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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10
게시물ID : history_129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19
조회수 : 1633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3/12/10 06:11:44
 
 
- 성(成) 정권의 성립 -
 
 
이특(李特)의 봉기 직후, 그 기세를 타 성도(成都 : 익주(益州)의 주도(州都)가 성도다. 삼국시대 촉(蜀)의 수도이기도 함)를 공격한다. 
 
 
이특이 촉(蜀)에서 일어나 성도의 나상(羅尚)을 공격하자, 나헌은 강양(江陽)으로 물러나 수비했다. 하지만 형세가 불리하자 구원을 요청해 형주자사(荊州刺史) 종대(宗岱)와 건평태수(建平太守) 손부(孫阜)를 인솔하여 나상을 구원하고 임시로 강주(江州)로 갔다. 종대와 손부가 도착하여 많은 사람들을 도적으로 몰아 핍박하자 사람들은 모두 분한 마음을 가졌다. - 진서 나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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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지명이나 행정구역은 지도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보시다시피 오늘날 중국의 사천성이 익주가 되겠고 바로 그 오른쪽에 접한 주(州)가 형주(荊州)다. 그리고 건평태수(建平太守)에서의 건평(建平)이란 곳은 형주에 속한 지역이고, 태수(太守)는 주자사 휘하의 지방 관리직이다. 나상은 인근 형주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특의 봉기군이 나상의 진군(晉軍)과 교전, 나상 쪽이 불리해지자 나상이 인근 주(州)인 형주(荊州)의 주자사(州刺史) 종대란 사람과 손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종대와 손부의 원군이 도착하여 나상을 구하고는 잠시 강주란 곳에서 머무르는데 이때 익주의 백성들을 싸그리 이특에 동조한 반란군 취급하여 백성들이 원망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어디까지나 이특의 봉기는 유랑민 집단만이 그 주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애꿎은 익주의 원주민들까지 역적으로 몰아넣어버리는 병크를 저지른 것. 그렇잖아도 나상의 폭정으로 불만이 많던 익주의 백성들은 이 사건으로 진(晉)에 대한 익주에서의 민심은 완전히 돌아서게 되고, 그그에 반해 선정(善政)을 천명한 이특을 따르게 된다.
 
 
이특은 봉기하면서 공약 몇가지를 내세웠다.
 
 
첫째, 창고를 열고 양식을 내놓아 백성을 구한다.
둘째, 덕망이 높고 능력이 높은 이들을 받들며 관직에 등용한다.
셋째, 군대와 관리들이 지켜야 할 규율을 엄격히 제정한다.
 
 
나상의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이특의 공약을 크게 환영하며 민심은 이특에게로 쏠린다.
민중들에게는 이특이 마치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특은 착한 사람, 나상은 악한 사람.
평서장군 나상은 우리의 화근일세.
 
 
당시 사람들이 지어 불렀다는 노래가 뒷받침 해준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이특의 네가지 공약 중 첫번째와 관련이 있는데, '창고를 열고 양식을 내놓아 백성을 구한다.' 이 말은 곧 헐벗고 가난한 대다수의 백성들을 익주의 지주층, 호족들의 부로 구휼하겠다는 뜻이었던 것.
 
이에 돈 좀 있는 지주층과 호족들은 반대로 나상과 진(晉) 왕조를 지지하며 돈으로 사병을 모아 비밀리에 나상을 지원하고 협공하여 백성들을 탄압한다.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어디든 돈과 빽 좀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기득권을 잃기 싫은게 사람의 심리인 것 같다.
 
 
아무튼, 싸움으론 불리하다 판단한 나상은 계책을 쓰기로 한다. 익주가 거의 자신에게 등을 돌린 이 마당에 이특이라는 괴수만 없애버리면 반란군 역시 금새 와해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이특에게 거짓항복하여 죽이기로 한다.
 
거기다 이특이 진영을 퍼뜨려 놓아 병력이 분산되어 있다는 보고도 들어와, 거짓항복을 하면서 소수의 병력만이 남아있는 진영에 머무르는 이특에 기습을 가하여 죽이기로 한다.
 
 
나상은 병조종사 임예를 보내, 이특에게 거짓항복을 시켰고 자신은 은밀히 나와 날짜를 구해 이특을 쳐, 크게 격파하고 목을 베 그 수급을 낙양(洛陽)으로 보냈다. - 진서 나상전
 
나상은 대군을 보내 이특의 진영을 급습하여, 이틀 연속으로 싸웠다. 이특은 대패하여 잔병을 수습해 물러났으나 나상의 군이 돌아가자, 이특은 쫓아 30여리 남짓에 걸쳐 싸웠으나, 나상은 대군을 동원해 요격했기에 이특의 군세는 패했다. 나상은 이특과 이보, 이원을 죽이고 그 시체를 태웠으며 수급을 낙양으로 보냈다. - 진서 이특전
 
 
작전은 성공을 거두고 이특은 전사한다. 서기 303년의 일이다.
 
이특이 죽으면서 지도자를 잃은 봉기군도 우왕좌왕 할 것처럼 보였으나, 그게 아니었다.
 
이특의 셋째아들, 이웅(李雄)이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봉기군의 수장으로서 계속해서 싸움을 진행한다.  
 
전투에서 많은 손실이 있어 잔여병력도 거의 없었고 이웅의 숙부이자 이특의 동생, 이류(李流)는 나상에게 항복하자는 말까지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이웅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나상에 맞서 분전분투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데에 성공, 성도(成都)를 함락한다.
 
 
그리고 서기 304년 10월, 이웅은 주위의 추대를 받아 성도왕(成都王)을 자칭하게 되는데, 이것이 파저족(巴低族)의 정권인 '성(成)'의 수립되겠다.
 
 
영흥(永興 : 서기 304년) 원년, 10월, 제장의 강한 요구에 따라 이웅은 존위(尊位)에 오를 것을 결의했다. 성도왕을 칭하고, 경내에 은사를 내려 연호를 건흥(建興)이라 하였다. 진(晉)의 법을 버리고 약법 7장으로 정했다. (이후는 생략) - 진서 이웅전
 
 
나상이 아직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왜 다 끝낸 것처럼 그러나 싶은 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는 이미 이웅은 익주를 거의 장악한 것과 마찬가지였고 나상은 이웅과의 몇 차례의 대규모 전투에서 패해 다른 곳에 도망가 "쟤네가 익주 먹었음. 빨리 원군 보내주셈." 이런 식으로 조정에 표문이나 보내 징징대고 있는 처지였다. 참고로 서기 310년에 나상은 이웅이 보낸 군사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나마 근거지로 버티고 있던 나상의 땅도 모두 성(成) 정권이 장악함으로서 익주는 온전히 성의 영토가 된다.
 
 
그리고 3년 후인, 서기 307년.
 
 
건흥 3년, 범장생이 서산에서 소달구지를 타고 내려와 이웅은 문까지 맞이하러 나왔다. 그리고 장생을 승상(丞相)으로 임명해, 범현(范賢)이라 존칭했다. 그 장생이 제호(帝號)를 칭하도록 권했기 때문에, 이웅은 제위에 즉위했다. 건흥(建興) 3년을 안평(安平) 원년이라 고치고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하였다. 아버지 이특을 경황제(景皇帝)로 추존하고 묘호를 시조(始祖)로 했으며, 어머니 나씨를 태후로 했다.(이후는 생략) - 진서 이웅전
 
 
'참람되이(진나라 입장의 기록에서의 표현)' 황제를 칭함으로서 진(晉) 왕조를 부정하는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윗 기록에서 범장생(范長生)이란 인물은 도가(道家) 쪽에서는 꽤나 유명한 도사(道士)로, 기록에는 그 나이가 백세를 넘었으며 심지어는 삼국시대 촉(蜀)의 유비를 섬겼었다고 하는데.. 불로장생이나 도사(道士)와 같은 것이 존재하는 도교 쪽 인물이다 보니 이런 기록이 있는 듯 하다. 거기다 이름도 장생(長生 : 길게 살다)이라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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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장생 조상.
 
그리고 범장생은 익주의 대지주로서, 기득권 가진 지주들이 이특을 배척했을때 유일하게 이특을 지지한 지주다. 이특에게 군량미를 주기도 하고 군자금이나 필요한 인력이나 물자를 지원해줘, 선대의 이특이 신임했고 이제 그 아들인 이웅도 범장생을 건국의 일등공신으로 여기며 '문까지 맞이하러 나오는' 정도의 정성을 보이는 것이다.
 
서기 307년이면 진(晉)의 연호로는 영가(永嘉) 원년. 회제(懷帝) 사마치의 치세가 시작된 해다.
 
제국의 한귀퉁이가 뚝 떨어져나간 셈이었지만, 당시 진나라는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성(成) 정권의 수립사건 외에도 진(晉)을 부정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봉기한 사건은 몇차례 더있었다.
 
그건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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