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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편/약19] '엿보기 구멍 Reboot 1/2
게시물ID : panic_917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야설왕짐보
추천 : 14
조회수 : 4420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6/12/08 14:3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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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기구멍표지.jpg

(엄밀한 의미의 공포소설은 아닙니다.)

A이야기와 B이야기 각기 다른 시점의 두 이야기가 병행하여 진행됩니다. 

소제목으로 A, B를 표기하였으니 참고 바랍니다.

엿보기 구멍


 #A-1. 견물낭심(見物囊心)

 

게 보였습니다. 뽀얗고 하얀 속살, 처음엔 '별 거 아니다.' '여자 몸 처음보냐?.' 스스로를 타일러도 봤습니다. 하지만 아실겁니다. TV 혹은 컴퓨터 모니터로 보는 것과 눈 앞에 빤히 보이는 실물의 차이를요. 그 압도적 비주얼이 주는 생생함 앞에선 숨죽일 수 밖에 없습니다. 꿈뻑이면 없어질까 눈 비비면 사라질까, 하릴 없는 걱정들이 똘똘뭉쳐 눈꺼풀을 잡아 당기고, 멈추는 것이 곧 죽음인걸 알면서도 '호흡'마저 제 의무를 잊은 채 따라 멎습니다.

 

'두근! 두근!'

 

가녀린 발목과 매끈한 종아리가 보입니다. 이 순간 요란스러운 것은 오직 요동치는 심장뿐, 시간마저 멈춘 듯 모든 것이 고요합니다. '정신차려 이러면 안돼!' '임마 그거 범죄야!' '양심'이 내뱉는 정의는 왜 이리도 나약 할까요? 이제껏 무단횡단 한 번 안해 본 올곧은 녀석이건만 호기심에 취하자 '! 분명히 경고했다.' '난 몰라 이제부턴 니가 알아서해' 같은 무책임한 말들로 방조에 동참합니다. 그래놓고는 어느새 헤벌죽 따라 웃는 양심을 보면 '너도 참 많이 고팠구나? 그래 다 내 책임이다.' 애달픈 자위(?)밖엔 할 말이 없습니다.

그 와중에도 ''은 탐험가로서의 기치를 번득입니다. 마치 신대륙을 찾아 헤매는 콜롬부스 같습니다. 연한 살구색의 바다를 표류하면서도 두려움이나 불안감은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호기심이란 낯선 조류에 몸을 맡긴 채 빠르게 위아래를 훑습니다.

그의 모험정신 때문일까요? 무릎이란 암초를 지나 탄탄한 허벅지의 해협마저 지나니 이내 풍요로운 두 개의 섬을 맞닥뜨립니다. 탐스럽다 못해 찰싹 올려 붙이고픈 탱글탱글함이 그 섬의 원주민마냥 손을 들어 환영합니다.

하지만 모험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 살구빛 해안 너머 그 어딘가엔 유년기적 욕망의 보고가 숨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깊은 허리의 골을 지나고 등이란 이름의 망망대해를 지납니다.

때론 죄의식이란 이름의 풍랑에 휩싸여 한 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치지만 탐험정신은 멈추지 않습니다. '눈꺼풀'의 짧은 밤이 지나면 호기심은 새로이 샘솟아 은근 슬쩍 왔던 길로 되돌아갑니다.

'너 시험 안 볼거야? 공부해야지! 빨간 줄 가면 시험자격 박탈당해!' 매서운 우려의 비바람이 휘몰아쳤지만 배를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엔 너무 멀리 온데다, 이대로 돌아서면 그걸로 끝, '두 번의 기회는 없다'란 아쉬움이 발목을 잡습니다. ''는 쫑긋, '목구멍'은 꿀꺽, 선원들은 이미 관음증에 취해 모험 이외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발 그만보자. 이러다 정말 큰일난다.' 1등 항해사 양심이 홀연히 일어나 경고했지만 역시나 소용없었습니다. 망루에 선 파수꾼 '눈동자'의 흥분섞인 외침 때문이었습니다.

 

'... 돌아선다.'

선원들은 모두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습니다. 말로만 듣던 신대륙, 그 곳의 숨겨진 보물들이 눈 앞에 펼쳐졌으니까요. 가장 먼저 기뻐한 이는 조타수 ''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봉긋 솟은 두개의 상징물 위에 닻을 내린 듯 쥐락펴락 손마디를 가만두지 못 합니다. 2등 항해사인 '콧구멍'은 어떻구요. 샤워 후 아련히 풍겨오는 샴프향을 느껴보겠다며 필사적으로 벌렁거립니다.

그리곤 모두 함께 한 마음 한 뜻으로 외칩니다.

 

'아래로! 아래로!'

 

아시잖아요. 진짜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배꼽의 호수 너머 깊은 곳.

전설로만 전해지는 금단의 땅...

실존한다 전해지지만 그들로선 아직 밟아본 바 없는 미지의 공간.

울창한 수풀로 뒤덮인 검은 정글 아래에 존재한다는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 말입니다.

문득 학교선배이자 그 곳의 전설을 읊어주곤 하던 한 음담시인과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너 정말 한 번도 못 해 봤냐?"

""

"전에 여자친구 사겨 본 적 있다며, 그런데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니 뭐! 걔는 거기에 금테 둘렀다니? 1년도 넘게 사겼다며!“

 

오오... 황금의 땅 엘도라도여...

 

"혼전순결주의자 였습니다. ... , 저도 지켜주고 싶었구요."

"하아... 너도 참 대단하다. 그 인내... 불굴의 의지. 진짜 존경스럽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저 요즘 썸 타고 있습니다."

"오호! ? 근데 썸이면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닌데, 너무 멀리 보는 거 아냐? 임마 그건 과욕이야. ! 거울 봐! 오징어가 보이지? 이게 현실이야! 그게 또 가르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남자에겐 세번의 기회가 온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근거는?"

"자주가는 편의점 알바생인데, 저를 볼 때마다 이유없이 웃습니다."

"그게 다야?"

"또 있습니다. 제가 커피를 하나 샀는데, 1+1이라나요? 친절하게 하나 더 가져다 주는 등 살뜰히 챙기더군요. 이 정도면 거의 결혼각 아닙니까?"

"크흠... 크흠..."

 

헛기침과 함께 침묵의 파도가 몰아쳤습니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끝내 선배는 아니 자타공인 학내의 음담시인은 다시 한 번 거울 속의 저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 다시 원점이다. 거울을 봐! 오징어가 보이지? 이게 그 여자가 웃은 이유다. 1+1은 그 편의점의 방침이고 이상!"

"반론의 여지는 없습니까?"

"없다. 기억을 미화시키지 마라.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라갔을 것이다. 그건 단연코 호감이 아니다."

 

선배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도 저만의 이유와 논리가 있었습니다.

 

"저 정말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요."

"좋다. 확실히 하는게 좋겠지. 그 편이 체념도 빨라."

"그 여자가 오징어 성애자일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겁니까?"


1 (1).jpg
※ 부득이하게 조정석씨의 이미지를 차용하였을 뿐, 극의 내용과는 무관합니다.

 

선배의 얼굴에 경악의 회오리 바람이 몰아쳤습니다. '쯧쯧쯧' 혀 차는 소리는 꽤 오랫동안 멎을 줄을 몰랐고 이내 선배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없다."

"하지만..."

"자꾸 같은 얘기해서 미안한데, 또 한 번 원점으로 돌아가서 얘기해 줄까? ! 거울 보이지? 오징어 확인했어? 그래도 미련을 못 버리겠으면 내가 어디 오징어의 쓰임과 흔한 결말에 대해 구구절절 읊어줘?"

"됐습니다. 선배는 아직 사랑을 잘 모르시는 거 같네요."

"뭐 임마?"

 

굴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여자에 대해 잘 아는 선배라 생각했는데, 대화를 나누어보니 그 선배는 아는 것이 없는 듯 했습니다.

저는 제 직감을 믿기로 했죠.

그래서 어찌 됐냐구요?

 

"저기요, 죄송하지만 저 남자 친구 있는데요? ..."

 

 

#B-1. 스스로 어린이

 

로운 곳,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 입니다. 새로운 집과 길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져야 합니다. 아버지의 잦은 이직으로 저희는 이사가 잦았고, 엄마는 그때마다 늘 인사를 잘 하는게 중요하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엄마를 따라 시장을 갈 때도, 집 앞 슈퍼에 갈 때도, 심지어는 처음보는 강아지가 지나가도 넙죽 인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쉽사리 생기지 않았습니다.

집 주변에 또래의 친구가 없었던데다, 저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학원에 다니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엄마를 졸랐습니다. 엄마는 안그래도 알아보고 있다며, 조금만 기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진 위험하니 밖에 나가지 말고 되도록 집 안에서만 놀라는 말씀과 함께요.

저는 착한아이였기 때문에 엄마의 말씀을 잘 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힘들었어요.


1-B (1).jpg
※ 내용 이해를 위해 부득이하게 왕석현군의 이미지를 차용하였을 뿐, 극의 내용과는 무관합니다.


갑자기 이사를 오는 통에 짐도 다 풀지 못했고, 제가 아끼는 동화책이며 장난감들이 죄다 골방 창고에 쌓여 있었거든요.

하여 저는 틈날때마다 아빠를 졸라 장난감을 꺼내어 달라 말했지만 아빠는 늘 '나중에' '시간 날때' '보채지 좀 마!' '아빠 피곤한 거 안 보이냐!' 라는 말로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였지요.

하지만 뭐 상관없었습니다. 저는 착한아이이며 동시에 주체적인 학습관을 가진 아이였기에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제 일을 스스로 처리하고자 마음 먹었습니다.

로봇 장난감도 꺼내고 비행기 모형도 꺼내 놓으면 부모님이 기뻐하실거라 생각했습니다.

칭찬받는 거, 그거 되게 기분 좋잖아요.

단지 그런 생각 뿐이었습니다.

 

 

#A-2. 파국

 

풍전야랄까요?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온했습니다. 말은 않지만 다들 때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잡지와 영상으로만 접하던 금단의 실체를 이제 곧 보게 될 테니까요. 이 날을 꿈에도 기다려왔던 조타수 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주방장 는 메마른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습니다. 배 안은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참을 수 없게된 탐험선 '불타는 욕망'호의 선장 '본능'이 외쳤습니다.

 

"가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어기영차 이영차' 흥겨운 뱃노래까지 부르며 다함께 한 마음 한 뜻으로 상륙선 눈동자의 노를 저었습니다. 모두들 기대에 차 있었죠. 만질수도 느낄수도 없는 벽 너머의 보물(?)일 망정 그것은 이 순간, 우리에겐 모든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 한 번의 조우는 비록 우연을 등에 없은 미약한 시선일찌나 먼 훗날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가기 위한 위대한 첫 걸음이 될 것이다!'

 

환호가 들려오고,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되어 아래로 아래로 더 깊이 내려갔습니다.

 

"헉 보인다 보여!"

 

호흡이 가장 먼저 숨죽이며 외쳤습니다. 검고 무성한 금남의 밀림에 도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역줄기가 엉킨 듯 검고 자글자글한 모낭의 땅, 모두가 멈칫했습니다. 자신들이 본 것을 새겨두기 위해섭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언제 다시 만날 지 모릅니다.

아니, 다시 없을지 모릅니다.

 

'저기요. 죄송하지만, 저 남자친구 있는데요? ...'

 

갑자기 떠오른 과거의 참사가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습니다. 편의점의 그녀 이후, 우리는 가장 유능했던 선원인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그는 그날 그렇게 배를 떠난 뒤론 소식조차 없습니다.

일설에는 오징어가 밉다며 원양어선을 탔다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커플들이 우글대는 극장 앞에서 버터구이 오징어를 굽고 있다고도 합니다.

그가 돌아온다면 언제고 기회야 있겠지만, 돌아올 지 어쩔지도 모르는 그를 기다리기엔 우리의 갈증이 너무 깊었습니다.

외로움의 고통이 너무 큽니다.

이제는 위로 받을 때 입니다.

하지만 그 때였습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시야가 온통 까맣게 물들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싶어 좌우로 시선을 돌리고 급히 깜빡여도 봤지만 앞은 온통 어둠뿐입니다.

그리고 그 어둠이 좌우로 움직입니다.

이건 마치... 눈동자 같습니다.

호흡은 멎고 온 몸이 전율합니다. 밀려드는 두려움과 공포에 모두가 떨고 있습니다.

아아 이것이 바로 추악한 관음증의 헛된 결말인가요?

선장 '본능'이 급히 위험신호를 보내보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탐험대는 완벽히 발견되었고, 벽 뒤에선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

'!'

 

그리곤 흉폭한 포효가 들려왔습니다.

 

"너 뭐하는 새끼야!"

"으허헉!"

 

난폭한 포효에 놀라 다들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입니다. 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눈 앞의 벽이 안전을 답보하진 않습니다. 벽에 난 구멍사이로 까맣고 긴 촉수 같은 것이 뻗어나왔습니다. 확신 할 순 없지만 그것은 분명 우리를 흥분시켰던 그 검고 무성한 덤불이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자라나더니 이내 뱀의 모습으로 변해 저의 온 몸을 휘감습니다.

 

'!'

'!'

 

다시금 벽을 두드리는 난폭한 소리가 들려오고, 저는 뱀으로 변한 덤불을 풀어내려 애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애원하고 발버둥쳐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리곤...

 

'쿠콰콰쾅'

 

2 (1).jpg


벽은 끝내 무너지고,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사이로 벽 너머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끔찍한 모습으로 노려보며 포효합니다.

 

"너 이번시험도 떨어지면 알량한 공무원시험일랑 때려치고 착실히 기술이나 배워!"

으아악 안돼!”

 

절망의 나락에서 들려오는 지옥의 말... ‘기술괴물은 왜 우리 엄마 같은 말로 저를 괴롭히는 걸까요?

저는 발버둥쳤습니다. 저를 얽어맨 절망의 괴물과 이 시커먼 어둠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제발... 제발 이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지만 괴물의 음성은 멈추지 않고 계속 저를 괴롭혀 왔습니다.

 

!’

!’

!’

 

#B-2. 클리프 행어

 

컥 겁이 났더랬습니다. 처음의 용기와 달리, 막상 창고로 쓰이는 골방 안으로 들어가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풀지 않은 집기며 이사짐들이 산처럼 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키가 작은 저로서는 뒤꿈치를 들어도 두 팔을 한껏 뻗어봐도 도무지 닿지 않았습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 쌓여있는 상자들과 잡동사니를 밟고 올라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근데 나... 올라갈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지만,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아깬두잇!' 영업사원인 아버지가 즐겨 하시던 말씀이었습니다. 되뇌고 되뇌이면 용기가 북돋아지는 마술 주문이라고 했습니다.

 

웃차!”

 

손을 뻗었습니다. 한쪽 다리는 낡은 라면박스 위에 디뎠습니다. 안에는 잡동사니가 가득 차 있던 터라 어린 제 몸 정도는 제법 지탱합니다. 조금 더 용기가 생겼습니다. 멋지게 암벽을 정복하는 영화 속 주인공을 떠올렸습니다.

 

아이() () () !“

 

마법의 주문이 힘을 준 덕분일까요? 라면박스를 딛고 재차 그 위에 놓인 보따리에 발을 얹었습니다. 조금만 더 기어 오르면 맨 위, 위태롭게 한들거리는 장난감 상자에 닿을 것도 같습니다.

다시 힘껏 팔을 뻗었습니다. 지난 여름 사용하던 선풍기가 손에 닿았고 이대로 한 걸음 더 올라서면 정상입니다.

하지만 제 몸을 버텨줘야 할 선풍기가 기우뚱하며 끌려옵니다. 다급한 마음에 다른 무언가를 잡으려 허우적 거려보았지만 소용없습니다. 손은 미끌어지고 온 몸의 균형이 흐트러집니다.

 

아아아! 엄마!”

 

그렇게 뒤로, 뒤로...

그리고

 

 

 

#A-3 결자해지(結者解之)

 

"으아아악! 하아! 하아!"

 

멍이 있었습니다. 길고 긴 수험생활의 압박때문이었을까요? 모처럼의 악몽에서 헐떡이며 깨어나보니, 정말로 벽에...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낡고 허름한 고시원이고 벽이라고 해봐야 얇은 판자를 덧대어 놓은 것 뿐이라 취약하긴 했지만 구멍이 나 있을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분명 어제도 그제도... 또 그 이전에도 본 적 없는 정체 불명의 구멍입니다.

 

뭐지? 그게 꿈이 아니었나?”

 

조금 난처했습니다. 크진 않지만 반대편이 훤히 들여다 보일정도인데다, 옆 방에는 마침 여자가 살고 있었거든요. 고시원의 특성상 따로 마주친 적은 없지만 소리는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꽤나 부산스럽고 호들갑스런 여자였고, 안그래도 거슬리던 참이었거든요.

사실 처음에는 응큼한 생각도 조금 했습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그 만화때문이었죠.

 

엿보기 구멍

 

혹시 압니까? 모른 척 놔두면 간밤의 꿈처럼 흥미로운 탈의 장면이라도 보게 될지? 하지만 시험 발표도 코앞이고 이래저래 바빴던 터라 급한대로 포스트잇 하나를 붙여두고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공무원 수험생이었고, 어설픈 관음증으로 제 인생을 망치고픈 생각따위 추호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포스트잇은 구멍난 벽이 아니라, 옆 방 문 앞,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두었습니다.

물론 생각하시는 바와 같은 응큼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옆 방입니다. 혹시 벽에 구멍내셨나요? 결자해지(結者解之), 공부하시는 분이니 무슨 뜻인지 알꺼라 생각합니다.]

결자해지 :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 스스로 저지른 일은 스스로 해결

 

 

#B-3. 각성(覺醒)

 

두웠습니다. 눈을 떴지만 마치 눈을 감은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창문은 두터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고 주변엔 온통 잡동사니들만이 층층히 쌓여있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습니다.

저는 겁이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했지만 문은 밖에서 잠겨있는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춥고 두려웠습니다. 방은 온기 한 점없는 냉골이었습니다. 차가운 어둠속에 갇힌 채 홀로있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여 저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도와주세요. 저 여기 갇혀 있어요.”

춥고 무서워요. 제발 저 좀 나가게 해주세요.”

문이 잠겼어요. 저 좀 내보내주세요!”

 

한시라도 빨리 이 곳에서 나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찾는 것은 오직 추위와 외로움 뿐이었습니다.

 

납치된 걸까?’

잊혀진 걸까?’

아니면 단순히 문이 고장난 걸까?’

 

고민을 거듭했지만 답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희뿌연 안개가 드리워진 듯 도무지 명확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저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아.”

 

그렇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누구고, 왜 이곳에 갇혀 있는지, 그리고 여긴 어디인지.

도통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마치 기억을 가위로 오려낸 듯 말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두려움에 떨며 누군가 찾아주기만을 기다릴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급히 창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도와달라,

내가 여기 있다

 

구조를 요청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으아악!”

 

창밖의 풍경을 본 순간, 저는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너무도 놀랍고 또한 두려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구요?

그건 정말이지 충격적이었거든요.

 

좀비


3-2.jpg

 

얇은 유리창 너머 세상은 지옥이 되어 있었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려던 의지마저 꺽인 채 저는 한참동안을 두려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A-4. 설전(舌戰)

 

시원에 다시 돌아온 건 꽤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지방직 시험은 이미 끝나 결과를 기다리는 입장이었지만, 미래야 알 수 없는 일이고, 코 앞에 닥친 행자부와 서울시 시험도 준비해야 했습니다.

학원에선 절박한 수험생들을 위해 [벼락치기 속성코스 ㅇㅇ 하루만에 끝내기] 강좌를 내놓았고, 말은 그럴싸하게 해놓았지만 그게 어디 쉽습니까? 강의는 예정된 시간인 10시를 훌쩍 넘겨 자정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문 앞에 서자, 아무도 기다리지 않던 고시원 제 방 문 앞에 모처럼 손님이 와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포스트잇 말입니다.

 

[음덕양보(陰德陽報), 피차 공부하는 입장이니, 뜻은 알거라 생각합니다.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느라 바쁘니 그대가 손을 보면 어떠하리? 일반천금(一飯千金)하리다.]

음덕양보 : 남모르게 덕행을 쌓으면 후에 보답받는다.

주경야독 :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책을 읽는다.(열공)

일반천금 : 밥 한끼를 얻어먹고 천금으로 갚는다.(작은 은혜에 크게 보답)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구멍은 자기가 내놓고 고치는 건 나보고 하라니요. 인상이 찌푸려진 것도 애꿎은 포스트잇을 거칠게 쥐어 뜯은 것도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제 방 문 앞에 포스트잇을 붙일 시간에 청테이프라도 사다 바르는게 맞습니다. 아니죠. 포스트잇을 제 방 문 앞에 붙일 게 아니라 구멍난 위치에 붙였어야죠.

울컥 했지만 일단은 참았습니다.

상대가 여자이기도 했고, 시험이 코앞인데 쓸데 없는 곳에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냥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저도 한 성격 하거든요.

 

[후안무치(厚顔無恥), 입장바꿔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선공후사(先公後私) 하시오. 수수방관(袖手傍觀)한다 원망말고]

후안무치 : 낯가죽이 두꺼워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선공후사 : 공적인 일을 먼저하고 사사로운 일을 뒤로 미뤄라.

수수방관 : 도와주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겠다.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 번 해보자!”

 

약간의 오기였습니다. 사실 저는 아쉬울 게 없었습니다. 벽에 구멍이 나든 말든, 불편한 건 여자지 남자는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다음 날이었습니다. 모처럼의 몰아치기 수업이 고단했던지 늦잠을 자버렸습니다. 부라부랴 옷을 챙겨 입고 학원에 나가려던 찰나, 또 한 번의 손님을 맞이합니다.

손님이래봐야 누구겠습니까?

그 여자가 붙여놓은 포스트잇이죠.

 

[각자무치(角者無齒), 내 벽에 거울을 달려 했으나 못 질하는 재주는 없고, 부서진 벽을 수리할 재주는 더더군다나 없으니 상부상조(相扶相助)합시다. 계명구도(鷄鳴狗盜)라 했으니 이 기회에 실력발휘 좀 해보구려.]

각자무치 : 뿔이 있는 짐승은 이가 없다. 한 사람이 모든 재주나 복을 겸비 할 수는 없다.

상부상조 :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

계명구도 : 하찮은 재주라도 쓰임새는 있다. 제나라 맹상군이 자신을 죽이려는 진나라 왕을 피해 도망치려 했지만 해가 뜨지 않아 국경의 문이 닫혀 있었다. 그러자 보잘 것 재주(닭 울음 소리 흉내내기)를 가졌다 생각했던 식객이 닭 울음소리를 냈고, 이에 착각한 문지기가 문을 열어 맹상군이 살아 남는다.

 

혈압이 치솟았습니다. 이쯤 되면 한 판 붙자는 말 아닙니까? 책임 회피는 그렇다쳐도 제가 저지른 문제를 나보고 수습해달라 부탁하는 입장에서 계명구도라니요. 하찮은 재주라는 말을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저는 곧바로 응전했습니다.

 

[두소지인(斗筲之人)갑론을박(甲論乙駁)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더 말해봐야 이란격석(以卵擊石)인 듯 하니,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수수방관할 테니]

두소지인 : 도량이 좁거나 보잘 것 없는 사람

갑론을박 : 각자의 주장을 내세우며 논쟁을 벌이다.

이란격석 : 계란으로 바위치기, 무의미한 일

 

두소지인이란 고사성어를 통해 계명구도로 받은 황당함을 상쇄하고자 하는 나름의 소심한 복수였습니다.

하지만 오전 수업을 마치고 잠깐 씻기 위해 돌아오니 이 여자, 개과천선(改過遷善)의 여지 따윈 찾아 볼 수 없는 형편없는 여자더군요.

그야말로 점입 가경이었습니다.

개과천선 : 지나간 허물을 고치고 착하게 변함

점입가경 : 차차 흥미로운 경지로 나아감

 

[안하무인(眼下無人)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재주가 있구려. 사고무친(四顧無親)한 이웃을 돕지 않는 그 품성 내 잘 알겠소. 우리가 막역지우(莫逆之友)가 될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이쯤에서 회자정리(會者定離)합시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맙시다.]

[추신 : 나 골지 마세요. 잠을 못 자겠거든요? 별꼴이야!]

안하무인 : 눈 아래 사람이 없는 듯 교만하다

사고무친 : 고아 또는 의지할 곳이 없음

막역지우 : 허물없는 친한 벗

회자정리 : 누구나 만나면 헤어진다는 뜻

 

세상에 뭐 이딴게 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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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화가 많이 났습니다. 기껏해야 9급 공무원 시험이지만, 말이 쉽지 수험생활이라는 것이 보통일은 아닙니다. 안 그래도 빡빡한 일상에 스트레스 풀 곳 조차 여의치 않은데, 어처구니 없는 말까지 들으니 저도 잠시 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저는 코를 골지 않습니다.

 

! ! !’

“307호 안에 있죠! 있으면 거 잠깐 얘기 좀 합시다. 이봐요 307!”

 

말해봐야 들어먹을 사람이 아닌 건 알았지만, 뭐라도 한 마디 해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인기척조차 없었습니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죠.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방이 여기니까 기다리면 오지않겠냐. 그런 막연한 생각때문이었습니다. 제 방에 돌아가 기다려도 좋았지만, 그랬다간 이 여자, 쏙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저를 닭 쫓던 개 취급 할 것 같았습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여자지만 그러고도 남을 여자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한 참을 문 밖에서 지키고 있던 전, 아예 장기전을 염두해 두고 책까지 펼쳤습니다.

 

오늘 한 번 끝장을 보자, 나 그렇게 만만한 놈 아니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놈이다. 누가 이기나 보자!’

 

오기가 치밀었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저 정말로 한 번 죽었다 살아난 사람입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끈질긴 걸로 유명한 놈입니다 저...

쉽게 봐선 안됐죠.

그런 저를 건드린 걸 일생일대의 후회로 만들어주겠노라!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다부진 저의 철야 농성은 채 한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중단되었습니다.

얘기치 못한 손님 때문이었죠.

이번에도 포스트잇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신고가 들어와서 왔습니다. 저희랑 같이 좀 가시죠.”

? 신고요? 무슨 신고요!”

그거야 가보시면 알구요! 이봐! 이 친구 잡아! 끌어내!”

이보세요! 이보세요! 저기요!”

 

 

# B-4. 지옥도(地獄道)

 

 

과거의 저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단어와 단어의 뜻은 정확히 떠올랐습니다.

 

부패한 죽은 자들이 마치 살아 있는 듯 거리를 활보하는 것

 

창문 밖 세상이 그러했습니다. 온 몸이 썩어문드러진 시체들이 도로 위를 누빕니다. 피투성이가 된 망자가 허기진 얼굴로 골목을 헤메입니다. 팔 없는 노인이 창백한 얼굴로 전봇대 앞을 서성입니다. 살아있는, 그러니까 정상적인 사람은 모습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온통 좀비뿐이었습니다.

 

! 설마 그래서 난...”

 

그제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왜 어두운 방 안에 갇혀 있는지. 두터운 커튼은 어떠한 이유로 창문을 가려야만 했는지. 애타게 불러도 왜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지.

제가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모든 궁금증의 이유 말입니다.

 

어쩌면 나는 갇힌 것이 아니라, 보호받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기억을 잃었지만 바보가 된 건 아니기에 답은 간단했습니다.

 

좀비로 가득찬 세상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그것은 어린 제 생각엔 꽤나 합리적인 추론이었습니다.

저는 절망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나갈 수도 없고, 혹 나간다 해도 좀비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어린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막막하고 불안했습니다. 어찌나 걱정이 되던지 허기조차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구조의 손길조차 포기한 채 울고 있을 때였습니다.

희망의 빛을 향해 손을 뻗기는커녕 어둠속에 주저앉아 절망을 곱씹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니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그만 좀 울어. 듣고있자니 나까지 짜증나니까.”

 

 

#A-5. 후안무치(厚顔無恥)

 

자기 나타나 저를 끌고간 사람들의 정체, 그들은 바로 경찰이었습니다. 왠 정신병자가 나타나 스토킹을 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나요? 저로선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파출소까지 끌려온 것도 그렇지만 오늘 밤 10시가 바로 저의 지방직 공무원 시험 필기 합격자 발표 시간이었거든요.

 

아저씨 저 억울해요. 제가 어딜봐서 스토킹을 하게 생겼어요!”

에이! 내가 짭새생활 십년인데, 딱 보면 사이즈가 나오는데, 어딜보자... ... 꼬질꼬질한 후드티 하며, 김치국물 묻은 츄리닝, 거기에 떡진 머리... 여기 써있네 나 스토커 맞음

! 진짜 이 아저씨 생사람 잡네! 저 선량한 공무원 수험생이에요. 고시원 생활하는 사람이 어떻게 맨날 옷을 빨아 입어요. 그래요 늦잠 자서 오늘은 머리 못 감았어요. 따듯한 물도 잘 안나오고! 그런데 그게 죄는 아니잖아요! ?”

어허 소용없어요. 일단 센터로 신고 접수됐으니까. 우리도 나중에 뒷 탈 없을라면 확인을 해야지! 아니면 신원을 보증해 줄 만한 보호자를 데려오시던가!”

제가 성인인데 보호자는 무슨 보호잡니까! 저희 부모님 지방에 계셔서 못 와요. 그리고 이런 일로 어떻게 부모님을 불러요! 아 답답해! 됐고! 그 여자나 불러주세요.”

누구?”

누구겠어요. 절 스토커라고 신고한 그 후안무치한 여자죠!”

안그래도 지금 오고 계시니까. ! 저기 오네. 저 분이요. 잘됐네! 둘이서 양자대면을 하든, 지지고 볶든 알아서 하슈.”

아 진짜!”

 

경찰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파출소 문이 열리고, 어디서 본 듯 만 듯 애매하게 생긴 여자 하나가 젊은 순경을 대동한 채 나타났습니다.

낡고 두터운 패딩점퍼에 며칠은 빨지 않은 듯 얼룩진 츄리닝과 옅은 메이크업 위로 송송 돋아난 주근깨!

억울했습니다.

누가 봐도 조금 전 제가 들은 스토킹 용의자의 데칼코마니였으니까요.

 

으잇!”

 

째려봤습니다. 자신이 보기에도 민망했던지 경찰은 시선을 피하더군요. 그 모습에 또 한번 분노가 휘몰아친 저는 소리쳤습니다.

 

! 307! 너 미쳤어! 누가 너 따윌 스토킹해!”

어머 무서워라. 간 떨어지는 줄... 아저씨 보셨죠? 스토커 맞잖아요. 그럼 전 이만...”

 

기가 차더군요. 저를 보자마자 가증스런 연기를 선보이며 내빼는 꼴이란, 화가 나는 걸 넘어서 그냥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결자해지는 커녕 일단 내빼고 보자는 두소지인의 작태

뚫린 입이라고 경찰 앞에서도 거짓말을 늘어놓는 후안무치함

저는 확신했습니다.

307호 저 년... ..이라고...

그나마 다행인 건 도망치려던 307호를 경찰이 막아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안됩니다. 신고하셨으니까 조서 작성할 때 계셔야 해요.”

제가 사실 국가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큰 시험을 쳐거든요? 근데 그거 발표가 오늘이에요 빨리 집에가서 인터넷으로 합격발표 확인해야 되요. 그러니까 조사는 알아서 하시고, 저한테는 결과 통보만! 하하하 부탁드립니다.”

이봐요 아가씨. 무슨 큰 시험이길래 그래요? 사법고시라도 보셨수?”

... 그게... 비슷은 한데 그거보다는 조금 작은

행정고시?”

아니요. 그보단 조금 더 작은...”

“7급 공무원?”

꼭 급수가 중요한가요?”

“9급이구만? 에이 난 또 뭐라고! 쓸데 없는 소리 말고 거 앉아요. 합격자 발표는 낭중에 돌아 가셔서 봐도 되니까. 그리고 확인 안 한다고 붙을 사람 떨어지고 그러지 않아요!”

... 그게 아니고... ! 용서하겠습니다.”

? 용서?”

... 너그러운 마음으로 제가 저 사람을... 아니 스토커를...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용서하겠습니다. 그럼 됐나요?”

읍참마속 : 아끼던 마속이 군령을 어기자 제갈량이 슬픔을 참으며 목을 베었다는 고사성어로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법을 엄정히 지킨다는 뜻.

 

경찰도 저도 황당한 얼굴로 그 여자를 쳐다봤습니다. 읍참마속이라뇨. 용례도 틀렸지만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입니까? 그건 누가봐도 구린 구석이 있어 도망치려는 꼼수임에 틀림 없었습니다.

그러자 다행히 경찰도 완강해졌습니다.

 

어허! 그건 안돼지! 신고를 해서 사람까지 잡아다 놨는데, 이제와 용서라뇨. 이봐요 아가씨 스토킹 범죄가 얼마나 큰 죄인 줄 알아요? 어설프게 봐줬다가 나중에 정말 큰 일 난 사람 많아요. 자 봐요 아가씨 이 사람 맞아요?”

... 아니... ... ... 그게...”

겁먹지 말고 잘 한 번 봐봐요. 정말 스토커면 내가 다시는 사회에 발 못 붙이게 깜빵에 쳐 넣고 말테니!”

 

당혹스러웠습니다. 제가 무슨 죄가 있다고 깜빵을 갑니까? 하지만 마음 한 편으론 두려웠습니다. 저는 잘 못이 없지만 아시다시피 이 여자 살짝 돌..이 아닙니까? 이거 된통 잘 못 걸려서 위증이라도 했다간 무언가 골치 아파질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마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 빨간 줄이라도 갔다간... 공무원시험은 영영 바이바이입니다. 제 지난 2년간의 노력도 물거품이 될테구요.

그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구겨졌습니다.

 

얼래? 이 친구 인상 쓰네! 아가씨 겁 먹지 말고 소상히 말해봐요. 이 사람이 그 스토커 맞죠? 찬찬히 봐요! 내가 책임지고 감옥소 보낼테니까. 이 친구도 공무원 수험생이라던데, 그런 사람은 시험 못 게 해야지!”

 

물론 그건 공시생이었던 그 여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감옥이요? 시험을 못... 허헉!”

그려, 잘 봐요! 겁먹을 거 한 개도 없슈

... ... ... ...”

 

그때였습니다.

별안간 와락, 그녀가 저를 끌어 안았습니다.

 

반갑다 친구야!”

 

이게 대체 뭔 시츄에이션일까요? 경찰서에서의 난데 없는 프리허그,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뿌리쳐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향긋한 샴프냄새가 코를 스칩니다.

물컹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부드러운 무언가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미쳤지 진짜...

이럴 때 왜 하필!

 

두근!’

 

제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그 여자 말하기를...

 

제가 사람을 잠시 착각을 했었나봐요. 하도 오랜만에 만나다보니까 잠깐 헷갈렸네요. 사실 이 쪽은 제 친구고, 스토커는 다른 사람입니다. 자 그럼 저는 이만...”

여봐 아가씨! 스토커가 문 앞을 지키고 있어서 나가질 못 한다고 신고 할땐 언제고 갑자기 뭔 친구야! 그리고 친구하기엔 나이차이가 좀 져 보이는데?”

그러니까요. ! 나의 실수! 그리고 사람이 만나 친구하는데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이 반가워라! 그럼 수고하십시오.”

아니 뭐... 실수고 신고자 본인이 취하하시겠다면야...”

 

또 다시 내빼려는 그녀, 경찰들도 모두 황당하다는 표정입니다. 물론 제일 어처구니가 없었던건 저지만요. 법적인 용어로 신고자의 취하’, 그렇게 상황은 일단락 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여자 입장이지, 저 까지 회자정리에 동의 한 건 아니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저 이미 한번 죽었다 살아난 놈입니다. 만만한 놈이 아니란 얘기죠. 상황이 뒤집어졌으니 당연히 제가 역공에 들어갈 찬스 아니겠습니까?

왜 그런 말 있잖아요.

 

인생은 실전이야 이 만아!’

 

이번엔 제가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저 여자, 제가 신고하겠습니다. 무고죄로요!”

? 이건 또 뭔일이래?”

신고하겠다고요. 스토커도 아닌데 스토커다 뭐다 뻔히 알면서도 신고해서 불쾌감을 준 저 여자... 이번에 제가 신고하겠습니다. 다 지켜보셨으니까 여러분이 증인입니다.”

 

보셨어야 합니다. 제가 무고죄로 역공에 들어가자 지어보인 그 여자의 표정을요.

이건 뭐 사이다가 따로 없더군요.

황당 + 당혹 + 두려움...

저는 말했습니다.

 

무고죄도... 깜빵 가죠? 빨간 줄 가냐구요.”

... 그야 그렇지만... 이거 참...”

 

붉으락푸르락,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깜빵이야기가 제 입에서 튀어나오자, 그 여자 표정이 가관입니다. ‘어머 어머!’ ‘어쩜 어쩜!’ ‘아 놔!’ 쌍욕만 안나왔다 뿐이지 손을 쥐락 펴락, 발을 동동, 안절부절 못하며 혼란의 싸대기를 쳐맞은 얼굴입니다.

그러더니 역시나 그 추잡한 본색을 드러내고야 맙니다.

 

! 306호 실수라잖아 실수! 그게 어떻게 무고죄야!”

아닌 걸 뻔히 알면서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하면 무고죄야. 넌 그것도 모르냐? 이따가 시험결과 보지마라. 내가 보기에 넌 100% 불합격이니까! 애당초 붙지도 못했겠지만 재수 좋게 붙었어도, 교도소 수형으로 인한 면접 불참! 임용탈락! 무슨 말인지 알아 들어?”

어머! 어머! 어쩜 어쩜! ... 나 황당해서! 야 나 공부 되게 잘하거든? 교도소? 그리고 너 언제 봤다고 반말이니?”

 

사실 정말 궁금한 건 제 쪽이었습니다. 이 여자, ‘대체 몇 살일까?’ 그리고 뭘 처먹길래... 말투가 하나같이 저렇게 이쁠까?’

그 순간 답을 알겠더군요. ‘어처구니이 여자는 필경 노량진 명물인 컵밥 대신 어처구니를 삶아 먹은게 분명했습니다.

보세요. 반말은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요.

 

그러는 넌 언제봤다고 반말인데? 몇 살이나 먹었냐?”

먹을만큼 먹었다 왜! 민증깔까? ?”

그래 까자... ㅇㅇ년생인데, 너 몇 년생이야!”

어머 어머! 넌 나잇살이나 먹고 여자 나이 물어보는 게 실례라는 것도 모르냐!”

 

역시나 어처구니, 어처구니... 요즘 홈쇼핑에서 어처구니도 팝니까? 레토르트 포장으로 365일분 39,900, 그거 사서 국 끓여 먹는 겁니까? 지가 먼저 까자 해놓고 실례라니요?

순간 이제까지의 사이다는 말끔히 사라지고 가슴 속 깊은 곳까지 고구마가 치밀어 먹먹합니다. 뒷 골이 땡깁니다.

 

! 니가 먼저 민증까자고... 아우! 열받아! 아저씨 여기 나이 확인되죠? 쟤 한 번 찍어봐요 몇 살인가! 몇 살이나 처먹었길래 저렇게 안하무인인지 한 번 좀 봅시다.”

 

황당해진 전 경찰 아저씨에게 달려들어 말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더군요. 공무원을 지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특유의 몹시도 귀찮고 짜증스런 표정으로 복지부동의 자세를 견지합니다.

 

에이... 파출소가 무슨 흥신손줄 알아요? 여자분이 오해라니까 대충 풀고 화해하는걸로 끝냅시다. 무고죄는 뭐 뉘집 개 이름인가? 어이 김 순경 이 분들 보내드려.”

아니!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상황의 A, B, C, D를 다 보시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나오냐구요! 무고죄는 큰 죕니다. 제 인생이 박살 날 뻔 했다구요!”

 

화가 났습니다. 시민의 권익이 침해됐는데도 유야무야, 이게 대체 말입니까 방굽니까?

 

허허 이것 참! 두 사람 혹시 애인 사이 아녜요? 괜히 싸우고 여기와서 이러는 거 아니냐고! 그러고보니까 두 사람 입은 옷도 얼추 비슷헌게... 잘 어울리네! 사랑싸움은 근처 공원에 가서 하고, 이거는 좋게좋게 화해한 걸로 끝냅시다.”

? 뭐요?”

아저씨 미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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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이해를 위해 부득이하게 이성경씨의 이미지를 차용하였을 뿐, 극의 내용과는 무관합니다.

 

불만의 목소리가 또 한 번 이구동성(二口同聲)으로 터져나왔습니다. 그럴만도 했죠. 이런 막되먹은 여자랑 연애라뇨. 차라리 평생 모태솔로로 늙어죽을 지언정 이 여자는 아닙니다.

황당해진 저는 흘깃 그 여자를 쳐다봤는데

참 나...

지가 뭐라고 그 여자도 저를 째려보더군요.

 

이건 뭐 누가 기분나빠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고...”

누가 할 소릴... 누가 할 소린데!”

아 진짜 이 여자가 정말!”

왜 한 대 때리게? 때려... 고시원 생활 힘든데 나도 소고기 좀 먹어보자!”

 

그 여자가 먼저 머리를 디밀었습니다. 제 정수리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줄도 모르고 제 옷에 머리를 비비더군요. 마음 같아선 꿀밤이라도 한 대 먹여주고 싶지만 참았습니다.

차마 여자를 때릴 순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정말 돌겠더군요.

 

어휴... 이 돌..! 천하의 상 돌..!’

 

그래서 참다 못해 한 마디 내뱉었습니다.

 

어휴... 이게 진짜 뚫린 입이라고...”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역반하장 그녀가 다시금 반격을 불씨를 지핍니다.

 

! 어차피 잘못한건 니가 먼저 아냐?”

내가 뭘?”

니가 먼저 나보고 후안무치라매? 치매야? 기억 안나?”

... 내가 언제...”

 

안나긴요. 또렷이 기억 납니다.

 

[후안무치(厚顔無恥), 피차 공부하는 입장인데 곰곰이 한 번 되새겨 보길 바랍니다. 선공후사(先公後私) 하시오. 수수방관(袖手傍觀)한다고 원망말고]

 

하지만... 그게 왜?

 

어라라? 이 인간 이거 오리발 내미는 것 좀 봐. 니가 그랬잖아. 니가 결자해지니 어쩌니 하길래 내가 고칠줄 몰라서 고쳐놓으면 나중에 일반천금 한다고 했어 안했어. 그러니까 뭐? 후안무치? 니가 그랬잖아! 니가! 내가 얼마나 기분 나빴는지 알아?”

 

후안무치... 그렇습니다. 제가 먼저 하긴 했습니다.

그러...!

멀쩡한 벽에 구멍을 내놓고 니가 고치라는 작태에 화가 안나면 어디 그게 사람입니까? 그리고 후안무치, 그게 딱히 좋은 뜻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쌍욕도 아니잖습니까.

하여 저 역시 막바로 반격에 돌입했습니다.

 

! 그러는 너도 계명구도 했어 안 했어!”

했다 왜! 그래서 너는... 두소지인이라고 했어 안 했어? 그리고 계명구도는 니가 아니라 벽 고치는 재주를 가리킨거야! 주어가 니가 아니라고! 하지만 두소지인은 명확하게 나! 나를 지칭하는 거야! 그러니 내가 얼마나 기분 나빴겠어! 그래 안 그래!”

 

갑작스런 주어 불일치 공격, 당혹스러웠습니다. 게다가 그 여자, 흥분조절장애까지 있는지 벌개진 얼굴로 느닷없이 경찰들을 향해 소리칩니다.

 

아저씨! 저도 고소할래요. 저 인간이 무고죄면, 나는 모욕죄로 고소할랴요. 후안무치, 두소지인... 증거도 모두 제 방에 있습니다. 야 너 이제 됐어!”

 

아십니까?

혈압이 빡! 오르고 뒷골이 빡! 땡기는 그 기분...

게다가 그 여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런 저한테 결정타까지 날립니다.

 

야 니 인생이 불쌍해서 이 누나가 딱 한 마디만 할게. 인생은... 실전이야 이 만아!”

 

 

#B-5. 조우(遭遇)

 

랐습니다. 고요를 깨뜨린 최초의 울림이자 깨어난 이후 처음 듣는 사람의 목소리였으니까요.

 

어디지?”

누구세요?”

저 여기있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저는 다급히 일어나 소리가 들려온 곳을 찾았습니다. 겨우 찾아온 희망의 손길을 뿌리칠 순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목소리 또한 더 이상 들리지 않았습니다.

 

헛 것을 들었을까?’

 

그때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창문이야 창문!”

 

저는 다급히 창문으로 다가갔습니다. 조금 전 제가 창 밖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조차 잊은 채로요.

하지만 역시나 보이는 것은 온통 좀비들의 행진뿐입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중 하나, 긴 머리에 피묻은 노랑 원피스를 입은 누나가 저를 바라봅니다. 눈이 마주쳤고, 순간 얼어버렸습니다.

그 누나 손가락을 들어 저를 가리킵니다. 그러자 누나 주변의 좀비들도 일제히 저를 바라봅니다. 저를 잡아 먹으려는지 팔을 허우적거리며 난동을 부립니다.

 

으아악!”

 

겁을 먹은 저는 주저앉았고 추위보다 더 무서운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소리를 낸 건 사람이 아니라 나를 잡아먹으려는 좀비였을까?’

세상이 정말 다 좀비 투성이가 된 거야?’

난 이제 어떻게 하지?’

 

두려움은 점점 커져만 가는데, 이 곳을 탈출할 어떤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지쳐 포기하려 할때쯤, 목소리의 주인공은 경망스러운 웃음과 함께 다시금 말을 걸어왔습니다.

 

깔깔깔... 놀라기는 너 깨어난지 얼마 안 된 모양이구나?”

 

보이진 않지만 제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같은 웃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리는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벽 반대편에서 들려왔습니다.

저는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대꾸했습니다.

 

맞아. 나 이제 깨어났어. 무서워 죽겠어. 나 좀 도와줘 창밖에 온통...”

죽은 사람들 뿐이지?”

 

상대가 볼 수 없을거라는 걸 알면서도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그 애는 안심하라는 듯 말했습니다.

 

나도 이렇게 되고 처음 창 밖을 봤을 땐 너처럼 놀랐어. 하지만 걱정마! 네가 밖으로 나가지만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그 사람들은 여기 오지 못하니까. ”

그게 정말이야.”

속고만 살았니?”

... 그럼 다행인데... 대체 어떻게 된 거니?”

몰라!”

몰라?”

그래 몰라!”

?”

10살이거든? 알파벳도 다 못 외운다고. 더 설명해야하니?”

... 아니...”

그럼 됐어.”

그래도 다행이다.”

뭐가? 거기 있는 거? 아니면 죽은 사람들이 집 밖을 배회하는거?”

 

목소리가 날카로웠습니다.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로선 그 애의 비위를 거슬릴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뭔데.”

친구가 옆에 있어서...”

? 깔깔깔깔

 

아이는 제 대답이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한 참을 웃어댔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지나 아직 웃음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미안... 나도 깨어난 이후로 통 웃을 일이 없어서 말야. 히히힛. 친구? 너 지금 친구라고 했니? 그럼 너도 10? 그런거야?”

.”

친구... 그 말 참 오랜만에 듣는다. 구질구질하다며 내 가방을 쓰레기통에 버린 영환이나 싸구려 옷이 거슬린다며 매직으로 칠해버린 지수가 자주 하던 말인데 그거... ‘선생님, 친구끼리 장난친거예요.’ ‘얘 너는 친구들이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오바하지마 얘!’ 설마 너도 그런 의미니? 그래?”

 

좋은 뜻으로 던진 말이었음에도 아이는 매우 차갑고 냉랭한 말투로 저를 윽박질렀습니다.

이해도 안되지만, 그런 의도 역시 없었기에 저는 다급히 대답했습니다.

 

! 아니야! 절대 아니야. 니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

! 알았으면 그랬을거란 얘기잖아. 그건!”

그렇지 않아. 정말이야. 믿어줘!”

됐어. 누가 너랑 친구한데? 나 아무하고나 친구 안 하거든.”

... 그럼 뭐라고 불러?”

?”

... 굳이 불러야 한다면... 누나! 그래 누나가 좋겠다. 누나라고 불러!”

나이가 같은데 왜 누나야! 친구지

필요 없어 내 맘이야! 싫은 말고! !”

 

당황스러웠습니다. 나이가 같은데 친구가 아닌 누나라 부르라니, 생떼도 이런 생떼가 없습니다. 저는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했지만, 아이는 마치 제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멋대로 토라져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따라 입을 다물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 편으론 그 애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반부로 이어집니다.)


p.s 너무 길죠? 예전에 썼던 엿보기구멍이란 소설을 조금 말랑말랑하게 고쳐써봤습니다.

이야기 두개가 같이 진행되어 정신없으시다면, 제 능력 부족입니다. 이해바랍니다.

올리면서도 이건 길어서 보실 만한 분 몇 없겠구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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