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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 11일, 부산의 음식점인 초원복집에서 현지의 정부 기관장들이 모여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해 지역감정을 대놓고 부추기자고 모의한 것이 통일국민당 관계자의 도청에 의하여 드러난 사건을 말한다.
1992년 5월, 김영삼이 당권 장악에 이어 대권 후보로까지 결정된 후 민자당의 정권 재창출에 제일 걸림돌이 됐던 지역 중 한 곳이 TK지역이었다. 3당 합당에도 불구하고 민주계-민정계 간 권력 투쟁이 심화되자 反YS 정서가 퍼져 매우 불안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정호용, 김윤환 등 김영삼을 지지하기로 한 민정계(이른바 신민주계)일부 인사들은 대선 때 대구, 경북 지역을 돌며 유일한 대통령감은 김영삼 뿐이라며 같은 경상도 정서를 드러내며 유권자들에 지지를 호소했다. 사실 이 때부터 민자당은 지역주의를 이용하여 영남권의 표 결집을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PK지역도 부마민주항쟁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정권교체의 목소리가 언제 터질지 몰라 아무래도 불안했고 울산(당시 경남 소속)과 강원도를 중심으로 한 정주영의 지지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실제로 대구, 경북지역의 반YS 정서를 간파하고 대선 구도 제3자로 나선 이가 바로 정주영이었는데 1992년 초, 통일국민당을 창당한 후 김복동, 박철언, 유수호를 위시한 민정계 인사는 물론 심지어 김광일 같은 민주계 인사들까지 대거 영입하여 경상도 표심을 노렸다.
제14대 대통령 선거에는 김영삼 - 김대중 - 정주영 등 사실상 3자 구도로 재편되어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대선을 불과 1주일 앞둔 12월 11일, 김기춘 법무부 장관이 부산에 내려가 김영환 부산직할시장, 박일룡 부산지방경찰청장, 이규삼 국가안전기획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직할시 교육감, 정경식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등의 지역 주요 기관장 9명을 대연동에 위치했던 복어 요리점인 초원복국에 초청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가 남이가" , "부산, 경남, 경북까지만 요렇게만 딱 단결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 5년 뒤에는 대구 분들하고 서울 분들하고 다툼이 될는지…그때 대구 분들 우리에게 손벌리려면 지금 화끈하게 도와주고…", "지역감정이 유치할진 몰라도 고향 발전엔 도움이 돼.",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 등의 발언이 나왔다. <녹취록 전문 링크>
1992년 대선의 결과를 예상 외의 방향으로 규정지은 결정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 때문에 정주영 후보 측이 오히려 역풍을 맞아 이후 부산, 경남은 물론 경북권에서조차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등하며 결국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 사건이 유권자들의 표심 형성에 큰 효과가 되어 울산을 제외한 영남권 전체가 김영삼 후보로 표심을 결집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폭로한 정주영 진영은 영남지역 표를 잠식하지 못한 것은 물론 강원, 충청권에서도 기대 이상의 표를 얻지 못하고 패했다. 안티 김영삼 정서로 인해 선전할 줄 알았던 TK지역에서도 선거 막판 지역주의를 무기로 한 표심 결집으로 인해 김영삼 후보(TK지역 약 62%)에 밀려 2위(약 17%)를 기록했다. 특히 김영삼의 최대 지지기반이자 사건의 발단이 된 부산에서 참패하게 되는데 9개월 전 14대 총선 결과와는 달리 김대중 후보(12%)는 물론 PK출신인 박찬종 후보에게조차 근소한 차(0.24%, 약 6천여표 차)로 밀리며 6.3%를 얻는데 그쳐 4위로 마감한다. 선거 직전만 해도 전국 여론조사 결과 부동층이 무려 30%가 넘고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후보가 각각24%와 25%의 지지율을 기록하여 각각 승리를 자신했던 특이한 선거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선거가 끝난 뒤 불법 도청한 정주영 후보 측 사람들은 전부 주거침입 등 죄로 처벌받았고 현대그룹의 자금줄이 2년간 묶이게 된다. 훗날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가 되는 이해찬은 당시 민주당 선거기획 쪽에 있었는데, 그는 후일 이 사건으로 정권교체가 5년 뒤로 미루어졌다고 평하였다. 하지만 PK가 군부독재 시절 비집권당후보를 지지한 전력이 있더라도 앞서 14대 총선(1992년 3월 24일)에서는 영남권에서 민주당이 단 한 석도 얻지 못하는 등 지역감정은 그만큼 뿌리깊었다. 따라서 이 사건만으로 모든 것이 뒤집혔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의도는 지역감정을 선거에 이용하는 당시 김영삼 후보 측을 곤란하게 만들 의도였지만 당시 주류 언론들은 언론플레이로 이 도청사건의 핵심을 '공권력의 선거 개입'이나 '지역감정 유발 기획'이 아닌 '불법 도청'에 맞추고 연일 보도하여 김영삼의 당선을 도왔다. 언론의 프레임 선정 전략과 의제설정의 힘을 보여준 단적인 예.
사실 도청이 큰 문제인 것은 맞고, 수사기관이나 공권력의 헌법 제12조 3항의 영장없는 위법한 도청은 통신비밀보호법 제정 이전에도 위법수사의 독수독과 이론에 따르자면 불법으로 수집한 증거가 얼마나 결정적이던 간에 그 증거는 증거로써 인정될 수 없으나 공권력이 아닌 본 사건과 같이 수사기관 아닌 일반인의 위법한 증거수집은 그 사안이 중대하면 어느정도 증거로 사용가능하다는게 현재에도 판례와 통설의 태도이다. 물론 위법한 증거수집에 대한 민형사상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하고. 그러나 도청에 학을 뗀 YS는 집권후 얼마 안되어 통신비밀보호법을 시행하여 최소한 사인의 증거수집 중 도청에 관해서는 수사기관이 일명 감청영장을 법원으로부터 적법한 절차를 거쳐 발부받아 적법하게 실행하지 않는 한 수사기관 뿐만 아니라 일반인이 수집하여도 민,형사 기타 모든 재판에서 무조건 증거로써 인정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유로 부정선거개입과 국가의 지역감정조작마저 덮어버리려고 했으니...
'공권력의 선거 개입'을 부정하고 불법 도청에 포커스를 맞추는 언론플레이에 앞장섰던 조선일보는 당시 사설에서 '기관장 모임을 도청함으로써 통일국민당은 선거전략상 호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공사회와 국민생활에 미칠 정보정치의 악영향을 고려할 때 도청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초원복집에서 불법 선거운동 모의를 했던 사람들은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 받기는 개뿔.
처음부터 자기 밑에 있었던 검사들을 압박하여 참여한 부산시 지역 인물들을 김기춘이 주최한 사적 모임이라고 주장해 불기소 처분하고, 주동자인 김기춘만 기소되었는데, 김기춘은 이 사건에 적용된 대통령선거법 제36조 1항(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을 했고, 이에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자동으로 기소가 소멸되었다. 자신이 유신시대에 수많은 정치인들을 옥죄었던 그 선거법을 자기가 걸리게 생기자 없앤 꼴.
김기춘은 김영삼 내각에 들어가는데는 실패했지만, 1996년 신한국당 보은공천을 받아 김영삼의 고향 거제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그 후 3선 의원이 되었다. 2013년에는 박근혜정부의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발탁되어 2015년 2월 22일까지 재임했다.
김기춘은 현재도 살아있는 권력이다.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져도 김기춘은 아직도 불구속 상태이다. 구속이 이루어 진다고 해도 형량이 높은 '뇌물 수수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 비교적 형량이 낮은'블랙 리스트'관련 구속이 이루어 질 것으로 보여진다.
솔찍히 박근혜가 김기춘의 말을 듣는 꼭두각시였고 최순실, 정유라만 아니었다면 청문회에서 얼굴조차 못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헌법률심판을 통해 선거법도 없애버리는 김기춘은 아직도 자유롭게 돌아 다니고 있다. 김기춘이 감옥에 가서 형량을 다 채우기전까지는 경계를 늦추지 말고 경각심을 갖자는 의미에서 이 글을 작성한다.
출처 | 나무위키 : 우리가 남이가 https://namu.wiki/w/%EC%9A%B0%EB%A6%AC%EA%B0%80%20%EB%82%A8%EC%9D%B4%EA%B0%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