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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5
게시물ID : history_128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4
조회수 : 200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2/07 02:17:25
 
- 이어지는 권력싸움 -
 
양준 일파를 숙청하고 어느덧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 가남풍(賈南風)은 양준과 같이 나름 정치적으로 거물이라 여겨지는
인사들에 대한 칼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대표적 인물들이 저번에 언급한 사마량(司馬亮)위관(衛瓘)이라는 중신이다.

사마량은 사마의의 네번째 아들로 황실의 웃어른 격이자 그의 관직또한 태재(太宰)라 하는 고위직이었는데다
죽은 양준과 함께 무제 사마염의 탁고대신이었으니 그 명예와 권력이 실로 컸다하겠다.

위관은 삼국지연의에서는 그저 촉(蜀)을 정벌할 때 위(魏)의 무장으로 나오며 강유를 죽이라 명령하는
일개무장으로만 등장하지만, 이후 진(晉)을 섬기고 나서는 고위직들을 역임, 무제 사후에는 혜제 사마충을 보좌하는
원로대신으로서의 입지가 컸다.

이렇듯 각각 황실과 조정에서 원로로 여겨져지며 당대의 존경과 우러름을 한몸에 받는 거물이 두 명씩이나
정계에 버티고 있으니 장차 권력을 손에 쥐려하는 황후 가남풍에게 있어선 이 두명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제거할 마땅한 구실이 없어 마냥 있는차에 기회가 저절로 굴러들어온다.

 4편에서 등장한 바 있는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가 그 구실이었다.
비록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양준 일파를 숙청했다고는 하지만 사사로운 원한으로 죽인 감도 없잖아 있다고 밝힌 바 있는
사마위는 성격이 모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인품 탓에 주위로부터 미움을 사는 것은 당연지사였을 터.
사마량과 위관과도 알력이 있었다고 한다.

사마량 같은 경우에는 역적(양준을 말한다)을 주살한 일에 공로가 있다하여 위장군(衛將軍)이라 하는 황궁에서의
군 통수권직을 받은 사마위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한다하여 혜제 사마충에게 건의해 다른사람이 대신하게 하고
사마위는 다시 봉국으로 되돌려보내버린 적이 있어 사마위의 원한을 샀고,

위관 역시 평소 사마위의 살인마 본능을 꺼려하여 사마량과 함께 사마위의 직위해제에 동참,
사마위의 힘을 깎으려는 의도로 사마위의 심복신하들 몇명을 잡아들여 역시 사마위의 앙심을 사게 된 바 있었다.

그런데 위관이 잡아들인 사마위의 심복들 중 하나가 몰래 가남풍과 접촉하여 사마량, 위관이 혜제 사마충을
폐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구라를 쳐버린 일이 화근이 되었다.

근거도 없을 이 참소가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던게 뭐냐면, 일찍이 위관은 무제 사마염에게 황제의 자리가
태자시절의 사마충에게는 과분하다고 돌려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태자를 교체할 것을
건의한 이도 위관이고.

그리고 가남풍과도 어느정도 알력이 있었는데, 가남풍이 태자시절의 사마충과 혼인얘기가 오가던 때에
위관의 딸도 태자비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린 바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남풍의 아버지 가충(賈充)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정적이었으니.. 결국에는 가남풍이 태자비로 간택되어 위관과 가충 간의 감정의 골은 더 깊어지게 된다.
아버지 가충과 대립하던 정적이었으니 가남풍에게는 나름의 증오(?)가 있었을 수도.

하지만 설사 이런 과거의 일들을 논외로 한다해도 가남풍은 역모를 획책했다는 썰만으로도 사마량과 위관을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그 밀고를 들은 가남풍은 몰래 살인머신 사마위에게 황제의 조서를 가장한 거짓밀명을 내려 사마량과 위관을 주살할 것을 명한다. 

그렇잖아도 봉국에서 이만 갈고 있었을 사마위는 그 조서를 받자마자 얼씨구나 냉큼 사병들을 이끌고
사마량과 위관의 집으로 쳐들어가 일을 끝내버린다.

가남풍은 이렇게 다시한번 차도살인의 계로 목적을 달성한다.

한편 사마위로서는 이 공로(?)로 '도독중외제군사(전국의 군권을 모두 통솔하는 최고의 통수권자 직)' 라 하는
거창한 벼슬을 받은데다 개인적으로 사무친 원한도 풀어 일석이조라 했겠지만,

이 사마위도 역시나 가남풍의 숙청대상이 된다.

위에서 말했듯 사마량과 위관을 죽일 때 가남풍은 황제의 거짓조서를 내렸다고 했다. 즉 애시당초 그 두 중신을 죽이라는
명령은 존재하지도 않는 명령이었단 소리다.

하룻밤 사이에 두 원로대신이 끔찍하게 살해되었다는 뉴스가 장안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조정에서도 논란이 불거지자 사마위를 처벌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게 된다.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가남풍은 남편 혜제 사마충으로 하여금 사마위를 처단하라는 조서를 내리게 했고,
이에 혜제는 조서를 내려 '조서도 없이 두 원로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참살한 사마위를 처단하라' 라 명령,
황실의 금군이 사마위의 집으로 들이닥쳐 사마위를 죽여버린다.

이 모두가 가남풍의 계산대로 놀아난 연극이었다.
애시당초 가남풍은 사마량과 위관은 물론이고 장기 판의 말에 불과했던
사마위까지 모두 없애버릴 심산이었음을 알 수있는 대목이다.
 
이 사건을 통해 적어도 '중앙'에서의 가남풍의 정적은 사실상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해진다.
 
 
 
- 가남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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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남풍 전도
 
앞에서 계속해서 가남풍이 궁중에서의 음침한 권모술수에 능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진(晉)의 건국 시조들 중 하나인
사마사(司馬師) 시절부터 사마씨의 참모이자 책사로서 각종 권모술수로 사마씨를 도와 위(魏)를 멸하게 되는
일등공신으로 활약했던 아버지 가충(賈充)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인지, 실로 무서운 여자가 아닐 수 없다.
 
 
1) 태자비 시절
 
사실 가남풍은 태자 사마충의 태자비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원래는 가충의 차녀이자 가남풍의 여동생인 가오(賈午)가 태자비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체구가 작아 옷이 맞지 않았기에 결국에는 언니인 가남풍이 태자비 후보로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언니 가남풍이든 동생 가오가 태자비 후보로 올라가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게 2편인가에서 다룬
독발수기능의 난과 관련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추천으로 인하여 외지로 나가 독발수기능을 토벌하게 된 가충이
중앙에서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딸을 태자 사마충과 혼인시키려 했던 일종의 권력유지 수단이었기에, 아버지 가충의 입장에서는
그냥 딸들은 도구..

아무튼, 이렇게 대타로 태자비 후보로 올라간 가남풍은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게 된다.

진 무제 사마염이 태자비를 고를때 당시 권신이었던 위관과 가충의 딸을 두고 저울질을 할 때였다. 최종적으로 위관의 딸을 고르고자 신하들을 불러두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였다.

"위(衛)씨의 딸은 풍채가 크고, 살이 희고 고우며, 위씨의 집안은 대대로 지혜로워 그의 딸 역시 어질고 지혜를 겸하고 있다. 반면에 가(賈)씨의 딸은 키가 작고, 피부는 검고 거칠며, 상이 좋지 못하다. 경들은 어떠한가?"

가충은 자신의 딸이 위관의 딸보다 어질지 못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양(楊) 황후에게 뇌물을 먹여 권신인 순의와 순욱을 움직이게 하였다. 순의와 순욱은 사마충이 워낙 백치이므로 미인이 황태자비가 되면 후에 바람날 것이라며, 지독한 추녀인 가남풍은 자기가 추녀임을 알고 있으므로 백치 남편에게 만족할 것이다라며, 가남풍이 더욱 좋다고 진 무제를 설득하였고 결국 진 무제는 가남풍을 훗날, 진 혜제가 되는 사마충의 태자비로 책봉하게 된다. 하지만 후일 이 백치남편에게 만족 못 한 가남풍은 추녀인 주제에 애인을 두었다. - 진서
 
고대 중국에도 외모지상주의는 존재했는 모양이다. 까딱하면 못난 외모 탓에 출세는 물 건너 갔을 가남풍이다.
 
결국 가남풍은 태자비로 간택되었고 태자 사마충과는 연상연하 커플이 되었다.
가남풍이 15세, 사마충이 1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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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제 사마충 초상화
 
그리고 태자비가 되고 나서부터는 그 진면목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가비(賈妃)의 천성은 몹시 잔학해, 일직이 손수 여러 사람을 죽였다. 혹 극(戟)을 임신한 첩에게 던져, 태아는 병기를 따라 땅에 떨어진 경우도 있었다. 무제(사마염)가 이를 듣고 대노해, 이미 금용성(金墉城)을 손질했으므로 장차 그곳으로 그녀를 유폐시키려 했다. - 진서 혜황후전
 
남편 태자시절의 사마충이 첩을 들여 애까지 갖자 빡친 나머지 저런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극(戟)은 한자를 검색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창이다..
성격은 파탄난데다 궁중에서의 어두운 권모술수 쪽으로는 또 머리가 잘 돌아가 무섭기까지 하다.
 
가남풍의 음험함은 그녀의 남편 사마충을 다루면서 한번 언급한 바 있다.
 
무제 사마염이 태자 사마충의 능력을 재보기 위한 시험에서 시아버지 사마염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에 알맞게 대처한 이도 가남풍이다.
 
다들 눈치채셨다시피, 이는 곧 남편 사마충을 무탈하게 황제로 만들기 위함이며 당시 태자비 시절에 그런 야심이 있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추후 황후가 되서의 행보로 미루어 보아 본인 역시 황후가 되고자 그런 일을 벌였으리라고 추측된다.
태자 남편이 무능아 수준이니 권력욕 많은 아내 태자비 입장에서는 그럴 바엔 차라리 남편을 황제의 자리에 앉힌 후에
황권은 내가 누려야 겠다고 다짐했을 수도.
 
또 가남풍의 권력욕을 뒷받침 해주는 설이 하나 존재하는데, 바로 가남풍이 사마염의 동생 사마유(司馬攸)를 독살했다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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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1편에서 이미 나온 삽화.
그때는 오른쪽의 사마소(司馬昭)가 다루는 인물이었지만
이번에는 왼쪽의 사마유가 주인공이다.
형 사마염이 후계자로 삼을 생각을 했을 만큼, 이 글에서 나오는
진(晉)의 황제들 및 황족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정상적인 인물이다.
 
4편인가에서 짤막하게 언급했던 일이기도 하다. 애초에 사마충이 황제가 될 재목으로 보이지 않자, 사마염이 차라리 차라리 자신의 동생,
사마유를 후계자로 삼아 황위를 물려주려 했다는 얘기.
 
사마유는 어릴적부터 할아버지 사마의(司馬懿)가 총명하다 여기며 귀여움을 받았고 아버지 사마소도 그런 사마유의 재목됨을 알아보고
몹시 사랑하고 아꼈다고 한다. 인품이 온화하고 겸허했으며, 어진 이들을 아끼는 성품으로, 문무에 고루 능하여 그 재주와 덕망이
형 사마염을 앞설 정도라고 평 될 정도였던 데다 사마소가 죽을 때 후계자로 장남 사마염과 차남 사마유를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결국에는 장유유서의 원칙에 따라 사마염이 황제가 되지만..
 
아무튼, 이토록 뛰어난 능력의 사마유였기에 형 사마염이 사마유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을 갖게 되자
이를 알아차린 가남풍이 독살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썰'이다. 근거도 증거도 없다.
그냥 가남풍을 깎아내리려고 지어낸 것 같다. 이런 설이 나도는 이유는 그저 사마유가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설이 존재할 만큼 가남풍의 권력욕을 탐하여 벌인 악행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았다는 얘기다.
 
 
2) 황후가 되고나서
 
 
서기 290년, 시아버지 사마염이 사망하자 남편 사마충이 제위에 오르고 가남풍 역시 황후가 된다.
그리고 황후가 되고 나서의 아름다운 짓거리에 대해서는 위에서 길게 서술했다.
 
그렇게 정적들을 제거하고 비로소 대권을 쥐게된 가남풍은 우둔한 남편 혜제 사마충을 제쳐두고 정치를 한다.
이때부터 가남풍의 가문인 가(賈)씨들이 득세하게 되는 것이다. 친척들이 졸지에 살판이 나 죄다 한자리씩 꿰찬다.
 
이때 등용된 가씨 일족이 워낙 많은지라 가밀(賈謐)이란 사람을 예로 보겠다.
가밀은 본래 가남풍의 외가쪽 조카였는데 숙모가 하도 잘나가자 빌붙을 생각으로 성씨까지 갈아서 가씨로 개명했다.
 
가후(가남풍)의 모친 광성군(곽씨)의 양손, 가밀은 국사에 간여해, 권력이 임금과 대등했다. - 진서 혜황후전
 
그리고 성씨 갈은 효과를 톡톡히 보게 된다. 그리고 충실하게 숙모의 앞잡이 역할을 하며 권세를 누리게 된다.
가씨일족의 한낱 한사람의 권력과 임금과 대등했다 하니, 가남풍의 위세는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소위 말해 외척이 득세한 것이다.
 
 
가남풍의 별난 짓 중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음탕함이다.
 
 
가남풍은 서기 256년 생이다. 그리고 황후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나이가 34세.
이런 말 하기 좀 그렇긴 하지만 여자의 성욕이 제일 불타오른다는 30대 초중반의 나이대다.
한마디로 한창일 때인데, 가남풍의 입장에서는 애석하게도 남편인 혜제 사마충이 남편구실을 못하는 저능아였기에,
그 욕구를 풀데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고안해낸다.
 
낙양(洛陽) 남쪽에 도위부(盜尉部)의 소리(小吏 : 하급관리)가 있어, 단정하고 아름다운 용모와 행동거지를 가졌었는데, 무덤의 요역을 공급하고 나서, 홀연히 예사롭지 않은 의복을 입었기에, 무리는 모두 그가 절도했다고 의심했고, 위(尉 : 일종의 무관관리)도 의심하여 이를 바로잡으려 했다. 가후(賈后 : 가남풍)의 먼 친속이 도둑맞은 물건을 구하고자 하여, 가서 들으며 조사를 했다. 소리가 이르길,

"이전에 가다 한 늙은 여자를 만났는데, 집에 질병에 걸린 이가 있어, 무당이 의당 성 남쪽의 소년이 이를 막을 수 있다고 일렀기에, 잠깐 일을 부탁하고자 하는 거라며, 반드시 큰 보답이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가니, 수레에 올라 휘장을 내리고는, 대나무 상자 안에 들어가게 하고, 10여 리 정도 가니, 6, 7개의 문을 지나서, 상자를 열었는데, 높은 궁전과 아름다운 집이 갑자기 보였습니다. 어디냐고 물으니, 천상계라고 이르며, 곧 향탕香湯으로 목욕시켰고, 좋은 옷과 맛난 음식이 장차 들어왔습니다. 한 부인을 보니, 나이는 35, 6 정도로, 작고 푸르고 검은 안색에, 눈썹 옆에는 혹이 있었습니다. 남겨져 여러 밤을, 함께 자며 주연을 즐겼는데, 떠날 때 이러한 물건을 선사했었습니다."
 
듣던 이는 그녀의 형상을 듣고, 가후임을 알게 돼, 부끄러워 웃으며 떠났고, 위 또한 의심이 풀어졌다. 당시에 다른 이 중 들어갔던 자는 다수가 죽었지만, 오직 이 소리는, 가후가 그를 아꼈기에, 온전히 나올 수 있었다. - 진서 혜황후전
 
이해 안되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드리자면..
좀 속된 말로 호빠 내지 영계 플레이를 즐겼다는 얘기다. 기록의 내용대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용모와 행동거지' 를 가진 남자들을
데려다가 대접해주며 욕구를 풀었다고, 그러다 그 남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물건 하나를 선물했고 그 남자는 그걸 가져가다가 그걸 본 무관들이
그 물건의 출처를 의심하여 물었더니 남자 曰, "황후께서 주신 건데요?" 이러자 평소 가남풍의 이런 행각을 알고 있던 무관들이 그제서야
이해하며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록의 마지막 줄이 서술해놓았듯, 바로 위의 남자와는 달리 다른 남자들은 궁중에 들어갔다가 다수가 죽었던 모양이다.
 
이런 짓들로도 욕구가 정 안 풀렸는지 다른 파트너(?)를 찾기에 이른다.
 
가후의 음탕함은 날로 방자해져, 태의령(太醫令) 정거와 간음함이 내외에 알려졌다. - 진서 혜황후전
 
'태의'는 한자에서도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의원이다. 그것도 황실 주치의.
 
이렇게 가남풍이 막장이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가남풍과 가씨일가가 막장으로 치닫고 전횡하는 모습을 보면 폭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기록은 이렇다.
비록 암주(혜제)와 학후(가남풍)의 조정이라고 간주하기도 하나, 천하는 이와 같이 편안하였다. - 진서 혜제기
 
즉, 윗놈들끼리만의 세상이었단 얘기다. 백성들이야 오히려 전란의 나날이었던 삼국시대 이후로 통일된 제국이 평안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저 자신을 배부르고 등따시게만 해주어 태평가를 부를 수 있는 시대만 온다면야 누가 지배자가 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혹자는 이 혜제가 암군이었고 가씨 외척들이 득세했어도 혼란기라 말할 수 있는 시나리오인  '세금을 과하게 걷거나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인다'
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다라는 점을 들어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거기다 더 나아가 이건 이후 팔왕의 난이라는 사태를 다루면서 볼 일이지만, 가남풍을 도리어 정변을 노리는 황족들로부터
황권을 굳건히 지킨 인물로 달리 평가하는 이도 있다. 여성이 권력을 쥐었다는 것만으로 눈살을 찌푸리는 유학자들이
의도적으로 깎아내렸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시각의 차이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가남풍의 행적들 가운데 이것만은 분명하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무능한 황제를 세워 추후에 있을 '팔왕의 난' 이라는 근본적 원인을 제공했다라는 것.
 
그리고 이 팔왕의 난으로 인하여 진(晉)은 내란으로 인한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되고 그 연쇄반응으로
나중에는 '영가의 난' 이라는 재앙이 도래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감안할 때, 가남풍이 진(晉)을 무너뜨리는데에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라는 점에서는 변론의 여지가 없다.
 
다음부터 팔왕의 난에 대해 다루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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