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을 재미있게 시청하고 있습니다. 초반에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어리둥절 할 정도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회가 거듭될 수록 이제 무슨 내용인지 시청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틀이 잡혀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드라마를 시청하게 된 이유는 우선 문근영이 주연인 "불의 여신 정이"에서 현재 조연역을 하고 있는 서현진이 주연을 꿰찬 드라마이며 특히 드문 사극인 백제 관련 드라마라고 해서 일부러 열심히 시청 중입니다.
그런데 드라마 주인공인 "제왕의 딸, 수백향"의 역사적 실존 문제나 역사적 고증과 도대체 얼마나 근접한 내용인지가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어느 방송에서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 여성이 한국어도 배우고 한국역사도 배울겸 사극 드라마를 열심히 시청한다고 하더군요.
즉, 그 외국 여성은 사극 드라마를 통해서 한국 역사를 배우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일반 한국인들은 과연 수백향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을까요?
대부분의 일반 한국인들도 한국 고대역사에 대해서 시시콜콜히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한국인들도 사실 사극 드라마 내용이 마치 진짜 역사적 사실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기 일쑤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실존 인물들의 이름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사극 드라마들은모두 실제 역사에서 크게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거의 대부분의 사극 드라마 작가들은 단지 시청자들의 재미를 위한 "드라마"일 뿐이라는 핑게로 역사적 사실 자체를 심각히 왜곡하는 내용으로 드라마를 만들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자들을 가히 친일매국노들에 버금가는 중대 역사적 범죄자들로 낙인 찍고자 합니다. 마치 친일 식민사학자들이나 마찬가지로 그들은 참으로 "더러운 양심의 소유자"들이라고 비난하고자 합니다.
왜냐면 대부분의 한국국민들은 나처럼 역사적 지식이 많지 않기 때문에 사극 드라마 내용들이 모두 실제 역사적 사실과 거의 일치할 것이라고 착각할 것이고, 그래서 드라마 내용을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고 철석같이 믿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왜놈들이 한민족 역사를 형편없이 왜곡하는 행위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매국노스런 짓이지요.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역사지식을 무겁게 대한다면, 그들은 결코 실제 역사적 등장인물들 이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예컨데,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과 "해품달"의 정은궐 작가는 실제 역사적 인물들 이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매우 훌륭한 퓨전 사극 드라마를 보여주었습니다.
즉, 실제 역사를 왜곡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면 절대로 실제 역사적 인물들을 등장 인물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실제 역사적 등장 인물들과 전혀 다른 이름들을 사용하더라도 "성균관 스캔들"과 "해품달"처럼 매우 훌륭한 사극 드라마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나는 "성균관 스캔들"과 "해품달"의 원작자인 정은궐 작가를 매우 칭찬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이제 드라마 "수백향"의 실제 주인공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지요.
(뱀발) 드라마 수백향에 등장하는 비문
비문이란 무슨 특별한 단어는 아니고, 그저 국가적 "첩보조직"이란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과거 왕조시절에도 현재의 정보조직과 같은 것이 물론 있었겠지요. 뭐 그런거....
지난 9월 30일 첫 방송을 탄 MBC 일일 연속극 <제왕의 딸 수백향>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생존한 수백향(手白香, 일본명 다시라카)을 다룬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방영 전부터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일본 왕족이라고 기록된 수백향을 이 드라마에서는 백제 무령왕의 공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을 잠재우고자 제작진은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주인공의 한자 이름을 수백향(手白香)이 아닌 수백향(守百香)으로 표시해 놓았다. 일본 역사서의 수백향과 다른 인물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이와 더불어 제작진은 '역사왜곡은 없을 것'이라는 의지도 천명했다.
일본인 수백향과 무관한 백제인 수백향을 새롭게 상상해 내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고대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따르면, 수백향은 일본 제24대 인현왕(일본명 닌켄 덴노)의 공주이자 제25대 무열왕(부레쓰 덴노)의 누이이며 제26대 계체왕(게이타이 덴노)의 정실부인이다.
계체왕은 선왕인 무열왕의 직계 후손이 아니다. 무열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방계 왕족인 그가 백제의 지원으로 왕이 된 것이다. 왕이 된 뒤 그는 수백향을 왕비로 맞이했다.
참고로, 고대 일본의 군주 칭호는 천황이 아니라 왕이었다.
왕보다 높은 대왕이란 칭호가 나온 것은 서기 6세기이고, 대왕보다 높은 천황이란 칭호가 나온 것은 서기 7세기 후반이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는 초대 천황이 기원전 7세기에 출현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후대 역사가들이 이전의 왕이나 대왕을 천황으로 표기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수백향이 무령왕의 공주라는 이야기는 어느 나라의 역사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순전히 역사 해석에 의해 나온 이야기다.
역사학자 문정창이 집필한 <일본상고사>가 이야기의 출처다. 문정창은 1970년에 펴낸 이 책에서 수백향이 백제인임을 증명하고자 크게 세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첫째, 문정창은 '계체왕이 수백향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하는 과정에서 수백향의 국적이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이미 기혼자였던 계체왕은 백제의 지원으로 왕이 된 뒤 제사의식이라는 성스런 절차를 거쳐 수백향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러자 기존의 정실부인은 수백향에게 안방을 내주었다. 이런 점을 보면, 수백향이 백제 왕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문정창의 주장이다.
둘째, 문정창은 '<일본서기>에서 계체왕과 수백향의 부부생활을 수교우내(修敎于內)라는 글자로 표현한 사실에서도 수백향의 국적이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수교우내는 속국 왕과 상국(上國) 공주의 부부생활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셋째, 문정창은 '수백향이 낳은 태자의 이름이 천국배개광정(天國排開廣庭)이라는 사실에서도 수백향의 국적이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천국배개'를 말 그대로 풀이하면 '천국 즉 상국이 밀어주다'란 뜻이 되므로 태자가 백제 왕실의 외손자일 것이라는 게 문정창의 추리다.
이런 근거들을 제시한 뒤 문정창은 "현행 <일본서기>는 이러한 사실(수백향이 백제 왕족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 수백향을 인현왕의 제3녀로 만들어 놓았다"고 주장했다. 수백향이 백제인이라는 문헌상의 근거는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틀림없는 백제 공주로 보인다는 것이다.
▲ 일본에서 수백향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 서전총고분. 일본 나라현 덴리시에 있다.
"백제의 현왕 정실왕녀 수백향이 사아군과 함께 무열천황 6년 4월에 왜에 2만대군을 거느리고 안착하여 이듬해 12월 폭군 무열을 폐위하여 남대적을 천황에 앉히니 계체천황이며, 계체천황은 응신천황의 5세손인 인주인왕의 아들이다. 수백향은 남대적의 황후가 되며, 흠명천황의 모후이다."
- 일본고사기 계체천황기
"폭군 무열천황이 재위 7년 12월 폐위되어 죽은 후 왜언왕을 천황에 옹립하려 했으나 백제군과 사아군, 백제현왕 정실왕녀의 반대로 계체천황이 옹립되었으며, 왜언왕은 무서워 달아났다."
- 일본서기
이 기록들을 토대로 하면 수백향은 그 당시의 백제의 정실왕녀이며, 일본의 천황과 결혼한 여성라는 것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계체천황(繼體,게이타이)이 왕위에 옹립된 서기 506년 12월입니다.
계체천황은 무령대왕의 사위가 되고 또한 후대의 흠명(긴메이)천황은 백제 무령대왕의 외손자가 되는 것이니 일본고사기와 일본의 신찬성씨록과 같은 기록들은 백제왕실과 혈연관계까지 맺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수백향 이전에도 백제와 왜의 왕실은 정략적 혈연관계를 맺고는 있었지만, 가장 직접적인 경우는 바로 수백향이 처음이었다고 보입니다.
수백향은 왜에 건너간 이후로 자신이 죽을때까지 왜의 실권을 완전히 움켜쥔 천황을 능가하는 실권자였지만,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일본서기에서는 수백향을 황후로 맞이하였지만 그녀의 이름이 누락이 되어 있으며, 또한 한국측의 기록인 삼국사기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고사기에 그녀의 기록이 비교적 자세한 것은 계체천황 이후로 전부 그녀의 자손들이 천황을 승계한 이유로 인하여 수백향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수백향은 부왕인 무령왕을 왕위에 올리는데 상당부분 기여한 여걸이었습니다.
동성왕이 북위와의 전쟁으로 인해 공주를 오랫동안 떠나있으면서 말년에 들어 산동 임류각 궁궐에서 사치와 향락에 빠져있던 즈음, 고구려는 맹렬히 백제를 노리고 있었고 신라는 신라대로 백제와의 동맹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501년 12월 위사좌평 겸 가림성성주 백가가 반란을 일으켜 동성왕을 살해한 급박한 소식이 공주에 전달됩니다.
동성왕의 피살은 백제전체의 일대혼란은 물론 자칫 내란으로 멸망할지도 모르는 급박한 사태까지 치달을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백향이 나라에 있던 무령왕에게 이 사실을 밀정을 통해 자세히 알렸고, 대화 왜에서는 곤지의 양아들 무령왕을 후임왕으로 임명하여 백제에 새로운 왕으로 보내게됩니다.
그러나 동성왕을 죽인 백가가 무령왕의 취임을 거부하고 반란을 도모하자 무령왕은 우두성의 성주 해명에게 출군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우두성에서 가림성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고 반란군의 확산을 먼저 막아야 했으므로, 수백향은 수천의 무사들을 거느리고 가림성의 반란군을 외부와 단절시키고 반군들이 나와 공격하는 것을 수차례 막아내면서 반란의 확산을 완벽하게 분쇄하였습니다.
이틈에 우두성의 성주 해명의 1만대군이 진군해들어왔고, 백가는 이미 철저하게 봉쇄된데다가 수차례 접전에서 낭패를 보았기 때문에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항복을 하게 됩니다.
무령왕은 이렇게 백가의 반란을 진압한 후 백제 제 25대왕인 무령대왕으로 추대되어 등극합니다.
또한 백가가 이미 동성왕에게 불만을 품고 왕을 피살했기 때문에 재차 반역할 여지가 강했고, 고구려와의 대치에서 자칫 크나큰 범국가적 위기에 봉착할 뻔했기 때문에 그의 목을 베어 죽입니다.
수백향은 백가의 난에서 이렇게 우두성의 성주가 대군을 거느리고 올때까지 능동적으로 대응해 고구려에서 눈치를 못채게 만들었고, 신라에서도 무령왕이 등극하여 조서가 발표되기까지 전혀 모르게 하였으며, 가림성의 반란군이 확산되어 나가지 못하게 하는등 그 반란을 진압하는 데 매우 일조하였습니다.
백가의 난으로 인해 공백상태에 빠진 왕통을 바로 이을 수 있었고, 또한 반대파의 별다른 잡음이 없었던 것은 백제조정의 대부분의 군사권을 무령왕이 쥐었으며, 그안에 수백향이 단단히 실권을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령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 41세였으니, 수백향은 많아야 20세 내외의 여인의 몸이었을 것이나 무예가 탁월하며 병법과 지략에 능숙하고 과단성이 뛰어난 여인이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무령왕이 왕위에 오른후 무령왕은 고구려와의 극도의 긴장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502년 11월 달솔 우영에게 5천의 대병력을 안겨 고구려에게 빼앗긴 수곡성을 탈취하게 합니다.
백제로서는 고구려가 동성왕의 죽음을 알고 그런 틈을 타 대군을 일으키는 상황이 닥치기 전에 백제의 국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시위할 필요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달솔 우영의 군대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고구려 수비군의 벽에 가로막혀 낭패를 당하게 되자, 수백향은 우영을 구출해내고 고구려의 대군을 변경에서 접전하여 패퇴시키면서 북방의 영토를 황해도까지 넓히게 됩니다.
수백향은 많은 대군으로 고구려군을 격퇴했다고 할수는 없었을겁니다.
전세가 크게 역전되어 반격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던 백제조정으로선 다급하여 정예병을 동원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많아야 5백을 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수곡성의 전투인데, 사실상 지리멸렬된 우영의 군대가 그런 역전극을 일으킨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며, 그가 무령왕이었다면 응당 기록에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록에서 누락이 되었다는 것은 수백향의 활약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녀는 왜의 황후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백제와 왜의 혈연관계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고, 또한 김부식의 고려 시대에서는 고려가 동아시아에서 상대적 약자형태였기 때문에 모나지 않는 기록을 내세워야 했을 것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수백향에 대한 기록은 완전히 누락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이 전투이후로 백제와 고구려는 상당기간 접전하지 않았지만, 503년 고구려의 사주를 받은 말갈군이 백제의 마수책을 소각시키고 고목성으로 쳐들어오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달솔 우영은 5천의 병력으로 두터운 수비막을 형성하여 막아냈지만, 많은 병력이 계속 몰려오므로 고목성의 수비력이 큰 한계에 부딫치게 되는데, 이때 우두성의 성주 해명과 함께 수백향이 지원군을 이끌고와서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대를 격파하게 됩니다.
그런데 505년 4월, 무령왕의 동생인 남대적(훗날의 26대 계체천황, 繼體 게이타이)의 무열천황을 천황의 위에서 끌어 내리려고 무령왕에게 도움을 청해옵니다.
무열천황의 변태적인 폭정에 왜조정은 크게 어지러운 형국이었고, 그의 학정으로 인해 백제왕실의 인물이 희생된만큼 배제조정에서도 무열천황에 대한 적지않은 반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일을 성공적으로 할수 있는 인물이 마땅히 없어 무령왕은 딸인 수백향을 왜로 급파하게 됩니다.
여차하면, 수백향으로 하여금 왜의 실권자가 되게 하여 왜와 완벽하게 결맹하여 백제의 국력을 한층더 향상시킬 수도 있었고, 또한 빼어난 자색을 가지고 있던 수백향으로 하여금 남대적과 잘 사귀어하여 그를 사위로 만들수도 있다는 계산이 짙게 깔려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난데없는 청천벽력이었지만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하고 동생인 사아군과 함께 왜로 건너가게 됩니다.
왜로 건너간 수백향과 사아군은 남대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마침내 506년 12월 무열천황을 제거하고 남대적을 계체천황으로 옹립하게 되었고 또한 수백향(手白香)도 황후에 책봉됩니다.
계체천황은 본부인과 여러 후비들 그리고 여러자식들이 있었지만, 자신이 천황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기반은 수백향이었으며, 또한 왜조정은 수백향의 수하들로 채워지다시피했기 때문에 그녀를 황후에 책봉하지 않고는 안될 상황이었습니다.
이로서 대화왜는 웅진백제의 부마국이 되었고, 무령왕은 대화왜와 친밀한 관계를 위해 나라에서 어린시절 곤지밑에서 같이 자란 이복 동생인 계체천황에게 백동 200관으로 만든 청동경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수백향은 황후가 된 이후에도 현숙하기 그지없는 인품으로 여러 후비들과 계체천황의 다른 자식들을 대하였고, 그녀의 인품과 빼어난 자색에 반한 계체천황은 차츰 사랑을 키워나가 그결과 수백향은 여러자식들을 낳게 되며, 그녀이 장남이 훗날 계체천황의 뒤를 이어 흠명천황이 됩니다.
그녀가 왜황실의 황후가 된 이후 백제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507년 5월 고목성 남쪽에 말갈과 고구려군이 다시금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무려 2만의 대군으로 공격을 가해오는 상황이 벌어지자 백제는 총력을 기울여서 막아내었습니다.
그러나 10월에 고구려는 횡악아래까지 진을 키고 더욱더 강력한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바람에 백제는 극한의 위기에 도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조국인 백제의 위기를 도저히 등한시 할수 없었던 수백향은 동생인 사아군에게 잠시 왜의 실권을 맡기고는 자신은 1만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해 어려움에 빠져있던 부왕 무령왕을 돕기위해 출정합니다.
무령왕은 횡악까지 직접나와 응전을 하였지만, 전쟁의 상황은 불리하기만 하여 자칫하면 무령왕도 고구려군에게 참살될 수 있는 극한의 상황까지 번집니다.
고구려의 대군이 고목성의 방어선을 차례로 부수고 횡악에서부터 강렬한 기세로 밀고내려오면서 백제군의 방어선이 차례로 부서져 중과부적의 상태에 빠져버려 무령왕이 크게 낙담하고 있을 때, 수백향은 백제의 영지에 당도해 1만의 전병력을 몰아 횡악으로 진군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왜에서 수백향이 직법 훈련시킨 정예군 1만군대였습니다.
수백향의 1만대군을 본 무령왕은 기운을 차렸으며, 수백향의 1만군대는 그대로 고구려군과 치열하게 치받았는데, 창병과 방패병을 앞세워서 고구려의 주전술인 기병을 견제함과 동시에 궁병들을 동원한 뛰어난 전술로 고구려군은 크나큰 병력손실을 입었으며, 기세가 되살아난 무령왕의 친위군대와 고목성의 백제군이 강력한 방어막을 형성하는 바람에 그들은 크게 낭패를 하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다시 왜에 돌아온 그녀는 왜와 백제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명실상부 천황을 능가하는 실권을 장악하게 되며, 또한 그녀의 말이 곧 왜조정의 정책화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백향은 남편인 계체천황을 몰아내거나 혹은 계체천황의 후비들을 구박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왜와 백제를 단단히 결속시킨 원동력이 되었으며, 백제가 다시 고구려를 능가할 정도로 국력이 융성해지는데는 수백향이 타국의 황후가 되었지만 조국의 국위선양에 크게 이바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다시 512년 9월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합니다.
작정을 하고 쳐들어온 고구려군에게 단숨에 가불성이 함락되었으며 원산성까지 격파되었고, 그들은 백제의 수도를 향해서 질풍노도로 밀고 내려오게 됩니다.
고구려의 대군이 양면협공으로 밀고오자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낀 무령왕은 3천의 군사를 동원하여 위천북쪽으로 진군하였지만, 이때 고구려의 대군은 이미 가불성과 원산성을 격파하고 위천남쪽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만일 위천북쪽의 대군을 상대로 싸우게 된다면 무령왕의 3천군대는 양면협공을 받아 지리멸렬될 처지였고,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닥쳐 매우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됩니다.
그런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백제는 기적에 가까운 대승을 이루고 고구려군대를 대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왜조정의 실권자이자 계체천황의 황후 수백향이 다시 수군을 동원해 직접 조국인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하여 고구려의 군대를 기적적으로 물리치는 개가입니다.
이로서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의 대공격으로 개로왕이 전사한 후로 크게 추락되었던 백제의 위상을 크게 드높이며 고구려와 대등한 국제적인 지위를 갖게됩니다.
이후로 수백향은 왜에 머물면서 물심양면으로 백제의 국위선양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왜에서는 왜의 문화발전과 왜황실의 단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
수백향의 뜻이 무엇인지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면 그것은 마치 연개소문이 무슨 뜻인지 알고자 찾아 헤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즉, 수백향의 뜻은 없다. 그건 그냥 일본 천황의 아내인 황녀의 이름일 뿐이다. 마치 연개소문이나 을지문덕 또는 계백 또는 세종대왕이 이름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