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0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고, 이듬해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지어 역법(曆法)을 개정하였으며, 1432년 예문관제학 ·춘추관동지사를 거쳐 이조참판 ·충청도관찰사로 있다가, 1436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439년 형조참판에 기용되어 이듬해 형조판서에 승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42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하였다. 1443년 중추원지사 ·제조를 거쳐, 1445년 우참찬 때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撰進)하였다.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지방의 전품(田品)을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하였고, 뒤에 공조판서 ·좌참찬을 거쳐 1452년(문종 2) 병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을 도와 좌의정이 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다. 1455년(세조 1) 영의정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네이버 지식백과] 정인지 [鄭麟趾]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