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삼국지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중국의 삼국시대(A.D 220~280)를 통일한 국가는 촉(蜀)의 유(劉)씨나 오(吳)의 손(孫)씨, 위(魏)의 조(曺)씨도 아닌 진(晉)의 사마(司馬)씨였다.
삼국지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그토록 팽팽한 각축전을 벌이며 대립하던 조조, 유비, 손권으로 대표되는 위촉오 삼국이 아닌 웬 쌩뚱맞은 진나라의 사마염(司馬炎)이란 인물이 결국엔 대륙을 통일하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을 보고 꽤나 허탈해 했을 것이다.
출처 - <고우영 삼국지>
저기서 유비, 조조, 손권을 싸잡아 유가, 조가, 손가라 비웃으며 손가락질 하는 양반이 바로 사마염 되시겠다.
그리고 이 사마염은 삼국지연의에서 그 유명한 제갈량의 호적수로 등장하는 사마의(司馬懿)의 손자다.
위(魏)의 중신이었으나 쿠데타로 자신의 가문인 사마씨가
위(魏)를 집어삼키고 훗날 진을 건국하는 기틀을 닦은 사마의.
손자 사마염에 의해 진(晉) 고조(高祖)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다.
사마의가 쿠데타로 위의 권력가로 재집권(재집권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삼국지를 읽어보셨으면 아시리라 믿어 굳이 이유를 적지 않겠다..)한 때는 서기 249년 경. 그리고 251년에 사망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집권한 이는 사마의의 장남, 사마사(司馬師).
이 사마사도 위(魏)를 농락하다시피 하며 마음껏 권세를 누리다 사망(이후, 조카 사마염에 의해 세종(世宗) 경황제(景皇帝)로 추존되었다)하고 그리고 그 후계자는 사마의의 차남이자 사마사의 동생인 사마소(司馬昭)가 된다. 사실상 진(晉) 왕조는 이 사마소의 대에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는데 사마소가 위(魏)의 원제(元帝), 제 5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였던 허수아비 황제 조환(曹奐)을 겁박하여 진왕(晉王)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비로소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가 삼국의 한축이었던 촉(蜀)이 멸망했던 서기 263년 쯤 되겠다.
사마소(司馬昭).
사망 후, 아들 사마염에 의해 태조(太朝) 문황제(文皇帝)로 추존된다.
오해없도록 하자. 왼쪽의 깜찍해 보이는 아이(?)가 사마소가 아니라 오른쪽의
험상궂은 아저씨가 사마소다. 참고로 왼쪽의 인물은 사마소의 차남, 사마유(司馬攸)다.
즉, 사마염의 동생이다.
조환을 명목상인 상전으로만 앉혀두고 위(魏)라는 국가가 거진 사마소의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사마소는 굳이 조환을 몰아내고 천자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뭐, 전례의 조조(曺操)를 흉내내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마소는 제국의 창업은 아들 사마염의 몫으로 남겨두고 서기 265년에 사망한다.
그리고 아들 사마염은 아버지 사마소가 남겨준 크나큰(?) 숙제를 아주 빠르고 진작에 했어야 했던 일을 처리하듯 당연하다는 듯이, 수행해나간다. 앞서 말했지만 그냥 폼으로 황위에 앉아있던 조환을 결국에는 끌어내고 서기 265년, 진(晉) 제국을 개국한다.
진(晉) 세조(世祖) 무황제(武皇帝) 사마염.
한 제국을 창업한 시조에 걸맞도록 위엄있게 그려진 모습이다.
연호는 태시(泰始). 크고 거대한 시작이란 뜻이다. 연호가 뜻하듯, 새로운 제국을 세운 사마염의 기대와 야망과 포부를 느낄 수 있다.
이때가 서기 265년, 진나라는 몇년전에 위가 촉을 멸하여 얻은 옛 촉 땅인 익주(益州)를 아우르고 양주(陽州), 형주(荊州), 교주(交州) 이 세개의 주, 즉 오(吳)를 제외한 당시 중국의 영역으로 일컬어지는 10개의 주(州)를 기반으로 겨우 세개의 주로 버티고 있는 강남의 오(吳)와 필연적으로 대치하게 된다.
후한 13주 전도
이 중 오(吳)는 양주(陽州), 형주(荊州)의 일부, 교주(交州)만을 차지하고 있었고 진(晉)은 그거 빼고 다...
셋 중 하나가 없어졌으니 당연스레 남은 둘이 대립하게 되는 일은 당연지사라 하겠다.
진과 오가 그러했다. 아닌게 아니라 진에서도 끊임없이 오정론(吳征論)이 들고 일어났다.
(264년)황제는 오를 멸망시킬 뜻을 갖고 있었다. 임인일에 상서좌복야 양호를 형주 지역의 모든 군사에 관한 일을 총감독하도록 하여 양양에 진수하도록 하였다. 정동대장군 위관은 청주 지역 모든 군사에 관한 일을 총감독하면서 임치를 진수하게 하였고, 진동대장군 동완왕 사마주는 서주 지역의 모든 군사적인 일을 총감독하면서 하비를 진수하게 하였다.-자치통감 79권
이건 고서의 기사이니만큼 어려운 관직과 지명이 나와 그냥 역사를 즐기려고 가볍게 보고 계실 독자분들은 뭔말인지 하나도 모르실 것이다.
그냥 이렇게 밑의 신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시켜 여차하면 콱 들어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다.
진이 마음만 먹고 오를 크게 쳤으면 오의 멸망(서기 280년)이 빨라졌을지 어쨌을지는 역사에 if란 없는 법이니 단언치는 못하겠지만.
위의 기사기록에서 보이듯 이미 서기 264년부터, 즉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도 전부터 오를 칠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는 소리인데, 저러던 차에 서기 270년, 멀리 양주(凉州)라는 서쪽지방(위의 지도에서 '량주'라고 표기되어 있는 초록색 영역)에서 뜻밖의 반란사건이 일어나 계획에 차질을 빚게된다.
바로 선비(鮮卑)족인 독발수기능(禿發樹機能)이란 인물이 일으킨 난 때문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감숙성에 해당되는 양주(凉州), 진주(秦州 - 뜬금없이 등장한 이 새로운 행정구역은 사마염이 진 왕조 창업 이후, 한마디로 행정구역 수정을 했다고 보시면 된다. 새로이 창설된 주(州)는 이 진주(秦州), 양주(梁州), 영주(寧州), 광주(廣州)인데 여기서 양주, 영주, 광주는 오를 멸하고 나서 이후에 새로 개설된 주이거나 기존에 오(吳)에서 진나라 마냥 자기네끼리 따로 지역을 떼내어 만든 주도 있다. 광주가 이에 해당한다.)
아무튼, 지도에 '秦' 자가 보이시는가? 바로 저기 일대를 휩쓸며 이 독발수기능은 진주자사(秦州刺使 - 또 관직명칭이 나왔는데 어려울 것 없다. 진주는 말그대로 저 진주라는 지역을 의미하고 '자사'는 오늘날로 치면 미국의 주지사? 아무튼 그 주의 행정권과 군권을 행사하며 주를 담당하는 관직을 의미한다. ) 호열(胡烈)이란 사람을 전사시키는 기염을 토하기까지 한다.
참고로 이 호열이란 사람은 삼국지 매니아라면 한번씩은 해봤을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 게임에서도 등장한 인물이다.
바로 요렇게.
삼국지 시리즈 해보신 분들이라면 눈에 익은 분도 계실 터.
하지만 원체 최후반부에 등장하는 무장이라 인지도는 엄청 낮다.
아무튼 그 주의 장(長)까지 전사시키며 진주를 박살내던 독발수기능에 맞서 진(晉)에서는 대응책을 강구한다.
고서의 기사를 빌려본 진의 대응은 이렇다.
진주-양주 지역의 모든 군사에 관란 일을 총감독하는 부풍왕 사마량이 장군 유기를 파견하여 그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유기는 관망만 할 뿐 진군하지 아니하였다.-자치통감 79권
상서인 낙릉 사람 석감을 파견하여 행안서장군으로 삼고 진주 지역의 모든 군사적인 일을 총감독하게 하고 독발수기능을 토벌하게 하였다.
독발수기능의 군사가 강성하여 석감은 진주자사 두예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서 그들을 치게 하였다.-자치통감 79권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런 대응들은 죄다 실패로 돌아간다.
보시다시피 장군 유기라는 사람은 무려 '관망'까지 하시며 독발수기능의 행패를 지켜보시다 결국 진노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중앙으로 소환된 뒤, 모가지가 날아간다(직책에서 짤렸다는게 아니라 진짜 모가지가 날아갔다. 즉 처형당했다는 얘기..).
그리고 유기의 상관이었던 부풍왕 사마량(참고로 이 사마량은 사마의의 7남인가 그렇다. 즉 사마염의 삼촌이다.)은 오늘날의 군대도 그렇듯이 잘못된 지휘책임을 물어 파직당한다. 그리고 두번째 기록의 석감이란 사람은 결과적으로 말해 그냥 무능력한 장군, 즉 똥별이었다.
(270년 6월 이후)두예는 오랑캐들이 이긴 형세를 타고 있고 말들이 살쪘으나 관군은 현군이어서 궁핍한 상태이니 의당 힘을 합하여 말먹이를 크게 운반하여야 하므로 봄까지 기다렸다가 나아가서 토벌하겠다고 하였다. 석감은 두예가 군사 일으키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상주하여 불라들여서 함거에 가두어 정위에게 보내서 속죄를 받도록 결정하였다. 그리고 나서 석감은 독발수기능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결국에는 이길 수 없었다.-자치통감 79권
역사 좀 아신다는 분들은 여기서의 기사에서나 바로 위의 기사에서 언급된 이름들 중 상당히 눈에 익은 인물이 있음을 아실 것이다.
바로 '두예(杜預)'인데, 두예로 말할 것 같으면 진의 역대 명장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며 고사성어 '파죽지세'의 주인공이기도하다.
아무튼, 이런 두예가 상관인 석감에게 진언하는 것을 석감이 쌩깠다는 것만으로 석감을 똥별내지 병신으로 치부하는 것은 후세에 두예의 명장이란 이미지를 감안했을때 결과론적인 생각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후세의 우리로선 그저 결과만 볼 수밖에..
(하지만 석감이 똥별이라는 증거는 또하나 있다. 언젠가 있었던 오(吳)와의 전투에서 전공을 조작해서 상당한 전공으로 조정에 보고했던 일이 들통나 짤리고 만다.)
본론으로 돌아가, 서진의 이러한 대응에도 이민족의 반란은 날로 거세어져 갔다.
(271년 4월~5월)북지의 호인들이 금성을 침구하자 양주 자사 견홍이 이를 토벌하였다. 호인 무리들이 모두 안에서 반란을 일으켜 독발수기능과 더불어 청산에서 견홍을 포위하자 견홍의 군사들은 패하여 죽었다.-자치통감 79권
반란이 일어난지 1년째, 서진이 건국된지는 불과 10년도 안된 무렵에 어찌보면 한 주(州)에만 국한되었을 소동이 이제는 국가가 본격적으로 진압에 나서야하는 사태에 이를지도 모를 상황이 벌어지고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