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서는 진(晉)에서 일어난 반란들 중 하나인 성(成) 정권의 수립과정을 살펴보았는데, 반진(反晉)에 의거한 반란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앞으로 몇개를 더 열거할 예정인데 그 중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다고 할 수 있는 장창(張昌)의 난에 대해 써볼까 한다. 장창이란 사람이 일으킨 난을 말한다. 난이 벌어진 범위영역이나, 그 영향과 결과로 보았을땐 익주(益州)에서의 유랑민 집단의 봉기보다 더 규모가 큰 반란사건이라 할 수있다.
- 장창의 난 -
기록에는 장창(張昌)이 '만족(蠻族)' 이라 했다. 즉, 오랑캐다. 그리고 출신지가 형주(荊州)의 신야(新野)현. 삼국지를 읽어보았으면 상당히 익숙한 지명인데, 유비가 한때 궁벽하던 시절에 다스리던 고을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장창의 출신지를 밝힌 이유는 장창이 이후 반란을 일으키고자 거병한 무대여서다.
장창이 반기를 든 배경에는 앞서 다루어본 익주에서의 유랑민 반란, 즉 이특-이웅 부자의 봉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기 303년, 이특(李特)이 익주에서 진(晉)의 익주자사(益州刺史) 나상(羅尙)과 박터지게 싸우고 있을 무렵, 조정에서는 이 익주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익주의 인근 주(州)인 형주(荊州)에서 징병을 실시한다. 무지렁이 농민들에게 칼을 쥐어주고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등떠밀 정도로 당시 사태가 급박했던 것이다.
그러나 형주의 백성들에겐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익주라는 먼 타지까지 가서 전쟁을 해야한다는 것도 불만이거니와, 한시라도 빨리 떠나지 않으면 엄벌에 처하겠다는 조정의 엄포가 있었기 때문.
조서에서 각 군(郡), 현(縣)을 지날때 닷새 이상을 머물지 못하게 하여 임오병(壬午兵)의 불만이 많았다. - 진서 장창전
여기서 임오병이란, 징집된 병사들을 말한다. 임오일(壬午日)에 징집되었다 하여 임오병이라 불렀다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조정에서 내린 조서에 징집된 병사들이 익주로 향하는 도중에 지나가는 군(郡)이나 마을, 고을에 닷새 이상을 머무르지 못하게 했다는 소리다. 그러니 쉴 생각일랑 말고 얼른 익주전선으로 가라는 얘기였다. 거기다 그 병력을 인솔하는 관리도 그런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발생하면 그 즉시 모가지를 날리겠다고 덧붙인다. 실로 당시 조정의 조급함이 느껴지는 기록이다.
익주(益州)와 형주(荊州)는 인접해 있는 주이긴 했으나 땅덩어리가 워낙 큰 중국인지라..
익주에서 형주는 수천 수만리 길인데 쉬지도 못하고 꼬박 강행군 할 생각에 '임오병'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레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그 무렵, 형주(荊州)의 한 고을 중 하나인 강하(江夏)군에서는 대풍작이 든다. 불만이 가득한 임오병들과는 달리 강하군 백성들은 풍작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을 터. 그러자 강하군에 풍작이 들었다는 소식에 각지를 떠돌던 유랑민들, 9편에서 언급한 서기 298년, 옹주(雍州)와 관중(關中)지역에서의 기근을 피해 대이동을 시작한 그 유랑민 집단이 강하군으로 몰려드는 일이 벌어진다.
유랑민들은 밥을 얻어먹기 위해 꾸역꾸역 형주로 몰려왔고 삽시간에 형주는 유랑민들이 득실거리는 땅이 되어버린다. 유랑민에다 현지인이 뒤섞이고 전장으로 향하는 도중 때마침 강하군을 지나가던 임오병들까지 합세해 형주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바로 그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반진(反晉)을 부르짖는 이가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장창(張昌)이었다.
진(晉) 왕조를 타도하자는 장창의 언변에 불만이 가득했던 임오병들과 역시 기근으로 인하여 발생한 난민들을 제대로 돌보아 주지 않은 무능한 조정에 대해 실망한 유랑민들은 품고 있던 원망과 불만을 터뜨리며 장창에 동조했고, 장창을 따라 봉기를 일으키니 그 무리가 수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서기 303년의 일이다.
사실 장창의 반란은 거의 예고된 것이라 할 수있다. 장창에 대해 기록한 진서(晉書) 장창전(張昌傳)에는 그가 일찍이 이특(李特)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이특을 본받고 모방하여 사람들을 모아 자신의 휘하로 두며 도적 비스무리한 집단을 만들었다고 전하고 또한 점괘를 보았을 때, 훗날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병법과 무예를 연마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선 진(晉)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이특을 본받고 모방하여 사병(私兵)집단을 조직했다라는 것부터가 애초 장창이 반란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충분한 증거다. 그런데 자신의 장래를 점친 점괘결과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는 말을 했다하여 병법과 무예를 닦은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재능을 밑천삼아 아마 언젠가가 될지모를 반진(反晉) 반란을 준비하기 위한 단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디까지나 내 의견이다.
그 뿐만 아니라 장창이 평소 형주(荊州)에서의 학정에도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도 반란을 일으키는데에 한 몫했다. 앞서 말했듯 장창은 형주군 신야현 출신으로, 형주에서 나고 자랐다. 당시 형주를 다스리던 이는 신야왕(新野王) 사마흠(司馬欽)이란 황족으로 사마의의 7남인 사마준(司馬駿)의 아들이다. 정치를 개판으로 한다는 것이 사마씨 가문의 내력(이쯤되면 정말 의심해볼만 하다)이라 그런지 이 사마흠도 학정을 일삼았다.
사마준(司馬駿) 초상화.
사마의의 7남이다.
그런고로 장창은 진(晉)의 학정 밑에서 살아왔다는 얘기다. 진 왕조에 대한 반감은 컸을 것이고 거기다 본인의 야심까지 더하여 적당한 기회를 노리다 기어코 일을 낸 것이다.
장창과 그를 따라 벌떼같이 들고 일어난 유랑민과 임오병들의 무리는 형주를 유린하며 이를 막으려는 진군(晉軍)과 수차례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총체적 난국이란 말은 이 시기의 진(晉)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익주, 형주라는 큰 두 주(州)가 난에 휩싸였고 한편으론 제국의 동쪽과 중원에서는 산동(山東 : 오늘날의 산동반도다)지방에서 일어난 왕미(王彌)라는 도적이 그 일대인 청주(靑州), 서주(徐州), 연주(袞州), 예주(豫州) 등을 휩쓸고 있었는데다 나중에는 하북(河北)지방에서 마저 왕여(王如)라는 도적이 창궐하여 하북지방도 유린되기 시작한다. 물론 왕여는 약간 뒤에 등장하긴 하지만. 여튼, 이 시기의 진나라는 팔왕의 난에다 유랑민들과 이민족들의 반란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다시 장창의 난으로 돌아가서,
기세등등 해진 장창은 진(晉)을 부정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을 벌인다.
바로 황제를 칭하는 것. 다만 장창이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갖다가 황제로 세운다. 어느 고을을 공략하다가 그 마을의 관리였던 구심(丘沈)이란 사람이 인물이 좋다하여 그를 붙잡아다 성씨를 유(劉)씨로 고치고는 한(漢) 왕조의 후손이라 선전한다. 아시다시피 한나라 황족의 성씨는 유씨다.
그리고 장창 자신도 개명하는데, 성(姓)은 이(李)씨로, 이름은 진(辰)이라 했다. 왜 하필 이씨이냐면 위에서 밝혔듯 장창은 처음에 이특(李特)을 본받고 모방하여 군사를 모았다고 했다. 장창에겐 이 이특이 롤모델을 넘어선 존경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기록인 <진서 장창전>에서도 그런 연유로 이특의 성씨인 이(李)씨로 바꾸었다고 나와있다.
근데 반란의 주체자이자 지도자인 장창은 왜 본인이 황제를 자칭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만 팔왕의 난에서 황족들이 제멋대로 황제가 되었다 비참하게 죽은 것을 봐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아니면 출신이 오랑캐라 많은 한(漢)족들 위에 군림하기엔 꺼림직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황제를 세워 제국을 칭한 장창(이진(李辰)이라 개명했다지만 여기선 그냥 장창이라 하겠다)은 관직을 두고 제도를 정비하며 연호까지 정하여 그 뜻을 굳건히 한다.
장창 자신은 상국(相國)이 되었고 그 형제들은 각기 거기장군과 광무장군으로 임명하여 대오를 인솔케 했다. - 진서 장창전
연호는 신봉(神鳳)이라 하였고 모든 예법을 한(漢)과 같게 했다. - 진서 장창전
이렇듯 세력을 가다듬은 장창은 진(晉) 왕조와의 싸움을 계속해나간다. 여기서 일종의 심리전을 쓰는데 '조정에서는 강남의 사람들은 모두 봉기군이라 하여 모조리 살육하라 했다 카더라' 라는 식의 카더라 통신과 찌라시를 퍼뜨려 아직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로 붙게 만들어 그 무리가 무려 3만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머리에는 붉은 두건을 두르고 양 귀 밑머리에 짐승의 털을 붙였는데, 관군(官軍)을 보기만 하면 칼과 창을 휘두르며 난도질 해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었다. - 진서 장창전
피아식별의 수단을 마련했다는 얘긴데, 그만큼 무리의 숫자가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창은 그 이후로 실로 눈부신(?) 전공을 세워나가는데 다음과 같다.
대장 황림에게 군사를 주어 예주(豫州)를 치게 하고 무창(武昌)을 침범하여 태수(太守)를 죽였다. - 진서 장창전
직접 대오를 이끌고 완성(宛城)을 쳐, 성을 함락시킨 후 전장군(前將軍) 조양을 무찌르고 평남장군(平南將軍) 양이를 죽였다. - 진서 장창전
양양(襄陽)을 공격하여 신야왕(新野王) 사마흠(司馬欽)을 죽였다.
여기서 학정을 일삼던 사마흠을 결국 죽이고야 말았다.
이게 끝이 아니다.
양주자사(陽州刺史) 진휘를 물리치고 각 군을 점령하였다. - 진서 장창전
진원 등의 장수를 파견하여 장사, 무릉, 영릉 등의 군(郡)을 공략하니 각 고을과 군(郡)이 이를 두려워 하여 항복했다 - 진서 장창전
이 결과, 장창은 형주(荊州), 예주(豫州), 양주(陽州), 서주(徐州) 등의 여러 주(州)를 유린하고 그 세력권 하로 둔다. 그 세력이 어느정도인지는 위에 올려둔 지도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야말로 연전연승을 거둔 장창이었는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그 심각성을 절감한 진(晉)에서는 대대적으로 토벌에 나서는데, 유홍(劉弘)이란 무장을 진남장군(鎭南將軍)으로 임명하여 지휘권을 맡긴다. 참고로 이 유홍은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을 앞두고 흥에 취해 시를 읊던 조조(曺操)에게 그런 시는 불길하다면서 간언했다가 빡친 조조에게 창에 꿰뚫려 죽임을 당한 유복(劉馥)의 손자다. 삼국지를 읽으신 분들이라면 아실터.
이때부터가 진의 반격이라 할 수 있겠다. 다음글에서도 서술할 예정이지만 이 장창의 난은 당시 중앙에서 벌어지고 있던 팔왕의 난과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다. 대권다툼을 하던 번왕들이 저들 권력다툼에 눈이 멀어 장창의 난을 등한시 한 것 때문에 초장부터 진압하지 못하고 나중에는 난의 규모가 커진 탓도 있다.
다음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