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이후 장지연은 이 황현의 절명시 필화 사건 이후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친일시[2]와 매일신보에 논설 주필로 있었고 730여편을 기고했다고 한다. 매일신보 기고 활동은 1914년 말부터 1918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빌려 조선인은 단결성이 없는 인종이라고 주장한 바도 있다.[3] 장지연이 이러한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은 일제강점기 경남일보사의 내부분열로 신문사를 퇴사한 이후 조선총독부 인사인 아베 미쓰이에의 권유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행보는 그 당시에도 유림,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비난에 대해 장지연 본인은 "1. 객원으로 대하고 사원으로 대하지 않는다. 2. 작성 원고는 일사, 유사, 종교 풍속 등의 내용에 한정하고 신문사 안이 아닌 밖에서 작성해 보낸다. 3. 아베 미쓰이에가 귀국하면 자신도 신문사 활동을 마친다."는 등 세 가지 조건에 입각해 매일신보에서 활동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제로 매일신보에 발표된 그의 논설글이나 작품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정에 호응하는 정치적인 언설들이 상당수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