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흉노의 한(漢) 건국 -
흉노 땅으로 돌아와 부족의 추대로 대선우(大單于)가 된 유연(劉淵)이 먼저 하려했던 일은 한때 자신이 상전으로 모시던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을 돕는 것이었다.
유연이 흉노의 5부(部)를 원군으로 끌고 오겠다는 핑계로 고향 땅으로 도주해버린 이후, 사마영은 왕준(王浚)의 고용한 선비(鮮卑)족의 공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여 근거지 업(鄴)도 잃고 낙양(洛陽)으로까지 혜제 사마충을 끼고 후퇴하는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마치 유연이 사마영 세력의 모든 것이었던 것처럼, 모양빠지게 유연이 빠지자 마자 처참한 패배를 당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이 소식을 접한 유연은 이렇게 말한다.
"내 말을 듣지 않더니 도리어 스스로 달아나 뿔뿔히 흩어지니 참으로 형편없는 놈이로구나. 그러나 내가 그와 더불어 했던 말이 있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 진서 유원해기
사마영을 뜨자마자 대차게 까버린 유연이다. 그래도 알던 정 보던 정이 있었는지 돕고자 마음먹고 왕준의 용병대인 선비(鮮卑)족을 공격하려 들자, 일찍이 유연을 추대한 장본인이자 종조부이기도 한 유선(劉宣)이 나서서 만류한다.
"진(晉)이 무도하여 우리를 노예처럼 부려먹으니, 이 때문에 우현왕(右賢王) 유맹(劉猛)이 분을 이기지 못하여 거병하였으나, 진(晉)의 기강이 아직 해이해지기 전이라 대사를 이루지 못하고 타계했으니 이는 선우(單于)의 치욕입니다. 하지만 이제 사마씨(司馬氏)의 부자형제들이 스스로 골육상잔하니, 이는 하늘이 진(晉)의 덕을 미워하여 우리에게 천하를 주려는 것입니다. 선우(單于)께서는 몸소 덕을 쌓고 이제 바야흐로 우리 방족(邦族 : 나라와 종족)을 흥하게 하고 옛날 호한야(呼韓邪) 선우(單于)의 업(業)을 회복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선비(鮮卑), 오환(烏丸)을 외원으로 삼아야지, 어찌 그들과 서로 다투면서 도리어 구적(仇敵 : 사마영을 가리킨다)을 돕는단 말입니까! 이제 하늘이 우리 손을 빌리려 하니 이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하늘을 거스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며, 중론을 거역하는 것은 유의하지 않습니다. 하늘이 주는데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입습니다. 원컨대, 선우께서는 의심하거나 주저하지 마십시오." - 진서 유원해기
해석하자면 이렇다.
우현왕(右賢王) 유맹(劉猛 : 흉노의 족장으로서 서기 277년에 기록의 내용대로 진(晉)의 횡포에 분노하여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여 죽었다)이란 흉노의 지도자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아직 진(晉)이 강성했기에 실패했었으나, 이제 지금은 진(晉)이 혼란하니 때가 좋으며 흉노족을 강성케 할 시점이라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진(晉)을 공격하는 것을 '하늘이 진(晉)의 덕을 미워하여 우리에게 천하를 주려는 것' 이라 표현함으로서, 그 명분과 타당성을 주장한다. 흉노는 이미 자신의 적을 진(晉)으로 못박아 두고 있던 것이다.
거기다 유연이 사마영을 도와 선비족과 오환족을 치려하자, 선비, 오환족과는 오히려 친하게 지내야지 어째서 진(晉)을 도우려 하냐며 반대하고, 마지막 문구에 '하늘을 거스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고 주는데도 취하지 않으면 재앙을 입는다' 라는 말은 왕(王)이나 황제(皇帝)를 칭하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개 역성혁명 세력이나 혁명의 무리가 천명하고 줄곧 내세워 관용적으로 쓰이곤 하는표현이다. '지금의 군주가 덕이 없고 무능하니 하늘이 우리에게 새로운 군주를 세우라 명하였기에 이렇게 군주를 새로 세운다' 이런 식이다.
솔직히 어디까지나 혁명세력이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고 타당함을 알리기 위한 말이다. 행동으로 보이기 전에 거치는 절차의식이랄까. 이는 고대 중국이나 중세, 근세를 구분할 것 없이 역성혁명으로 왕조나 정권이 교체될 때 항상 이 표현을 써 그 혁명세력의 명분과 그 타당함을 광고하곤 했다.
유선도 이런 개념에서 유연에게 왕(王)이나 황제(皇帝)를 칭할 것을 은연 중에 권한 것이다.
유선(劉宣)의 이와같은 진언에 유연도 응한다.
"옳은 말입니다. 대장부로서 마땅히 숭강준부(崇岡峻阜 : 높고 험한 산등성이)가 되어야지, 어찌 부루(培塿 : 작은언덕)가 되겠습니까. 어찌 제왕(帝王)이 늘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 하겠습니까. 우왕(禹王)은 서융(西戎)에서 나오고 문왕(文王)은 동이(東夷)에서 났으니, 오로지 덕이 있는 자에게 천하가 돌아갈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군사를 보면 모두 한명이 진병(晉兵 : 진나라 병사) 열 명을 감당할 수 있으므로, 북을 치며 진격한다면 진(晉)을 꺾고 어지럽히는 것은 마치 마른 나뭇가지를 꺾는 것처럼 쉬울 뿐이니, 위로는 한고(漢高 : 한 고조 유방)의 업을 이루고 아래로는 위씨(魏氏 : 삼국시대 위나라)의 업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진인(晉人)들이 꼭 우리와 같은 마음은 아닙니다. 한(漢)이 오랫동안 천하를 소유하여 인심에 은덕을 맺었으니, 이 때문에 소열(昭烈) 고작 한 주(州) 땅에서 기구한 처지였음에도 천하에서 능히 맞설 수 있었습니다. 나 또한 한씨(漢氏)의 외손이며, 흉노와 한(漢)은 일찍이 서로 형제의 맹약을 맺었으니, 형이 망하면 동생이 잇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한(漢)을 칭하며 후주(後主)를 추존한다면, 인망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진서 유원해기
기록이 꽤나 길어졌는데 상당히 중요한 발언이다.
기록 첫 줄과 같이 '싸나이라면 포부를 크게 가져야지' 같은 문구는 제쳐두고, 그 다음부터가 본론이다. 기록만 봐도 이해될 법한 문구들은 생략하고 필자 기준에서 해석이 요구된다 싶은 것들만 풀이해보겠다.
'우왕(禹王)은 서융(西戎)에서 나오고 문왕(文王)은 동이(東夷)에서 났으니, 오로지 덕이 있는 자에게 천하가 돌아갈 뿐입니다.'
-> 우왕(禹王)과 문왕(文王)은 각각 고대 하(夏)나라와 주(周)나라의 성군이요, 명군(名君)들이다. 그래서 후세에까지 그 이름이 칭송받는 임금들인데, 그런 임금들이 한(漢)족이 멸시하고 낮춰보는 서쪽 동쪽 변방 오랑캐 땅 출신들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으며, 오로지 덕이 있는 자가 천하를 얻을 뿐이고 하물며 같은 오랑캐 취급받는 나라고 황제, 왕 노릇 못하겠느냐고 하는 내용이다.
주(周) 문왕(文王). 폭군의 대명사가 된 고대 은(殷)의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周)의 기틀을 다지고 융성케 한 명군(名君)이다.
하(夏) 우왕(禹王). 흔히 '우임금' 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우수치(大禹治水)라 하여 자주 범람하는 황하(黃河)를 잘 다스려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 덕에 임금이 되어 흔히 말하는 요순시대의 뒤를 이어 태평성대를 이룩한 군주다.
'진인(晉人)들이 꼭 우리와 같은 마음은 아닙니다. 한(漢)이 오랫동안 천하를 소유하여 인심에 은덕을 맺었으니, 이 때문에 소열(昭烈)은 고작 한 주(州) 땅에서 기구한 처지였음에도 천하에서 능히 맞설 수 있었습니다.'
-> 진나라 백성들은 우리끼리 황제다 왕이다 하며 세운 나라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진(晉)의 백성들의 인심을 얻어야 한다고 결론을 도출지었고, 민심을 얻어 성공한 사례를 드는데, 사례의 주인공은 한(漢)의 소열(昭烈), 한(漢)은 흔히 아는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한(漢)나라가 아니라 삼국시대 촉한(蜀漢)을 의미한다. 고로 소열(昭烈)은 촉(蜀)의 군주, 유비(劉備)다. 소열(昭烈)은 유비의 시호다. 즉, 소열제(昭烈帝)가 유비의 시호가 되겠다.
아시다시피 유비는 익주(益州)에다 촉(蜀)을 세워 삼국의 한축을 마련한 군주다. 위(魏)나 오(吳)가 여러개의 주(州)를 거느린 반면에 촉(蜀)나라는 겨우 익주(益州) 한개 주 뿐이었는데, 그런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삼국의 한 국가로서 팽팽하게 대결을 벌이지 않았느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유비가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민심을 얻는 것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나 또한 한씨(漢氏)의 외손이며, 흉노와 한(漢)은 일찍이 서로 형제의 맹약을 맺었으니, 형이 망하면 동생이 잇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한(漢)을 칭하며 후주(後主)를 추존한다면, 인망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여기서 유연은 자신이 한씨(漢氏)의 외손이며, 흉노와 한(漢)은 서로 형제의 맹약을 맺은 바가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의 유래는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흉노를 토벌할 때의 일에서 비롯되었다. 한(漢)나라 초 무렵에 흉노의 묵돌(冒頓)이라는 선우(單于)가 있었는데 이 묵돌이 평소 한(漢) 왕조에 위협이 되자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묵돌을 토벌하고자 했다.
하지만 싸움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오히려 유방은 백등산(白登山)이란 곳에서 흉노의 병력에 포위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고민 끝에 묵돌에게 화친을 제안하여 이 위기상황을 벗어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패자 쪽에서 건네는 화친이다 보니 조건이 실로 굴욕적이었다. 여러가지 조항들이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바로 '한(漢)과 흉노는 형제의 맹약을 맺는다.' 였다.
말이 좋아 형제지, 당시 한(漢)으로서는 한낱 변방 오랑캐 따위에게 처참한 굴욕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얹은 조항으로 한(漢)은 흉노에게 예물과 공주를 바치기로까지 합의 본지라, 실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형식상으로는 그나마 한(漢)이 형이고, 흉노가 아우가 되기로 해 최소한의 자존심은 살렸다지만, 이건 그냥 그깟 형식적 관계 따위는 흉노가 양보해줬다고 봐도 무방하지 싶다.
유연은 바로 과거 이 때의 일을 상기하면서 자신이 한씨의 외손(外孫 : 솔직히 왜 외손이란 표현을 썼는지는 필자도 잘 모르겠다. 외손이면 외가 얘기가 나와야 하는데.. 하지만 한(漢)의 후손이라 자처한 표현 임은 분명하다)이라 자칭하고, 형인 한(漢)이 망했으니 그 뒤를 동생인 흉노가 잇는 것이 맞지 않냐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밝히지 않았던 내용이기도 한데, 여기서 기인하여 한(漢) 왕조의 성씨인 유(劉)씨를 성으로 하는 흉노족이 생겨난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명색이 형제지간이니까 성씨도 응당 같아야 하지 않겠냐는 얘기도 있었고 뭣보다 유방이 황실의 공주 한명을 묵돌에게 시집보내, 그 이후로 흉노왕족 중 일부는 이것을 이유들어, 자신의 성씨가 유(劉)씨라고 자처하고 다녔다고 한다. 당장 유연(劉淵)만 봐도 성씨가 유(劉)씨다. 유연의 아버지 유표(劉杓)도 그렇고.
다만, 유연의 조부 어부라(於扶羅)나, 종조부 호주천(呼廚泉)은 성씨가 유(劉)씨가 아닐 뿐더러 정확한 성씨까지도 기록에 전해져 내려온다. 어부라, 호주천의 성은 '난제(欒提)'. 아마 흉노식 성씨로 추정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어부라(於扶羅) 본인은 자신의 성을 유씨로 쓰지 않았지만 정작 그 아들인 유표(劉杓)에게는 성을 유씨로 붙여주었다. 그리고 호주천은 위에서 말한 그 논리를 근거들어 자기 가문은 유(劉)씨 성을 쓰기로 정한 장본인인데도 정작 본인은 쓰지 않았으니 실로 궁금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 논리는 이후 유연이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한(漢)으로 정하는 계기가 된다. 동생이 형의 국호를 계승했다는 원리였다. 그리고 비단 국호 뿐 아니라 그 정통성까지도 계승했다고 역설하기까지 하는데, 그 계보는 다음과 같다.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 왕조 - 삼국시대에 유비(劉備)가 건국한 촉한(蜀漢) - 유연(劉淵)이 세울 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 왕조야 두말할 것 없이 중국 역사상 수없이 등장한 한(漢)나라들의 원조인지라 굳이 따로 설명은 않겠다. 다만 설명할 것은 유비의 한(漢) 왕조 부터다.
삼국지에도 나와있듯이, 유비(劉備)는 자신이 한(漢) 왕조 황족의 후예라고 자처한 인물이다. 실제로 그 족보가 맞는지 틀린지는 논외로 두고 훗날인 서기 220년, 위(魏)의 문제(文帝) 조비(曺丕)가 후한(後漢)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를 몰아내고 후한(後漢)을 멸하자 유비는 자신이 한나라 황족의 후예임을 내세워 후한(後漢)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한(漢)으로 정한다. 역사에서는 구별을 위해 흔히 '촉한(蜀漢)' 이라 부른다.
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
삼국지연의에서나 다른매체에서 자주 접한 인물인지라 굳이 따로 설명을 적지는 않겠다.
그리고 유비(劉備)의 한(漢)이 멸망한지 약 40년 후, 똑같이 유(劉)씨 성을 쓰며 역시 한(漢)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유연(劉淵)이 앞선 두개의 한(漢) 왕조를 계승함으로서 진(晉)을 부정하고 인심을 얻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유비의 아들이자 촉한(蜀漢)의 제2대 황제였던 유선(劉禪), 즉 후주(後主)를 추존한다면 인망을 얻을 것이라고 유연이 말하는데, 이 역시 위에서 설명했듯 두개의 한(漢)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원리다.
선제(先帝)를 제사지내고 추존하여 그 황제의 시호나 묘호를 정하는 일은 해당 왕조에서 그 뒤를 이은 황제가 해야할 일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후임 황제는 선제(先帝)를 계승했다는 명분만으로도 당연히 그 권한과 명분을 가질 수 있다.
유비가 그러했다. 조비에 의해 쫓겨난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를 제사지내고 추존하여 '민제(愍帝)' 라 시호를 올림으로서, 촉한(蜀漢)만이 후한(後漢)을 계승하는 정통왕조이며, 헌제(獻帝)를 추존하고 제사지내는 유비 본인만이 헌제의 뒤를 잇는 정통 황제라고 만천하에 보란듯이 천명한 것이다.
유연도 똑같았다. 유비가 그랬듯, 유연도 훗날, 한(漢)을 건국한 후에 전대의 한(漢) 왕조인 촉한(蜀漢)의 마지막 황제, 유선(劉禪)을 효회황제(孝懷皇帝)라 시호를 올려 추존하고 제사를 직접 거행함으로서 그 정통성을 표면화 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유연은 '인망을 얻을 것' 이라고 강조했는데, 이건 한(漢)이라는 국호만으로도 얼마나 큰 파급효과를 지니고 있었는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도 중국민족을 한(漢)족이라 부르듯, 고조 유방이 세운 이 한(漢)이라는 나라가 갖는 무게감은 실로 컸다.
진(秦) 왕조 이후로 들어서, 장장 몇백년간 존속되어 오던 국가였던데다 한(漢)족, 한(漢)족 문화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도 이 한나라 때부터로, 중국의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가 융성하여 근본적으로 그 기틀이 확립되었던 때였던 만큼, 이 한(漢)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과거 전성기의 융성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여 일종의 회귀본능을 건드려 향수에 젖게 만들곤 했던 것.
진(晉) 왕조 치하에서 혼잡스러움과 학정에 시달려 왔을 백성들에게서 한(漢)을 계승한 국가라는 타이틀만으로도 많은 호감과 지지를 얻어낼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유선(劉宣)과 유연(劉淵)의 뜻은 통하여, 근거하고 있던 이석(離石)에서 좌국성(左國城)으로 근거지를 옮기니, 많은 이들이 따랐다고 기록은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서기 304년, 10월. 진(晉)의 연호로는 영흥(永興) 원년.
유연(劉淵)은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왕(王)을 자칭하니, 이것이 흉노의 한(漢) 정권의 시작이다.
진대(晉代) 말기의 이민족 분포도.
흉노를 비롯하여 선비(鮮卑), 오환(烏桓), 강(羌), 저(氐), 갈(羯) 등 여러 이민족들이 눈에 띄는데
이들 모두가 우후죽순으로 나라 하나씩을 건국하는 주역들이다.
이 중에 오부흉노(五部匈奴), 즉 흉노 오부라 표시 되어있는 영역권이 보인다.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한(漢) 정권 초기의 영역과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