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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글) - 박근혜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초스압)
게시물ID : sisa_8144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밥우유다
추천 : 1
조회수 : 361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6/12/10 17:55:18
 
내용이 너무 좋습니다
 
http://issuein.com/index.php?mid=index&page=10&document_srl=5332855
 
 
 
[◆ 박근혜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
장기 지속(longue durée), 권위와 복종 ... 그리고 도착(perversion)적 나르시시즘(Narcissism) ]


시민, 정치인, 정치평론가, 교수, 법조인, 학생, 종교인 등 ... 현 시국에 대한 각계각층의
법적, 정치적 해법들과 다양한 의견들이 매일같이 (저녁)뉴스를 통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더불어 각 정당들은 여론의 분위기를 살피면서도 각자 어떤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 당에 가장
유리한지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 법조계(특검, 검찰), 재계, 그리고 이번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된
수많은 개인들도 각자의 가늠자로 나름의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모습입니다. ... 여기에 언론은
자기역할(언론의 역할)에서 굉장히 잘하고 있거나, 일부에서 매우 수준 낮은 모습을 보여주는
중앙값이 없어진 두 개의 극단의 양상만이 보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 (이미)쏟아져 나오고 있는 수많은 팩트와 의견들 말고, 조금은 다른
인문학적 시선에서 이번 국정농단 사태를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많은 자료를 참고로 저만의 주관적 견해가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냥 편하게 보시면서 다른 생각하나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 도움 받은 자료들]
@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페르낭 브로델/ 갈라파고스 )
@ ( 서양 윤리학사/ 로버트 L. 애링턴/ 서광사 )
@ ( 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산책자 )
@ ( 권위에 대한 복종/ 스탠리 밀그램/ 에코리브르 )
@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한나 아렌트/ 한길사 )
@ ( 데미안/ 헤르만 헤세/ 민음사 )
@ ( 감각의 제국 - 라캉으로 영화읽기/ 권택영/ 민음사 )
@ ( 샤먼 THE SHAMAN. / 피어스 비텝스키 (Piers Vitebsky) / 창해 )
@ ( 잔혹, 피와 광기의 세계사 / 콜린 윌슨/ 하서 )
@ ( 영화 내부자들 )


대통령(President) 이라는 국가 최고 권력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권력(Power)이 아닌, “권위(Authority)”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도착(perversion)에 대한 이야기와 전복(顚覆)된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할 것입니다. ... 여기에
사람들에게 새로운 역사인식을 선사했던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의
장기지속의 관점도 얘기해 볼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지도자는 비난 받더라도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 는 말을 했습니다.
권력이 어떤 형태(왕정, 귀족정, 민주공화정 등)로 존재하든지간에 비난 대신 무시를 받는다는 것은
아마도 “권위”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권위” 뒤에는 복수적 형태로 항상
“복종(obedience)”이 수반되며, 이 둘은 “명령”에 의해 비로소 생명력을 얻습니다.

이야기는 장기지속의 관점을 소개하는 것부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 이어서
권위와 복종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쉴 틈 없이 도착(뒤바뀜)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질 텐데,
도착(perversion)의 관점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라는 일본감독이 1976년에 만든
“감각의 제국(In the Realm of the Senses)” 이라는 영화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고 와서
저의 멋대로의 생각을 풀어볼 예정입니다. 마무리는 딱히 정해진 계획은 없으나 ~ 아무튼
잘 마무리 될 거라 기대하고 지금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40년의 우정(?) 이라고 합니다.
언론에서는 그들의 관계가 자그마치 40년의 관계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국가 최고 권력의 한복판에서 샤먼(shaman)이 거론되고, 영혼의 지배가 영혼처럼 거리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혼란이 가중되던 상황에서 문뜩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부)언론이 말하는 것처럼 실세는 대통령의 영혼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만의 “시대(장기지속)”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를 말입니다. ...

‘시대’라니? ~ 그리고 ‘장기지속’은 도대체 또 무슨 소린가?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 보입니다.
대통령 스스로가 자리에서 물러나든, 의미 없는 꼬리를 자르든 ... 중요한건
‘박근혜’라는 한 개인의 내면에 각인된 ‘최순실-박근혜’ 라는 관계는 영혼의 연결 관계를 넘어선
하나의 “시대(장기지속)”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들의 세계는 계속해서 절대적으로 존속하게
될 것이라고 점입니다. 왜냐하면 시대는 변해도 “시대” 자체는 결코 사라지는 속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급된 “장기지속” 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인간의 삶의 방향은 보편적으로 낯설음에서 익숙함(친숙함)으로 진행됩니다.
낯선 음식도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하지만 이후에 접근 빈도에 따라 차차 익숙해지고, 또
선호(불호)하는 음식이 되며, 최종적으로는 안전하게 믿고 먹을 수 있는 편안함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의 흔한 일상이라 할 수 있는 주거와 환경, 직업, 오락, 사무 등
생활 전반의 모든 행위들이 낯설음에서 익숙함으로 진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타인과의 관계” 또한 우리는 낯선 관계에서 점차 익숙한 관계로 발전합니다.
물론 익숙하다고 해서 모든 관계가 긍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익숙함 속에는
좋아함과 싫어함이 극명하게 나뉠 것이며, 딱히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모호함 또한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낯설지 않다” 는 부분입니다. ... 다시 말해, 타인과의 관계가
모호함이나 분명한 호불호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관계는 “익숙함” 이라는 기본 틀 내에서
형성되면서 (타인과의)관계를 인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 저녁 식사 자리에 반찬으로
오이무침과, 파김치, 멸치볶음, 가지무침, 장조림 등이 차려졌다면, 이 반찬들은 제가 오래전부터
먹어왔던 익숙하고 친숙한 반찬들입니다. 다만 이러한 익숙한 반찬들 중에서 저에게 가지무침은
아직까지 잘 손이 가질 않는 반찬입니다. 그렇다고 가지무침이 처음 보는 낯설고 안전이 두려운
반찬은 아닌 것입니다. 호불호가 갈릴 뿐이지 이 반찬들은 오래전부터 접해왔던 “익숙한” 반찬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낯설음에서 익숙함으로의 이동은 인간에게는 매우 자연적이며 진화론적인 현상입니다.
어쩌면 일종의 견고한 제도적 속성을 내포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인간의 역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성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역사의 “시간흐름”을 ‘과거-현재-미래’처럼 너무 단선적인 선형관계로만 파악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프랑스의 대표적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역사를 바라볼 때 “장기지속” 이라는 견고한 구조위에서 좀 더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라고 얘기합니다.

한국이나 일본, 중국 등의 식(食)문화는 대부분 오래전부터 쌀(Rice)이 중심이 된 문화였습니다.
몇 해 전에 신문에서 중국이 본격적으로 소고기를 먹기 시작했다며, 향후 소고기 시장 변화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었지만, 여전히 한국, 일본, 중국에게 고기보다는 쌀이 중요한 식(食)의
한 부분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있어서 쌀(Rice)이 주는 의미는 더욱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쌀이 귀하던 시절에 국가 권력은 국민들에게 혼식(쌀에 보리 같은 잡곡을 섞어 먹음)을
장려했으며, 막걸리 또한 쌀로 만들지 못하게 하여 밀로 만든 막걸리를 마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산업 발전, 교역의 증가, 국민의 소득수준 향상 등으로 인하여 세계의 다양한 먹거리가 국내에
소개되었고, 해외여행의 경험을 통해서도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들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밥(쌀)이 중심이었던 우리의 식문화에도 상당한 변화의 바람이 불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는
쌀과 고기는 물론이고, 피자, 파스타, 햄버거, 커피, 양고기 같은 다양한 먹거리와 식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쌀은 여전히 민족 식문화의 내면에 아주 깊게 뿌리내려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피자나 파스타(Pasta)를 먹기 시작한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 또한
뷔페나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서구식 외식문화의 트렌드는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1970년대에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던 문화였습니다. 더불어 최근 유행인 캠핑이나 와인을 즐기는 문화도
마찬가지로 역사가 매우 짧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우유와 빵, 라면 같은 식문화는 밥에 비하면 덜 하지만, 그래도 한국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역사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아무리 다양한 식문화라도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밥(쌀) 만큼 오래된 식문화를 찾기는 힘들 겁니다.

결론적으로 누군가(외국인이) 만약 한국사회 식(食)문화의 진면목을 알고 싶다면, 우선적으로
쌀(Rice)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는 것부터 출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렇듯 한국 이라는 나라의 식문화는 먼저 가장 깊은 저변에 (너무나 당연해서)거의 인지하기 힘든
“밥(쌀)” 이라는 상당히 오래되고(장기적 시간대) 거대한 역사의 큰 흐름이 있으며, 그 위로
우유와 빵, 라면 같은 중기적 시간대의 식문화(역사)가 흐르며, 제일 상단부에는 피자와 파스타,
와인 같은 최신의 짧은 역사의(단기적 시간대) 흐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식문화는
앞서 언급했듯이 “과거-현재-미래”라는 단선적 선형 흐름이 아닌, 겹겹이 쌓인 다층적 구조로
식문화의 역사가 함께(동시에)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바로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이
주장했던 다층적 역사관인 것입니다. 그리고 저변에 자리한 “밥(쌀)”의 흐름을 페르낭 브로델은
“장기지속(longue durée)”의 흐름(역사) 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페르낭 브로델에 따르면, 장기지속의 흐름은(역사는) 그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해서
거의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구조화된, 혹은 단단한 뼈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삶이나 어느 한 사회의 문화 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과거로부터 거의 변화하지 않고 현재까지
매우 천천히 흘러온 단단한 뼈대 같은 구조(장기지속)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저녁에 밥이나 같이 할까?”
“동기들하고 밥 먹기로 했는데요? ~ ”

브로델의 장기 지속적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사회에서 “밥”이 주는 의미는
단순한 식물 알갱이인 “쌀(Rice)”을 넘어서 한 끼의 식사(아침.점심.저녁)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뿐만이 아니라 냉면, 불고기, 스테이크, 피자, 만둣국 등 저녁 메뉴가 무엇이
됐든지 간에 배를 든든히 채우는 일은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밥을 먹었다”는 표현 하나면 충분합니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밥(쌀)”은 그 대표성이나 범주성에 있어서 거의 모든 식(食)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유서 깊은 식문화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페르낭 브로델식으로 표현 한다면 한국사회에서 “밥”은 바로 “식문화의 장기지속(longue durée)”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쌀의 “귀함”은 단순히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식(食)”의 의미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쌀이 화폐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으며, 조공 품목으로서 중요한 외교적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었습니다. 이렇게 쌀의 식(食)을 넘어서는 “귀함”은 벼를 재배할 수 있는
토지의 귀함으로 이어졌으며,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은 이제 더 이상 노동(농사)을 하지 않고
땅을 빌려주기만 하여도 쌀을 수확할 수 있게 됩니다. ...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은 한국사회에서
일종의 토지 신화를 만들어냈고,(@ 쌀이 귀했던 일본도 마찬가지 였음), 이것이 현대에 와서는
부동산 집착으로 이어지며 조물주보다 위대하다는 “건물주”라는 현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여기에 심지어 가족을 얘기할 때도 우리는 “식구(食口)” 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직역하면 그냥 “먹는 입” 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너희 식구는 몇 명이냐?” 같은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또한 기름밥(자동차 정비), 은행밥,증권밥.보험밥(금융업), 대패밥(목수),
운전밥 등 ... 특정 직업을 얘기할 때도 “밥”이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쓰입니다.

언뜻 보기에 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쌀”과 “건물주” 그리고 식구(食口)와 “@@밥” 같은 다양한
표현들은 이렇게 우리의 “밥”이라는 장기 지속적 틀의 구조위에서 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한국사회는 밥(쌀)에서 파생된 식(食) 문화의 스펙트럼(Spectrum)이 이처럼 대단히 넓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한 사회에서 오랜 시간동안 세대를 뛰어넘어 장기 지속되는 것들을 살펴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지금까지 어떠한 변화들(생성,소멸)이 있어왔는지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국의 주거 문화에서도 우리는 또 하나의 장기 지속적 관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온돌 같은 바닥 난방 문화입니다. ... 일부 지역에서 한옥을 관광 상품화 한 것을 제외하면
현재 우리 주변에서 한옥을 보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바닥 난방시스템은 여전히
쌀 문화와 함께 수백 년의 시간대를 살아남은 한국만의 장기지속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기 지속적 바닥 난방 문화는 현대에 와서는 일반 단독주택은 물론이고, 서구 문화의 대표적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아파트에서도 우리는 대부분 바닥 난방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닥 난방 생활은 실내에서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바닥 청소가 중요해 졌는데,
이 결과 물걸레 청소기, 신발장 살균제품, 전기(온돌)장판 등 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다양한 상품들이 개발되는데 바닥 난방 문화가 저변에서 보이지 않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기숙사, 어린이집, 펜션, 찜질방 등 ~ 바닥 난방 문화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다양한 갈래로
한국 국민들 삶 전반으로 깊숙이 뻗어나가 밥(쌀)과 함께 (한국)경제의 한 축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게(저변에서 단단하게) 견고하게 흐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페르낭 브로델의 말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 구조라고 하면, 사회 현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실재와 여러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무언가의
조직이나 체계 혹은 상당히 견고하게 굳어진 일련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가들이 보기에도 구조란 무언가의 결합이고
건축물과 같은 모습이겠지만, 그보다는 시간이 흘러도 쉽게
마모되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는 무언가의 실재를 뜻합니다.
그와 같은 구조들 중에는 오랜 시간 존속해서 세대가 수도 없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유지되는 구조가 있습니다. 그러한 구조들은
역사에 멍에를 씌웁니다. 역사의 흐름을 옥죄고 흘러갈 방향을
결정하지요. 그러한 구조들보다 쉽게 사라지는 구조들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러한 구조는 모두가 디딤돌로 작용하기도 하고,
장애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장애물로 작용할 때는 인간으로써
애써 봐도 좀처럼 넘어설 수 없는 한계와도 같습니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일정한 조건의 무수한 선분들을 외곽에서 바싹 감싸는
포락선(envelope) 같은 것입니다. 지형적으로 결정된 틀이라든가
여러 가지 생물학적 조건, 혹은 생산성의 한계를 넘어서기가 얼마나
어려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런저런 정신적인 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심성의 틀 역시 장기 지속하는 감옥입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152페이지 / 페르낭 브로델/ 갈라파고스)]

페르낭 브로델의 얘기를 들어보면,
장기 지속의 흐름은 우리에게 디딤돌이나 장애물로도 작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앞서 밥(쌀)과 바닥 난방의 예를 들었지만, 우리에게 이러한 한국적 장기 지속의 흐름은
그 구조가 깨지기 전까지는 우리국민들은 “밥과 바닥 난방” 이라는 그 장기 지속의 힘에
어쩔 수 없이 구속(제약)되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 ... 다시 말해, 한국 국민들은 밥과 바닥 난방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국민들 이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만약 이러한 한국만의
장기 지속이 도전을 받는다면(구조가 깨진다면), 즉 ~ 식문화가 밥이 아닌 고기나 빵으로,
또 주거문화가 바닥 난방이 아닌 벽난로나 히터로 바뀌어 버린다면, 아마도 한국사회에 엄청난
변화가 불어 닥칠 것입니다. ~ 수백.수천년을 이어온 뼈대(구조)가 바뀌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브로델의 장기 지속적 관점을 빌려와 생각해 본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삶이 전적으로
각자의 개인의 자유의지대로 선택하고 살아온 삶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세대를 뛰어넘는
삶의 가장 깊숙한 저변의 구조화된(장기지속) 흐름 속에서 우리도 어쩌면 전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상당한 선택의 제약을 받고 살아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리해보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오랜 시간동안 단단한 뼈대처럼 구조화 되면서 흘러온 장기지속은
그 사회의 문화와 사상의 틀이 결정되어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며, 그 구조(장기지속) 위에서
크고 작은 많은 변화가 생성되고 또 소멸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장기지속(longue durée)” 이라는
장기적 시간대는 새롭게 생성되는 수많은 단기적 시간대의 도전을 받으면서, 또 버텨내고 더 견고하게
구조화 되었던 것입니다. ... 다만 장기적 시간대가 무조건적으로 승리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쉽게 말해, <단기적 시간대 Vs 장기적 시간대> 라는 대립구도에서 만약 단기적 시간대가
장기적 시간대를 누르고 승리하게 된다면, 그 지점에서 단기적 시간대는 새로운 장기지속을 위해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새로운 변곡점에서 우리는 급격한 변화를 목도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인류역사에서 나타났던 수많은 “혁명(Revolution)”인 것입니다.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는 대규모 민중시위가 일어났습니다.
튀니지 나라꽃 이름을 빗대어 흔히 재스민 혁명(Jasmine Revolution) 이라고 부르는 이 운동은
이후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예멘, 모로코 등으로 번지면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고
소위 “아랍의 봄” 이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당시에는 성공적 민주시민혁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었습니다. ... 장기 지속적 관점에서 보면 단기적 시간대가 장기적 시간대를 누르고 승리한 것입니다.
하지만 혁명이후 6년이 넘어가는 지금의 시점에서 아랍의 봄의 현실은 어둡기만 합니다. ...

당시 혁명을 이끌어냈던 상당수 국가들은 내전에 시달리며 또 다른 독재로 후퇴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단기적 시간대가 기존 아랍의 장기적 시간대에게 완벽하게
승리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이렇듯 어느 한 국가나 사회에서 오랜 시간을
흐르던 장기 지속의 힘은 그 깊이와 힘의 세기가 보통의 힘으로는 결코 (구조를)깨뜨릴 수 없는 절대적
무게감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나름의 성공적인 민주화를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우리나라도 어쩌면 깊은 저변에는 과거 조선시대(혹은 그 이전)때부터 이어져오던 양반,
상민, 천민 등의 계급적 관념이 지금까지 암묵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현상은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정신은 여전히 과거 신분제가 존재하던 계급적 관념의 장기지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 수백년을 흐르던 왕정과 신분제라는 장기적 시간대가 해방이후 그것도
군부독재 기간을 제외하면 고작 30년 남짓한 민주화라는 단기적 시간대에게 패배한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은 여전히 과거 신분제 시대의 장기 지속의 힘이 깊은 저변에서 (미소 지으며)조용히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는 뜻입니다. ~ [ @ 사회적 언어로 굳어지고 있는 금수저, 흙수저 및
개.돼지 라는 조어가 어느 날 불쑥하고 그냥 나온게 아니라는 뜻이죠 ... ]

@ 참고로 이렇게 단기 시간대와 장기 시간대의 역동적인 대립의 역사를 페르낭 브로델은
“시간 지속의 변증법” 이라는 그야말로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만드는 탁월한 표현으로 대신했습니다.

[◆ 농단(壟斷) - 이익이나 권리를 교묘한 수단으로 독점함]

국정(國政)은 말 그대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국민에게 위임받지 못한 권한 없는 어느 사인(私人)이 모든 이익과 권리를 교묘한
수단으로 독점을 했던 사태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어났습니다. 한마디로 국정을 농단한 것입니다.
분노한 국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정부를 비난하는 시위도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크고 작은 시위는 과거에도 늘 있어왔습니다.
노동자의 시위, 농민의 시위, 여성단체의 시위, 지역주민들의 정책 반대시위 등
크고 작은 많은 시위들은 각자의 요구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정부나 기업에 항의하기도 했고,
진실이 더 많이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언론과 정치인들을 향해 크게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 그러나
거리로 나온 시위의 주체가 본인이 속한 단체를 위한다거나 혹은 개인적인 이해관계와 얽혀있어
소리치는 조금은 협소한 행동이라면 그 시위는 단기적 시간대의 한계에 갇혀 자연히 소멸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공동체” 라는 좀 더 묵직한 거대 담론이 시위의 본질이 되었던 경우에는
역사적으로 보아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 다시 말해, (한국에서)공동체의 염려를 위한 시위는
우선적으로 단기 시간대를 넘어 장기 시간대(장기 지속)로의 진입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먼저 공통적으로 시위의 주체가 “학생과 시민”이 주축이 된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장기 지속적 관점에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본다면,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7년 6월 항쟁> ... 등은 대부분 학생과 시민이 주축이 되었던 운동입니다. 더 깊은 흐름으로
들어가보면 동학운동까지, 그리고 역사너머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수많은 시민들의 풀뿌리 저항은
우리의 장기지속적 운동의 아주 큰 줄기이자 동시에 뿌리였습니다. ... 결론적으로 “학생과 시민”은
한국의 장기 지속적 운동역사에서 절대적인 요소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이 전면에 나섰다는 것은
장기 지속적 관점에서 현재 우리사회가 상당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 학생과 시민이 참여한 운동은 한국의 정치 역사에서 하나의 큰 흐름(구조, 장기지속)을
형성했음.]

최근 뉴스를 보니, 이제 중.고등학생까지 시국선언에 나서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작금의 이 사태는 오랜 시간동안 한국 정치역사의 저변에서 아주 단단한 뼈대를 이루며 흐르고
있었던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권력부분에서의 장기지속의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인데,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지켜보았던 < 투표 – 권력위임 – 국민주권과 공동체의 안전 – 투표 – 권력위임 ... > 이라는
장기 지속적 공식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장기 지속적 권력의 작동방식이
한 순간에 모두다 허물어져버린 사건인 것입니다. 국민들이 그동안 익숙하게(장기적으로) 행사해왔던
권력의 위임구조가 모두 파괴되어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국민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낯설은 권력의 작동방식이 등장한 것이고 ... 그래서 지금 우리 모두는 당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박근혜에게 최순실(혹은 최태민 일가)은 장기지속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박근혜”라는 한 개인의 역사에서 최순실(최태민 일가)은 하나의 시대이자
구조(장기지속)였을 것이며, 이것은 결국 최순실(최태민 일가) 이라는 단기시간대가
박근혜 혈족(박정희, 박지만, 박근령 등)이라는 장기시간대를 누르고 승리한 박근혜 개인차원에서
바라본 “시간 지속 변증법”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제가 글 처음에서 얘기했던
최순실은 박근혜 에게 하나의 “시대(장기지속)” 라고 말했던 부분이 이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이해되실 거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브로델의 장기지속의 관점은 수백, 수천년처럼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박근혜의 나이(65세), 혹은 최순실과의 관계는 고작 40년입니다. 이정도 시간을 과연 우리가
브로델의 장기지속에 편입시켜 이해해도 괜찮은가? ~ 하는 점이 바로 염려되는 부분입니다.

물론 인간의 수명이 100년 남짓하기 때문에, 한 개인사에서 40여년의 시간은 충분히 장기지속의
관점이라 인정해도 되겠다 싶습니다. ... 그렇다 해도 무언가 부족함을 감출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염려를 영화적 기법을 이용해 해결해 볼까 합니다.

“쌍팔년도 채홍사도 아니고 ~ ~ ~ ”

(권력형)범죄 장르로서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그었다는 영화 “내부자들” 에서
정치깡패 안상구(이병헌)는 재벌회장과 정치인, 언론인 등의 섹.스파티 때마다 채홍사 노릇을 합니다.
그러다가 유력 대선후보 장필우의 비자금 관련 파일을 입수하게 되는데 ... 그러나 안상구는
그 일로 비 내리던 어느 날 고급 요정의 정원에서 재벌회장의 추악한 일들을 음지에서 수습하던
조상무(조우진)에게 벽돌로 뒤통수를 맞고 쓰러집니다.

이어서 화면이 바뀌고 ....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환하게 조명이 켜집니다.
하얀 내부가 매우 깔끔해서 마치 SF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거대 냉동컨테이너 같았던 창고 안
한 가운데, 홀로 의자에 묶여 있던 안상구는 갑자기 밝아진 조명에 눈이 부신 듯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크게 뜹니다. ... 그때 창고 입구에서 안상구 쪽으로 존재감 있게 걸어 들어오는 조상무!

"어이 ~ 안상구 사장! ~ 사장! 사장! 해주니께네 ~ 다 똑같은 사장으로 보이요?
사이즈가 다르잖아! ~ ~ ~ 우리 상구씨! 이자부터 바보로 삽시다 ~ 잉!"

그렇게 창고에서 정치깡패 안상구는 조상무에게 한쪽 팔목이 잘리는 끔찍한 폭행을 당합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워낙 강렬한 장면이라 다들 기억하실 거라 생각됩니다만 ... 그런데 만약
이것이 진짜 현실이었다면 어땠을까? ... 현실이었다면 이 장면에는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으며,
우리(관객) 모두는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생략(과정)”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다시 말해, 요정에서 안상구가 조상무에게 벽돌을 맞고 쓰러진 것이 진짜 현실이었다면 ... 이어질
다음 상황은 우선 안상구의 기절을 확인한 조상무가 부하들을 불러 안상구를 창고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할 겁니다. 그리고 부하들은 안상구를 차에 태워 이런 추악한 일들을 여러 차례 처리해온
익숙한(적당한) 장소로 이동하여 그 곳에 있는 (냉동컨테이너)창고 안으로 안상구를 끌고 들어가
의자에 앉힌 후, 줄로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결박합니다. ... 여기까지 일이 진행되면 부하들은
조상무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한 후, 한 두 명씩 조를 짜서 돌아가면서 화장실을 가거나 담배를
피면서 조상무가 올 때까지 창고 앞을 지킵니다. ... 이러는 동안 조상무는 요정 안에 마련된 룸으로
들어가 피 묻고 비에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를 합니다. 샤워가 끝나면 뜨거운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부하들에게 전화로 상황을 보고받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가 다른 새 옷으로 갈아입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다음, 재벌 회장이나 비서실장에게 상황을 직접 보고한 후, 천천히 안상구가
있는 장소로 이동하게 됩니다. 창고에 도착한 조상무는 부하들에게 현재 안상구 상태를 물어본 후,
다시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부하들과 함께 창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

극장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스크린을 통해 이 장면을 지켜본다면, 아마도 몇 분이 채 소요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이 상황이 진짜 현실이었다면 안상구를 컨테이너 창고까지 끌고가 의자에
결박하기까지, 그리고 조상무가 도착할 때까지는 최소한 4~5시간은 소요됐을 것입니다. ... 하지만
보시다시피 영화에서는 안상구가 기절하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창고안 의자에 묶여있는 안상구를
클로즈업 합니다. ... 즉 영화는 우리(관객)에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당연한(뻔한) 사실들을(과정)
모두 생략하고 중요 부분만을 편집해 보여줌으로써 시간을 아껴주고 몰입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안상구가 조상무에게 벽돌을 맞고 기절한 이후의 (제가 위에서 진술한)상황은 우리가
충분히 이러했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영화적 언어로 표현해 보면 이렇습니다.

“행위(과정)의 생략으로 시간의 압축을 획득한다!”

영화에서 “쇼트(Shot)의 배열”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 우리가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게 지루한 (중간)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획득한 시간을 쇼트(Shot)의 치밀한 배열에 양보함으로써
핵심적, 혹은 극적 요소만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 쇼트(Shot) - 영화촬영의 최소단위, 보통은
감독이 “액션!” 이라고 외친 후, 중간에 멈추지 않고 ”컷!“ 할 때까지의 (짧은)촬영분량을 말함]

스릴러 영화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Hitchcok, Sir Alfred)은
“인생에서 지루한 부분이 커트된 것이 바로 영화다!” 라고 말했습니다. ... 한마디로 우리 삶에서
지루한 부분이 모두 제거되고 가장 극적인 요소만이 남은 것이 바로 영화란 뜻입니다. ... 그래서
한 인간의 일생도 영화로 만들면 2시간 남짓한 아주 짧은 시간만으로도 가능한 것입니다.
시간의 압축을 얻는 것이죠 ! .... .... 혹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분이 상대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만남에서 극적 요소를 잘 활용해 보세요 ~ 어쩌면 10분의 극적요소가 상대에게 압축된 100시간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극적으로 연출된 10분이라는 시간이 상대에게는 마치 당신과
100시간동안 있었던 것처럼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을 선사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오래 사랑한 연인처럼 말이죠 (@ 그래서 다들 이벤트를 하나 봅니다. ~ ) ... 사귄지 열흘 된 연인과
1년 된 연인을 비교해 보면, 당연히 1년 된 연인에게 극적인 사건이 더 많았을 겁니다.

이러한 (영화적)시간압축 효과는 연인사이 뿐만 아니라 정치인에게서도 많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선거시즌이 다가오면 세련된 정치인들은 시간압축 효과를 잘 활용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다듬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워딩으로 한 순간에 뉴스의 초점이 되기도 하며,
동료의원과 사적으로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를 거의 공개적으로 보여주듯이 기자들 카메라에 찍히기도
합니다. 야외에 천막을 치고 단식 투쟁을 하기도 하며, 지역구 재래시장을 돌며 어묵을 (처)먹기도
합니다. 기자회견을 할 때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거리에서 삼보일배도 합니다. ...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시간 압축을 통한 극적 요소를 유권자들에게 각인 시키는 일종의 의원 자신의 존재감(인지도)
알리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이야기의 본류로 돌아와 보면 ....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대한구국선교단” 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수천명이 모인 자리에 박근혜를 함께 데리고 가서 기도회(구국기도회)를 열기도 했고,
각종 이권이 개입된 크고 작은 (기업 및 단체)행사에도 항상 박근혜를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당시로서는 “대통령 딸” 이라는, 막강 권력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수많은 부정부패를
저질렀는데, 이것은 박근혜 입장에서 보면 최태민과의 동행이 극적요소가 가미된 쇼트(Shot)의
배열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박근혜에게 최씨 일가와의 만남은 매 순간순간이 지루한 부분이
모두 커트되고 시간이 압축된 한편의 영화만들기 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박근혜와 최순실의 관계가
비록 40년뿐이라 하더라도, 그 40년 시간의 상당부분이 모두 극적요소로만 채워졌다면 ... 아마도
그 40년이라는 시간은 40년이 아닌, 400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적 언로로 해석해
보면 박근혜와 최순실의 40년의 우정(?)은 충분히 장기지속이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극적 요소의 가미는 꽤 많은 시간을 압축시켜 익숙한 관계로의 발전을
가속화 시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여행이나, 재난현장에서의 자원봉사, 사고를 당해 병원에
함께 입원한 경험에서 그 순간을 함께했던 동료나 이성친구가 유독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가 시간
압축을 통한 극적인 순간을 함께 하면서 지루한 부분(시간)이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 더불어
유명 배우나 인기 스포츠 선수에게서 가족 같은 친근함이 느껴진다면 아마도 본인이 그들이 출연한
영화나 경기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극적인 감정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극적요소가 가장 극대화되는 경우는 바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가족,
특히 부모님의 죽음과 자녀의 죽음(탄생)은 각자의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극적인 순간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를 신격화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들에게는 박정희와 육영수의 죽음이 모두
엄청난 시간압축 효과를 제공했을 것이며, 추종자들에게는 이러한 시간압축은 박정희와 그의 딸
박근혜가 본인들 인생 전반을 함께한 상당한 장기지속의 속성을 제공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

낯설음을 경계하고 익숙함에 의지하는 것은 인간의 DNA 속에 들어있는 기본적인 방어기제입니다.
그런데 만약 낯설음에서 익숙함으로 달려가려는 자연스런 관계에 전복적 상황이 벌어진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먼저 “혼란”이라는 진부한 표현은 제쳐두고, DNA 속성이 바뀌어버려 생물학적으로는
종의 변이가 일어날 정도의 엄청난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인간 삶의 모든 진행 방향이
역전되어 익숙함에서 낯설음으로 달려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은 어제와 다른(낯선) 지금까지 먹어보지 않았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음식을 먹어야 하며,
다음날 역시 마찬가지 상황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은 매일 바뀌게 되고, 단 하루라도
같은 옷을 입을 수가 없으며, 직장에서는 매일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람들과 업무를 진행해야 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타인들이 자기 주변을 에워싸고, 법원과 구청에서는 매일 새로운(낯선) 법과
새로운 세금고지서 양식을 발부합니다.

생각만 해도 혼란을 넘어 끔찍합니다. ... 이러한 관계의 전복은 삶은 물론이며, 내가 몸담고 있는
제도에 대한 전복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 쉽게 표현하면 어제까지 알고 있었던 세상이 한꺼번에
뒤집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유권자의 권리로 투표권을 행사했고, 그렇게 국민들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권력은 인사권과 각종 행정권한으로 제도의 안전을 책임지며, 혹시 모를 제도(체제)의 균열과 상처를
보수하고 치료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관계가
모두 전복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국민들이 위임하지도 않은 이름 모를 낯설음이 등장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한 권력자와 그의 지인이 벌인 단순한 치부가 아니라 공동체 DNA 속성이 바뀔지도
모르는 매우 위험천만한 일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는 전쟁을 통해 제국을 형성하기도 했으며, ... 억압당한 자유와 불평등, 그리고
분배의 불균형에 분노한 수많은 민중들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공화정을 이루어내기도 하였습니다.
시민혁명을 통해 자유를 획득했고, 그렇게 찾은 자유는 투표권을 통해 권력의 독점이나 과점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류는 낯설음에서 익숙함으로의 달려가는 과정 속에서
민주화라는 (아직까지는)가장 이상적인 체제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민주화라는
아주 친근하고 익숙한 기반위에서 (안정된)권력을 창조하는 환경을 만듦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그런데 우리가 이토록 힘겨운 과정을 통해 만들어놓은 장기 지속의
익숙함을 최순실 이라는 어느 사인(私人)이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하지만 박근혜에게는 최순실은 최태민의 연장선에 있는 그 자체로서 장기지속이자 익숙함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최순실을 부정하는 것은 박근혜 자신에게는 낯설음으로 향하는
전복적 상황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글 처음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나는 것과는
상관없이 절대로 최순실과의 관계를 끊어놓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또한 박근혜 지지자들에게는 박근혜를 부정하는 것이 낯설음이며, 이러한 모든 낯설음은
결국 본인들이 살아온 시대가 부정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박근혜가 박정희의 연장선에
서있는 일종의 장기 지속이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부정된다는 얘기는 그동안 쌓아온 모든 익숙함이 송두리째 허공으로 사라지며
한순간에 낯설음으로의 전복적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뜻입니다. ... 아니, 어쩌면 종의 변이가
일어나 삶의 속성이 바뀌게 될지도 모르는 매우 위험한 상황인 것입니다.

페르낭 브로델은 우리에게 역사를 사유하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장기지속의 관점은
역사뿐만이 아닌, 인간 삶의 다양한 분야로 그 의미를 확장해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저는
장기지속 이라는 구조위에서 “권위와 복종”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해볼까 합니다.

더 이상 오를 곳 없었던 한 공동체의 최고 권력자가 공동체의 합의(법)를 넘어서면서까지
본인의 권력(권한) 상당부분을 다른 이에게 이전했다는 점은, 그 다른 이가 최고 권력자 보다
위계구조에서 더 높은 지위를 점령하고 있다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 그렇다면 이 상황의
본질은 권력의 범주가 아닌, 권위의 범주 안에서 해법을 찾아야 할 텐데, 결론적으로
(명목상의)최고 권력자는 본인보다 더 높은 (관념적)권위에 복종을 했을 거라는 추론이 가능 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인 것입니다.

처음 이야기 시작부분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보편적으로 권위는 복수적 형태로 복종을 수반하며,
이 둘의 관계는 다시 “명령”에 의해 생명력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 그런데 저는 이야기의 전개를
“권위와 복종은 이성적인가?”, “복종은 도덕적인 행동인가?” 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질문의 핵심인 “이성과 도덕적 행동”에 대해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그 부분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모두가 그 어떤 배려나 양보 없이 오로지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세계는 그야말로 하루가 멀다고 온통 대립과 분쟁에 휩싸여 혼란스런 세상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흔히 “이성적으로 판단하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감정에 휘둘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해 편향된 사고나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들의 이기적이고 비양심적인 본성이 수시로 나타난다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혼란을
막을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공동체의 이성으로 만든 법과 제도라는 합의된
강제성을 활용한다면 문제가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성적인 결과인 거죠.
하지만 인간 사회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는 걸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너무나 많이 배워
왔고, 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혼란스러운 사회 상태에 대해서 법과 제도로도
어찌해볼 수 없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며 도로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거나,
종일 굶었다며 거리에서 배고픔을 호소하며 돈을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도 그냥 모른 채 하며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은 법과 제도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기심과 무관심이 공동체 내에 만연하게 된다면 이성으로 만든 아무리 훌륭한
법이 존재한다고 해도 사회는 그야말로 극단적인 삭막함 속에 놓이게 되어 공동체라는 말이
무색해 질 정도의 ~ 그야말로 껍데기만 공동체인 사회가 될 가능성이 매우 커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무리 공동체의 선과 평화를 위한다 해도 인간의 “도덕적 양심”까지
우리 공동체가 강제할 수단은 없다는 것입니다. ... 한마디로 인간의 “도덕”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이성적 사고만으로는 어찌해볼 방법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근원적인 해결 방법은 없는 것인가? ~ 하는 물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이쯤에서 약 300년 전에 태어난 독일의 대철학자 칸트(Immanuel Kant)의 견해를 들어볼까 합니다.

등산객이 비탈진 등산로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져서 다쳤다 해도 우리는 산(山) 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 단지 중력이라는 과학적 “인과법칙”에 따라 그러한 사고가 발생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양심은 어떨까?

과학(법칙)같은 지식적 측면의 이성은 우리 인간이 얼마든지 사유가 가능한 영역입니다.(이론적 접근
가능) 한마디로 과학은 충분히 이성으로 사유가 가능한 대상인 것입니다. ... 하지만 신, 영혼, 자유,
도덕 같은 영역은 유의미 하지만(무의미 하지 않다!), 이성으로 사유(검증)하기에는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양심에 따른 도덕적 행동을 왜 해야만 하는지는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며,
신과 종교가 과학적 질문을 허용하지 않듯이,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도 질문이나 이유를 묻지 않아야
한다고 칸트는 주장했습니다. ... 한마디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그 어떤 이유나 이해 없이
무조건 양심이 시키는 명령에 따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칸트는,
과학은 이론적인 이성으로는 접근이 가능했지만, 신과 영혼, 도덕 등은 이론적으로는 접근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지식적 측면이 아닌,
다른 측면의 이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직접적인 “실천(행동)”으로,
아무 조건을 달지 말고 그냥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우리 내면에 우리를 도덕적으로 행동(실천)하게 만드는 의무적인 의식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실천이성” 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살펴보면, 칸트가 규정한 “도덕”은 너무나 막연한 것 같습니다. ... 또한
“의무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부분도 조금은 억지스럽고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좀 더 확실히 이해하려면 너무나 유명한 칸트의 발언을 살펴봐야 합니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칸트(Immanuel Kant)

인간의 도덕은 지식적인(이론적인) 이성으로는 사유가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신, 영혼, 도덕 등) 영역을 과감히 이성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 그리고
인간의 도덕(도덕적 행동)에도 과연 과학(중력)법칙 같은 “보편적인 원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를
끊임없이 사유하며 고뇌한 끝에 내 놓은 결론이 바로 위의 원칙입니다.

등산객이 아래를 향해 굴러 떨어지든, 밤나무에서 밤송이가 떨어지든, 그리고 타자가 친 홈런 볼이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다가 결국은 외야 관중석으로 떨어지는 것은 모두가 중력법칙 이라는
보편적인 과학 원리에 따른 결과인 것입니다. ... 그렇다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도덕의 원리가 있을 수 있을까? ... 여기에 칸트는 “보편적 도덕법칙(원리)”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칸트의 주장처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도덕법칙(원리)을
찾아보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넨
행위를 어떤 이는 매우 도덕적인 행동이라 생각하고 있는 반면, 이와는 반대로 그러한 행위(적선)는
오히려 걸인의 자활의지를 꺾게 만드는 별로 좋은 행동이 아니라는 의견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실제 인간사회의 현실에서는 “도덕적 행동”에 대한 기준이 개개인 마다 편차가
있기 때문에 칸트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칸트가 주장한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 그래서 칸트를(칸트의 발언)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 먼저 법(法)과 선(善)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을 전환시켜야 합니다.

최근 사회적 이슈로 많이 거론되고 있는 보복운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구성원(국민)들이 보기에는 보복운전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보복운전은 “선(善)한 행동”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동체는 보복운전을 하게 될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공동체의 보편성이 담긴 법(法)을
만들어 적용하게 됩니다. ... 한마디로 우리는 보복운전을 하지 않는 것이 선(善) 이라는 보편적 시선을
갖기 때문에 법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판단이 먼저 존재한 후에
그 뒤를 법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입법원리(법이 만들어지는 과정)는 선한 판단 뒤에
법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칸트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러한 입법의 원리를 뒤집게 됩니다.
근대철학 이전까지만 해도 신(God)은 그 자체로서 진리였습니다. 때문에 신의 계율(말씀, 명령) 또한
묻고 따지지 말아야 할 엄격한 법(法) 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신의 말씀(명령)을 따르는 것이
바로 선이라 생각했습니다. ... 한마디로 법(신의 계율)이 먼저 존재한 후에 그것을 따르는 것이
(신의 말씀을 따르는 삶) 바로 선(善) 이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칸트는 여기서 힌트를 얻어,
인간의 “보편적 도덕법칙” 또한 신의 계율처럼 그 자체로서 하나의 법(法)이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선(善)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한 판단 같은 건 따지지 말자는 거죠. 그냥 (보편적)도덕
법칙대로 행동하는 것 자체가 선한 행동(도덕적 행동) 이라는 뜻입니다. ... 결론적으로 칸트가 주장한
“보편적 도덕법칙” 이란 아무 조건도 따지지 말고 “의무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 해야만 한다!)
규칙(원칙)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규칙)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선이며,
도덕적 행동 이라고 했습니다.[◆ 의무에 따르는 삶!]

결국 앞의 사례에서 걸인에게 천원을 건넨 행위는 잘했다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칸트의 도덕법칙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은 아닌 것입니다. ...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도덕적 행동과 칸트가 생각하는 도덕적 행동과는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아무튼
마음속 깊은 곳에서 타인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동정심이 마구마구 샘솟아 자선을 베풀었다고 해도
칸트는 그것이 아무조건 없이 “의무적(해야만 한다)”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도덕적
행동이 아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칸트의 도덕적 행동은 “천원을 주고 싶다!”가 아니라
“천원을 줘야 한다!”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 ... ... 그래서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라는 칸트(Kant)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 ◆ 당신이 하려는 어떤 도덕적인 행동이(의지가)
모든 사람이 보기에 법으로 만들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보편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그렇게 행동하라!> ~ 라는 뜻입니다. ... 좀 더 쉽게 풀어보면, 당신이 지금 하는 행동에 대해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본인을 따라 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행동은
보편성(일반원칙)을 가진 도덕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볼 때 마다 나는 그에게 의지박약한 놈이라며 주먹질을 할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과연 다른 모든 사람에게 따라하도록 얘기할 수 있을까? ~ 당연히 이것은 칸트가
얘기한 도덕적 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칸트에게 도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습니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모든 인간이 개인의 이기심과 비양심적인 행동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종국에는 모두의 자유가 박탈당하게 되는 상황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참된 도덕은 이성에서
나오며, 도덕은 의무적인 법칙으로 규정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정리하는 의미에서
윤리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조지아 주립대학 로버트 L. 애링턴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 동정심이라는 동기는 “도덕적 내용이 부족하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동정심이라는
동기로부터 행위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옳은 것을 행하는데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동정심이라는 경향성을 만족시키는데 관심을 쏟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행하는 바의
도덕성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사람은 분명히 “도덕적 가치”를 갖는 방식으로 행위 하는데
실패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칸트는 오직 의무라는 동기만이 행위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 (중략) ~ 칸트는 도덕적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행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무에 따라
행위하는 경우라고(@ 이러한 경우에는 행위의 동기가 오직 의무감뿐이기 때문에) 주장한다.
- 서양 윤리학사. (414~415 페이지)/ 로버트 L. 애링턴/ 서광사 ]

칸트는 개인의 동정심의 성취욕구나 타인을 도와줌으로써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을
“경향성”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이러한 경향성이 도덕적 행동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며, 인간에게 의무적으로 도덕적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하는 능력” 밖에는 없으며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실천 능력에 쉬지 말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러한 이성을 바로
칸트의 “실천 이성” 이라고 부릅니다.

더불어 도덕(도덕적 행동)이 “의무”라면 그것은 곳 명령이 됩니다. (@ 신의 말씀이 곧 명령인 것처럼)
그래서 칸트의 보편적 도덕원리(법칙)를 “정언명령(定言命令)” 이라고 부르며, 정언 명령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상관하지 말고 행위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따라야할 도덕적 명령을 말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조건을 달고 행동하는 것을 “가언명령(假言命令)”
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칭찬받고 싶다면 거지에게 천원을 주어라!” ... 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결국 목적이 칭찬받는 것이기 때문에 가짜 도덕인 것입니다. 따라서 가언명령이 됩니다.

그래서 ...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라는 명령은
칸트의 대표적인 정언 명령이 되는 것이며, 인간(타인)을 위해 행하는 도덕에는 그 어떤 조건도 달지
말고, 그냥 의무감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하라
뜻입니다. ... [@ 의무감에서 남을 돕는 행위가 동정심보다는 더 도덕적인 것입니다!]

권위와 복종에 대한 이야기를 위해서 제가 이렇게 300년 전에 태어난 칸트까지 소환한 이유는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권위와 복종의 메커니즘이 마치 칸트의 실천이성, 그리고 정언명령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권위와 복종의 문제는 인과성이 배제된 조건 없는 하나의 “보편 원리”와 같다는 뜻입니다.
“~ 해야만 하는” 것이죠! ... 권위가 명령하면 그냥 “복종(행동)하는 것” 뿐입니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칸트(Immanuel Kant)

반복하자면, 칸트의 가장 유명한 이 정언명령은 인간에게 이성(실천)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칸트는)말합니다. 또한 도덕법칙(정언명령)은 오직 행위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결과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칸트의 이러한 표현 이후에 세계가 걸어온 길은 “보편적 입법(도덕)원리” 와는
(상당한)거리가 있었음을 이제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이성이, ~ 그렇다면 오류가 없는
이성에 의한 행위 혹은 행동은 언제나 좋은 결과만은 생산해야 정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는
그러한 이성에 의해 전쟁과 학살과 불균형과 배제를 빈번하게 생산했습니다. ... 그래서 이에 대해
세계적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igmunt Bauman)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르는 전략을 정면으로 반대하며, 근대적 이성은
걱정근심에서 해방된 자유, 안전, 행복을 추구한다. 무엇보다도 행복을 추구하며,
안전 또는 행복의 경우 이성은 그것을 인류의 보편적인 소유물로 규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지금껏 근대적 이성은 보편성 보다는 “특권”을 위해 봉사해왔다.
어떤 보편성에 대한 꿈이 아니라, “우위”를 차지하려는 욕망 그리고 차지한 우위를
지키려는 목표가 근대적 이성을 발휘케 하는 주된 동기였으며 그것이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욕망과 목표에 이끌린 것이었다.
- 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112~113 페이지/ 산책자]

칸트가 주장했듯이 인간 이성에 따른 도덕적 행동은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자체로서
또 의무감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타인)을 향한 도덕적 행동은 그냥 의무적으로
“~ 해야만 하는” 것이죠. ... 그런데 완벽할 것만 같았던 칸트의 도덕원리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그동안 수많은 전쟁과 학살과 배제를 양산하면서 칸트가 자신의 심연속 깊은 곳에서 어렵게 꺼내온
보석 같은 정언명령(“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유가 무얼까? ~ ~ 칸트를 무색하게 만드는, 우리가 아직 눈치 채지 못한 혹시 모를
숨은 원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까? ... 그래서 칸트만큼은 아니지만, 나름의 깊은(?) 생각 끝에
제가 내린 결론이 바로 “권위(Authority)와 복종(obedience)”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도덕에 권위가 개입하게 되면 이성의 의한 정언적 명령에도 심각한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는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려 합니다.

[◆ 지역신문에 공고를 냈다. 기억과 학습에 관한 연구의 참가자로
모든 직업군을 대상으로 하며, 시간당 4달러와 주차료 50센트를 지불한다는
공고였다. 그 결과 전체 296명이 지원했다. 실험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인원이어서, 여기에 덧붙여 보조적으로 직접 편지를 보내 모집했다. ~ (중략)
전형적인 피험자는 우체국 직원, 고등학교 교사, 회사원, 기술자, 노동자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피험자들은 고등학교를 마치지 않은 사람들에서부터 박사나 다른
전문 학위를 받은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 (중략) ~ 진짜 피험자 한 명과
희생자 한 명이 한 조가 되어 각 실험을 수행했다. 진짜 피험자는 왜 전기충격을
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한 구실을 찾아야만 했다.(합법적 권위에 관한 모든
사례에서, 명령을 수행하는 자는 자신이 받는 명령과 특정 형태의 권위 사이에
아무리 희미하더라도 어떤 연관성을 지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 권위에 대한 복종. 41~43페이지/ 스탠리 밀그램/ 에코리브르 ]

50여 년 전, 미국의 예일 대학교에서 사회심리학을 가르치던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세계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유명했던 소위 “복종 실험”을 진행하게 됩니다. 실험에는 고루 분포된
나이(20~50대)와 성별, 그리고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럼 먼저 실험의 주요 내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기억과 학습> 이라는 주제로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실험에 참여하게 됩니다.
[2] 한 사람은 선생(전기충격 가해자), 나머지 한 사람은 학습자(전기충격 희생자) 역할을 맡게 됩니다.
[3] 실험자는 이들에게 처벌이 학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라고 설명합니다.
[4] 학습자(전기충격 희생자)를 실험실 방 의자에 앉히고, 양팔을 묶고, 전극봉을 손목에 부착합니다.
[5] 학습자는 단어 쌍 목록을 공부하게 될 것이며, 틀릴 때마다 전기충격의 강도가 높아질 것입니다.

이 실험의 핵심은 전기 충격을 가하게 될 선생 역할을(이후 “선생”) 맡은 참가자입니다.
선생은 학습자(전기충격 희생자)가 묶여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 실험실로 들어가서 전기충격기계
앞에 앉습니다. 전기충격기계에는 15볼트에서 450볼트 까지, 15볼트씩 증가하는 총 30개의 스위치가
가로로 늘어서 있습니다. 더불어 각 스위치에는 “약한 충격”, “강한 충격”, “위험(매우 심각한 충격)”
이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있습니다. ... 실험을 총괄하는 실험자는 선생에게 학습자가
올바른 답을 하면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고, 틀렸을 경우 학습자에게 전기충격을 가해야 한다는 얘기를
전합니다. 그리고 선생은 가장 낮은 단계의(15볼트) 전기충격부터 시작해서 학습자가 틀릴 때마다
30볼트, 45볼트, 60볼트 ..... ..... 순으로 충격의 강도를 높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실험에서 진짜 실험 대상은 바로 “선생”입니다.
희생자 역할을 맡은 학습자는 실제로는 그 어떤 전기충격도 받지 않습니다. 그냥 전기충격을 받은
것처럼 연기를 하는 것뿐입니다. 더불어 선생이 충격의 강도를 높여갈 때마다 학습자는 강력히
항의하는 연기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선생은 계속해서 충격의 강도를 높여가며 실험 총괄자의
명령(지시)을 따를 것인가, 만약 명령을 계속 수행한다면 스위치를 과연 어느 단계까지 누를 것인가,
아니면 명령을 거부(불복종) 하게 된다면 그 지점은 어디인가 ... 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 실험자(실험 총괄자)는 선생 역할을 맡은 참가자에게 우선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시험적으로
45볼트의 전기 충격을 진짜로 경험하게 합니다. 이로써 선생에게는 이 실험과 전기충격기가 진짜라는
믿음이 강화됩니다. - @ 샘플 전기충격 ]

본격적인 실험이 시작되면, 학습자(희생자)는 전기 충격의 강도가 높아질 때마다 불편과 불만을
표현하게 됩니다. ... 예를 들면, 75볼트 수준에서는 짜증나는 표정을 지으며 약한 불만을 드러냈고,
100볼트가 넘어가면 “고통스럽다!” 라며 말로써 좀 더 직접적인 불만을 표현합니다. ... 150볼트가
넘어가면 “실험을 그만하고 싶다!” 같은 항의성 발언을 큰소리로 선생을 향해 외칩니다. 한마디로
충격 강도가 높아질 때마다 학습자(희생자)는 좀 더 격렬하게 감정적인 발언과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격의 강도가 250볼트가 넘어가게 되면, 이때부터는 단순한 항의성 발언이 아닌,
고문을 당하는 사람처럼 심한 “괴성과 비명”을 지릅니다. 이러한 학습자(희생자)의 고통스런 반응은
선생의 내면에 “실험을 중단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심리적 압박을 가합니다. 이와 동시에 합법적인
권위자인 실험자(실험 총괄자)는 선생에게 개의치 말고 계속 스위치를 누르라며 압박을 가합니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실험”의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 그런데 밀그램의 복종실험은 전시(戰時)에
군 지휘관이 내리는 명령과는 차이가 많습니다. 우선 대학 실험실에서의 실험자(실험 총괄자)가 내리는
명령은 전시의 지휘관처럼 (실험참가자에게)명령을 강요할 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실험참가자 또한
전쟁에서 느끼는 어떤 위기감이나 국가를 위한 헌신의 필요성도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때문에 사실상
밀그램의 복종실험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복종을 위한 여러 상황적인 조건 또한 상당히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험의 결과는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실험이 시작되고 전기충격의 단계가 조금씩 높아지자, 선생 역할자는 스트레스를 느끼며
실험자(실험 총괄자)에게 우려를 표하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실험참가자(선생 역할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협조적 이었으며, 예상을 훨씬 웃도는 상당수의 선생들이 전기충격의 마지막 단계(450볼트)까지
명령을 따랐습니다. ... 특히 이 과정 중에 많은 학습자(전기 충격 희생자)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항의하고, 심지어 (실험을)못하겠다며 풀어달라고 애원을 하기도 했었지만 상당수의 선생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실험자(실험 총괄자)의 명령을 끝까지 따랐습니다.

불복종에 대한 개인의 처벌의 위협이 존재하는 공포적 상황은 복종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스탠리 밀그램의 이 복종실험은 그 어떤 강요나 위협도 없는, 권위자의 단순 요구에 따른 자발적
복종만을 다룹니다. ... 밀그램은 이 복종실험에서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 특별한 심리적 동요 없이
실험의 마지막 단계까지 따르려 했던 매우 극단적인 자발성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더불어
이 실험은 이후, 다른 여러 대학에서도 똑같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밀그램의 실험 결과와 거의
유사하게 나타났습니다.

보편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마지막 단계인 무려 450볼트라는 엄청난 충격의 스위치를 누른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이들은 사회에서 폭력성이 심하며, 가학적인 일탈을 즐기는 사이코패스(psychopath) 같은 부류들일까?
밀그램의 실험에서 참가자의 대략 3분의 2의 숫자가 “(매우)복종적인” 피험자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
실험의 결과로 드러났으며, 이들은 모두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직장인 이거나 학생,
혹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쯤에서 평범함 속에 내재된 가학적이고 파괴적인 속성을 스탠리 밀그램보다
훨씬 이전에 발견했던 독일 태생의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그 유명한
<<◆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 에 대해서 살펴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렌트는 자신이 1963년에 집필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에서
독일 나치의 친위대 중령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 중 수백만의 유대인 학살 혐의로 이스라엘
정보경찰(모사드)에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진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그 과정과 본인의 생각들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 보고서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은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괴물이 아니었으며, 그는 낡은 사무용 책상에 앉아 무료하게 업무를 수행할 것
같은 너무나 평범한 관료주의의 전형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당시 아렌트의 이러한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으며, 수백만의 유대인 학살의 주범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좀 더 사이코패스 적이며 악마적인 인물로 대치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히만의 모습은
아렌트의 말처럼 너무나 평범했으며, 대중들이 원하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 그의 양심에 대해 그는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거라는 점을 완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이란 수백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분명히 이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를 “정상”으로 판정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적어도 그를 진찰한 후의 내 정신 상태보다는 정상”
이라고 탄식했다고 전해지고, 또 다른 한 명은 그의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자매,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그의 태도. 그의 모든
정신적 상태가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함”을 발견했다.) 그리고 끝으로,
대법원에서 그의 항소를 들은 후 그를 정기적으로 방문한 성직자는
아이히만이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 이라고 발표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확인해 주었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79페이지/ 한나 아렌트/ 한길사 ]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 악마적 속성은 광신이나, 포악, 반사회성 같은 정상성에서 많이
벌어진 곳이 아닌, 바로 우리 곁에 늘 존재하는 “평범함” 속에 있다는 것을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통찰한 것입니다. ...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아렌트가 얘기한 악의 평범성은
악마적 속성이 평범함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함 속에서 언제든지 악마적 속성이
나올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평범함이 악의 근원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질퍽하고 검붉은 토양 아래 어딘가에 평범함이란 뿌리가 퀭하게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태양(빛)과 물과 온도 같은 “적당한 조건만” 갖춰진다면 악의 꽃은 평범하게, 그리고 너무나 과감하게
대지위로 솟구쳐 오를 것입니다. 그렇게 피어오른 꽃은 평범한 우리들을 가스실 경비를 서게 하고,
독극물 주사를 놓도록 강하게 유혹합니다. ... 그렇다면 대다수 평범한 국민들은 모두 악마적인 것인가?
아니면 악마성을 스스로 억제하며 인내하고 살아가는 것인가? ~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개인적 견해로는 아렌트가 주장한 평범함 속에 악의 본성은 바로 “권위”가 개입할 때 드러납니다.
더불어 그 권위 안에서 “(복종의)적당한 조건”만 갖춰진다면 평범성은 어느새 악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될 것입니다. ... 그리고 그 “적당한 조건”에 대해서는 다시 밀그램의 실험으로 돌아와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밀그램의 (복종)실험에서 희생자에게 극단(450볼트)까지 전기충격을 가했던 선생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은 모두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며, 특히 그들은 모두가 실험 참가자의 한 사람으로서
실험이 실패하지 않고 무난히 잘 끝날 수 있도록 바라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이 존재했다고
얘기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엄청난 파괴적 과정의 대리자가 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 단순히 실험이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실험참가자로서의 의무감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밀그램은 실험에서 이들을 복종하게 만드는 좀 더 구체적인 요인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복종하게 만드는, 즉 ~ 선생(전기충격 가해자)을 상황에 묶어두는 구속요인들>

(1) 선생의 공손함이나 실험자(총괄자)를 돕겠다는 처음의 약속을 지키려는 소망, 약속 철회시의 어색함.
(2) 선생의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순응적 변화가 권위자에게서 벗어나려는 결심을 방해함.
(3) 순응은 실험자(총괄자)와 관계를 유지하는데 기여함과 동시에, 실험 중에 벌어지는 긴장을 줄여줌.

밀그램은 이와 같은 요인들이 힘없는 사람에게 해를 가하라는 권위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사고들이라고 주장합니다. ... 여기에 기술적인 완충요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예를 들면,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Dr. Strangelove. 1964년 제작)에서 핵폭탄을 투하하기 위해
정밀한 기술적 업무에만 치중하는 비행기 조종사를 빗대어 얘기하면서, 과제의 기술적 측면에만
치중하다가 그 과제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는 전혀 보지 못하는 개인의 어리석은 경향성을
지적합니다. 이는 복종실험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는데, 학습자(희생자)가 단어 쌍을 정확히 발음하는지,
스위치는 잘 못 건너뛰어 누르지는 않았는지와 같은 “기술적.절차적” 부분에만 몰두하다가
도덕적 사안은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를 얘기합니다. 한마디로 선생은 본인 스스로가
과연 유능하게 일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에만 몰입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술적 부분은 권위에 대한
복종에 윤활유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전기충격기계” 같은 물리적 수단과, 선생과 희생자와의
물리적 “거리” 등도 기술적, 절차적 요소처럼 긴장을 완화(혹은 완충)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권위자(실험 총괄자)가 시키는 지시(명령)사항을 이행(복종)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결과에
대해 선생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으로부터 이러한 완충요소들이 긴장 수준을 떨어뜨려 준다는
것입니다.

[◆ 희생자를 주먹으로 때려야 한다면 피험자(선생)는 더 꺼려할 것이다.
악의적인 권위자가 완충제의 비인간화 효과와 결합하면, 인간의 생존에
그 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사이에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전적으로 양적으로만 보면, 돌을 던져 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마을에 대포를 쏴서 1만 명을 죽이는 것이 더 사악한 일이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전자가 훨씬 더 실행하기 어렵다. ... 거리, 시간, 심리적
장벽들은 도덕의식을 둔화시킨다. 사실상 6킬로미터 상공의 비행기에서
해변을 폭격하거나 네이팜탄을 떨어뜨리는 데 어떠한 심리적 억제 요인도 없다.
아마겟돈(Armageddon)을 야기하는 버튼(인류 종말을 야기하는 핵무기 발사 버튼)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그 버튼을 누르는 것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것과
정서적으로 거의 동일하다.
- ( 권위에 대한 복종. 226페이지/ 스탠리 밀그램/ 에코리브르) ]

복종은, ~ 특히 권위에 대한 복종은 신비한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며, 신념에 따라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명령을 받게 되면
평소에 잘 하지 않았던 행동도 과감히 혹은 주체적일 때보다 더 열정적으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밀그램은 위에서 살펴보았던 복종에 대한 구속요인들 이외에도 또 다른 상당히
중요한 복종의 핵심 이유로 “책임“을 얘기합니다. ... 한마디로 권위가 시키는 명령에 순응하는 복종자는
자신을 권위자의 소망을 이루는데 필요한 도구쯤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복종에 따른 책임을 더 이상 지지 않아도 된다는 암묵적인 기대가 있다고 합니다. ... 한마디로
도덕성을 평가하는 좀 더 폭넓은 일은 권위자에게 위임되는 것입니다.

[◆ 복종실험 – 피험자(선생)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실험을 450볼트까지 진행한다.

<선생>: “아무래도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아요.
더 낮은 전압에서는 소리를 질렀잖아요. 들어가서 그가 괜찮은지 확인 좀 해보지 않으실래요?“

<실험자(총괄자)>: “(초연하고 차분하게)일단 시작하고 나면 그럴 수 없습니다. 계속해주십시오 선생.”

<선생>: “(깊은 한 숨을 쉬며) ‘시원한-낮, 그늘, 물, 페인트’ ~ 대답해주세요. 그 안에 괜찮으시죠?”

<실험자>: “계속해주십시오. 선생! ~ 계속하세요.( ... 선생이 스위치를 누른다.)”

<선생>: “(의자 주변을 돌며, 희생자 방안을 가르킨다.) 저 안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당신이 들어가서 점검해 보는게 좋겠어요. 그는 대답도 않고, 아무것도 안 할 거에요.“

<실험자>: “계속하세요. 계속해주십시오.”

<선생>: “당신이 모두 책임지겠습니까?”

<실험자>: “책임은 제가 집니다. 틀림없이. ... 계속해주십시오.”

- ( 권위에 대한 복종. 230~231페이지/ 스탠리 밀그램/ 에코리브르) ]


피험자(선생)는 실험자(총괄자)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자, 다시 자리에 앉아 최대한 빠르게
단어들을 읽으면서 실험을 이어갔고, 최종적으로 마지막 단계인 450볼트까지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복종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큰)책임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합법적인 권위자가 상당부분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은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또한 스탠리 밀그램은 이 실험을 통해 복종에 순응하는 자들의
대부분은 본인들의 행동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대신 외부 권위자의 대리인으로만
생각한다고 얘기합니다. ... “무엇을 위한 실험인지”, “희생자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와 같은
명백한 질문들 보다는 권위자의 기대에 어떻게 부응할 것인가가 더 큰 관심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 그렇다면 저는 이쯤에서 아이히만의 진술과 저만의 견해를 더해, 밀그램의 주장 속으로 들어가
한 가지 논쟁을 일으켜 보려고 합니다. 바로 방금 전 밀그램이 언급했던 복종하는 자들이 본인들의
복종을 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부분입니다. ... 저의 견해는 그들(복종 순응자)은 자신들의
복종에 대해서 충분히 도덕적 행동이라고 인식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 본질에 있어서나 의도에 있어서 병사들이 명백히 범죄적인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이상으로 이 문제 전체와 연관된 것이
있는가에 대한 아이히만의 애매한 생각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경찰심문이
진행될 때였다. 이때 그는 갑자기 전 생애에 걸쳐 칸트의 도덕 교훈, 특히
칸트의 의무에 대한 정의에 따라 살아왔다는 것을 아주 강조하면서 선언하듯 말했다.
이것은 표면상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칸트의 도덕철학은 맹목적인 복종을 배제하는 인간의 판단 기능과 아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 (중략) ~ 모든 사람이 놀랍게도 아이히만은 정언명령에 대한
거의 정확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칸트에 대해 언급하면서 제가 말하려 한 것은,
나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일반적 법의 원칙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중략) ~ 국가에 의해 합법화된 범죄의 시대에는 칸트의 정식이 더 이상 적용 가능하지
않으므로 기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이히만은)왜곡하여 읽었던 것이다. 즉 당신의
행동의 원칙이 이 땅의 법의 제정자의 원칙과 동일한 한에서 행위하라 ... 라든가,
“만일 총통이 당신의 행위를 안다면 승인할 그러한 방식으로 행위하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칸트는 분명이 이런 종류의 어떤 것도 말할 의도를 갖지 않았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210페이지/ 한나 아렌트/ 한길사 ]

이이히만 본인은 칸트의 정식, 즉 우리가 앞서 그렇게 자세히 살펴보고 고민해 보았던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라는 정언명령에
따른 삶을 살았다고 주장했지만, 수백만을 학살 하는 행동을 우리는 감히 그 어느 누구에게도
따라하도록 권유하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해 아렌트는 당연히 터무니없는 얘기로 취급하면서,
다만 아이히만은 히틀러 같은 권위자의 명령을 도덕법칙으로 왜곡하여 이해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저의 견해를 더해보면, 아이히만의 이 같은 주장은 복종에 순응하는 자들에서
보여지는 (잠재된)공통요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말해, 아이히만의 주장은 인류의 선과
도덕적 사회를 위해 아름다운 도덕원리를 만들었던 칸트의 본질에는 정반대편에서서 위배하고 있지만,
이들(복종 순응자)이 인식하고 있는 복종의 형식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칸트의 정언명령의 메커니즘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인류의 선이 아닌, 파멸을 위한 행동임에도
“권위”가 명령하면, 복종 순응자에게는 그것은 하나의 법칙이 되며, 책임이 배제된 “~ 해야만 하는”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 다시 말해, 의무감에서 하는 복종은 칭찬받기 위해 복종하는 것보다
이들(복종 순응자)에게는 훨씬 더 도덕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복종에 순응하는 자들은 복종을 통해 자신들이 경배하는 힘(권위)의 일부가 되기도 하며,
그로인해 스스로 강해졌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더불어 그 힘(권위)이 자신을 대신해 결정해줌으로써
본인들은(복종 순응자) 책임의 관에서 두발을 모두 빼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러한 복종의
기초적이며, 보편적인 인식은 복종 순응자들이 “왜?” 라는 단서를 달지 않고, 권위자에게 의무적으로
복종할 수 있게 만드는 그들 내면의 순수한(그들 차원에서) 이성인 것입니다. ... 그리고 저들은(복종자)
자신들의 이러한 인식들이 언제든지 칸트의 “실천이성”과 교환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 생각인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랄 때, 그 반대편에는 권위에 대한 복종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복종은 낯설음이 아니라 익숙함의 하나였으며, “권위에 대한 복종”은 그 자체로서
상당한 범주적 관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는데 ... 쉽게 말해, 가족, 학교, 사회제도, 문화 등 우리 인간사회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는 매우 견고한 장기지속이 아닐까 ~ 저는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어릴 적 아버지가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마라!” 라고 말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도덕적 교훈”과 함께, 아버지 당신의 말에는 조건을 달지 말고(의무적으로)
“복종하라!” 라는 함축적 명령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가정 내에서의 권위와 복종체계를
경험한 후에, 다시 “학교”라는 제도적 권위 체계로 장소를 이동하여 적응하게 됩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남자라면)군대, 직장 등으로 우리의 복종의 공간은 계속해서 바뀌게 됩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현대 사회에서의 권위와 복종의 구조는 독특하게도 사람(권위자)이 아닌,
제복(군복, 의사, 법복 등), 직함(사장, 이사, 시장 등), 소속배지(국회의원, 국세청, 검찰 등)같은
기호화된 관념구조에도 반응합니다.

인간이라는 종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대표적 특성이 바로 권력을 창조하는 환경을 만듦으로써
인간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점입니다. 홀로 고독하게 대지위에 서있을 땐 인간은 자연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의지합니다. 무리지어 군집을 이루고 있을 때는 누군가에게 대표성을 부여해 군집의
운명을 맡깁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은 공동체의 안정을 보장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공동체를
짓밟아 허무는 역설적 기능도 잠재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권력을 끊임없이 창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창조는 바로 “권위와 복종” 이라는 위계구조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럼 이제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순실과 박근혜의 관계는 과연 권위자와 복종 순응자의 관계였을까?
대통령의 인사권을 비롯한 각종 수많은 권력지분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느 사인(私人)이 독차지하고 사적으로 행사하였습니다. ... 헌정질서가 파괴된 것입니다.
권력에 있어서라면 “대통령”이라는 압도적 혹은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소유한 박근혜가
일반 사인(私人)에게 강압에 의해 대통령의 권력을 넘겨주었다고는 절대 상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 합니다. 따라서 앞에서도 언급했었지만, 우리는 이 둘의 관계를 권위와 복종의 구조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본인들의 권력에 대한 제한을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이는
경우를 많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 예를 들면, 입법 권한이 있는 정치인들이 판사들이 자신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을 허용하는 경우나, 부자들이 자발적으로 재산을 기부하려 행위, 그리고 총을 가진
경찰이 총이 없는 시민들에게 낮은 자세로 봉사하는 경우 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우리의 공동체 내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상당히 포괄적이며, 또 너무나 어렵습니다. 다만 여기서 알 수 있는 명확한 사실은
이 또한 복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해답을 찾자면 이들이(권력 소유자) 복종을 수용하는
일반적으로 이유로는 권력 소유자가 도덕적 행동을 추구하는 양심적인 사람이거나, 다른 이유로는
복종을 함으로써, 즉 권력에 대한 제한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에게 이익이 예상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근혜의 최순실에 대한 복종(@혹은 정신 나간 협조?)은 박근혜 본인에게 이익이
예상되어서 일까? ... 아니면 아이히만처럼 칸트의 숭고한 도덕원리를 잘못 이해한 상태에서
본인의 의지의 준칙, 즉 본인의 행동(최순실에 대한 복종)을 누가 보더라도 보편적 입법 원리에 따라
행한 도덕적 행동이라 생각해서 일까? ~ 밀그램의 실험을 통해서 납득할만한 답을 도출해 보려고
해도 박근혜-최순실의 관계는 너무나 특별해서 쉽지만은 않습니다.

지금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듯이 밀그램의 실험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었던 복종의 대표적
이유에는 복종 순응자가 (권위자의)대리자 역할을 함으로써 본인이 책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다는
인식을 갖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이라는 최고 권력은 모든 걸 책임지는 위치이지,
책임을 회피하거나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 또한 대통령은
국민의 대리자는 될 수 있어도 국민이 위임하지 않은 사인의 대리자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박근혜의 복종의 진짜 본질은 무엇일까? ~ 사실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 그런데 이때 아렌트가 저에게 가장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 나는 재판에 직면한 한 사람이 주연한 현상을 엄격한 사실적 차원에서만
지적하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셰익스피어 희곡 인물)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 발전을
도모하는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 (중략) ~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에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 (중략) ~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391~392페이지/ 한나 아렌트/ 한길사 ]

그렇습니다! ~ 권력에서 절대적으로 앞섰던 박근혜가 너무도 무력하게 최순실 이라는 사악한
사인(私人)이 엄청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도록 방관했던 것은, 그리고 복종 순응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생각하지 않는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아렌트가 지적한 것처럼 모든 악을 합친 것 보다 더 큰 파괴가 일어난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생각할 의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이유가 아닐까
저는 생각해봅니다. ... 다시 말해 박근혜의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는 일종의 정언명령의
메커니즘을 따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 한마디로 “생각하기 싫다!”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였던 것이죠 .... 그래서 최순실과의 40년이라는 장기지속의 자궁 속에서
박근혜는 마치 새의 알처럼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 상태로 잉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 (데미안. 123페이지/ 헤르만 헤세/ 민음사) ]

워낙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주 인용되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현재의 “나”에서 더 나은 “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을 두텁게 에워싸고 있는
알의 껍질(기존의 인식의 틀)을 깨뜨리고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 그러자면 진정한 자기성찰과
깊고 처절한 사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 투쟁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요의 세계에 머물러 있기만을
바란다면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 상태는 그대로 화석화 될 것입니다.

이제 저는 한쪽 손에 무사유 상태로 화석화 되고 있는 박근혜라는 새의 알과, 또 다른 손에는
마지막 시선인 “도착(perversion)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관한 이야기를 꽉 움켜쥐고,
이 글의 아프락사스를 향해 힘차게 날아가려 합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In the Realm of the Senses. 1976)”은
일본의 군국주의가 극에 달하던 1936년을 배경으로 돈 때문에 창녀가 되기로 한 사다의
등장으로부터 (영화는)시작됩니다.

어느 고급 술집의 부엌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사다는 거리의 걸인이 도저히 잊을 수 없어
다시 달려들 정도로 성에 상당히 민감한 여자입니다. 거지가 한 번 관계했던 창녀를 다시 기억할
정도로 관능이 넘쳐흐르던 여자가 바로 사다였던 것입니다. ...

그녀(사다)는 어느 날 부엌에서 자신을 천하게 대우하는 서너 명의 여자들과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이를 알게 된 술집 주인은 사다를 자신의 집 하녀로 들이게 되고,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 매일같이
향락을 즐기던 주인 키치는 마침 사다의 성적 관능을 단번에 알아보고 사다와 격정적인 섹.스(S.ex)를
시작하게 됩니다. ... 그런데 이들의 이러한 쾌락의 향연 속에서 사다는 주인 키치가 잠시라도
자신이 아닌 아내(주인마님)와 즐기는 모습을 보일 때 마다 질투심이 극에 달합니다. 결국 사다는
집을 나가 여관에 방을 얻어 아예 키치를 장악하게 됩니다.

이제 사다와 키치는 오직 육체적 쾌락만을 위해 매일같이 서로를 불태웁니다.
섹.스(S.ex)가 반복될 때 마다 주인 키치와 하녀 사다의 관계는 전복되고, 사다는 키치를 지배하며
키치의 의지를 허물어뜨리고 노예화 시킵니다. ... 이윽고 사다의 “신음”은 하나의 명령이 되고
키치는 이에 복종하며 “너무좋아! ~ 계속해! ~ 황홀해!”를 외치다가 마지막 순간에
키치는 사다에게 <“내 몸은 이미 너의 것이다! ~ 어서 나를 죽여달라! > 면서 끝이 납니다.
(@ 사다는 키치를 목 졸라 죽인 후, 성기(남근)를 자릅니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나르시스(Narcisse)는 숲의 요정 에코(Echo)의 사랑을 거부하여
벌을 받게 됩니다. 이후 소년 나르시스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흠뻑 반해
대상(물에 비친 자신)을 얻으려 안간힘을 씁니다. ... 하지만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 물이 흐트러져서
아름다운 얼굴은 이내 사라졌고, 아쉬움을 달래면 보석 같은 얼굴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 결국
그 연인(대상)을 얻는 방법은 물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고, 나르시스는 그렇게 물속으로 뛰어들어
죽게 됩니다.

자신을 유혹한 아름다운 연인은 사실은 자신이요, 본인 심연속에 새겨진 이상적 타자(연인)의
모습이 투영된 판타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만났을 때, 상대에게서 간혹
낯설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엿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르시스의 대상(물에 비친 자신)에 대한
사랑은 결국 (물에 비친)자신을 영원히 파괴하는 일종의 도착증입니다.

영화에서 사다의 격정적 신음은 명령으로 치환되어 키치에게 복종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가 관음증에 취한 대리만족자가 되어 이들의 섹.스(S.ex) 속으로 좀 더 깊게
침잠해 들어가 보면, 사다는 키치에게 사다 자신의 명령(신음)에 복종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다 자신이 “복종을 하고 싶다”는 본인의 욕망을 위해서 키치에게 요구하는 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치 나르시스가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위해 (복종하듯)죽음 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말이죠 ...

그렇다면 사다는 사디스트(Sadist)인가?, 마조히스트(Masochist)인가?
죽는 건 키치입니다. 결과를 놓고 보자면 키치는 마조히스트이고, 사다는 이름처럼 사디스트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동일시합니다. 미소년 나르시스와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연인이 모두 하나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사디즘이 곧 마조히즘이고,
마조히즘이 사디즘입니다. ... 결국 키치를 목 졸라 죽인 사다는 물에 비친 자신을 얻기 위해
물에 뛰어든 나르시스인 것입니다. 그리고 키치의 죽음으로 혼란스런 도착(perversion)은 멈추게
됩니다. ... 그런데 이러한 도착관계는 아마존 부족들의 사냥하는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동물의 몸을 찌르는 것이 성적 결합에 비유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냥과 성적유혹 사이에는 공통된 개념적 연계가 있다. 아마존 강의
상류지역에 사는 데사나족에게 “사냥한다는 것”은 “동물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중략) ~ 사냥꾼은 그냥 쏘기만 하면 된다.
사냥꾼 자신은 최소한 사냥 하루 전부터 금욕을 통해 성적으로 긴장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는 육체적 청결, 의례적 정화, 주술적 주문과 얼굴 치장을 통해
사냥감에게 구애할 수 있도록 자신을 아주 매력적인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 ( 샤먼 THE SHAMAN. / 32페이지 / 피어스 비텝스키 (Piers Vitebsky) / 창해) ]

인류학자이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수인 피어스 비텝스키(Piers Vitebsky) 교수는
자신의 저서 “샤먼(THE SHAMAN)”에서 아마존 데사나족의 예를 들며 얘기합니다.
그들이 화살이나 창을 이용해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대상(사냥감)에 대한 파괴이자 동시에
그 대상(사냥감)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냥꾼은
사냥 전에 자신을 최대한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서 사냥감(동물)이 자신의(사냥꾼) 유혹에
넘어올 수 있게 만드는 (샤먼적)의식을 치른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사랑(사냥꾼)은 죽음(사냥감)과 연계됩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사랑과 죽음의 극한은 필연적으로 한 점에서 만나게 되는 “은폐된 나르시시즘(Narcissism)”일 것이다.
~ 라고 말이죠! ... 화살과 창끝이 사냥감의 몸통을 관통하는 순간과 나르시스가 물속으로 뛰어드는
그 순간에서 우리는 모종의 일체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대상에 대한 파괴가
일어나지만 결국 이것은 죽음이 사랑으로 승화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주인 키치의 삽.입은 사냥꾼이 활과 창으로 동물을 찌르는 행위와 궤를 같이 합니다.
또한 이는 대상(사다, 사냥감)에 대한 명령과 같습니다. 그리고 명령에 대한 복종은 신음과 비명이
대신하고, 이 관계는 다시 전복되어 어느 순간부터는 사다의 신음이 명령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키치는 언어(좋아, 황홀해 ~)로 복종하며 죽음으로 마무리 됩니다. 결국 키치와 사다의 관계는
<명령 – 복종 – 명령 - 복종 ... > 으로 이어지는 도착(perversion)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순환관계인 것입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다! ” 라고 얘기합니다. ... 한마디로 인간은
타인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타인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박근혜와의 위계적 경합에서 승리한 최순실의 욕망은 쟁취한 권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캉의 욕망이론으로 들여다보면 최순실의 명령에 박근혜는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박근혜 본인의 욕망이 채워집니다. 한마디로 박근혜는 최순실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박근혜는 자신의 복종을 명령으로 인식합니다. 최순실의 명령이 곧 자신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호수에 비친 자신을 차지하기 위해 욕망이 시키는 명령에 따라 복종(호수로 뛰어듬) 하는 것처럼
말이죠 ....

결론적으로 박근혜는 복종을 통해 안식과 위안을 얻게 되며,
복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박근혜 본인의 “명령하는 권위”를 회복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도착(perversion)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입니다. 더불어 박근혜가 복종에 완벽성을 기하면 기할수록,
그 행위는 활과 창으로 사냥감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며, 물속으로 뛰어들고자 하는 나르시스의 욕망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은 바로 최순실의 욕망이자 본인의 욕망이고,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도착(perversion)적 관계의 종말인 것입니다. (@ 주인 키치의 죽음처럼 ~ )

인간이 살아가면서 위험한 것은 불신일까? ~ 아니면 믿음일까?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믿음이라고 답했습니다.
공감이 많이 가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이 대혼란 또한 어쩌면 박근혜와 최순실의 서로에 대한
과도한 믿음 때문이 아니었나를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인지 심리와 정신의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도착증이 타인들에게는 혐오로 비춰지지만, 당사자들은 자신들만의 즐거운 놀이라 생각한다고 합니다.
매우 이기적인 행복인 것이죠 ...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1956년, 24살의 나이에 비평집 <아웃사이더>를 발표해서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된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콜린 윌슨(Colin Henry Wilson)은 주로 인간의 심층적 의식을 다루는
작품들을 발표해 왔었습니다. ... 그 중에 <잔혹, 피와 광기의 세계사> 라는 저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 범죄성이란, 선이 아닌 악으로만 달리는 이상한 성향은 아니다.
그것은 지름길을 택하려는 인간의 아주 유치한 성향이다.
어떤 범죄에도 “진열창을 때려부숴 귀중품을 약탈” 하려는 성격이 있다.
절도범은 갖고 싶은 것을 노동에 의해서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훔친다.
강.간범은 여자를 설득하여 뜻에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능욕한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Freud, 1856~1939)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이에게 권력을 부여하면, 그 아이는 세계를 파괴할 것이다.”

프로이트가 의미하는 바는 이러하다.
"아이는, 완벽하게 주관적이다. 자기 감정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남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가 없다. ... 범죄자란 계속 아이처럼 행동하는 어른을 말한다."

- 잔혹, 피와 광기의 세계사 中 / 콜린 윌슨/ 하서 ]

최순실(최태민 일가) 이라는 장기지속의 자궁 속에서 무사유 상태로 배태되고 있었던 박근혜에게
알의 껍질을 부수며 새로운 세계로 향하려는 염원은 바로 호수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흐트러뜨리며
물속으로 뛰어드는 나르시스(Narcisse)와 같습니다. 그래서 박근혜가 알의 밖으로 나오려는 시도는
다시 알의 내부로 돌아가려는 도착(perversion)적 아프락사스인 것입니다.

알을 부수려는 가학(명령)과 알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피학(복종)의 이 혐오스런 도착적 유희는
원래는 무사유의 알로서 하나에서 출발했으며, 외부와의 소통이 불가능한 ~ 그리고 영원히
새가 될 수 없는 바로 “알” 자체의 상태인 것입니다. ... 그래서 박근혜의 아프락사스는
남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없는 “아이처럼 행동하는 어른의 세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뱀발 - 아큐정전과 광인일기로 유명한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은 군중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군중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면 군중은 제사를 지낸 후, 그의 살점을 산산조각 내어 뜯어 먹는다"

루쉰은 역사가 새롭게 창조되고 발전하려면 그 무게의 중심 추를 군중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각성하지 않고 배움의 의지가 없는 무지한 군중으로는 결코 개혁을 이루어 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루쉰은 군중의 계몽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정신적 개조와 함께 군중 개개인의 능력 배양이
선행되어야만 혁명의 역량을 배가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광화문 집회에 참가해본 경험에서 저는 아직 우리 국민들이 (무지한)군중이 아니라
현명한 "민중"이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루쉰의 충고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 그래서 군중과 민중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 합니다.

"군중이라는 무리에 합류하여 그저 쏠림에 만족하는
파편 덩어리가 되지말고, 민중이라는 거대하고 숭고한 흐름 속에서
제각각 깨어있는 독립된 의식덩어리가 되어라 ! "


[@ 글 읽어주신 분들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
 
 
 
출처 http://issuein.com/index.php?mid=index&page=10&document_srl=5332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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