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머니가 새로 개발한 휴지 장난이 시작되셨다. 젊어서부터 깔끔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던 어머니는 유독 각 휴지사용을 많이 하셨다. 입가에 뭐가 조금만 묻으면 한 장 쏙 뽑아 톡톡 닦으시고 잠시 후 또 한 장 뽑으셔 톡톡 닦기를 계속 하셨으니 식사하실 때 적어도 열 댓 장은 기본이었다. 이 깔끔한 습관이 이제 티슈 각을 앞에다 두고 한 장씩 뽑아 쓰레기통으로 옮기는 재미있는 놀이가 되셨나보다. 오늘은 잠시 마트에 가서 장을 봐 갖고 들어와 보니 화장실에는 두루마리 휴지를, 식탁 옆에는 각 티슈를 산더미 같이 뽑아 놓으신 게 아닌가. 깨끗한 것으로 골라 각에 다시 접어 넣어 보지만 새 휴지를 기가 막히게 알아보시는 어머니께 모른 척 쓰시게 할 수는 없다. 찝찝한 휴지가 늘 이놈의 차지로 오는 것 까지는 괜찮은데 휴지 값을 당해낼 수가 없다. “엄마, 휴지 장난이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이거 너무 비싼 놀이인데 재활용 좀 해도 될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은데...”
깔끔한 성격도 그렇지만 어머니의 반복 놀이 중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재활용놀이다.
“이놈아~ 이거 재활용에 갖다 놓고 와라, 재활용~ 재활용~”
어머니는 효자손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나무라신다. 좋아하시는 카라멜을 드시고 나면 빈 상자를 잘 접어 나를 부르신다. “이놈아~ 이거 재활용~” 신문에 딸려온 광고전단지라도 보이면 또 “이놈아~ 이거 재활용~” 냉장고에 우유병이 보이면 “이놈아~ 이것도 재활용~” 정말이지 ‘재활용’이라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릴 지경이다. 한꺼번에 모아두었다가 하루에 한번 씩 갖고 나가 분리수거해도 충분할 텐데 어머니에게는 통할 수가 없다. 재활용할만한 것들이 눈에 띌 때마다 ‘이놈아 재활용’을 외치시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저 할배 참 자발없고 유난스럽다’ 하지 않을까 신경 쓰이는 건 둘째 치고 늙은 이 아들놈도 이젠 힘이 든다.
새벽부터 쉴 새 없이 종종거리다보면 정말 힘이 든데, 오늘은 유난히 어머니의 반복놀이가 심했던 날이라 그런지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 도가니탕이라도 끓여서 먹어야 할 것 같다. “엄마, 도가니탕 끓여 드릴까? 내가 맛있게 끓여 드릴께요~” “싫다! 도가니탕 싫다! 닭고기 삶아라!” “엄마, 오늘은 아들이 몸보신을 좀 하고 싶어요. 오늘만 이 아들놈이 먹고 싶은 도가니탕 같이 드세요” “싫다! 도가니탕 싫다! 도가니탕 싫다!‘
아, 어머니의 새로운 반복놀이가 생겼다. 도가니 핏물을 빼고 있는 한 시간째 효자손으로 방바닥을 두드리며 ‘도가니탕 싫다’를 외치고 계신다.
어차피 파 송송 썰어 넣고 소금간 잘 해서 드리면 맛나게 드실 테니 나는 귀를 막았다. 안 드셔도 할 수 없다고 마음을 다잡고 못 들은 척 해버렸다. 사춘기 때처럼 엄마 말이 듣기 싫어서, 내 멋대로 하고 싶어서 귀를 막아버렸다.
내가 어머니를 간병하며 삼시세끼 요리를 해 드리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세상에 없는 효자 났다고들 칭찬도 했고 왜 사서 고생을 하냐며 혀를 차기도 했다. 나는 억지로 효자가 되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혀를 찰 만큼 고통스럽기만 한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다. 만약 내가 착하디착한 효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면, 그래서 온전히 내가 희생한다고 생각했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어머니와 함께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냥 9년 전 어느 날, 어머니와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엄마 덕에 난 ‘할배 요리사’가 되었고 책도 쓰게 되었고.
사춘기 할배 반항은 이쯤에서 끝내고 어머니가 드시고 싶다는 닭요리를 해야겠다. 맛있는 ‘닭한마리 막국수’로 우리엄마 입맛 나게 해 드려야겠다.
<나는 매일 엄마와 밥을 먹는다>의 저자 정성기님의 이야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