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피휘(避諱), 회피(回避)하는 글자
조선은 개국초기부터 중국의 속국(屬國), 혹은 제후국(諸侯國)으로써 적절하고 유연하게 대처함.
어떨때는 너무 유연해서 완전히 중국 변방의 고을 같음.
아무튼 이런 속국으로나마 국가라는 체제를 유지하던 조선시대의 왕들과 신하들에게 존경을 표함.
그런 시대에 맞는 유연한 자세가 없었으면 그냥 중국의 작은 주(州)가 되었거나 아니면 아예 양아치 오랑캐 취급 받으며 살았을지도 모름.
중국의 속국으로 중국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할 일도 무지 많음. 그중에서 중국에 서류를 보낼때 주의해야할 사항이 있음. 동양에서는 당연히 높으신 어른들과 이름이 똑같으면 안됨. 중국, 조선, 일본도 마찬가지...
예를 들어 조선시대 세조 임금 시절에 김첨지가 세종 대왕을 너무 존경해서 아들 이름을 김세종이라고 지었다면...
일단 과거에 급제하기라도 하려면 당연히 이름을 세정이나 채종으로 바꿔야 함. 아니면 막동이라도 좋고,
"상감마마, 이번 과거에 3등으로 급제한 경상도 김해의 첨지 김00의 자제 세종이라 하옵니다."
"아니 저자는 우리 세종 대왕을 능멸하는 이름을 지은것 아니냐, 이런 괘씸한지고. 저자의 과거 급제를 취소하고 그 애비와 식솔들을 함께 함길도 극변의 물길어오고 밥하는 나무 베어오는 관노로 정속하여라!!!"
이럴때 일고의 지체도 없이 "아뢴데로 시행 하겠나이다~!!!"
그런데 사헌부에서 바로 탄핵 들어옴. "선대왕의 묘호(廟號)를 피휘(避諱)하여야 함을 아는것은 사족(士族)의 마땅한 도리인데 인군(人君)을 능멸한 저자는 참형으로 다스려야 하옵니다~!!!"
뭐 대충 과장 전혀 없이 이런 스토리로 전계될듯.
이제 조선 시대 중국과의 피해야 할 글자와 그 이유를 알아봄.
◆ 태조
태조 6년(1397년 정축 / 명 홍무(洪武) 30년)
태조의 등극 후 나라 이름도 그 유명한 기자(箕子)조선으로 받아와서 "우리도 이제 중국에서 인정한 중국의 영토임. 북쪽에 사는 오랑캐들은 우리를 중국처럼 섬겨라~ 눈누 랄라~"
조선에서는 이제 고려때 쓰던 임금의 인감 도장을 반납하고 조선왕의 이름이 선명하게 찍힌 인감 도장을 중국에 요청하는데 그 요청 서신중에 여러가지 실수가 있었음. 그중에 국서에 쓰지 말아야 할 글자들이 있어서 중국 황제가 노발대발.
그 표문을 가져간 사신 몇사람이 구속 수감됨. 그리고 그 표문을 만들고 교정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도 전부 중국으로 보내라고 협박함. 이거 때문에 한동안 태조 임금은 마음 편하게 지낼 날이 없었음.
태조 임금이 중국에 다시 보낸 댓글의 일부...
『"이것이 첫째는 내가 어리석고 졸한 까닭이요, 둘째는 소방(小邦) 사람의 언어(言語)·자음(字音)이 중국과 같지 않고, 또 조정 문자(文字)의 체식(體式)과 회피하는 자양을 알지 못하여 이런 차오를 가져온 것이니, 하정(下情)에 부끄럽고 두려운 것을 어찌 이루 말하겠습니까?"』
또한 중국에 보낸 말(馬)들이 대부분 황야의 무법자에 나오는 그런 윤기나는 털에 엉뎅이 섹빵한 그런 말이 아니고 다들 골골 거리고 갈비대가 보이는 말들임. 뭐 이건 한번에 최대 1만 마리씩 보내는 말인데 겨울이라면 말들이 요동까지 가면서 뜯어 먹을 개풀도 없기 때문에 바짝 마르게 되고 또 요동의 뗏놈 장군들 중 일부가 자기네 동네의 찌질한 말들과 우리나라 말을 바꿔치기 하는 경우가 빈번해서 그런거였음. 아무튼 중국 황제가 그런 말들을 보니 성질나서
"그럴꺼면 주기 싫은 조공도 매년 가져올 필요 없으니까 한 3년에 한번씩만 와라. 더럽다 퉤!퉤!퉤!"
뭐 당연히 우리 태조 임금이 또 변명을 해야 함.
『"또 3년에 한 차례씩 조공하라고 유시하셨으나,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은 중국으로 가기에 멀지 않으니, 만일 다른 해외 번방(藩邦)에 비교하여 3년에 한 번 조공한다면 신자(臣子) 된 마음에 스스로 편안할 수 없으니, 다시 바라옵건대, 긍찰(矜察)하여 아울러 아뢰어 전과 같이 하정(賀正)·성절(聖節)·천추(千秋) 때마다 조공하도록 허락하여 주시면 대단히 다행하겠습니다."』 얼마나 쫄았으면 가져오지마라 해도 준다네...ㅠ. 버로우! 버로우!
◆ 태종
태종 3년(1403년 계미 / 명 영락(永樂) 1년)
그럼 중국에 보내는 공문서에서 금기시 하는 신비스런 글자들은 무엇인가?
하윤(河崙)·이첨(李詹)·조박(趙璞) 등이 명나라 서울[京師]로부터 돌아와서 임금에게 보고를 함.
"인묘(仁廟, 명나라 황제)의 휘(諱)는 세진(世珍)이고, 고황제(高皇帝)의 휘는 원장(元璋), 자(字)는 국서(國瑞)이며, 황제(皇帝)의 휘는 체(棣)이고, 제왕(諸王)의 휘는 상(樉)·강(棡)·숙(橚)·정(楨)·단(槫)·재(梓)·기(杞)·단(檀)이라고 함.
이제 위에 열거한 글자가 들어가는 이름으로 중국으로 갈수 있는 여권 발급이 금지됨.
물론 일반 백성이나 중,하급 신하들은 큰 상관이 없지만 조선의 임금이나 중국사신으로 갈만한 사람은 대법원에서 무료로 이름을 바꿔줬다나 뭐라나... 쉽게 말하자면 본토 물 좀 먹으려면 이름까지 조심해서 지어야 함.
이름뿐만 아니라 특별히 천(天,天子 중국 황제)자 같은 황제를 지칭하는 한자를 잘못 사용해도 중국 황제에게 3단 콤보로 욕먹게 됨.
◆ 세종
물론 이게 중국으로 가는 공문에만 적용되는게 아니라 국내에서도 벼슬 좀 할려면 조선 임금이나 왕세자 등 왕족들과 이름에 들어가는 한자가 같거나 발음이 같으면 안됨.
세종 1년(1419년 기해 / 명 영락(永樂) 17년)
개성 유후(開城留後, 개성 시장 정도) 이도분(李都芬)이 임금의 이름과 발음이 같아서 이사분(李思芬)으로 고쳤다 함.
세종 대왕의 이름은 복(福) 도(祹)자임. 이 도(祹)자는 한자급수 난이도 특급에도 나오지 않는 희귀자임.
임금들은 원래 백성들이 많이 쓰는 한자를 피해서 이름을 지어야 함. 쉬운 한자로 이름 지으면 많은 백성들이 이름을 갈아야 해서 대법원이나 동사무소의 공익분들과 공무원들이 엄청 바빠짐.
이무튼 개성 시장 이도분은 임금의 이름과 발음 조차도 같으면 불손한 것이라 여기고 자기 이름을 갈아버린 충신임.
당연히 이도분은 당시로써는 벽에 똥칠을 할 정도인 88세까지 살았다고 함.
이거 뭐 한두사람이 임금이랑 이름의 발음이 비슷하다고 고치기 시작하니까 이거도 유행 타나봄.
이제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지역 명칭도 바꾸자고 함.
충청도 감사가 이도역(利道驛)을 이인역(利仁驛)으로 고치자고 함. 뭐 듣고 보니 세종 대왕이 이도(李祹)이니
아홉시 뉴스에 " 오늘 충청도 이도역에서 역마 세마리가 죽었다고 합니다."
세종 대왕이 저녁밥 드시다가 "나? 내가... 뭘... 죽여?"
(역시 바꾸는게 맞을듯 함)
일단 조선이 중국 속국이었다는 것에 좀 울컥 하는 사람도 있을지도 몰라서...
세종 1년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에게 중국에서 행할 예절을 논하는 자리가 있었음.
여기서 중국에 가서 사신이 중국 황제에게 인사 드리는 격식을 서로 가르쳐주고 그러는데,
"왼쪽 무릎을 꿇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 되어있다"라고 함.
아마도 이거 성종 임금때 궁궐안에서 신하들끼리 금지된 인사법인 호궤(胡跪)인듯함.
호궤가 금지된 이유는 오랑캐가 대국(大國)을 섬길때 쓰는 인사법이라는...
(요게 호궤胡跪라는 인사법임)
세종 3년(1421년 신축 / 명 영락(永樂) 19년)
천추사(千秋使) 서장관(書狀官)인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조숭덕(曹崇德, 아버지가 중국 사람이라 중국어가 유창함)이 북경에서 돌아왔는데 중국으로 갈 사신 이름 중에 여권 발급하면 안되는 사람 이름 발표함.
덕(德)·인(仁)·연(燕). 이유는 너무 길어지니...
세종 23년(1441년 신유 / 명 정통(正統) 6년) 7월 28일 드디어 나중에 비운의 왕 단종 임금이 태어남.
그런데 이때 당시 문종(文宗)이 왕세자(王世子)이므로 문종의 아들은 왕세손(王世孫)인데...
이때 왕세자를 원자(元子)로 부르는 게 유행이었음. 그러니 손자는 자동으로 원손(元孫)이 됨.
원손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한자든 발음이 같든 간에 다 바꾸라고 함.
세종 28년(1446 병인 / 명 정통(正統) 11년), 세종 대왕의 와이프인 소헌 왕후(昭憲王后)가 돌아가심.
소헌 왕후의 신주(?,魂宮)를 모실 사당을 만드는데 사당 이름을 세종 대왕이 휘덕전(輝德殿)으로 지어줌.
그런데 세종 대왕의 아들인 문종 임금이 자(字)가 휘지(輝之)임.
세종의 싱크 탱크 집현전(集賢殿)에서 "세종 임금님아(로 쓰고 악질 사업주로 읽는다). 휘(輝)를 님 와이프 혼궁에다 넣어 버리면 님 아들내미 자자를 바꿔야 하는데요?"
뭐 결국 집현전에서 또 다른 고사를 끄집어내서 그냥 써도 된다고 아룀. 이로써 임금의 체면을 세워 줌...
◆ 성종
성종 6년(1475년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성종 임금까지 왔으니 중국도 임금이 많이 바꿔였을 터... 그럼 피해야 할 글자도 많아지겠음.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 이경동(李瓊仝)이 중국 갔다 와서 보고를 올림.
회피(回避)할 글자 모양은,
인조 순황제(仁祖淳皇帝)의 묘휘(廟諱) 세진(世珍)
태조 성신 문무 흠명 계운 준덕 성공 통천 대효 고황제(太祖聖神文武欽明啓運峻德成功統天大孝高皇帝)의 묘휘 원장(元璋) 주원장의 자(字) 국서(國瑞)
태종 체천 홍도 고명 광운 성무 신공 순인 지효 문황제(太宗體天弘道高明廣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의 묘휘 체(棣)
인종 경천 체도 순성 지덕 홍문 흠무 장성 달효 소황제(仁宗敬天體道純誠至德弘文欽武章聖達孝昭皇帝)의 묘휘 고치(高熾)
선종 헌천 숭도 영명 신성 흠문 소무 관인 순효 장황제(宣宗憲天崇道英明神聖欽文昭武寬仁純孝章皇帝)의 묘휘 첨기(瞻基)
영종 법천 입도 인명 성경 소문 헌무 지덕 광효 예황제(英宗法天立道仁明誠敬昭文憲武至德廣孝睿皇帝)의 묘휘 기진(祁鎭)
당시 황제인 헌종(憲宗)의 어휘(御諱) 견심(見深)
이거 중국 공문서에 쓰면 또 조선의 신하 여럿 범죄인도 협정에 따라 중국으로 송환되어서 구속 될수 있음.
그런데 명나라가 한 300년쯤 더 지속되었으면 쓸 수 있는 글자가 몇 자 남지도 않았을 것 같음.
그래서 미리 세종 대왕이 한글을 창제 하셨나?
중국 황제가 가끔씩 조선을 떠보려고 표문(表文)·전문(箋文)을 올릴 때면 휘피(諱避)하는 글자를 많이 만들어 놓고 글 한번 지어볼래? 그러기도 했나 봄. 이걸 뭐 하나하나 중국에 물어보게도 뭣한 모양임.
임금이랑 신하들 사이에 특정 글자를 왜 못쓰게 하는지, 이거 쓰면 뭐라 그럴지 서로 난상토론이 벌어짐.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세종 대왕보다 더 똑똑한 왕이라고 생각하는 성종 임금... 머리를 짜내보고는,
당시 성종 임금이 가장 믿던 신하 중 한사람인 현석규(玄碩圭)에게,
“실험 삼아 슬쩍슬쩍 휘피(諱避)하는 글자를 끼워 넣어서 보내는 게 어떨까?"
신하들..."(잘못되어도 님은 구속 안되니까 저런 말하는 거지...)"
(성종 임금도 아마 이런 마인드였을듯... 사진출처 오늘의유머)
좀 다른 이야기인데 중종 임금 때 중국의 종묘에 불이 났나 봄.
중국 갔다 온 사신에게 임금이 다급하게 물어봄.
"거 쌍둥이 빌딩 무너졌다며? 몇 명 죽었대?. 알카에다가 그런 거라며?. 다우존스 떨어지겠네? 나스닥은?"
뭐 이런 게 당시에 중국을 섬기던 우리나라에서는 긴급 외신으로 타전되던 기사였음.
◆ 숙종
숙종 임금 시절은 이제 명나라가 아닌 청나라 시절임.
이제 명나라 때 보다 더 압박이 가해짐.
왜냐면 청나라도 명나라가 잘 나갈 때 오랑캐 시절을 보냈으니 이제 오랑캐들이 주인 행세를 하니 어떻게 하면 더 잘 괴롭히는지 잘 알고 있지 않겠음?
조선의 주문(奏文) 가운데에 임금의 휘(諱)를 쓰지 않고 국왕(國王)이라고만 일컬은 것을 트집 잡아서 벌금으로 벌은(罰銀) 1만 냥을 물게 하기도 함.
당시 보다 약 30년 전인 인조(仁祖) 임금 시절 나라에 상비하던 은(銀) 보유고가 1년 평균 10만 냥 정도라는데 글자 몇 개 틀린 걸로 1만 냥이면 강도 수준임.
그런데 조선이 중국을 섬기고 일본이 조선을 섬기던 좋은 시절은 끝나고 이제 임진왜란 후 일본 놈들도 조선을 아주 가볍게 보기 시작함.
숙종 37년(1711 신묘 / 청 강희(康熙) 50년) 통신사(通信使) 조태억(趙泰億) 등이 일본 가서 일본 놈들이랑 말다툼함,
일본 국왕의 국서를 조선 통신사가 받아서 읽어 보니,
『"제6항(行)의 ‘감(感)’자 아래에 우리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어휘(御諱)를 범하였고, 또 서면(書面)에 현심(弦心)을 하지 않았으며, 봉(封)에도 역시 쓴 글을 싼 종이가 없이 위는 봉하지 않고 다만 두 줄로 ‘봉복 조선 국왕 전하서(奉復朝鮮國王殿下書)’라 썼을 뿐, 그들 국왕의 성명(姓名)을 쓰지 않았으며, 또 보(寶)를 찍지 않았고, 또 ‘근봉(謹封)’이라 쓰지 않았으니, 단지 우리나라의 서식(書式)과 서로 틀릴 뿐 아니라 또 임술년의 회답서(回答書) 봉식(封式)과도 같지 않았습니다."』고 함.
이런 쪽발이 개쉥키들을 봤나...
그래서 통신사가 이거 잘못이니 고쳐 달라고 요구함.
근데 쪽발이들이 이제 좀 컸다고 야안 행세하면서 이러저런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면서 안 고쳐 줌,
이 새퀴들도 많이 큰 건지 조선이 약해진 건지... 아무튼 그러고 좀 실랑이를 하다가 공문서를 고쳐 받지도 못하고 그냥 통신사는 조선으로 건너왔다고 함.
여기서 조선왕조실록의 그 유명한, 문성근 아저씨의 그것이 알고 싶다 보다 더 음성 지원 되는듯한
"사신(史臣)은 말한다."가 나옴.
『"신사(信使)가 이미 국경을 나가 전명(傳命)하다가 비록 불행하여 사변을 만나더라도 우리의 고집한 바가 이미 바르면 또한 마땅히 반복해 힘껏 쟁변하여 〈마음을〉 돌려 듣기를 기약해야 하는데 머뭇거리며 이미 전했던 국서를 도로 가지고 마침내 먼저 귀로(歸路)에 올라 치계(馳啓)하여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니, 나라를 욕되게 한 죄는 다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연석(筵席)에서는 오직 고쳐 보내는 것이 혹 지체될까 염려하여 감히 사신을 논척(論斥)하는 데 언급한 자가 없었으니 애석하다. 이이명이 이른바 ‘서식을 전에 비해 예(禮)를 더하라면 결코 따를 수 없지만 지금은 간이하게 하자는 것이니, 어렵게 여길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한 말은 더욱 알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더하게 하거나 간만(簡慢)하게 하거나를 논할 것 없이 먼저 의논을 통하지 않고 마음대로 구식을 고쳤으니, 이는 참으로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저들이 글에다 예를 더하는 것을 창시(創始)하여 우리로 하여금 따르도록 했다면 오히려 치경(致敬)이 저들에게서 먼저 나왔다고 핑계할 수 있겠으나 저들이 이에 간이한 규정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우리 국서가 겨우 참여해 서로 같게 되었으니, 이는 저들이 먼저 우리를 모욕한 것이고 우리가 그걸 본받은 것이다. 도리어 예(禮)를 더하도록 고쳐 따르게 하는 것만 못함이 심한 데도 이이명의 말이 이와 같으니, 하나같이 소견이 어찌 이렇게 잘못되었는가?"』
출저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