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 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해골에 든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잖아. 하지만 그 외에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 하는 게 사실이야. 원효대사의 삶을 살펴보면 중독성 강한 후크송에 천재적 재능을 보인 프로듀서이자, 지금 시대에도 받아 들이기 힘든 파격적인 포교 활동을 펼치신 행동 종교의 일인자 라고 할 수 있어. 거기다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신분제 중 하나인 골품제의 장벽을 넘고 왕실의 공주와 결혼을 해. 둘 사이에 낳은 아들은 그 이름도 유명한 설총이야. 여기에 국민 스님이라고 불릴 정도로 온 국민의 절대적 사랑을 받지만 정작 소속사인 불교계에서는 퇴출이 되었지. 자 그럼 해골 물 일화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원효대사의 인생 속으로 고고고! 오늘의 주인공 원효 대사께서는 617년에 태어나셔서 686년에 입적하셨으니 13백 년 전 사람치고는 엄청 장수 하신 거야. 역시 장수의 비결은 소식과 정신수양인 건가? 스님께서는 정확한 년도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어린 나이에 불교에 입문을 하셨어. 100년도 안 된 역사를 조작 하려 하고 기록물이 유실 되는 현대야. 이 정도 기록이 없는 건 이해하고 넘어 가자고. 누구보다 명석한 두뇌를 타고 났지만 신분제의 한계는 신라 시대 젊은이들이 꿈을 포기 하게 만들었어. 일찌감치 소위 말하는 사회적 성광이나 출세에 대한 미련을 접을 수 밖에 없었어. 이 당시 신라에서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권장을 하였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불교에 입문을 하신 거지. 승려생활 초 창기는 일반 승려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이야. 뚜렷한 행동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 하신 건 8살 아래의 친구 같은 동생 의상대사와 당 나라 유학 길에 오르고 나서야. 의상대사도 많이 들어본 존함이잖아. 불교계의 어마어마한 두 거물이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깊은 우정을 나눈 것이 흡사 노무현 문재인의 관계처럼 보이기도 해. 조기 유학이 열풍을 일으키는 요즘의 세태를 보면 불혹을 바라보는 굳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불교의 본 고장은 인도이긴 하지만 이 당시 당나라에는 어마어마한 분이 인도에서 수련을 마치고 막 돌아오셨어. 그 분은 바로 바로 서유기의 실제 모델인 삼장법사 현장스님 이였어. 이 분 이야기를 잠깐 안 할 수가 없네. 삼장법사는 불교의 본 고장인 인도방문을 간절히 바라셨어. 하지만 이 당시는 당나라 건국 초기라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나라에서 막았지. 하지만 대 스님의 꿈을 향한 열정은 월경으로 이어졌고, 당나라 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낮에는 숲에서 숨어서 자고 밤에만 이동을 하였다고 해. 인도로 향하는 여정은 김동률의 노래 ‘출발’ 과는 전혀 달랐어. 낭만이나 설렘이 아니라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투였지. 이때 스님이 가진 거라고 작은 물병 하나 먼지 낀 카메라 대신 노새 하나였어.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길은 4계절을 만나는 건 물론이요 사막까지 넘어야 했지. 이렇게 어렵게 도착한 인도에서도 대 스님으로 인정을 받아 당 나라로 돌아오는 길에는 불교서적만 실은 말이 22필이요. 삼장법사를 쫓던 당나라 군이 환영을 나와 그야 말로 도망자에서 위대한 고승으로 전격 변신! 당 태종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고 해. 삼장법사가 온 몸으로 겪으며 쓴 기행문인 ‘대당서역기’는 네팔, 파키스탄 등의 나라의 고고학, 지리학 적 자료로도 그 가치가 크다고 하니, 이건 여행서가 아니라 그야 말로 살아있는 역사책이지. 인도를 오가면서 겪은 말도 어마어마한 에피소드들은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부풀려 지기도 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로 둔갑 하기도 했어. 그래서 명나라 때 오승은 이라는 이야기꾼이 삼장법사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서유기’ 라는 책을 내게 된 거야. 다시 우리의 주인공 이야기로 돌아가서 원효와 의상은 남 다른 브로맨스를 과시하면서 이 삼창법사가 있는 당나라로 유학 길을 떠났던 거지. 이 들도 삼장법사처럼 걸어서 당나라로 떠났는데 마침 이때가 삼국통일 일보 직전이라 고구려와 백제의 부활을 꿈 꾸는 세력에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까지 국경이 그야 말로 아수라 장이었어. 1차 유학 길은 승려로 위장한 스파이로 오인 받아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백 투 더 신라. 이 후 당 나라 유학을 다시 시도하여 경로를 바꿔 이동 하던 중 지금의 천안 부근에서 너무도 유명한 해골 물 일화가 일어나는 거지. 그런데 말이야? 이 해골 물 일화는 두 남자가 사망하고 200년이 지나 당나라의 혜홍 이라는 사람의 임간록 이라는 책에서 갑툭튀! 이 두 남자의 명성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까지 그야말로 열풍을 일으켰어. 이 두 남자의 유학 길부터 그 이후의 사건들을 두루마리에 그림으로 표현한 ‘화엄연기’라는 두루마리 형식의 그림책은 심지어 일본의 국보로 지정! 송나라 때 편찬된 ‘송고송전’ 이라는 책은 350년의 중국 역사 중 위대한 스님들에 대한 기록인데, 원효와 의상도 포함 되었어. 대륙의 스님들을 사이에 두 분이 당당히 끼인 거지. 우리나라에서 만든 책이 아니라 중국에서 만든 책이야! 표본이 적긴 하지만 3가지 책 중 2가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오직 한 책에서만 해골 물을 언급하고 있어. 두 스님이 무덤에서 잠을 잔 후 다음 날 원효대사께서 유학을 포기 한 건 공통적으로 서술 하고 있어. 혹시 말이야? 그냥 갑자기 돌아왔다고 하는 것 보다 해골 물 마시고 진리를 깨닫고 돌아왔다 이건 왠지 어디서 본거 같지 않아? 삼장법사의 개 고생 체험기가 ‘서유기’라는 멋진 소설로 재탄생 했듯이 해골 물 에피소드도 중국의 후대 작가가 좀 더 그럴듯한 이야기로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어때 들? 이제 원효대사의 유학 리턴 후 행적을 살펴 보자고. 6.25 이후 이 땅에는 다행스럽게도 전쟁이라는 악마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 참상에 대해서는 직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어. 전쟁이 없는 데도 먹고 살기가 어려운 판국인데, 전쟁이 일어나면 일상 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고 후..생각만 해도 또한 전후 복구도 오랜 시간이 걸리니,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세대는 어찌 보면 축복받은 세대일지 몰라. 왜냐고? 원효대사가 살았던 7세기에는 1세기 동안 대략 150여 차례의 전쟁이 이 땅에서 일어났다고 해. 4년에 한 번씩 하는 월드컵도 금방 돌아 오는 것 같은데 이 같은 주기는 말도 안 되는 거잖아. 백성들의 삶이 피폐 하다는 말 한 마디로 표현 하는 것이 죄스러울 뿐이야. 물리적 힘이 약한 여자나 부모 잃은 고아들 노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지옥도 그 자체였을 거야. 이럴 때 귀족들의 전유물로 남아있는 종교인 불교는 민초들에게는 그야 말로 남의 나라 이야기지. 이때 백성들에게 승복까지 벗어 던지고 홀연히 나타난 슈퍼 히어로가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원효 대사야. 스스로 소성거사라 칭하며, 꿈이나 희망은 사치일 뿐인 백성들의 삶에 직접 뛰어 들었어. 스님은 부랑자들과 함께 노숙을 하기도 하고, 주막에 들어가 백성들과 탁주(?)를 사이에 두고 그 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어.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가야금이나 각종 악기를 가지고 버스킹도 많이 하셨다고 해. 이런 음악적 재능으로 ‘무애가’라는 노래를 만들었는데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장단 이었는데, 노래 가사는 어머 무시하게도 화엄경의 이치를 담았다고 해. 진짜 어려운 게 어려운 걸 쉽게 표현 해내는 거잖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민중에 최초로 퍼트리신 분이 원효대사야. 나무아미타불은 부처님께 돌아간다는 뜻인데, 이 것만 외우면 누구나 극락에서 새로 태어날 수 있다고 설교를 하며 불교를 설파 하신 거지. 길바닥에서 객사 할지도 모르는 지옥 같은 삶이 아닐지라도 회사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왔는데 어려운 종교 이야기를 한다면 효과가 있을까? 하지만 나무아미타불 한 마디라면? 잠자리 들기 전에 한 번쯤 속으로라도 외워 보지 않았을까? 원효대사의 이런 접근은 확실히 효과가 있긴 했어! 1500년 가까이 지난 오늘 날도 나무아미타불 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때로는 기생집에 드나들기도 하고, 귀족의 집에서 묵을 때도 있었지만 항상 원효대사가 돌아간 곳은 백성들이 있는 삶의 현장 이었다고 해. 민심은 천심이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야. 우리는 알잖아. 저 사람이 도를 아십니까 라는 첫 마디로 시작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4년에 한 번씩 재래시장에 뜬금없이 나타나 애매한 표정으로 오뎅국물을 마시며 사진 찍기에 바쁜 정치인들이 진짜 원하는 게 먼지 민심은 사실 다 알고 있어. 이 개 새들아!! 신라백성들도 원효대사의 진심 어린 애민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그는 마침내 국민스타로 등극하게 되셔. 하지만 조상님 연합을 비롯하여 불교계 내에서조차도 원효대사에 대한 평판은 민심과 완전히 반대로 나타나. 불교계에서는 “큰 스님! 원효의 행동은 우리 불교계 전체에 셀프 빅엿을 먹이는 입 에도 올리기 힘든 행동입니다. 더 이상 좌시하였다가는 불교계 전체가 큰 위기에 빠질 겁니다.” 조상님 연합으로 대표되는 일부에서는 “그 스님이라면 말이야. 참선과 점잖은 행동이 기본 아니야? 어디 스님이란 양반이 천한 것들과 어울리고 노래나 불러대고 에잇! 세상이 말세야 말세. 요즘 것들 하는 건 도통 이해가 안돼!” 신라 진평왕 때부터 내려오던 ‘백고좌회’라는 대형 행사가 있었다고 해. 임금님 주최로 전국의 이름 난 고승 100분을 모시고 세미나도 열고 인맥도 쌓고 했겠지. 무슨 임금 모시고 부흥회처럼 기도 하고 했겠어? 그렇지만 불교행사로는 올림픽과 동급이라고 봐야지. 원효대사는 국민스님으로 등극 후 이 행사에 불교계의 격렬한 반대로 참석을 못 하시게 돼. 그러니까 우사인 볼트의 출전을 막고 올림픽 100미터 경기를 진행 한 거지. 누가 알아주나 그걸. 원효 대사의 반응은? 백고좌회? What? 그런 행사에 신경 쓰고 다닐 스님이었다면 백성들과 살 비비고 살 지도 않았겠지. 원효대사의 삶은 종교지도자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정치인들도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여의도에서는 분명히 한국판 트럼프를 꿈꾸는 정신 나간 금배지들이 있겠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좀 길게 봅시다 들! 1500년이 지나도 사랑 받을 수 있는 길을 택할 건지, 죽으면 가지고 가지도 못할 돈 챙기느라 임기도 마치기 전에 욕을 바가지로 먹으며 후세까지 두고 치욕적인 삶의 흔적을 남길지 생각 좀 하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