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에서 밝혔듯 진(晉)의 지배층인 문벌귀족들이 부정부패에 이은 사치와 향락에 빠지자 황제 사마염도 물들기 시작한다.
치세초기에는 간관(諫官 : 황제에게 직언을 하는 관리)를 두고 한(漢) 왕조 시대의 유교질서를 회복할 것을
정치 모토로 삼는가 하면 사치를 경계할 것을 중요시여겨 이에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이는 등 나름의 성군면모를 보이던 사마염이었으나,
나중에는 "황제인 내가 뭣하러 이렇게 궁상맞게 살아야 하지?" 라는 심보로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치벽을 보인다.
일화 하나를 보자면..
지방관리를 임명하는데에 있어 두사람이 있었다. 한사람은 술버릇이 심한 사람이었고, 다른 한사람은 사치벽이 심한 사람이었다.
이에 황제(사마염)는 "사치가 심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술버릇이 심한 것은 고치지 못할 일이다." 라 이르며
사치벽이 심한 사람을 지방관리로 임명했다.
비단 이 일화만으로 사마염이 사치스러워 졌다고 까는게 아니라
역사서에도 다들 사마염의 사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거기다 나중에 가서는 심지어 신하들에게 쓴소리도 듣게 되는데..
이상한 것은 신하들이 마치 사마염이 암군인 것처럼 까댄다는 것이다.
무제(武帝 : 사마염)가 태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오는 길에 물었다. "나는 한(漢)의 황제들 중에 누구에 비교할 수 있는가?"
이에 유의가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영제(靈帝)에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불쾌하여 되묻기를,
"내가 어찌 환제와 영제에 비할 수 있단 말인가?" 유의가 답했다. "환제와 영제는 벼슬을 팔아 번 돈으로 국고를 채웠지만 폐하께서는
벼슬을 팔고도 얻은 돈으로 개인의 국고를 채우시니 어찌 환제, 영제에 비교하겠습니까?" 황제가 이에 웃으며 말하기를,
"환제와 영제 때에는 이렇게 직언하는 신하도 없었는데 나에게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내가 그들보다 낫다."
해석해드리자면...
환제(桓帝), 영제(靈帝)는 후한(後漢)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무능력한 황제들이었다. 그러니 자신을 그들에 비교한 유의라는
신하의 디스에 불쾌함을 드러냈고,이 패기넘치는 유의는 한술 더떠 너는 오히려 환제, 영제보다 못하다 라는 식으로 더 까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마염의 정신승리.
한가지더 소개해드리겠다.
황제(사마염)가 말했다. "나에게는 어찌 제갈량과 같은 신하가 없는가?" 이에 번건과 단작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등애(鄧艾)의 억울함을 알고도 풀어주시지 않으신데 하물며 제갈량과 같은 신하들이 수십명 있다한 들 어찌 감당하오리까?"
등애(魏의 무장)는 삼국지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잘 아시는 무장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등애의 억울함이란,
등애가 반란을 꾀했다하여 사마염의 아버지인 사마소가 역모죄로 죽였는데 이제 와서 그 아들인 사마염에게 등애의 억울함을
풀어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사마염이 제갈량 타령하는데 뜬금없이 등애드립을 치는 건 사마염의 처사에 관해 불만을 갖고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제갈량 수십명이 있다해도 너는 워낙 암군이라 대책없다는 식으로 대차게 깐 것.
대관절 사마염이 정확히 무슨 짓을 벌였길래 저런 일화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물론 유의가 디스한 매관매직이라는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하지만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랴란 말이 있듯이, 분명히 사마염의 맛간행동들로 인하여
저런 일화가 생겼으리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사마염의 저런 나사빠진 행동들이 나라가 휘청걸릴 정도로 큰 악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마염 자체가 무능한 인물이 아닌지라 황제노릇은 제대로 해나갔고 나라도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다만 황제고 지배층이고 다들 고위층들의 정신상태가 해이해졌다라는 것뿐.
문제는 이 사마염의 장남이자 태자였던 사마충(司馬衷)이 뒤를 이어 황제가 되고 나서부터였다.
- 백치황제 사마충 -
A.D 290년, 사마염이 사망한다.
그리고 진(晉)의 제2대 황제로 태자였던 사마충이 즉위하니 이가 곧 혜황제(惠皇帝)다.
사마충이 어떤 황제였는지는 당장 그의 시호에서부터 가늠할 수 있다.
대개 중국 역대 황제들의 시호를 볼때 앞에 '혜(惠)'가 붙으면 우선 별볼일 없는 황제라고 봐도 거의 맞다.
나쁘게는 무능, 그나마 좋게는 매우 평범.
이 사마충이란 인물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있는데 소개해보겠다.
전국에 기근이 들었는데, 백성들이 많이 굶어 죽었다. 황상(사마충)에게 글이 올라왔는데, 황상은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굶어 죽었는지 물어보았다. 답변은 백성들에게 먹을 양식이 없어서 라는 이유였다. 이때 사마충은 "쌀이 없으면 어찌하여 고기를 먹지 않느냐?" 라 물었다.
어디서 들어본법한 레퍼토리의 글이다. 먼 훗날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물은 우문과 똑같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지 그러냐였던가..
밤에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개구리가 울었다. 황제가 시종에게 "저 개구리들은 공적으로 우는가, 아니면 사적으로 우는가?" 라고 물었다. 이에 시종은 "공유지의 개구리들은 공적으로 울고 사유지의 개구리들은 사적으로 울고 있습니다." 라고 답했다. - 진서 혜제기
어딘가 모자라는 듯한 인상을 남기는 일화들인데, 실제로 사마충이 지적장애가 아니었나 하는 설도 존재한다.
흔히 촉(蜀)의 유선(劉禪)과 비교되고는 하는데, 유선은 무능했다뿐이지 멍청하지는 않았다라고 재조명 받는반면
사마충은 그냥 장애인으로 인식되곤 한다.
사마충의 우둔함은 일찍이 아버지 사마염도 알아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과연 이놈이 뒤를 이을 자격이 있는가 싶어 아들을
테스트 해보고자 일종의 시험종이를 주었는데 아둔한 사마충은 당연히 뭐가 뭔소린지를 몰라 벙쪄있었고 그걸 본 간특한 태자비 가남풍이
어느 학자더러 대리시험을 쳐 답안을 보내 사마염이 "이놈이 그렇게 아둔한 놈은 아니었구만." 하고 안심했다 얘기도 있다.
여기서 더 눈길이 가는건 가남풍의 영악함이지만 어쨌든 사마충은 아버지에게까지 의심을 살 정도로 멍청했던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사마염이 동생 사마유(司馬攸)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까지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런 모습도 보여준다.
영안(永安 : 303년) 원년, 동해왕 사마월이 혜제를 끼고 업을 공격했다. 성도왕 사마영이 석초와 함께 탕음에서 격파하고 혜제를 사로잡았다. 그(혜소)는 조칙을 받들어 행재소에 이르러 반란군을 만나 의연히 싸웠다. 황제를 호위하다 결국 적의 화살에 맞아 황제의 곁에서 숨을 거두었고 이때 그의 피가 황제의 어복을 물들였는데, 천자가 이를 몹시 애도했다. 반란이 평정된 뒤 좌우의 신하들이 어복을 빨 것을 청했는데, 황제가 “이것은 충신의 피이니 없애지 말라.” 라고 명했다. - 진서 혜소전
나중에 다룰 팔왕의 난의 한 장면이다. 난리통에 사마충이 혜소라는 신하의 호위를 받아 도망가던 중, 반란군의 무리에게 혜소가 죽자
그 이후에 자신의 옷에 묻은 혜소의 피가 충신의 피이니 옷을 빨지 말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마충의 또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는데, 이걸 보면 앞뒤분간 정도는 할줄 알았던 인물이었던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그 무능함 때문에 자신이 허수아비 황제신세를 면치 못했고 이를 틈타 황후 가남풍을 비롯한
외척 가(賈)씨가 득세하여 대립하던 황실의 사마씨와 외척의 가씨가 대립하여 싸움 붙게 되는 주 원인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권력싸움의 시작 -
혜제 사마충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제국은 평온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즉위한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발생하게 된다.
사마염은 죽기 직전 여남왕 사마량(司馬亮 : 사마의의 4남이니 사마염의 숙부가 된다)과 중신 양준(楊駿) 등의
대소신료들을 모아두고 탁고(托孤)한다. 탁고란 후계자를 잘 돌봐줄 것을 부탁함을 말한다.
황제에게서 그런 부탁을 받았다라는 것은 그만큼 황제의 신망이 두텁고 조정에서의 위치가 높은데다 중신 중의 중신임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양준(楊駿)이란 인물에 주목해야 한다.
이 양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마염의 장인이자 홍농 양씨라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 사람으로서
고사성어 '계륵(鷄肋)' 과 관련있는 양수(楊修)의 친척이기도 했다.
양수(楊修).
삼국지에서는 조조(曺操)가 무심코 내뱉은 계륵(鷄肋)의 뜻을 알아차려
조조의 질투 반 앙심 반을 사 처형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삼국지에서는 그냥 해프닝처럼 지나가는 인물로 나오지만
홍농 양씨라는 명문가의 일원이기도 했다.
앞에서 말한 문벌귀족이란 이런 사람들을 두고 말함이다.
이 양준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 두명(양요, 양제가 그들. 참고로 이 양제는 2편에서 언급하기도 했는데 오 정벌때 관군장군으로 나왔다.
그리고 양요는 딸이 사마염의 후궁이었다)도 다들 한자리씩 고위직을 꿰차고 있어 당시 사람들은 이 삼형제를 '삼양(三楊 : 세명의 양씨)'이라
부르며 그들의 권세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만큼 잘나가시던 양반들이었다는 거다.
위에서 말했듯 양준은 종친의 어른격인 사마량과 함께 사마염으로부터 탁고를 부탁받았는데
문제는 이 양준이 권력에 꽤나 집착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함녕(咸寧 : 서기 276년) 2년 12월, 황후의 부친 진군장군 양준이 거기장군이 되어 임진후에 봉해졌다. 상서 저략과 곽혁이 함께 상표하여 양준의 그릇이 작아 중임을 맡길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황제(사마염)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준이 매우 교오자득하자 호분이 양준에게 충고하여 말했다. "경은 딸을 믿고 더욱 호기를 부리는 것이오. 역대를 두루 살펴보면 황실과 혼인하여 멸문의 화를 당하지 않은 자가 없소. 이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오." 양준이 대꾸하여 말했다. "경의 딸도 황실에 있지 않소." 그러자 호분이 잘라 말했다. "내 딸은 경의 딸에게 시녀로 주었을 뿐이니 나에게 무슨 손익이 있을 수 있겠소." - 자치통감
훗날 양준의 최후에 비추어보았을때, 호분의 조언은 섬뜩하다.
사마염의 유서를 조작하여 정치적 라이벌로 여기던 사마량을 내쫓으려는 시도를 하는가 하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은 내쫓거나
한직으로 내몰기도 했으며 감탄토고라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물들을 위주로 기용하기도 했다.
영희(永熙 : 서기 290년) 원년, 4월 12일에 태위, 태자태부, 도독중외제군사, 시중, 녹상서사로 임명되어 전권을 장악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동생들인 양요, 양제도 각자 한 자리씩 잡는다.
다만 양준과는 달리 양요, 양제는 명망깊은 사람들이었다.
스스로 평판이 좋지 않은 것을 알고 모든 관원의 봉작을 높여 환심을 사려고 했다.
손초가 양준에게 공명정대하고 순리대로 처리해야 한다면서 종실이 강성한데도 그들과 논의하지 않으니 화가 이르는 것이
얼마 안 남았다고 충고했지만 이를 무시했다.
기록에서는 양준 일파의 정치를 '학정' 이라 표현해 놓았다.
이렇듯 전횡하던 양준 일파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는데, 바로 황후 가남풍이었다.
양씨일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져가자 가남풍이 멍청한 남편 혜제로 하여금 양준을 토벌하라는 식의 조서를 쓰게 하였고
가황후(가남풍을 지칭한다)의 일파가 양준 일파에 대한 비난 여론 물타기에 나선 것이다.
사전에 조정신료들로부터 양준을 탄핵하는 지지를 얻어내고는 무제 사마염의 5남인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
즉 혜제 사마충의 동생을 불러다가 양준을 무력으로 제압할 요량으로 중앙에서의 병권을 맡긴다.
얼핏보면 차도살인의 계획이나 평소 사마위가 양준을 싫어하던 탓도 있었다.
양준이 권력을 남용하면서 사마위도 피해를 입었기 때문.
가남풍의 계교에 사마위의 사사로운 원한이 교묘하게 맞물린 계획이었다랄까.
그리고 결국 혜제 사마충의 양준을 역적으로 모는 조서가 떨어지자마자 사마위는 금군을 이끌고 양준의 거처로 찾아가
양준을 죽이고 그 양씨 일가를 도륙내버린다. 이때가 서기 291년. 사마염이 죽은지 1년 남짓 쯤 지났을 때였다.
자고로 역적으로 몰린 집안은 삼족은 물론이요 구족까지 멸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바람에 사마염의 황후였던 양황후도 며느리뻘인 가남풍에게 살해당하고 양준의 형제들이었던 양요, 양제역시 처형당한다.
다만 위에서 밝힌대로 양요나 양제 같은 경우는 형 양준과는 달리 워낙 정반대의 인물들로서 공적이 높고 덕망이 깊다 여겨져 그들만은
죽이지 말자는 상소나 여론이 있었지만 가남풍은 기어코 양씨 일가를 멸하고 만다.
그뿐 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양씨일가와의 관계가 있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은 모두 혐의를 받아 역시 해를 입는다.
삼국지연의에서도 등장하는 문앙, 장화, 왕융, 위관 등.. 당시로서는 선대의 중신들인데도 숙청의 피바람에는 피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피의 숙청을 끝낸 이 모든 계획의 주인공 가남풍은 혜제 사마충 뒤에서의 정치놀음은 그만두고
비로소 정식으로 정치일선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