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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청계천 공사에 관한 짤막한 이야기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28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11/9
조회수 : 85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12/05 10:38:42

어제 쓰던 답글을 보충할 필요성을 체감해서 또 그렇게 하겠다고 말을 하기도 했으니 두서없는 졸필이나마 글을 간략히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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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은 일제 시대에 붙은 이름입니다, 지금의 청계천 상류를 지칭했던 청풍계천淸風溪川를 가져온 말로, 본디 개천開川이라 불리었지요, 뭔가 느끼셨던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열 개開, 내 천川 이라는 이름에서 볼수 있지만 본디 어떠한 하천이 존재 하였다기 보다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하천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아는 청계천은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하천입니다.

더 정확히는 청계천의 전신?은 조선이 개국하고 한양에 도읍을 세운 이래 한양을 가로지르는 저습지를 형성하는 이름없는 물줄기에 가까웠던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 한양이라는 도시가 북한산, 인왕산, 남산등으로 둘러쌓인 분지 지형인데다, 이 시내들이 모여 물줄기를 형성하여 한강으로 흐르는 것이 지금의 청계천이었기에 범람하기 매우 쉬웠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매해 크고 작은 수해를 겪어야 했기에 필연적으로 공사가 따를수 밖에 없었고 그 첫 삽을 뜬 사람이 태종입니다, 


개거 도감(開渠都監)을 설치하고, 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공조 판서(工曹判書) 박자청(朴子靑)·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응(李膺)을 제조(提調)로 삼고, 운하를 팔 기초를 마련하고 전라도·경상도·충청도 3도(道) 군인으로 하여금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게 하였다.

태종 11년 (1411년)


보시다시피 군인을 주요한 연료(....)로 삼았는데, 생각해보면 별도로 역을 지게 할 필요도 없고, 별도의 유지비(....)도 들지 않는다는 군인을 심하게 말하자면 종놈 부려먹듯 부려먹는 지금과 엇비슷한 논리가 성립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막 부려먹는것은 아니고 나름 기준이 있었습니다, 

새벽 4시부터 저녁 10시 사이에만 일하게 하고 쉬게 해주었으며, 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제생원(濟生院) 등 의료 기관으로 하여금 상시 부상자를 치료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징발 대상인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군인들이 한양으로 올라올때 얼어죽지 않도록 행군로 인근 고을에서 숙식을 해결할수 있도록 어명을 내리기도 했지요.

씁슬한게 이게 별도의 명으로 내려질 정도라면 그 이전의 노동 현장의 상황이 어땠는가는 참 상상하기가 그렇습니다, 고려때는 노동 전문 부대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이 개거도감開渠都監은 개천도감開川都監으로 그 명칭이 바뀌는데 그 이전까지 이름이 없었던 물줄기에 개천開川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여기서 유래합니다, 또 하천이 열린다는 이름을 쓸 정도로 대단한 공사이기도 했지요,



하천(河川)을 파는 역사가 끝났다. 장의동(藏義洞) 어귀로부터 종묘동(宗廟洞) 어구까지 문소전(文昭殿)과 창덕궁(昌德宮)의 문앞을 모두 돌로 쌓고, 종묘동 어귀로부터 수구문(水口門)까지는 나무로 방축(防築)을 만들고, 대·소 광통(大小廣通)과 혜정(惠政) 및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신화방(神化坊) 동구(洞口) 등의 다리[橋]를 만드는 데는 모두 돌을 썼다. 

하천을 파는 역도(役徒)를 놓아주라고 명하니, 많은 사람이 같은 말로, “전번에 성을 쌓을 때에는 밤에 편히 자지를 못하여 사람이 많이 병들어 죽었는데, 금년의 역사에는 오로지 주상의 은혜를 입어 낮에는 역사하고 밤에는 자기 때문에, 병들어 죽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하였다. 

개천 도감(開川都監)에서 아뢰기를, “역사에 나와서 병들어 죽은 자가 64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일에 시달려서 죽은 자는 심히 불쌍하다. 마땅히 그 집의 요역(徭役)을 면제하고, 또 콩과 쌀을 주라.” 하였다. 임금이, “하천을 파는 것이 끝났으니, 내 마음이 곧 편안하다.” 하고, 또 말하였다. 

(생략)

태종 12년 (1412년)


공사기간 1년 공사 투입 인원 약 5만여명, 사망자 64명 공사결과는 종래에 저습지와 자연적인 물줄기를 구간에 따라 더 넒히거나 더 깊게 만드는 등 인공 수로를 만들어 표현하자면 규격화 시켰고 제방을 쌓고 다리를 올렸습니다,

물론 공사는 이후로도 지속되어 행랑조성도감이라는 이름 아래에 시전의 행랑을 대거 건설하는 이를테면 상업 단지를 건설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만 그 것은 여기서 다룰 것은 아니니 넘어가지요.

이렇게 인공 수로를 뜷었지만 당연히 관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자명한 노릇일터, 후대의 왕들도 종종 손을 대는 것은 당연한테 여기서 규정을 세우고 넘어가신 분이 계셨으니 그 분이 바로 세종이십니다,

사실 이렇게 인공 수로를 뜷고 제방을 쌓고 다리를 건설하고 뭐하고 해도 문제는 있습니다, 바로 용도의 구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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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청계천은 조선의 갠지스 강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상태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분뇨와 생활 오폐수를 버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기서 마실 물을 떠가고, 세탁하고 씻고 뭐하고 그렇다고 이 강이 비오면 잠잠한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래 이런 저런 문제가 발생했던터라 손을 댈수 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여러 규정을 제정했습니다, 

첫째로 수성금화도감의 설치입니다, 기존의 여러 기구들이 난잡하게 존재했던것을 합친 것으로 성을 수리하고 화재를 예방하고, 천거(川渠)를 소통시키고, 길과 다리를 수리하는 따위의 일을 맡았고 청계천은 이 들이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청계천을 관리하는 이들은 강원도와 황해도에서 올라온 군인들로 채웠습니다, 강 바닥을 긁어내거나 무너진 제방을 축조하는 등의 유지 보수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지요.

두번째로 책임자의 규정입니다, 네 관리는 저 들이 했지만 책임은 전적으로 공조에서 지도록 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모든 개천과 다리에 대한 업무를 공조에서 주관하도록 이양한것인데, 그러니까 엄하게 처벌받지 않으려면 제대로 일을 하라는 것이지요.

세번째로 용도의 제정입니다, 더 이상 청계청의 물을 생활 용수로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전적으로 하수도로 만든 것입니다.

당시 한양의 규모를 통해볼때 청계천이라면 생활 오폐수를 충분히 감당할만 했고 상수도와 하수도의 구분을 통해 폐해를 막고자 했습니다.


이후로는 성종 시절에 예종의 건의에 따라 제방에 버드나무를 심어 토사의 유출을 막으려 했던 일 등 소소한 일들이 있었기는 한데, 문제는 이후에 벌어집니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한양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현종 때 한성부에 등록된 호구의 수는 2만 4,800호였고 인구는 19만 2,154명 정도 되었습니다. 

당시 전국의 인구수는 117만 6,917호이며 인구는 469만 5,611명이었는데, 숙종시기에는 한양의 호수가 3만4,191호에 인구 역시 23만8,119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호적상의 누락이나 잘못된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불과 50여년 사이에 3만5,000여 명이 늘어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으로 한정된 자원위에서 발생한 급격한 인구수의 증가 더 정확하게는 유랑걸식을 하던 빈민의 증가에 따른 여러 문제가 야기되었습니다,

연료의 소비량 증대에 따른 과다한 벌목과 경지의 확대로 인한 토사의 유입은 물론이거니와, 하수의 증가에 따른 포화상태에 다다른 청계천의 처리 문제도 그랬습니다, 청계천변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악화 일로를 걷고 있던 빈민들의 구휼문제도 시급했지만 영조참판 홍봉한의 말 그대로 성의 모든 개울이 막혀 매년 장마철이면 성내의 백성들중 피난갈 준비를 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더러는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발생한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문제가 되는 강을 아예 들어엎는 수준으로 새롭게 조성하겠다는 대 역사를 준비하고자 했는데 역시나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계획이나 구상, 비전은 모두 나무랄데가 없습니다, 공사인원 약 20만명중 6만여명은 일용직 노동자였다는 점등을 고려할때 확실하게 구휼과 치수 둘 다 잡을수 있는 일거 양득의 효과를 누리고자 한 이상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조선의 재정이었습니다, 준천濬川에 대한 모든 계획을 세우고 공표하던 그 자리의 기록에서 여실히 이러한 문제는 드러납니다.

전교하기를, 

“준천(濬川)의 대책은 역시 모색하기 어려운 일이더니, 이제는 그 실마리를 알 수 있겠다. 이미 조그마한 책자를 하나 만들도록 명하여 《준천사실(濬川事實)》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책이 완성된 뒤에는 서문을 지어 내리겠다. 만약 계속하여 신칙하는 방도가 없으면 전공(前功)이 아깝게 되니, 제언사(堤堰司)의 사례에 의하여 병조 판서·한성 판윤·삼군문 대장이 준천사(濬川司)를 예겸(例兼)하고 삼군문 참군(參軍)이 준천사 낭청(濬川司郞廳)을 예겸하되, 참군을 역임한 다음에 우선으로 도총부(都摠府)에 의망할 것을 전조에 신칙하라.” 

하였다. 임금이 홍봉한에게 묻기를, 

“준천한 뒤에 몇년이나 지탱할 수 있겠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그 효과가 백년을 갈 것입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준천의 역사에 역민(役民)이 여러 십만 명이나 동원되고 경비(經費)도 십만여 전(錢)이나 소모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안위(安危)가 걸린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인가? 준천한 곳을 보건대 하나의 시내를 소통한 것에 불과한데도, 공사를 주관한 사람이 아첨하기에 급급하여 지나친 과장을 하였다. 홍계희가 사실을 기록하여 두자고 계청한 것과 홍봉한이 그 효과가 백년을 갈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하여 사람들이 비난하는 자가 많았다.

영조 36년(1760년)



비단 신하들의 반대는 이러한 자리에서만 나올 이야기는 아닙니다, 공사가 강행되거나 어쨌거나 의구심은 가실줄을 몰랐지요.



임금이 준천 공역이 잘된 일인지의 여부를 여러 고관(考官)에게 물었는데, 성천주(成天柱)·서명응(徐命膺)만이 대답하기를, “해마다 폐지하지 않는다면, 거의 막힘에 대한 근심을 면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달갑게 여기지 않으며 말하기를, “내가 유척기(兪拓基)에게 벌써 말하였다.” 하였다.

영조 36년 (1760년)

“준천을 하여야 한다는 의논은 신이 늘 주장하여 왔습니다마는, 다만 모래를 운반하는 공역이 너무 커서 이를 어려워하였던 것입니다. 여러 만 명의 인부와 만여 냥의 재정을 들인다면 모래를 운반할 수는 있겠으나, 지금 이 모래를 모두 천변(川邊)에 쌓아 두거나 길 위에 깔 경우, 모래는 흙과 달라 장마가 져서 냇물이 넘치면 천변에 쌓아 둔 모래가 저절로 무너져 내릴 수 있고 또 길 위에 깔아 놓은 것도 모두 내로 흘러 들어갈 것이니, 이제 비록 준천을 하더라도 내가 금방 다시 막히고 말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망연 자실한 모양으로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가 보면 지혜롭다고 하고 어진 자가 보면 어질다고 하는 법인데, 경은 말하기를 좋은 일이 못된다고 하겠으나 나는 말하기를 좋은 일이라고 하겠다. 이 뒤로는 단 한 삽도 대지 않아도 백년을 안심할 수 있을 것인데, 경은 수작에 방해가 되니, 그만 물러가라.” 하고, 이어 석강을 하였다.

영조 36년 (1760년)


신하들의 주된 반대 논리는 더 이상 없는 돈 털어다가 재화와 인력을 부어봐야 어떤 효과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적어도 유지 보수외에 별 다른 효용성을 생각해 내기 어려운 상황과 더불어 이후의 공사 진척을 통해볼때 불과 절반도 안되는 일용직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지급이 매우 곤란함을 엿볼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다만 영조의 생각 역시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현재 한성의 인프라는 누군가 칼을 대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당장 한성으로 몰려오는 저 수많은 백성들을 먹이고 살려야 하는데, 건의대로 고향으로 돌아가라 곡식을 주고 등을 떠밀어야 먹고 살기 힘들어 상경한 그 백성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렇지만 문제는 역시 재정을 빼놓고 생각할수는 없습니다, 최대한 재정을 절약해 보고자, 여러 방책을 강구하였으나 결국 마땅한 방도는 없었고, 공사 기간은 자연스래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니, 준천사(濬川司) 당상도 같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준천사에도 채전(債錢)이 있는가?” 하니, 영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지난해 준천 공역을 마친 뒤에 약간의 남은 재물이 있어서, 나누어 주어 이식을 놓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오래 할 방법은 아닙니다. 그리고 앞뒤로 놓은 채전을 신칙의 하교가 있는 이상 그대로 둘 수가 없기 때문에 준천사 당상이 지금 돈을 거두어 들여서 곡물을 장만하고자 한다고 하니, 참으로 좋은 생각입니다. 그 돈을 진휼청이나 혹은 균역청으로 이송하여 외방 고을에 있는 상진곡(常賑穀) 및 균역청미와 서로 교환한 다음, 그것을 조적법으로 해마다 모곡(耗穀)을 받아서 쓴다면 채전을 놓는 폐단을 없앰과 동시에 준천사의 수요에도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경호(李景祜)는 말하기를,

 “준천사의 남은 돈이 지금 1만 2천여 냥이나 되므로, 만약 이것을 균역청으로 이송하여 절가(折價)대로 그 액수를 쳐 준다면 곡물 4천 석은 될 것입니다. 모곡을 취하여 비용에 보태어 쓰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영조 46년

때로는 이렇게 남는 예산을 모아 돈 놀이를 하여, 차기 공사 비용을 마련 하려 한다던가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이번에 청계천(淸溪川)을 준설(浚渫)하고 석축(石築)할 물력(物力)을 제때에 마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즉 비국에서 행회(行會)한 관서(關西)의 무역(貿易) 보관중인 소미(小米) 1만 석을 3군문에 나누어 주어 청계천을 준설하고 석축을 끝낸 뒤에 준천사에서 주관하여 조적(糶糴)하고 있는 소미 3천 석을 해마다 모조(耗條)까지 합하여 차차로 이번에 나누어 준 1만 석의 수량을 채워 주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영조 49년

지방 재정을 융통하여 공사비에 보태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 완성한 공사는 신하들의 식견 이상으로 상당히 큰 효과를 냈습니다, 마치 뉴딜 정책 처럼 백성들의 구휼을 해결했을뿐만 아니라 한양의 인프라를 개선했으니 말입니다.

더 이상 장마비에 피난을 가는 이도 없었고, 하천의 잦은 범람 역시 잡을수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영조 자신의 3대 업적중 하나로 손꼽을만한 조선 역사에 남을 엄청난 공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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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후로 준천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좋겠습니다만 자연적인 하천도 아니고 인공적으로 조성한 하천인데다 토사의 유입량이나 오폐수등으로 발생하는 문제로 인하여 준천사를 유지하여 해마다 준천을 할 것을 규정으로 삼은 까닭에 조선이 문을 닫는 그 날까지 끊임없이 준천은 계속되었지요, 백성들의 구휼 역시 이 공사 하나로 해결할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가령 청계천의 직선화 공사를 수반한 백성의 구휼은 순조때에도 이어졌습니다, 물론 영조때 만큼 대대적인 공사는 아니었습니다만..여전히 재정은 지리하게 발목을 물어뜯고 있었지요.


비국에서 준천(濬川)하는 데 물력(物力)이 부족하다 하여, 균역청(均役廳)과 각영문(各營門)의 돈 8천 냥을 떼어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고, 이어서 준천하는 군사와 백성들에게 각각 그 영문에서 호궤(犒饋)하라고 명하였다.

순조 33년


만전을 기하라 명을 내린지 2달도 되지 않아 재정이 바닥나버렸고 결국 다른 기관에서 재정을 융통해 올수 밖에 없었습니다, 순조때는 청계천에 대한 크게 두 번의 공사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순조 18년에 하천을 파서 쳐내는 그러니까 영조때와 같은 공사가 있었고 33년에도 송기교(松杞橋)로부터 영도교(永都橋)에 이르는 하천을 파내는 같은 공사가 있었는데, 시쳇말로 첫타에 너무나 큰 여력을 소비한 까닭인지 뒤의 공사에서 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이후의 왕들의 행적을 보면 준천은 있되 영조나 순조때의 그 것은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지요, 철종이나 고종때까지 연중행사로 꾸준히 준천을 행하였을만큼 청계천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화, 경제, 사회의 인식적인 경계선 역할을 했던 만큼 그 비중은 결코 작지 않았고 그랬기에 조선의 개국 이래로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습니다.

두서 없이 글을 대강 써내려갔는데, 그렇습니다. 

수도 한양을 가로지르는 주요한 물줄기이기에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화두중 하나임은 분명합니다만 현실은 까놓고 말해서 재정은 무시할수가 없습니다, 영조때의 경우가 그렇고 순조때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조선 초의 태종과 이 들이 다른게 무엇일까요? 순조때의 가칭 1차 공사와 영조의 공사가 다른게 뭘까요?

결국 재정입니다, 구휼과 치수, 일거 양득의 효과는 노릴지언정 결단코 공사가 장기화 되며 벌어질 폐단을 모를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속된말로 어른의 사정이라는 것은 참 무겁기 그지없지요, 농업중심국가라 할지라도 재원은 결코 마르지 않는 샘이 될수는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상황에 직면한 왕들이 얼마나 고충이 심하였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드네요, 여기는 1년마다 은 20만냥 비단 30만 필을 공물로 바쳐도, 그래도 이 정도면 평화롭게 지내는데 싸게 먹힌거지 하고 웃어넘길수 있는 송나라가 아니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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