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치긴의 몽골제국 칸의 자리에 대한 도전 의지는 이미 오래전 부터 명확했다 할수 있겠습니다, 그 것의 첫번째 사례는 1219년에서 1225년 까지 칭기스칸의 서역 원정 동안 그의 권한을 옷치긴이 대행한 것에서 비릇된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 시기 옷치긴은 칭기스 칸을 대신해 몽골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한편 무칼리와 함께 요동을 정벌했습니다. 또한 고려와의 형제 맹약을 통해 많은 물자를 수탈해 전시 경제 속에 원할하게 물자를 공급하며 통치에 대한 자신감을 획득할수 있었습니다.
1225년 오랜 서역 원정을 마치고 몽골 제국으로 귀환한 칭기스칸은 부카 수지쿠 Buqa Sujiqu 不合速只忽 에서 자신의 전제 독재권을 정비하고 재 확립하는 의미로서 대규모 연회와 수렵을 계획했습니다, 집사는 이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지요.
'황금색 대장을 치라고 명령하고 집회를 열어 커다란 연회를 개최했다, 그 곳 땅이 부드러워 먼지가 일어나자 그는 각자 돌을 가져오게해 자신의 오르두 근처에 돌들을 모두 던저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의 동생 옷치 노얀만이 돌 대신 나무를 던졌고, 그래서 그의 죄를 물었다. 바로 그곳에서 며칠간 사냥을 했는데, 옷치 노얀은 石翼의 圈垨로 가지 않고 약간 뒤쳐졌다, 그가 저지른 이 두 가지 잘못때문에 그를 일주일간 오르두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가 "만일 제가 앞으로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른다면 (저를 처벌할것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라고 아뢰자 그를 용서하고 출입을 허락했다'
이 사건은 옷치긴이 칭기스 칸을 대리해 몽골 제국을 다스리는 동안 생겨난 일종의 부작용으로 옷치긴의 자만심이 불러온 결과라 할수 있겠습니다, 즉 칭기스 칸은 황금 씨족 중 옷치긴을 가장 아끼고 존중해 주었지만 이는 오랜 기간 대 칸의 자리를 비운 데에서 오는 칭기스 칸과 옷치긴 사이의 불화를 보여주는 일화인것입니다. 특히 돌 대신 나무를 던진 첫번째 사건보다 몰이 사냥에서 뒤쳐진 두번째 사건은 중대한 사건으로 볼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칭기스 칸 시대 무렵의 수렵이라는 것은 정치, 사회, 군사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장기간의 서역 원정이후 칭기스 칸은 자신의 중앙 집권적 권위를 과시하고 제국 건설 사업의 완성을 선포하는 의미로 수렵을 행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칸이 행하는 수렵이라는 것은 유목 민들의 수렵 기술을 총체적으로 정립해 전술화 시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규모의 수렵은 일종의 전술 훈련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옷치긴은 군사 훈련과 관련된 수렵에서 종래에는 바투르 로서 물러섬이 없었지만 이 수렵에서는 칸의 명령에 불복하고 군율을 어기는 잘못을 저질렀는데 이 것은 옷치긴이 칭기스 칸을 대행한데서 오는 자만과 이에서 오는 상호 충돌의 결과로 볼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옷치긴은 그 경솔했던 행동때문에 칭기스 칸에게 잘못을 구하고 또 용서를 받았지만 그 것을 초래했던 7년간 칭기스 칸을 대신하여 몽골 제국을 지배했던 경험은 우구데이 칸 사후 칸위 계승 다툼에서 군사행동을 초래하는데 한 몫을 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구데이 칸이 자신의 치세중 잘못을 지적했던 몽골 비사 281절과 관련하여 옷치긴의 군사 행동을 이해해 볼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몽골비사 281절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옷치긴 숙부의 나라에서 처녀들을 데려오게 하는 실수가 있었다, 나라의 주인, 칸이면서 법도 없이 부끄러운 일에 관여한 나의 잘못은 이 것이었다.'
라는 것인데 라시드 웃딘은 부족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몽골 부족 중 어떤 부족'이라고만 기술했지만 원사의 태종 본기에는 '좌익의 여러 부에서 민간의 여자를 취했다는 헛소문이 있다' 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좌익의 여러 부는 몽골 비사 281절에 따르자면 옷치긴 가문으로 이 사건은 옷치긴 가문의 권위를 짓밟고 그의 면상에 침을 뱉은 매우 치욕적인 사건임이 틀림없습니다. 이는 그간 옷치긴이 대노해 칸의 자리를 쟁취할 기회만을 노리게 만든 주요한 원인이 되었겠지요.
위의 내용으로 추론해 보건데 옷치긴은 우구데이 칸의 사후 칸의 자리가 비어 있는틈을 이용해 무력으로 몽골제국 칸의 자리에 도전하려 했음을 알수있게 해줍니다.
이러한 옷치긴의 군사 행동은 옷치긴 가문과 몽골 제국간의 대립이 표면화된 첫번째 사건입니다, 투레게네 카툰은 급히 사신을 보내 '저는 당신의 子婦이고 당신에게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온 군대는 무엇입니까? 온 올루스와 몽골 제국의 군대가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라고 했는데 여기서 子婦 그러니까 아들 아내 혹은 아들 부인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좀 이상하게 보이지만 몽골은 세대별로 父 子 孫 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우구데이의 처 투레게네 카툰은 세대별로 볼때 子에 해당되는 이의 아내가 됩니다, 따라서 옷치긴에게 세대의 차이를 설명한 것으로 볼수 있는 子婦라는 표현은 어색한게 아니지요.
이는 달리 말해 다음 칸의 자리에 오를 이에게 옷치긴은 祖父에 해당 되므로 이제 2세대나 지난 옷치긴이 나올 무대가 아님을 인식하려는 의도가 있다 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투르게네 카툰은 이어 옷치긴의 아들 오르타이와 손자 말릭 오굴 등을 옷치긴에게 보내어 군사 행동을 중지할것을 권유하기도 했는데 이와 별개로 한편 킵차크 초원으로 원정을 나선 구육이 바투와의 다툼으로 예정 보다 일찍 우구데이 칸의 오르두 에밀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옷치긴은 그의 군사 행동이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자신의 올루스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비록 군사 행동으로 칸의 자리를 쟁취하려한 옷치긴의 노력은 투레게네 카툰의 기지와 구육의 예상외의 행동으로 인한 이른 도착으로 말미암아 실패하기는 했지만 이때 부터 시작된 옷치긴 가문과 중앙 정부의 대립은 그 후 분열하는 몽골 제국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됩니다, 옷치긴의 군사 행동은 실패 했지만 이어서 몽골 제국 내에서 복잡하게 진행된 칸위 쟁탈전에서 뭉케 칸과 쿠빌라이 칸의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옷치긴 가문은 향후 몽골 제국의 정치 전반에 깊숙이 개입하게 됩니다,
또한 옷치긴 가문은 올루스의 영역을 동북 만주 지역으로까지 확장하고 이 지역의 부富와 풍부한 인적 자원 등을 토대로 몽골 제국 중앙 정부의 지배권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올루스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는데....이후는 다음 글에서 잇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