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하게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 모든 칸에 빼곡하게 줄지어 있는 사람들. 질러 가고 싶지만, 야속한 에스컬레이터는 그럴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저 발만 동동. 계단이 평평해지자마자 힘껏 발을 구른다. 마치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는 몸. 전광판 한 번 슬쩍, 개찰구 한 번 흘깃. 발을 더더욱 멀리 내딛는다. 늘 눈에 띄던 이디야 여학생도, 저어기 구석에서 풍기던 오뎅 냄새도 오늘은 발을 묶지 못한다. 마치 도시 속 모글리처럼 쏟아져 나오는 인파의 틈을 헤집는다. 드디어 다다른 개찰구. 원래라면 시원스런 기계음으로 맞아 주어야 하거늘, "같은 위치에 다시 대 주십시오." "같은 위치에 다시 대 주십시오." 지가 무슨 제갈량이라도 된 양, 삼고초려 끝에야 보내주는 개갈량. 한숨을 쉬기에도, 분을 터뜨리기에도 촉박한 다리는 다시 달린다. 계단을 두세 칸씩 내려간다. 아니, 계단에 기대어 떨어진다. 0.5배속에 걸린 듯 찬찬히 닫히는 문. 지금 이순간만큼은 내가 9회말 2아웃 역전주자다 라는 생각과 함께 몸을 던진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뭇 사람들의 시선에 얼굴이 벌개져 옆 칸으로 몸을 옮긴다. 그제서야 다시 눈에 들어오는 전광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