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왕의 난' 이라는 사건의 경과와 결과를 쭉 살펴보았는데, 이 글이 진(晉)이라는 제국을 다루는 글이니 만큼 전체적으로 서술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이번에는 초점을 다른 사건에 맞춰 써볼까 한다.
이 글에서는 팔왕의 난을 다루느라 황족간의 권력다툼 내란이 벌어지는 무대인 중앙을 제외한 제국의 각 지역은 마치 아무 일 없이 평안했던 것처럼 느껴지는 감이 없잖아 있다. 사실은 그게 아니다. 중앙에서의 내란에만 집중적으로 보아 그렇지, 다른 곳도 개판이었다.
당시 진(晉)에서는 비단 팔왕의 난 뿐만 아니라 갖가지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팔왕의 난은 황실의 내분과 중앙에서의 권력싸움에만 국한된 얘기다. 즉, 팔왕의 난은 당시 제국에서 일어난 사건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 내란으로 나라가 박살이나는 결과를 불러온 중대한 사건임은 틀림없지만, 제국 각지에서도 혼란이 일기 시작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앙에서의 내란을 틈타 제국 각지에서는 이민족들의 유입과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제국의 각 지방에서의 사건들을 짚어볼까 한다.
그러기 위해선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 이특의 반란 -
중앙에서는 가남풍과 외척세력이 한창 판을 치던 서기 298년.
옹주(擁州)와 관중(關中)지역에 심한 기근이 든다(내란에 자연재해까지 생겨난걸 보면 망조가 보이는 나라였던 것 같긴 하다).
천수(天水)군을 비롯한 6개의 군에서는 유랑민이 생겨났고 이중에는 이민족들도 제법 섞여있었다.
이 글에서는 따로 언급은 한했지만 당시 진(晉)은 팔왕의 난이라는 전란에다 관중지방에서의
자연재해까지 겹쳐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세상이었다. 각자 살길을 찾아
각지로 이주하게 되는데 위의 지도가 그 이주 노선도다. 이때 발생한 난민이 백만명 가량 된다하니
당시의 혼란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유랑민들을 이끄는 우두머리 중에 이특(李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특은 파저족(巴氐族 : 오늘날 티베트계)족이라 하는 이민족이었는데, 이특은 유랑민들을 데리고 기근을 피해 기근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익주(益州)란 지역으로 향한다. 익주는 오늘날 중국의 사천성 일대로, 과거 삼국시대에는 유비의 촉(蜀)이 세워진 땅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익주를 다스리는 지방 행정관인 익주자사(益州刺史) 조흠(趙廞)이 이특의 유랑민 무리가 익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선다.
자신이 다스리는 익주에 수십만의 유랑민들이 갑작스레 대거 유입 되어버리면 꽤나 귀찮아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특의 설득과 거기에 덧붙인 뇌물 덕택(?)에 조흠은 이특의 유랑민 무리가 익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
이특의 언변이 좋아 조흠을 설득시켰다라기 보단, 이 조흠이란 작자가 당시 어떠한 생각으로 유랑민의 유입을 승낙했는가가 중요하다.
무슨 말인가 하니, 이 조흠은 중앙조정에 반기를 들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앙은 이미 저들끼리의 싸움으로 혼란스러워 제국의 전 지역에 통치의 손길을 뻗칠 여유도 힘도 없었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왕초라고, 각지의 지방관들은 중앙으로부터의 통제와 간섭을 벗어나 독립할 마음을 품게 된 것이다.
이는 꼭 조흠 뿐만 아니라 제국 각지의 힘 좀 있다하는 세력들이 그러했다. 나중에 영가의 난을 다루면서도 나올 내용인지라.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꿔 이특 집단의 무리가 유입을 허락한 조흠의 계산은 간단했다. 수십만 명의 인구가 자신의 영지로 들어오면 그 무리를 흡수하여 자신의 세력 강화를 도모한다.
아무튼, 이특과 유랑민들은 익주에서 자리잡아 새로이 생활기반을 잡아나가기 시작한다. 조흠은 이특과 그 형제들인 이상(李庠), 이류(李流) 등을 잘 대접하며 자신의 세력으로 편입시켜 수하로 두려했다.
그러던 차에 서기 300년.
그 동안 독립할 기회만 노리던 조흠이 중앙조정에 반기를 든다. 적당한 때를 노려 드디어 일을 터뜨린 것이었으나 결정적인 계기는 조흠의 아들이 팔왕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일이 그것이었다. 지방직인 아버지와는 달리 조흠의 아들은 중앙조정에서 일하며 번왕들 중 어느 한명을 지지하다 죽은 것인데, 전 편에서도 말했듯이, 난에 휘말려 해를 입은 이들은 다양했다고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조흠은 분개하여 시나리오대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중앙에서 파견나와 있던 감찰관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익주를 온전히 자신의 땅으로 만드는데에는 이특과 그 형제들도 동참하여 조흠을 돕는다.
당연히 이를 용납할리 없는 조정에서는 나상(羅尚)이란 이를 평서장군(平西將軍)으로 임명하여 조흠을 토벌할 것을 명한다.
이 나상이란 인물은 삼국지연의에서도 나오는 촉(蜀)의 무장, 나헌의 조카다. 촉의 최후의 명장이라 불리던 삼촌 나헌과는 달리 훌륭한 성품과 장군으로서 갖추어야 될 군재는 찾아볼 수 없는 무능한 인물이었다.
"조흠에게는 영웅의 재간이 없으므로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날짜를 헤아리고 있으면 절로 패전소식이 들려올 것입니다." - 진서 나상전
익주로 떠나면서 나상이 던진 말이다. 무능한 주제에 큰소리친 것 같아 보이지만, 놀랍게도 머지않아 나상의 말이 적중하게 된다.
조흠이 제 스스로 자멸해 버린 것이다.
어찌된 일이냐면, 이특과 그 형제들을 기용하여 자신의 반란에도 동참시킨 조흠은 제 스스로 병크짓을 터뜨린게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특의 동생들 중에 이상(李庠)이란 동생이 있었는데, 병법에 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흠은 이 이상에게 나상의 토벌군을 막고자 한가지 임무를 준다. 이끌고 온 유랑민 부대를 이끌고 주요 길목을 막을 것을 지시했다.
병법에 통달한 이상은 그에 앞서 아무 전투경험없는 유랑민들을 훈련시키는데, 자신의 재주를 십분활용하니 일개 유랑민들을 정예부대로 만들어 버렸다. 조흠은 이걸 보고 슬몃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당최 이해가 안되지만 아무튼 조흠은 이상의 재주에 일종의 위협감과 두려움이 생긴 모양이다. 마치 그대로 두었다가는 나중에 저놈이 나를 어떻게 할 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랄까.. 그래서 제거하기로 마음 먹는다.
군법을 위반했다는 적당한 구실을 붙여 이상을 처형시켜버리고 그 아들들과 조카를 포함, 도합 30여명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이특과 남은 형제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자신의 동생을 되도 않은 이유로 죽여버린데다 기껏 도와주어 돌아온 대가가 겨우 이딴 것이었으니, 눈이 뒤집힐 수 밖에.
이특과 그 아우 이류는 그날로 유랑민 부대 7천여명을 이끌고 조흠이 위치한 성도(成都)를 쳐, 기습에 놀라 도망가는 조흠과 그 처자를 붙잡아 살해한다. 서기 301년의 일이다.
나상의 말대로 조흠은 과연 영웅의 재간이 없었는지, 반란을 일으킨지 1년 남짓만에 자멸해 버린다. 일이 이리되어 버리면 역적으로 낙인찍힌 조흠을 죽인 이특과 토벌오는 나상과의 관계가 미묘해진다. 이특도 나상의 원정군을 두려워하여 미리 사람을 보내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잘 보이고자 굽신거린다.
이특이 나상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동생 이양에게 영접하도록 시키면서 진기한 노리개를 바치자, 기뻐하면서 이양을 기독으로 삼았으며, 이특, 이류 등이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면죽에서 대접하자 왕돈, 신염 등이 그들은 도적질을 하는 사람이니 이 기회를 노려 그 목을 베어야 한다고 했지만 무시했다. - 진서 나상전
하지만 그런 노력도 헛되이, 나상은 익주에 도착하자마자 이특과 유랑민 집단에게 일주일 내로 익주를 떠날 것을 명령한다. 이특과 유랑민들에게는 실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을 터. 익주를 떠나란 말은 기근이 판치는 옹주, 관중지방으로 되돌아가란 소린데 곧 죽으란 말과 같았다.
그나마 이특은 먹을 식량을 구하기 위해 떠나는 절기를 늦추어 가을에 수확한 곡식만 가져가게 해달라고 사정하지만 나상은 겉으로는 이특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했지만 암암리에 유랑민들을 탄압하며 행패를 부린다.
이후, 나상은 전임 익주자사인 조흠의 후임으로 익주자사로 임명된다.
하지만 나상 치세 하의 익주는 무능한 나상의 폭정으로 인하여 반란이 일고 원망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3월에, 성도(成都)에 이르러 문산의 강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나상은 왕돈을 파견하지만 진압에 실패하고 왕돈은 살해당했다. - 진서 나상전
"나상은 욕심이 많고 간사하여 법을 잘 지키지 않는다. 부유함은 노(魯), 위(衛)에 버금가고 집과 저자를 거리에 함부로 지어대니 탐욕스럽기가 시랑(豺狼)과 같다. 우리는 아마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 진서 나상전
"촉(蜀)의 도적은 나상이다. 우리를 죽이는 것은 나상이니, 평서장군은 다신 없을 재앙이다." - 진서 나상전
반란이 일어나고 사치를 일삼는데다 토목공사에, 나상을 비유하기를 '시랑', 즉 이리와 승냥이로 비유한데다 재앙이란 표현까지 썼다.
극단적인 표현까지 쓴 것으로 보아 나상의 폭정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이라는 속담이 이걸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다시 이특에게로 돌아가보자면,
영녕(永寧 : 301년) 원년 겨울, 이특과 유랑민의 무리는 익주를 떠나는데, 나상의 명령을 받은 나상의 부장, 신염이란 장수가 면죽관 일대에서 이특과 그 무리를 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
나상이 본격적으로 군사행동에 나선 것이다. 면죽관이란 성에서 이특과 나상의 군대는 격돌하였고 이 전투에서 이특이 승리한다.
그리고 내친김에 유랑민들은 이특을 정식 지도자로 추대하면서 유랑민들의 정권을 수립하기까지 하는데, 이것이 진(晉)이 혼란할때 우후죽순 생겨난 이민족들의 정권 가운데 하나인 파저족의 나라 '성(成)' 의 시작이다.
기록은 이렇다.
이특은 스스로를 진북대장군이라 칭하고, 아우 이류를 진동장군으로, 이보를 표기장군으로, 이양을 효기장군으로, 자신의 맏아들인 이시를 무위장군으로, 둘째아들 이탕을 진군장군으로, 막내아들 이웅을, 전장군으로 임명했다. - 자치통감
결국에는 최초로 진 제국에 대항하는 정권하나가 수립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