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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전투의 진실
게시물ID : history_129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왕나무
추천 : 8
조회수 : 2415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12/10 15:09:53
642년 쿠테타로 집권한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귀족 180여명을 도륙하고, 고구려 인사체계를 완전히 물갈이합니다.
(이때 고구려의 고급 인적 자원들은 거의 쫑났다고 봐도 될꺼 같습니다.)
이에 안시성주가 반기를 들고, 연개소문은 중앙군으로 안시성을 공격하나 안시성의 치열한 공성전에 마지못해 유임시키고 말죠.
안시성은 그때 당시 정권을 인정 하지 않은 "중립국" 정도로 생각해도 될 꺼 같습니다. 실제로 고구려가 무너지고 난 후에도 명맥을 유지하죠
거기다가 다른 성의 요청에도 아랑곳 않고 묵묵 부답으로 일관하죠. (병력파견 및 지원 일제 없음)
이 후 고당 전쟁이 발발해 645년 당 태종이 요동 방어선을 거진 무력화 시키고 안시성과 건안성을 무너 뜨리면 평양성까지 함락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이에 연개소문은 안시성 옆 주필산에서 말갈족을 포함한 가용병력 15만 대군을 끌어모아 당군의 최대 약점인 "당태종"을 사냥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대군인 만큼 속전 속결로 끝내야 했고, 당태종의 전략에 15만 대군이 전멸로 보아도 될만큼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됩니다. 
안시성주는 고구려군이 그런 대패를 하는 상황에서도 문을 굳게 닫고 나몰라라 하고있었죠.
안시성주 입장에서는 호랑이 두마리가 자기 앞마당에서 싸우는 격이었을껍니다.
문을 열고 고구려군을 맞이했다면, 성을 연개소문 정권의 고구려군에게 빼앗겼을 것이고,
당태종은 전투 전 안시성 사람들을 도륙 약탈한다는 선언을 했었으닌까요.
고구려 15만 대군이 당군에게 주필산에서 박살이나고 당 태종은 고구려의 장수들을 모두 흡수합니다.
이 후 당에서는 두가지 의견이 나왔습니다.
안시성을 건너뛰어 건안성을 함락시키면 고립되 자연히 무너지고 주변의 짜잘한 성주들도 항복하니 건안성만 함락 시키면 된다는 주장과
안시성을 후방에 두고 싸우면 위험하다는 두가지 주장이었죠.
이에 후방에 적을 두면 황제인 당태종의 신변이 위협당할 것이라 생각한 이세적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는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사들의 양식은 요동성에 있는데 지금 안시성을 건너뛰어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만약 도적(고구려군)들이 우리들의 (군량) 운송로를 끊게 된다면 장차 어찌 합니까? 먼저 안시성을 뽑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안시성이 떨어지면 북을 울리며 가서 건안을 빼앗으면 됩니다.”
당 태종이 대답했습니다. “공(公)을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계책을 쓰지 않겠소, 나의 일을 그르치지 마시오.”
 결국 당태종의 신변을 걱정한 당군은 안시성부터 차례로 무너뜨리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당군이 간과 한 것이 있습니다.
요동성과 비교하여 안시성은 엄청나게 작은 성입니다.
요동성 같은 경우 규모도 크고 성 자체가 평지에 있다보니 당군의 공성병기를 쓰기 용의하나
안시성의 경우는 작은 규모의 산성이었죠.
당군의 공성병기는 커녕 효율적인 공격도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당태종은 안시성 공략을 위해 토성 까지 쌓지만 안시성군사들에게 빼앗기기 까지 하고,
3개월 동안 지지부진 시간만 끌게 됩니다.
결국 고구려에게 매수당한 설연타에게 배후를 공격당하자 당태종은 퇴군하게 됩니다.
빡친 당태종은 회군하여 설연타를 공격해 646년 외공몰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확보하죠.
당태종을 상대로 필사 항전하여 안시성을 지켜낸 안시성주는 물론 대단한 인재지만 연개소문 정권의 한계 또한 명백히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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