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꽁초를 비벼끄고는 초조하게 시계를 보았다.
채 5분도 남지 않은 시간.
남자는 점퍼속에 손을 넣어 딱딱한 금속을 어루만지고서야 크게 심호흡을 할 수 있었다.
익숙한 풍경.
남자는 3일전에 거닐던 바로 그 곳에 서 있었다.
3일 전.
남자는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인지라 크게 불만도 없던 삶.
하지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악마는 남자의 인생을 평범하지 않게 만들었다.
악마는 남자에게 선물을 주려고 했다.
-원하는 시간으로 남자를 돌려주는 것-
단지 그 뿐이었다.
그러나 그 하나가 인생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남자 역시 가끔은 상상으로 꿈꿔보던 일이었다.
다만 상황이 좀 꺼림칙했다.
"돌아간 곳에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 있으면 곤란하겠죠?"
길목 저편에서 들리는 노랫소리가 신호탄처럼 들려왔다.
저벅저벅 그 곳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눈엔 결심이 서려있었다.
남자는 준비한 철끈을 양손에 쥐고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나타난 사람의 목을 졸라당긴 후 쓰러진 대상의 등허리에 칼을 쑤셔박았다.
완벽한 살인이었다.
단 한 가지를 제외 한다면 말이다.
남자는 화성 외각에 위치한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밤이 되면 인적이 끊겼고 오로지 남자 홀로 회사의 기숙사를 지켰다.
외로움을 달래기위해 매일밤 8시만 되면 하던 산책은 완전범죄의 가능성을 더 높여주었다.
이제 남자는 신원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시신을 훼손한 뒤 암매장을 하면 그만이었다.
발각될 확률은 0였다.
하지만 자신이 죽인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극심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동이 틀 무렵에서야 작업을 겨우 마친 남자는 곧 휴가를 내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수령한 복권1등 당첨금.
평생 구경도 못한 액수였기에 그 쾌락은 이루말할수 없었다.
부가 가져다주는 기쁨은 스스로를 죽인 살인마의 자책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순간의 찝찝함을 견디면 얼마든지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이 벌써 3번째 살인이다.
익숙하게 시체를 처리한 남자의 입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씨발새끼 드럽게 피는 흘리고 지랄이야."
그리고는 신경질 적으로 시체가 묻힌 흙바닦을 발로 내리 찍었다.
이번에는 작업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자는 휘파람을 불며 늘 산책했던 길목을 걸어갔다.
그리고는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손끝에서 파르르 떨리는 그 느낌.
사람이 죽을 때의 그 손 맛.
남자는 피묻은 자신이 손바닥을 지긋이 내려다 보았다.
[화성 xx인근을 중심으로 연쇄살인이 벌어졌습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범인의 행방은]
TV를 끈 남자는 침대에 누워 얼마 전 느낀 쾌감을 되새겨 보았다.
근방을 돌며 혼자 사는 목표를 탐색한 남자는 일주일도 안된 사이에 4명의 목숨을 빼았았다.
'나는 이미 살인마가 된 것인가?'
이제 더 나서면 경찰에 덜미를 잡힐 것이다.
통장엔 고액의 예치금이 남아있었지만 남자는 다시 과거로 돌아갔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쾌락도 살인은 넘을 수 없었다.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온 고통이 이제는 남자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미 32번째 재귀.
그러나 꼬리가 너무 길었다.
어쩌면 남자는 발각될 것이라는 공포에 둔감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어차피 과거로 가면 그만이니까.
철창안에 같힌 남자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느낌이 어때?"
남자는 고개를 들어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악마였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었다.
애초의 악마는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도없이 죽인 얼굴.
그 얼굴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애초에 너가 조건 없이 나에게 뭘 줄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이제 너가 뭘 원한지 알겠어."
거울앞에 선 것처럼 남자는 마지막 인간미를 쥐어짜내려 노력했다.
"이제 기회는 한 번 뿐이야. 마지막으로 너가 원하던 시간으로 널 돌려줄 수 있어. 돌아갈건가?"
하지만 남자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이 없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들 변하는 것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