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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16
게시물ID : history_130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2
조회수 : 1743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3/12/14 00:55:18
 
- 흉노의 한(漢) 정권 -
 
 
480px-西晉時期北方各族分布圖.png
 
재탕하는 흉노 한(漢) 정권의 영역.
정권 초기에는 흉노 5부의 세력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서기 304년, 10월. 좌국성(左國城 : 병주(幷州) 부근)에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한(漢)이라 칭하고 연호를 원희(元熙)라 정한 유연(劉淵)은 즉위문을 하령한다.
 
 
"옛날 우리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가 신무(神武)함으로 천하의 뜻에 응하여 대업을 크게 열고, 태종(太宗) 효문황제(孝文皇帝)(->한(漢) 문제(文帝) 유항(劉恒))는 또한 명덕(明德)으로서 나라를 다스려 나가 태평하게 만들었다. 세종(世宗) 효무황제(孝武皇帝)(->한(漢) 무제(武帝) 유철(劉撤))는 척토양이(拓土攘夷 : 국토를 개척하고 오랑캐를 물리침)하여 그 땅의 크기가 당(唐 = 당요(唐堯, 즉 요임금) 때를 넘어섰고...(중간 생략)....소열(昭烈)(->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은 촉(蜀) 땅으로 파월(播越 : 파천, 외지로 떠돔)하면서 불운이 끝나고 태평함이 다시 생겨나 옛 도읍으로 돌아가기를 바란 것이다(유비가 한(漢)을 다시 부흥시켜 했던 노력을 의미한다). 어찌 하늘은 한(漢)에 내린 화를 뉘우치지 아니하여, 또다시 후제(後帝)(->촉한(蜀漢) 후주(後主) 유선(劉禪)) 치욕을 당하게 하였는가(서기 263년 촉한(蜀漢)의 멸망을 가리킴) 사직이 멸망한 이래, 지금까지 종묘에 혈식(血食 : 제사)을 올리지 못한지 40년에 이르렀도다..(중간 생략)...이제 하늘이 자신의 속마음을 달래어 한(漢)에 내린 화를 뉘우쳐, 사마씨(司馬氏) 부자형제로 하여금 서로 잔멸하게 하였으나 뭇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하소연 할 곳조차 없다..(이하 생략) - 진서 유원해기
 
 
전편에서 언급한 대로, 유연의 한(漢)은 이 즉위문을 통해 전한(前漢)-후한(後漢)-촉한(蜀漢)을 잇는 왕조임을 다시한번 드러내고 있다.
 
우선 즉위문 제일 처음에 보면 '옛날 우리~' 란 표현을 써, 전한(前漢)의 역대 황제들이 마치 자신의 윗대 조상인 것처럼 나열하며 그 덕과 공을 기리고 있으며, 또한 촉한(蜀漢)의 유비와 유선 또한 같은 맥락에 넣었다.
 
그리고 하늘이 화(禍 : 재앙)을 내려 잠시 한(漢) 왕조가 무너졌었지만, 한(漢)을 멸망케한 하늘이 이제 그 잘못을 뉘우쳐 한(漢)을 부흥시키고자 진(晉)의 사마씨(司馬氏)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으며 촉한(蜀漢)이 멸망한지 40여년 만에 이제 우리의 한(漢) 왕조가 대통을 이어받았다라고 천명한다.
 
 
 
즉, 건국한 왕조의 정통성과 명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흉노족이 진(晉)으로부터 독립하여 감히 무엄하게 제멋대로 왕을 자칭했다는 소식은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과 대결을 벌여 몰아냈던 동영공(東嬴公) 사마등(司馬騰)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게다가 흉노가 자립한 지역 역시 자신의 임지인 병주(幷州)였다.
 
사마등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수하무장 섭현(聶玄)이란 자에게 군사를 주어 유연을 치게했지만, 되려 대패하여 쫓겨오자 사마등은 이를 두려워하여 병주(幷州)의 백성 2만여명을 이끌고 도주한다.
 
이에 유연도 대응을 신속히 하여 조카 유요(劉曜)를 보내 병주(幷州)의 각 군(郡)과 고을을 함락케 하니, 병주(幷州)는 완전히 흉노의 한(漢)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유요.jpg
 
유요(劉曜).
유연의 조카로, 이후 영가의 난에 활약하면서도 줄곧 등장할 인물이다. 유연 이래로 몇대를 지나 황제로 즉위한 후, 기존의 국호 한(漢)을 '조(趙)' 로 고쳤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동시기에 존재한 후조(後趙)와의 구별을 위해 전조(前趙)라 부르고 있다. 차차 다룰 내용이다. 
 
 
흉노족이 한(漢) 정권을 수립했다는 소식에 당시 진(晉) 조정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해 알 수없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당연히 이를 용납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깔보던 흉노족이 독립하겠다고 찢어져나가 이제는 제국의 한 주(州)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니 말이다. 
 
이 한(漢) 정권에 대항하는 주체가 계속해서 사마등(司馬騰)인 것으로 보아 아마 진(晉) 조정에서는 이 사마등에게 토벌을 명한게 아닌가 싶다. 물론 사마등이야 자신의 임지 병주를 탈환하고자 줄기차게 싸우려 드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흥(永興) 2년(서기 305년), 사마등이 또 사마유(司馬瑜), 주량(周良), 석선(石鮮) 등을 보내 유연을 치게하며  이석(離石)에 주둔했다. 유연은 그의 무아장군(武牙將軍) 유흠(劉欽) 등의 여섯 군(六軍)으로 사마유 등에게 항거하니, 네번 싸워 사마유가 모두 패하였고, 유흠은 대오를 정돈해 개선하여 돌아왔다. - 진서 유원해기
 
 
사마등이 박살나자 조정에서는 답답했는지 따로 유연을 토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
 
 
병주자사 유곤(劉琨)을 판교(版橋)에서 요격하게 했으나 유곤에게 패하였다. 이에 유곤은 진양(晉陽 : 병주(幷州)의 군(郡)들 중 하나)을 점거하였다. - 진서 유원해기
 
 
 
이렇게 지리멸렬한 싸움이 계속해서 오가는 가운데, 한(漢)의 신하들이 유연에게 진언한다.
 
 
"전하께서 거병하신 이후로 벌써 만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오로지 편방(偏方 : 한쪽구석)을 지킬 뿐, 아직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습니다. 실로 사방으로 출전하도록 장수들에게 명해 결기일척(決機一擲 : 기회에 따라 결단해 승부를 겨루다)하여 유곤(劉琨)을 효수하고, 하동(河東)을 평정한 뒤에 제호(帝號 : 황제의 호칭)를 세우고 북을 치며 남쪽으로 진격하여 장안(長安)을 함락하고, 이를 도읍으로 삼는다면 관중(關中 : 장안일대를 가리킴)의 군사로서 낙양(洛陽)을 석권하는 것은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가리키듯 쉬운 일입니다.."(이하 생략) - 진서 유원해기
 
 
신하의 진언대로 정권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그 영역은 겨우 병주(幷州)를 비롯한 각 주(州)의 조금씩을 차지한 땅들 뿐이었고 진정 진(晉)의 중앙이라 할 수있는 중원(中原)은 아직까지 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총공격을 감행하여 제대로 진(晉)과 맞붙어보자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제호(帝號 : 황제의 호칭)까지 칭할 것을 은연 중에 권하고 있는데, 나중에 이르러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진다.
 
 
유연 역시 이에 동의하여 군사를 크게 일으켜 공격을 감행한다.
 
 
이에 진격하여 하동(河東)을 점거하고 포판(蒲坂), 평양(平陽)을 공격해 모두 함락하였다. 그리하여 포자(蒲子)로 들어가서 그곳에 도읍하니, 하동(河東), 평양(平陽)의 속현(屬縣)과 그 주변 고을이 모두 항복하였다. 당시 급상(汲桑)이 조(趙), 위(魏) 땅에서 거병하였는데 상군(上郡)의 사부(四部) 선비(鮮卑)인 육축연(陸逐延), 저족(氐)의 추대선우(酋大單于)인 선징(單徵), 동래(東萊) 사람인 왕미(王彌) 석륵(石勒) 등이 모두 차례로 와서 항복하니, 원해(元海 : 유연의 자(字))가 그들 모두에게 관작(官爵)을 내렸다. - 진서 유원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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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司州)가 병주(幷州) 옆에 위치한 주(州)임을 지도를 통해 알 수있다. 여기서 사주(司州)라는 주(州)는 정식 행정구역이 아니라 진(晉)의 수도, 낙양(洛陽)과 그 일대를 속칭, 사주(司州)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우리나라의 서울 - 경기권 같은 개념이랄까? 흉노의 한(漢)이 그 사주(司州)에까지 진출했다는 말은 진(晉)의 수도, 낙양(洛陽)도 지척에 놓여진 상태로, 이제는 흉노의 한(漢)도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병주(幷州)를 벗어나 사주(司州)란 주(州)로까지 진출하여 사주(司州)까지 점거했다는 얘기다. 이렇게 흉노의 한(漢)이 위세를 떨치자 당시 진(晉)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세력을 꾸리고 있던 군벌들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들이 찾아와 유연에게 항복하며 귀순하는데, 그 중 장창(張昌)의 난을 다루며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왕미(王彌), 석륵(石勒)의 이름도 있다. 특히 석륵(石勒)은 갈족(羯族)이라 하는 돌궐 쪽 계통의 민족으로 오늘날 투르크 계라 보면 되겠다.
 
석륵.jpg
 
석륵(石勒).
갈족(羯族)이라는 이민족으로, 당시 진(晉)에 한창 유입되던 이민족들 중 한 부류다. 뒤에 다룰 내용에서도 서술하겠지만, 특히 석륵은 유독 독보적인 존재로, 한때 흉노족의 한(漢) 정권 아래에서 영가의 난에 참전하며 몰래 독자세력을 구축하고 결국에는 독립하여 후조(後趙)를 건국한 시조가 된다. 국호는 '조(趙)' 지만 위에서 서술한 유요(劉曜)의 조(趙)와 구별하고자 전조(前趙)보다 늦게 건국되었다 하여 편의상 후조(後趙)라 불리운다. 진(晉) 멸망 직후에 도래한 '5호 16국 시대' 의 주역이기도 했다. 근데 이렇게 미리 써놓으면 스포일러인가?
 
 
왕미(王彌)나 석륵(石勒)은 흉노의 한(漢) 정권의 연재를 마치고 영가의 난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흉노를 제외한 다른 이민족 세력이나 군벌들을 다루는 편에서도 좀더 깊게 살펴보려한다.
 
 
그리고  2년 반 가량이 지난 서기 308년. 진(晉)에서는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의 치세가 시작된지도 2년째에 접어들었던 영가(永嘉) 2년.
 
 
영가(永嘉) 2년, 가을 갑진일(2일), 유원해(劉元海)가 평양(平陽)을 침범하니 평양태수(平陽太守) 송추(宋抽)는 낙양(洛陽)으로 달아나고 하동태수(河東太守) 노술(路述)은 힘껏 싸우다 죽었다..(중략)..그해 겨울 10월 갑술일(3일), 유원해(劉元海)가 평양(平陽)에서 제호(帝號)를 참칭하고는 한(漢)이라 칭하였다. - 진서 유원해기
 
 
위에서는 평양(平陽)을 이미 점거했다는 기록을 싣어놓았는데 여기서는 또 다시 평양을 침범했다 되어있어 갸우뚱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아마 처음에 평양을 점령하고난 서기 305년부터 이 기록의 배경시점인 서기 308년까지 2~3년간 계속해서 진(晉)과 교전을 펼치며 세력권 싸움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록의 마지막 문구대로, 유연은 결국 황제를 자칭하고야 만다. 연호는 영봉(永鳳). 도읍은 평양(平陽)에 두었다.
 
 
역사에서는 유연이 황제를 칭한 서기 308년부터를 영가의 난의 시작이라 본다.
진(晉)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를 갖추는 때이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영가의 난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한숨돌려 흉노의 한(漢) 정권 수립이외의 기타 사건 및 인물들에 관해 연재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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