶주림에 땅은 서서히 메말라 갔지요.

 

헛소리 늘어놓지 마!”

 

 

이들은 궤변만 늘어놓고 있었다. 탐욕이니 오만함이니 뭐니 하며 우리들에 대한 빗나간 혐오감만 드러낼 뿐이었다.

 

 

지금 그 헛소리를 나보고 믿으라고?”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요. 당신이 천국의 존재를 안 이상 이 정도는 얘기하면 좋겠다 싶은 것 뿐이니까.

 

-신만 불쌍하시지.

 

흐흐-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얘기...”

 

-어쨌든 이야기를 시작 했으니 마무리는 지어야 겠지요. 그렇게 당신들이 사는 세상은 점차 지금처럼 황폐하고 버려진 곳 인 마냥 변해가기 시작했지요.

 

-이를 본 신께서는... 젠장할. 진작에 당신들을 없앴어야 하는건데.

 

-신께서는 다시 스스로를 나무라셨지요. 신이시여. 당신께서는 아무 잘못도 없으십니다.

 

-신의 그릇된 자책감을 덜어드리기 위해 결국은 우리가 나서기로 했지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말하는 강경책들은 신께서 전부 수긍하지 않으실테니.

 

 

말을 마치고 검은 그림자들의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조용히 그들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자니 잠시 잊고 있던 소회의실의 한기가 조금씩 내 몸을 적셔왔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그들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직접 지옥을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 당신들이?”

 

-. 신께서 저 인간들을 아우르는 그 심복과 아량을 미처 몰랐노라고. 뒤늦게나마 깨우쳤노라고.

 

-입을 맞춘 저희들의 말에 신께서는 큰 감탄을 하셨지요. 이제야 본인의 마음을 알아주었다고.

 

-그 이후로 우리는 조용히 지옥으로 내려와 신을 대신해 당신들을 아우렀지요.

 

 

어느 누구도 웃음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그들의 말 속에는 냉소가 섞여 있었다. 그들의 말에는 악취가 풍겨 나왔고 털끝이 설 정도로 불길한 무언가가 있었다.

 

 

-당신들은 수 천 년 간 신의 가호 안에서 제 멋대로 자랐어!

 

-신에게 감사함은커녕 그 더러운 욕망을 쉬지 않고 숨 쉴 때 마다 내뱉었지.

 

-교활한 인간들. 만물의 모든 것 중에 가장 추악하고 쓸모 없는 것들!

 

, 당신들... 대체...”

 

 

감정 없이 내뱉던 그들의 목소리는 어느새 큰 화를 뒤집어 쓴 것처럼 매섭게 나에게 달려들었다.

 

 

-당신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어. 하지만 아직까지도 신의 비호 아래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터.

 

-우리는 인간들이 원한다는 명목 하에 악마들을 풀어놓았지. 인간들은 서로 노예로 부리고, 남을 밟고 위에 서고, 그 밑에서 가축처럼 일 하는게 당연하거든.

 

-신은 우리의 뜻을 받아들였어. 신께서 지켜본 인간들의 모습이 그러했으니까.

 

-우리는 지옥을 더욱 더 황폐하고 아무런 의미없이 살아가게 만들기를 원했어. 그래서 신께서 원하는 재건을 우리는 극구 부인했지. 천국과 다름 없을 정도로 좋은 환경을 지금의 지옥처럼 만든 것은 바로 인간들 자신이니까. 좋아서 그렇게 만든게 아니겠어?

 

-역시 신께서도 우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이뤄 나가다보니. 언젠가부터 우리는 신의 신임을 받아가기 시작했지.

 

 

어느새 검은 그림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욱 효과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신에게 청했어.

 

-그래. 지옥이라는 곳이 너무도 인간들이 살아가기에 좋은 곳이라 천국과 지옥과의 적절한 관계를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말했지.

 

-사실. 천국의 꽃들은. 선한 사람일수록 그 자태가 빼어났지.

 

-하지만 인간들은 어찌된게 죄다 지옥으로만 갈 요량만 갖고 있으니.

 

-결국엔 이 사이를 조율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설마...”

 

-그래. 바로 이 곳. 이 회사.

 

 

그들이 지껄이는 궤변의 종착지는 바로 이 회사였다. 지옥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회사.

 

 

-신께서는 우리의 노고에 큰 감명을 받으셨는지 굳이 요구하지도 않은 능력까지 전해주셨어.

 

-그래. 죽은 인간들에 대한 애정이 차고 넘친 나머지 감히 전지전능하신 그 능력을 너희에게 선사하라 하셨지.

 

 

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지전능한 능력. 감히 신께서 선사하신 그 힘.

 

 

, 구원...”

 

 

-신은 너희에게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할 기회를 주고자 하셨지. 그런 말도 안되는!!!

 

-신께서는 회사와 함께 그 능력을 소중히 써달라고 부탁하셨지만...

 

-너희 같은 인간들은 감히 그 분의 고결하고 성스러운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어!

 

그런 말도 안되는...”

 

-하지만 신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으니 우린 그 능력에 자그마한 장난을 좀 넣었지.

 

 

드디어 그들에게서 퍼즐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바로 끝이 없는 구원.

 

이 미친..!”

 

-하하. 인간 따위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호호호. 정말 재미있는 일 아니겠어요?

 

개 같은 놈들! 미친 새끼들!”

 

-감히 인간들이 뭐라고 그런 영광을 누리냔 말이지.

 

-호호. 그래도 뭐 덕분에 지옥에서의 삶이 심심하지는 않았지요.

 

-맞습니다. 천국에서는 너무 지루하고. 지옥에서도 예전처럼 재미있지가 않고.

 

-색다른 경험이지요. 업무 스트레스 해소는 역시 자극적인게 제일이지요.

 

...미친...”

 

 

미친 새끼들이 분명했다.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대답을 넘어서서 더 이상 그들과 대화하고 싶지가 않았다.

 

 

-우리는 신께서 감수하지 못한 일들을 해야 했을 뿐이야.

 

-신이 감히 행하지 못할 어두운 이면. 그게 우리의 역할이니까.

 

 

더러운 그들의 말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이는 궤변이다. 간사하고 더러운 혀로 꾸며낸 허황된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요즘은 인구 비율이 맞지 않아서 걱정이에요.

 

-그러게요. 천국에 꽃들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수가 별 차이가 없다는 걸 신께서 눈치채신 것 같더라구요.

 

-그건 큰일이네. 슬슬 다른 계획도 준비를 해야겠어요. 호호.

 

 

이제는 이 미친 것들과는 대화할 이유가 없어졌다. 어서 빨리 이 곳을 나가 저 미치광이들이 나부리는 이야기들을 모두에게 알려야했다.

 

 

-아참. 그러고보니 그 쪽도 구원의 기회를 받으셨지요?

 

 

검은 그림자 중 하나가 내게 물었다.

 

 

구원의 기회?”

 

-하하. 너무 오래 되서 잊으셨나보네. 혹시 준비된 거 있으세요?

 

-잠시만요. 보통은 부장님이 준비해주시는데 여간 귀찮은 게 아니네... , 여기 있어요.

 

-그럼 볼까요?

 

 

말이 끝나자마자 무섭게 소회의실 안에는 순간 어두워졌다. 그리고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언덕이 눈에 들어오면서 쓰러져 있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 그만해!!!”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낯익은 풍경.

나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은 그림자들은 영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괴음을 내며 언덕을 내려오는 차를 뒤로 한 채 남자가 힘겹게 여자를 향해 손을 까딱이고 있었다.

 

 

, 지은아!”

 

 

남자의 다급한 외침에도 여자는 눈을 뜨지 못했다. 그녀가 입은 새하얀 원피스는 어느새 새빨간 핏물을 머금은 채 젖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만하라고!!!”

 

 

크게 고함을 내지르는 내 목소리는 영상의 차 소리에 묻혀 소회의실 어딘가로 사라졌다. 잊고 있었던, 희미하게 매일 악몽 속에서 반복했던 그 순간을 어느 때 보다 선명하게 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 괜찮은거야?”

 

 

힘겹게 자기를 부르는 남자를 쳐다보는 여자의 눈이 영상을 가득 메웠다.

 

 

-호호. 이 부분이 제일 재밌어요. 뭔가 영화같지 않나요?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더욱 감칠 맛 나네요.

 

 

씨발! 그만 하라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덕을 내려오는 차는 그 둘을 덮쳤다. 인형처럼 양 옆으로 고꾸라지는 남녀를 보며 검은 그림자들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 흑흑... 그만 하라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차마 영상을 끝까지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검은 그림자들의 웃음소리는 영상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었다.

멍하니 잊고 싶은 기억에 잠겨 허우적 대는 동안 검은 그림자들이 입을 열었다.

 

 

-당신도... 구원의 기회를 받으셨더라고요.

 

-아마 스무 번 정도였죠?

 

-오늘 보니 다시 또 다른 장면들도 궁금해지네요.

 

-호호. 그럼 다른 장면들도 틀어볼까요?

 

-하하. 아꼈다가 나중에 보도록 하지요.

 

 

무심하게 오고가는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잊고 있었던 그 날의 감촉과 수 없이 반복했던 그 고통들이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당하고 나서 내 앞에 나타난 어떤 남자는 1분을 되돌려 주겠다고 말을 걸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물어볼 겨를도 없이 난 무조건 다시 되돌려달라고 간청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살릴려고 했었다. 하지만 세 번 네 번 반복하며 1분 전으로 돌아갔고, 결국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걸 뒤늦게야 알았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1분을 되돌리고 또 되돌렸다. 실패하면 지옥의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음에 오는 비참함. 그리고 결국에는 더는 그녀를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 나는 끝이 없는 구원의 기회를 돌리고 또 돌렸다. 잊지 않기 위해. 다시는 볼 수 없기에. 그녀의 눈, 그녀의 입술, 그녀의 얼굴을 새기고 또 새겼다.

 

 

 

흐흑...”

 

 

-이정도면 알아들으셨는지 모르겠네요.

 

-호호. 너무 많이 알려드린 거 같아서 좀 걱정이긴한데.

 

 

검은 그림자들은 이후로 내게 몇 번 더 말을 건냈다. 하지만 내가 전해줄 수 있는건 긴 침묵뿐.

 

 

-오랜만에 얘기 좀 했더니 좀 피곤하네요. 이만 돌아가도록 하죠.

 

-그럴까요. 그럼 저 분은 이제 어떡하지요.

 

-흐음... 글쎄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검은 그림자들을 뒤로 한 채 나는 힘 없이 벽에 기대섰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저들이 지껄인 궤변 때문인지 몰라도 곧게 서 있을 수가 없었다.

 

 

-, 좋은 방법이 생각이 났네요.

 

-그게 뭐죠?

 

 

검은 그림자들 중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이제 더는 그들에게 어떤 중압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 안에서 휘몰아치는 복잡한 감정만이 전부였다.

 

 

-사실 요즘 천국의 인구가 부족하긴 해요. 그리고 당신. 그녀가 보고 싶은 거지요?

 

“......?”

 

 

검은 그림자의 말에 조심히 고개를 들었다.

 

-뭐 별로 탐탁치는 않지만. 이제는 우리도 계획을 틀어야 하기에.

 

 

말을 마치고 검은 그림자는 내게 검고 긴 형체를 들어올렸다.

 

-아하. 무슨 생각하고 계신지 알 것 같네요.

 

-. 이제 슬슬 시작해두는 건가요?

 

-뭐 나쁘지 않죠. 일단 하나라도 거두는게.

 

 

다른 검은 그림자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하더니 이내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그리고 내 앞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는 들어 올린 형체를 계속해서 내게 까딱 거렸다.

 

 

-어차피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지옥에서 편히 살아가게는 놔둘 수 없지요. 그 전 당신의 업무를 맡았던 사람처럼.

 

 

나는 멍하니 검은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역시나 한참을 보아도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가시죠.

 

 

초점 없는 눈으로 검은 그림자를 바라보던 나는 조심히 그 형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몹시도 차가웠다. 인간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욱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칠흑같은 차가움이었다.

 

그리고 나도 이내 다른 검은 그림자들처럼 소회의실에서 몸을 감추었다.

 

 

 

 

 

*

드넓은 잔디가 펼쳐졌다. 살아 생전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분 좋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곳곳에는 싱그러운 향기가 온 몸을 감싸주었다.

멍한 정신을 이끌고 홀로 나 있는 외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지옥과는 다른 청량한 공기에 나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천국. 그들이 말한 천국에 내가 발을 디딛었다. 영원한 안식. 그 미친 것들이 말하는 신의 가호가 내려진 또 다른 세상.

 

 

, 여기가...’

 

 

너무나도 싱그러운 절경에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푸근했다. 오래 전 추억이 담겼던 장소에 다시 찾아온 듯한 그리움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흐흐... 그 미친 것들이 말한 게 사실인건가...’

 

 

추악하고 교만한 인간. 그리고 그들을 향한 맹목적인, 아니 빗겨간 신의 애정.

 

한참을 걷다보니 멀리서 무언가가 줄을 서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옷은 마치 이슬을 머금은 풀잎처럼 푸르렀고, 살며시 햇살을 머금은 그들의 옷은 멀리서도 눈을 찡그릴 정도로 눈부셨다.

하지만 바람이 불자 그들에게서 낯익은 악취와 왠지 모를 공포가 천천히 젖어왔다. 나는 힘껏 고개를 흔들고는 그들에게서 눈을 뗐다.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새하얀 꽃이었다. 모두가 모여 바람에 기분 좋게 서로의 얼굴을 비벼대는 다른 꽃들과는 다르게 외진 곳에 멍하니 서있었다. 나는 좀 더 그 꽃에 가까이 다가갔다.

새초롬하게 피어난 꽃잎은 바람을 따라 살랑살랑 몸을 흔들어댔고, 곧게 자란 줄기는 굽히지 않은 채 가볍게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꽃 옆에는 자그마하게 잔디가 움푹 파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자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살짝 몸을 기대었다. 가까이서 바라본 꽃은 매우 매혹적이고 나의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살며시 그 꽃잎이 떨어지지 않게 쓰다듬었다. 내 손길이 간지러웠는지 꽃은 바람을 타고 더욱 앙증맞게 비벼댔다.

 

 

천국이라...’

 

 

따스한 햇살이 이불처럼 내 몸을 덮어주었고, 옹기종기 모인 잔디는 내 등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한결 마음이 차분해지자 그동안 억눌렀던 분노가 부질없던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생각 없이 그냥 이대로 지낼 수 있는게 좋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파도처럼 스며들었다.

 

 

다 무슨 소용이 있다고...’

 

 

나를 향해 기분 좋게 인사하는 새하얀 꽃을 보고 있자니,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는 그런 세상.

 

흐흐.”

 

 

햇살이 너무나 따뜻해서 눈을 감고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평화로웠다. 아름답고.

나는 좀 더 꽃을 향해 몸을 바짝 당기고 꽃이 상하지 않게 팔로 가볍게 감쌌다.

그리운 냄새가 났다. 마음 깊숙한 곳까지 따뜻하게 만들 정도로 포근하고 안락한 기분이었다.

 

 

비로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긴장된 근육이 풀어지면서 졸음이 쏟아졌다. 신의 가호를 받은 것 마냥.

아마도 깨지 못할 깊은 잠이 될 것만 같았다.

 

 

.

.

.

 

 

그리고 나는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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