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는 지리적 위치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과 북한에 가장 가까운 곳이어서 당시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 공군이 소련을 봉쇄할 수 있는 전략적 위력의 실험이 가능한 최고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제1778호(1947. 9. 16)에 의해 주일 미 공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돼 있었다. 그 이후에 미 공군은 독도 지역에 대해 1948년 6월과 1952년 7월 등의 여러 차례 폭격이 있었다.
제1차 폭격은 지역 주민들에게 사전 통보도 없이 1948년 6월 8일 오전 11시 30분경 발생됐다. 미국 극동공군사령부의 B-29 폭격기 9대가 4차례에 걸쳐 독도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 사격을 실시하는 등 폭격 훈련을 하였다. 이로 인해 독도 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울릉도 어민 14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어선 20여 척이 파괴됐다고 확인됐으나, 폭격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어부는 “30여 척의 동력선에 한 척당 5~8명이 승선했으므로 150여 명 정도가 숨졌다고 보면 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튿날 독도에 조업을 나간 어선에 의해 어민들의 사망이 알려졌고, 독도에 대한 폭격은 ‘야만행위’이며 ‘진상조사와 책임자 공개 처단’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이었기때문에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조난 당한 어민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독도조난어민위령비'는 6.25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8일 조재천 경상북도지사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독도 선착장 근처 몽돌해변 절벽 아래에 세워졌다. 당시 비석의 비문에는 ‘독도 어민들이 숨진 지 2주년을 맞아 조난어민 제위의 명복을 빈다.’라는 내용과 함께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고려해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재천명하기 위해 건립한다.’라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고 한다.
독도조난어민 위령비 제막식(1950년 6월 8일)
그러나 1952년 당시 거듭된 독도 폭격이 모두 일본의 유도에 의한 것임을 밝히는 일본 내부의 발언이 공개되었다.
1952년 5월 23일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시마네현 출신 야마모토 도시나가 의원 질의에 이시하라 간이치로 외무차관이 응답한 내용 야마모토 의원 : "이번에 주둔군의 일본 내 훈련구역 지정에 있어서 독도 주변이 훈련 구역으로 지정되면 그 (독도) 영토권을 일본의 것으로 확인받는 데 유리하다는 생각에서 오히려 외무성이 훈련구역으로 지정되기를 바라고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사하라 차관 : "대체로 그런 발상에서 다방면에 걸쳐 추진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1952년 11월 한국 정부가 미 공군의 독도 폭격훈련에 대해 항의하자, 미 공군은 즉각 독도를 폭격훈련구역에서 제외했다. 미 대사관은 독도를 폭격 연습지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한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통고했다.
*참고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193128
http://blog.naver.com/correctasia?Redirect=Log&logNo=50087009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