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왕 사마륜의 역심과 반발 -
정변을 통해 황후 가남풍과 가씨세력을 축출하는데에 성공한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은
새로운 실권자가 되어 혜제 사마충을 보좌하게 된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가남풍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 사마휼(司馬遹)에게 민회태자(愍懷太子)라는 시호를 올려 그 명예를 회복시키고 사마휼의 아들,
사마장(司馬臧)을 황손으로 책봉하는 등, 그동안 외척들에게 유린되던 사마씨 황권을 다시 공고히 했으며, 명성이 높고 덕망이 깊은 자들을 등용하여
대소신료들이 정변으로 죽어나가는 바람에 썰렁해진 조정을 다시 바로 세우려는 노력도 보여준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만 좋았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기본적으로 이 사마륜이라는 인간이 원체 용렬하고 멍청한 성격이었기에, 이로인해 벌어질 사태는 사실상 예고된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사마륜이 역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정변을 일으켜 외척을 몰아낸 것도 그걸 공로로 건덕지 삼아 혜제 사마충에게 황제의 자리를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우둔한 주군 곁에는 항시 간신이 들러붙기 마련이다.
이 사마륜에게는 손수(孫秀)라는 참모 겸 심복이 딱 그 짝이었다.
손수는 예전부터 쭉 사마륜을 섬겨왔던 사마륜의 심복 중 심복으로서, 그가 과거에도 벌인 행각들을 보자면 가히 그의 됨됨이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손수는 실질적으로 사마륜의 상전이나 다름없었다. 무슨 소리인가 하니,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사마륜은 용렬한 위인인지라 거의 모든 대소사를 손수에게 물어 해결하고, 손수의 통제를 받았으며 가남풍과 가씨일가를 칠 정변을 일으킬 것을 사마륜에게 부추기고 종용한 이도 손수였다.
사마륜이 황제가 될 생각을 품자, 손수는 충실(?)하게 킹메이커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선, 사마륜이 황제가 되는데에 걸림돌이 될 만한 이들을 모조리 숙청하거나 내쫓는 일에 착수한다. 대표적인 희생자로는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司馬允 : 무제 사마염의 9남)이란 황족이 있는데, 사마륜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사병들을 모아 사마륜 일당을 선수치고자 계획하고 있었는데 손수 역시 사마윤의 낌새를 눈치채고는 사마륜에게 밀고하여 사마윤의 병권을 박탈할 것을 진언한다.
사마윤은 사마륜의 정변이후, 사마륜 정권 하에서 '표기장군, 개부의동삼사' 라는 관직에 임명되어 중앙에서의 병권을 쥐고 있었는데, 사마륜과 손수는 행여나 사마윤이 그 병권으로 자신들을 칠 것을 두려워해 병권을 빼앗고자 태위(大尉)라하는 실질적인 병권이 없는 일종의 군권 명예직으로 이임시켜버린다. 태위라는 직책은 고위직 중의 최고 고위직이라 불리우는 삼공(三公 : 태위, 사도, 사공)의 벼슬 중 하나였으니 겉으로 보기엔 관직을 높여준 것처럼 보이나, 실권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마륜의 이와같은 조치의 의미를 사마윤이 모를리 없었다. 더구나 사마륜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면 더더욱이나.
거기다 한술 더떠 손수는 사마윤 휘하의 관속들을 포함한 신하들을 몇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체포해버려 사마윤의 수족을 잘라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조치를 취하고 또 사마윤이 태위직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라는 이유(뻔히 속셈이 다보이는데 눈뜨고 당할리가 없다)로 황제의 조서를 받기를 거부했다는 죄명으로 압박하기에 이른다.
사마윤은 더이상 참지못하고 그날로 수도 낙양(洛陽)을 떠나 자신의 근거지이자 봉국인 회남국(淮南國)에서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고서에서의 기록은 이렇다.
조왕(趙王)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외치면서 자신을 따를 사람은 옷을 왼편으로 여미라고 했고, 그(사마윤)에게 귀부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궁궐로 갔지만, 상서좌승 왕여가 액문을 닫아걸어 들어가지 못하자 상국부(相國府 : 사마륜의 거처)를 포위하면서 사마륜을 공격해 여러차례 이겼다. - 자치통감
기록대로 사마윤은 싸움에서 몇차례 이겨 사마륜을 거처인 상국부(사마륜은 상국이라는 관직도 겸하고 있었다)까지 몰아넣어 궁지에까지 몰아넣는데에 성공한다. 그런데 여기서 일이 틀어지고 만다.
사마윤은 승화문 앞에 진을 쳤고, 이 때 태자좌율 진휘가 사마윤을 돕기 위해 사마충에게 백호번(궁궐에서 근무하는 장교)을 보내 싸움을 해산시켜야 한다고 했고, 사마독호 복윤이 기병을 거느리고 나갔다. - 자치통감
진휘라는 신하가 혜제 사마충에게 사마륜과 사마윤 두 왕들 중에서 사마윤을 지지하여 군사를 보내 도울 것을 진언하고 혜제가 승낙, 복윤이란 장수를 보내 사마윤을 돕게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복윤에게 사마륜이 아들 여음왕(汝陰王) 사마건(司馬虔)을 보내 회유하게 한다.
사마건 : "우리 아빠 편 들으면 출세할 거임. 그러니 사마윤 따위 버리고 우리편으로 오셈."
복윤 : "오케이, 사마윤한테 페이크치고 그쪽으로 튀겠음."
미래를 약속받은 복윤은 사마륜에게로 돌아섰고 사마윤을 낚고자 함정을 파기로 하는데, 복윤은 혜제 사마충이 직접 보낸 장수였기에 사마윤더러 황제의 조서를 받으라는 구라를 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마윤은 복윤을 만나러 갔고, 사마윤은 복윤의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주군이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마윤의 병력은 순식간에 와해되어버렸고 사마윤의 가족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싸그리 처형되고 모반에 동조했던 이들은 도주하는 것으로 사마윤의 반란은 끝난다.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싸잡아 표현했지만, 실제로 이 숙청으로 죽어나가거나 쫓겨난 이들들은 황족, 고위직 관료, 학자들이었다.
석숭(石崇 : 삼국지 연의에서도 나오는 석포(石苞)의 아들이기도 하며 이 당시 고위관료였다), 구양건(歐陽建 : 진(晉)의 유명한 학자이자 사상가), 반악(潘岳 : 역시 고명한 학자다),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 사마륜과 함께 가남풍을 몰아낸 그 사마경이 맞다. 사마륜이 맛이간 나머지 자신을 중앙에서 축출하려 들자 사마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직접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등.
반악(潘岳)의 초상화.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진(晉)의 고명한 학자다.
추후에서 다룰 본격적인 팔왕의 난(정확히는 사마륜이 황위를 찬탈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지만)에서도 언급할 내용이지만,
이 난에 연루되어 죽어나가는 인물들의 계층은 각기계층으로 학자나 사상가가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다양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재들이 죽어나가는 사태는 나라의 큰 손실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사마윤을 정리한 사마륜의 위세는 더 높아졌고 덩달아 심복 손수도 날뛰기 시작한다. 위에서는 언급한 석숭, 반악, 구양건과 같은 인물들이 그저 반란에 연루되어 죽은 것으로 써놓았지만 실제로는 이 손수의 사사로운 원한에 의해 죽었다(사마륜이 죽이라 지시한게 맞긴 하지만 앞에서도 서술했듯, 사마륜은 거의 손수의 꼭두각시였으니 사실 손수가 죽인 것과 다름없다).
손수는 하급관리 시절에 반악으로부터 일을 잘못해 꾸지람을 받은 적이 있어 앙심을 갖고 있었고, 석숭과는 석숭의 첩인 녹주(綠珠)를 달라했다가 거절을 당한 알력이 있어 원한을 품었으며(이건 순전히 손수가 미친놈), 구양건은 그저 주군인 조왕 사마륜과의 관계가 나빠서 그러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사마윤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자 이를 빌미로 원한도 갚을 겸해서 이들 셋은 물론이고 그 일족까지 싸그리 멸했다고 한다.
거기다 손수 자신이 신임하는 인물만 벼슬을 내려 기용했기 때문에, 사마륜의 친인척은 물론 노비, 시종들까지도 고위직에 오르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하니..
여튼 손수가 호가호위하며 권력을 휘둘렀다는 얘기다.
또한 다른 황족들도 난데없이 피해를 보게 되는데, 사마륜이 집권 초기에 죽어서나마 명예를 회복시켜준 사마휼의 아들, 사마장(司馬臧)도 대우해주더만 사마윤 반란사건 후에는 황족들에 대한 의심이 생겼는지 죽여버린다. 거기다 사마윤의 동복동생인 오왕(吳王) 사마안(司馬晏 : 무제 사마염의 15남. 여담이지만 이 사마안의 아들인 사마업(司馬業)은 훗날 진(晉)의 마지막 황제 민제(愍帝)가 된다. 아주 나중에 다룰 영가의 난과 관련된 인물이니 그냥 참고하실 것)도 일족이 멸해질때 죽을 뻔하지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되 빈도현왕으로 지위가 격하되어 중앙에서 쫓겨나는 등, 사마륜 정권 하의 피의 숙청은 계속되고 있었다.
- 사마륜의 제위찬탈과 팔왕의 난의 발발 -
그리고 서기 301년.
손수는 혜제 사마충에게 구석(九錫)의 지위를 조왕 사마륜에게 하사해줄 것을 요구한다. '구석의 지위란' 아홉(九)가지의 특권을 의미한다. 예로부터 권신이 허수아비 황제로부터 거의 반 협박식으로 받는 것과 같은 일종의 절차였다. 진(晉)의 시조들 중 하나인 사마소(司馬昭)가 위(魏)의 원제(元帝)로부터 하사받았고 좀더 앞선 사례로는 조조(曹操)가 한(漢)의 헌제(獻帝)에게서 받은 바 있다. 전례들이 심상찮은 것을 느끼실텐데, 보시는 바와 같다. 사마륜도 언젠가는 지금의 황제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을 뜻을 간접적으로 보였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게 된다.
혜제 사마충이 아둔하다 하여 태상황(太上皇)으로 올려버리고, 결국 사마륜은 제위에 오르고야 만다.
연호는 건시(建始).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는 것을 못박기라도 하려는 듯 장남 사마과(司馬荂)는 태자로 책봉해버린다.
정월에 산기상시인 의양왕 사마위, 상서령 만분 등을 시켜 선양할 준비를 마련했다가, 9일에 황제로 즉위해 연호를 '건시(建始)'라고 고쳤으며, 사마충을 폐위해 금용성에 살게 했다가, 10일에 사마충을 태상황으로 높이면서 금용성을 영창궁으로 고쳤다. 아들 사마과를 황태자로 삼으면서 다른 아들이나 친척들을 왕으로 임명했으며, 그 밖의 부하들도 관직을 승진시켰다. - 자치통감
황후 가남풍과 외척 가씨세력은 황제만큼은 건들지는 않았지만 사마륜은 황제까지 갈아치운 것이다. (상관없는 얘기지만 기록에서의 만분(滿奮)이란 신하는 삼국지연의에서의 위(魏)의 신하였던 만총의 손자다)
그리고 그해 3월, 사마륜의 제위 찬탈소식에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이 여러 왕들에게 사마륜을 칠 것을 권유하는 격문을 돌리니, 이에 장사왕(長沙王) 사마애(司馬乂),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등이 동참의 뜻을 밝혀 역적 사마륜을 쳐없앨 것을 맹세하며 군사를 일으킨다.
이것이 팔왕의 난의 진정한 시작이라 하겠다.
당시 팔왕(八王)의 각 위치도.
여기서 표시된 초(楚)왕 사마위(司馬瑋)와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은 이미 죽었지만,
사마위와 사마량이 가남풍과 관련되어 권력다툼을 하던 때까지도 팔왕의 난의 시기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은 지도에서는 표시되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아직 안나왔는데,
사마월은 좀더 뒤에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