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편에서 썼듯, 독발수기능의 반란은 이제 중앙조정에서 개입해야 할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었다.
이름난 장수만 해도 두명(호열, 견홍)씩이나 전사한데다 나름 믿고 보냈던 토벌군들까지 병크를 저지르며 깨져버렸으니 말이다.
상황이 이쯤되니 사마염도 슬슬 걱정이 되는지 신하를 불러다 놓고 대책을 논의한다.
이건 기록을 빌려 보도록 하겠다.
마침 독발수기능이 진주와 옹주를 침구하여 혼란하게 하자 황제가 이를 걱정하니 임개가 말하였다. "의당 위엄과 명망이 있는 중요한 신하 가운데 지략이 있는 자를 찾아서 그곳을 진무하게 하셔야 합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임개가 이를 이용하여 가충을 천거하였고, 유순도 역시 그를 칭찬하였다. 7월 계유일(26일)에 가충은 진주-양주의 모든 군사적인 사항을 총감독하게 하고, 시중이며 거기장군의 직책은 옛날과 같이 그대로 두었다. 가충은 이를 걱정하였다. 가충이 조정을 떠나 군직을 수행하게 되자 군력을 잃을까 걱정한 것이다.-자치통감 79권
가충(賈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마사-사마소를 섬겼던 중신 중의 중신이요, 훗날의 창업공신인데다 당시 진(晉)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던 권세가이자 정치적으로도 그가 위치해있는 관직을 보자면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인재로서의 면모는 훌륭할지는 몰라도 인품만은 개차반이었는지 기록의 마지막 줄에서 보이듯 외지로 떠나 군직을 수행하는 것을 중앙에서의 권력을 잃는 악재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이것이 너무나 걱정이 되었는지 가충은 양주-진주로 떠나기전에 한가지 방도랄까, 나름의 보험을 들이고 떠나는데, 바로 혼인이었다.
중국의 4대 악녀라는 말이 있다. 은의 주왕의 비(妃), 달기. 한 고조 유방의 황후, 여태후. 당의 측천무후. 청의 서태후.
중국 역사상 이들 넷이 그렇게 못됐다고 오늘날까지 명성을 떨치고 있는데, 혹자들은 여기에 한명을 더 넣어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바로 가남풍(賈南風)이란 여인네다.
이 여인이 대관절 얼마나 못돼먹었길래 저 영광의 명단에 넣자고들 하는지는 나중에 볼 일이고 여기서는 그냥 혼인의 등장인물로만 보시면 되겠다.
가남풍은 가충(賈充)의 딸이자 훗날, 진(晉)의 제2대 황제, 혜황제(惠皇帝) 사마충(司馬衷)의 황후가 되어 혜문황후(惠文皇后)라고도 불리운다. 가충은 딸 가남풍을 황제 사마염의 아들, 즉 태자 사마충과 혼인시키고 외지로 떠난 것이었다. 명색이 황제의 사돈인데 어느 누가 감히 내가 없는 사이에 빈집을 털겠는가 하는 것이 가충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한 국가의 재상의 머릿속에 들어앉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충은 자신의 바람대로 결국에는 양주-진주 전선으로 가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라는 표현이 적절할라나 모르겠다. 자신의 딸과 태자 사마충의 혼인을 성사시키고 나니 주위에서 만류하고 나선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명색이 황제의 사돈양반인데 전쟁터 같이 살벌한 곳에 가서야 되겠는가?"
가충 : "응, 아무래도 그렇겠지?"
뜻대로 가충은 양주-진주로 떠나지 않고 그대로 중앙에 눌러앉았으며 '군략과 지략에 능하다' 라는 이유로 황제 사마염에게 천거하여 자신을 감히 전선으로 몰아넣으려던 임개를 대차게 까버리고 몰아낸다. 이때가 서기 272년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느덧 서기 277년. 진(晉)은 아직도 독발수기능을 진압하지 못했으며 고로 진주(秦州) 역시 통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여기서 의문스러운 점은 약 5년간의 이 난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277년을 기점으로 그 이후의 기록에 독발수기능의 난이 다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그 전까지는 여전히 독발수기능이 건재했다는 얘긴데, 기록이 없으니 알 턱없다. 기록이 분실된 것인지 어쩐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이 독발수기능이 다시 등장하는 때는 277년이다.
(277년) 3월에 평로호군 문앙(文鴦)이 양주-진주-옹주의 여러 군사를 감독하여 독발수기능을 토벌하여 그들을 격파하니, 여러 호족 20만명이 와서 항복하였다.-자치통감 80권
문앙이란 장수가 선전하는가 싶더니만,
여름, (278년) 6월에 양흔이 (독발)수기능의 무리인 약라발능과 무위에서 전투하였는데, 패하여 죽었다.-자치통감 80권
다시 박살.
(279년) 봄, 정월에 (독발)수기능이 양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자치통감 80권
그리고 마무리.
진주에 이어 양주(凉州)까지 함락되었다는 소리인데 여전히 진(晉) 조정에서는 태평했다.
선비족의 (독발)수기능이 오랫동안 변방의 근심거리가 되었는데 복야 이희가 군사를 발동하여 그들을 토벌하겠다고 청하자, 조정에서 의논하면서 모두 군사를 출동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오랑캐도 그렇게 걱정거리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자치통감 80권
사실, 시야를 좀더 넓게 보자면 진(晉)의 입장에서는 저런 이민족 나부랭이들의 소란보다는 오(吳)와의 대치구도가 훨씬 더 중요했음은 구태여 덧붙여 말할 것도 없다. 어디까지나 진의 주적은 오(吳)였으니 말이다.
사실 저렇게 진주-양주쪽의 서쪽 지방에서의 이민족 반란에 직면함과 동시에 진은 형주-양주 전선에서 오와 대치하고 있었다.
다시 꺼내보는 당시 중국지도.
지도를 참고하며 보는 것이 편하다.
여기서는 따로 오(吳)와의 전쟁을 다루지는 않았는데, 이유는 사료가 없다라기보다는 이 글 자체가 한 국가의 헛짓거리로 인한 결과들, 그리고 사건들, 결국에는 무너지는 일련의 과정에 주로 초점을 맞추기 위한 글인지라 상대적으로 대오(對吳)전선에서의 사건들보다는 이 독발수기능의 난이 좀더 주제에 부합하다 여겨 따로 오와의 전쟁은 다루지 않았다.
본론으로 돌아가, 서기 279년에 이르러 진주-양주가 함락되었을 무렵, 혜성처럼 등장한 마륭이란 인물덕택에 진(晉)은 독발수기능을 비로소 진압한다.
좀 뜬금없고 급하게 마무리 지은 감도 없잖아 있지만, 여기서 이 마륭의 등장과 등용, 토벌까지 다루자면 사실상 <마륭전>이 되어버리니 그냥 이렇게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여기서 짚어볼 것은, 진이 본격적으로 오(吳)를 정벌하는 서기 280년 경의 불과 1년전인 서기 279년까지도 진주-양주에서의 독발수기능 문제로 골치를 썩어가면서도 오 정벌에 착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앞서 밝혔듯 한낱 이민족의 반란과 국가 중대지사인 오 정벌의 그 중대점을 저울질 해볼 필요조차 없이 진에서는 그만큼 오를 정벌하는 것을 크게 중요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그리고 서기 280년, 사마염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오를 친다.
진남대장군 두예를 대도독으로 봉해 군사 10만을 주어 강릉으로 가도록 했으며, 진동대장군 낭야왕 사마주는 도중으로 가고, 안동대장군 왕혼은 횡강으로, 건위장군 왕융은 무창으로, 평남장군 호분은 하구로 가 20만의 군사를 주었으며 악주 자사 용양장군 왕준과 광무장군 당빈으로 수군과 육군 20만 명과 전선 수만 척으로 하여금 장강으로 동쪽으로 가게 했으며 관군장군 양제에게 양양으로 나아가 주둔해 모든 길의 군마를 통제하게 했다.
지도로 표시하면 이렇다.
빨강색 : 익주에서 쳐들어오는 왕준, 당빈의 수군.
파란색 : 두예를 중심으로 왕융, 호분의 병력. 양제는 형주에서 대기.
초록색 : 사마주, 왕혼의 병력
두예의 고사처럼, 말그대로 '파죽지세'로 짓쳐든 진(晉)의 공세에
오(吳)의 고을과 주군(州郡)은 차례차례 함락당하거나 투항한다.
오(吳) 말제(末帝) 손호(孫皓)
손권(孫權)의 손자가 되시겠다.
오나라 최후의 황제.
진(晉)의 대공세에 신하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논의하는 손호.
사실 의논해도 답은 없었다.
그리고 서기 280년. 오(吳)는 그렇게 멸망했다. 오랜세월 동안 강남에 웅거하며 지배해오던 세력치고는 너무나도 빠르고 허망한 최후였다.
진(晉)은 그렇게 오(吳)를 멸함으로서 비로소 명실명백한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게 된다.
그리고 오를 멸한 직후, 연호를 기존의 태시(泰始)에서 태강(太康)으로 개원한다. 참고로 태강(太康)은 크게 편안하다 정도의 뜻으로 풀이하면 된다.
통일제국에 걸맞는 연호다.
천하를 통일하고 난 후의 통치목표였을까. 아니면 단순 천하에 적이 없어졌으니 편안하다 생각하여 그리 한건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진(晉)의 몰락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