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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를 반복할 때마다 괴로워요. 어떡하죠?”
게시물ID : lovestory_801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edIUm
추천 : 6
조회수 : 76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11/08 13: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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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청년 불교대학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즉문즉설이 열렸습니다.
어제부터 1박2일 일정으로 진행되고 있는 특강수련 프로그램 중 스님은 오전 6시부터 9시까지 3시간 동안 즉문즉설을 진행하였습니다.
스님은 단상에서 내려와 청년들과 가까이 서서 3시간을 강연했습니다.

불교대학 수강생들은 궁금했던 점에 대해 마음껏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그 중 실수를 반복할 때마다 스스로를 다그치게 된다는 분의 고민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실수를 반복할 것 같아 괴롭습니다. 담배 피는 사람이 금연을 시도했는데 계속 실패하면 패배감이 들고 또 실패할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지금 제 마음이 꼭 그렇습니다. 저는 실수를 반복할 때마다 그 실수를 다시 반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를 다그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긴장이 많이 되고 괴로워요.”

“실수를 반복한다, 이 말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내가 여기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못 올라갔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 연구해서 이번에는 저렇게 해봤는데 또 못 올라갔어요. 도대체 왜 안 될까? 연구해서 또 다르게 했는데도 못 올라갔어요. 이건 실수가 반복되는 걸까요, 시도하고 있는 걸까요? 이것은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겁니다.

이번엔 계단으로 가봤는데 실패했으면 계단은 포기하면 됩니다. 그럼 다시 밧줄 타는 걸 시도해보는 거예요. 그런데 밧줄도 안 됐어요. 만약 10가지 중에 나에게 맞는 방법이 있다면, ‘이건 아니네. 이것도 아니네.’ 하면서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인 거예요. 그래서 이름 하여 실수지, 실수가 아닙니다. 성공을 향해 가는 과정인거죠. 실수를 반복하지만 실제로는 반복하는 게 아닙니다.

저 목적지로 가려면 열 걸음은 가야한다고 칩시다. 한 걸음을 갔는데 도달하지 못했고, 두 걸음을 갔는데 도달하지 못했고, 세 걸음을 갔는데 도달하지 못했다면 이게 실패일까요? 이건 과정이에요. 열 걸음을 가야 목적지에 다다르기 때문에 열 걸음을 디뎌야만 하는 겁니다. 여기 올라가려면 열 번의 시도가 필요한 겁니다. 이것은 실패가 아니고 그냥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반복되는 실패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녁에 술 마시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속 쓰려서 다시는 술 안 마시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또 술 마시고 쓰린 속을 붙잡고 아침에 결심하고, 다시 저녁이 되면 또 술 마시고 아침에 결심하는, 이렇게 열 번 이상 되풀이하면 실수의 반복이라고 합니다. 아무런 진전 없는 반복이 바로 업식, 카르마입니다. 습관화 된 거예요.

습관화 된 것을 극복하는 것은 좋은데, 실수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실수 자체를 잘못으로 보는 것은 욕심 때문이에요. 열 걸음 가야할 것을 한 걸음 가놓고 목적지에 도달해야겠다고 ‘아이고, 아직도 못 갔네.’하고는 또 한 걸음 가서 ‘아직도 못 갔네. 안 되겠다, 그만하자’라고 해버리는 겁니다. 열 걸음 가야할 것을 두 걸음 가고는 안 됐다고 합니다. 실수가 좌절이 되는 것은 실수 때문이 아니라 욕심 때문입니다. 실수가 문제가 아니라 욕심이 문제예요.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좋아하지만 상대는 나를 싫어할 수 있어요. 그런데 상대가 나를 싫어하면 상처를 받아서 ‘나는 이제 연애 못 하겠어.’라고 합니다. 나는 상대를 좋아하지만 상대는 내가 싫다면 이건 상처받을 일이 아니에요. 확인 작업을 한 것입니다. 상대가 나를 안 좋아하는 걸 확인한 것인데 가슴 아플 일이 뭐가 있어요?

확인을 안 했으면 계속 혼자서만 좋아할 뻔 했잖아요. 이게 낭비지요. 막연히 '상대도 나를 좋아하겠지'하고 기다리는 것보다 빨리 확인을 해서 아닌 건 정리하는 게 좋습니다. 확인을 해서 포기하는 길이 하나 있고, 그래도 상대가 좋다면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확인해야 작업이 쉬워요, 확인 안 해야 쉬워요?”

(청중) “확인해야 쉬워요”

“상대방이 나를 안 좋아하면, 50에서 출발할 것을 0에서 출발해야하니까 연구를 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음식은 뭘 좋아하고, 취미는 무엇인지, 사고방식은 어떤지, 어떻게 하면 나를 좋아하게 될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야합니다. 상대방의 친구도 만나보고 어머니도 만나봐서 여러 가지를 연구를 해서 시도해 봐야합니다. 시도를 해도 안 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면서 1단계 길을 찾고, 더 접근해보니 상대방이 튕긴다면 또 다른 시도를 해보면서 접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수가 왜 문제입니까? 안 되는 것을 보고 실수라고 하는데 이 세상은 거의 잘 안 됩니다.(청중 웃음) 안 되는 속에서 되는 길을 찾는 게 인생이고, 창조고, 그게 연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릴 때 엄마가 밥 달라면 밥 주고, 옷 달라면 옷 주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스님은 가난한 집에 태어났기 때문에 밥 먹으라고 부를 때 바로 와서 먹지 않으면 조금만 늦어도 밥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밥을 각자 밥그릇에 주는 것이 아니라 큰 그릇 하나에 식구들이 다 둘러앉아 먹었으니까요. 밤에 잘 때도 늦게 오면 잘 곳이 없었습니다.

돈을 자기가 벌어서 쓰면 함부로 안 쓸 텐데 부모가 주는 돈을 쓰니까 함부로 쓰게 됩니다. 자기가 벌어서 쓰면 돈을 자기 뜻대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에게 돈을 받아서 쓰면 돈 쓰고도 야단 맞을까봐 걱정해야합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데 쓸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이 “왜, 불교대학 다니면서 돈 쓰고 그러냐!!” 말해도 할 말이 없잖아요. (청중 웃음)

그래서 여러분들의 인생이 항상 조마조마 합니다. 재미있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된 것은 여러분들이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부잣집에 태어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조기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다. 스님은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 이생에 가난한 집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조기교육을 받은 겁니다. (청중 웃음)

청소도 내가 하고, 옷도 내가 빨고, 음식도 내가 해 먹고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노동이지만 이게 바로 학습입니다. 이런 학습을 여러분은 부모가 다 해 준 겁니다. 겉에서 보면 좋은 환경이지만 죽을 때까지 부모가 돌봐주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내가 맞닥뜨려야합니다. 이 문제를 초등학교 때 해결하는 게 나은가요? 서른 살에 해결하는 것이 나은가요?”

(청중) “초등학교 때요!”

“그래요. 서른이 돼서 해결하려니까 힘드는 거예요. 이미 몸은 다 컸고 습관은 들었는데 이제야 고치려니까 어려운겁니다. 그래도 극복해야합니다. 그래서 불교대학 특강수련에 오면 좋은 점이 여럿 있습니다. 여기 안 오면 여러 명이서 함께 자볼 기회가 없잖아요. 요즘 같은 세상에 침낭 속에서 잠자고, 바람이 쏴하고 들어오는 재래식 화장실을 써 보는 경험을 어디에서 하겠습니까?(청중 웃음) 남자는 그래도 군대에서 익히는데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군대에서도 잘 못 견딘다고 합니다. 이것은 습관의 문제입니다.

질문자도 실수할까봐 조마조마한 것은 어릴 때 야단맞았던 것에서 생긴 트라우마입니다. 다 커서는 야단맞을 일이 없습니다. 야단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 상황을 딛고 나아가야합니다. 케이블카만 타고 등산 다니던 사람이 걸어 올라가려면 어려운 게 당연합니다. 지금까지는 케이블카로 올라 왔지만 앞으로 남은 길엔 케이블카가 없습니다. 앞으로는 한 발 한 발 딛고 올라가야하니까 누가 대신해줄 수가 없습니다.

실수에 대해 조바심이 생길 때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농구선수가 골대에 공을 넣는 연습을 할 때, 공이 들어가도 다시 던지고, 안 들어가도 다시 던지면서 연습합니다. 이렇게 연습이라는 것은 들어가도 하고 안 들어가도 하는 겁니다.

우리 인생도 뜻대로 되면 되는대로 살고, 뜻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살면 됩니다. 되면 되는 대로 하고,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소리를 아무도 안 해준다는 것이 문제예요. 혹시 이렇게 솔직하게 야단치니까 기분 나쁜가요?”

“아니요.”

“여러분, 이제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아야합니다. 누구도 여러분의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랏님이라 해서 대신 살아주겠습니까? 부모가 살아주겠습니까? 부모도 어떻게 살아야할 지 몰라서 저에게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묻잖아요.(청중 웃음)

부모 밑에 붙어서 부모가 다 해주겠지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스무 살까지는 도움을 받아도 스무 살이 넘으면 자기가 선택해서 살아야합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데 실수는 인생의 당연한 과정입니다. 10개를 도전하면 9개가 안되고 1개가 되는 게 인생입니다. 저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괴로움이 없는데 여러분은 10개 중에 9개가 되고 1개가 안 되는 걸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항상 괴로운 거예요. 현실적으로 여러분이 스님보다 조건이 나은데도 저보다 괴롭잖아요. 질문자랑 스님이랑 비교하면 누가 더 나아요?

질문자는 젊고 스님은 늙었고, 학벌을 따져도 질문자가 더 낫고, 직장 수입도 더 낫고 다 나은데도 질문자가 괴로운 것은 스님은 안 되는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질문자는 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뜻대로 된 게 없었어요. 여러분은 돈 주고 좋은 장난감 사면됩니다. 우리는 팽이를 만들어야 했어요. (청중웃음)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와서 말려서 만들어 보는데, 어떤 건 잘 만들어지고 어떤 건 잘 안 만들어집니다. 형이 잘 만들어서 따라 해봤는데 생각처럼 안 돼요. 돌려보면 삐딱해서 잘 안 돌아가요. 그러면 버리고 새로 만들지요. 이렇게 팽이 하나 제대로 만드는 데도 열 번, 스무 번 만들어 봐요.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때까지 연습을 해서 ‘아, 팽이는 이렇게 만드는 거구나.’하고 알게 됩니다. 단순히 팽이하나를 만드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 과정에서 얻은 사유체계나 경험이 모든 인생에 적용됩니다. 이게 바로 학습이라는 겁니다.

팽이 만드는 것, 구슬 만드는 것, 구슬치기하는 것들이 모두 학습입니다. 구슬치기 할 때도 구슬을 딱 맞추려면 얼마나 집중하고 노력해야하는데요. 근데 맞았다고 좋아하고 안 맞았다고 싫어서 울고 있으면 매일 울기만 하겠지요. 그런 과정이 인생이라는 겁니다. 이런 것이 인생이란 걸 알면 ‘실수했구나. 그럼 지금 어떻게 하면 되지?’ 하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섯 명의 여자를 떠나보낸 남자가 ‘저는 이제 여자 만나지 말까요?’라고 물어요. 어떤 사람은 한 번 만에 성공해서 연애하고 있다고 부러워해요. 어쩌면 연애하고 있다는 그 사람은 평생 여자 한 명 밖에 못 만나본거고 연애 못 한 남자는 벌써 다섯 명이나 만나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섯 명이 그냥 반복되면 안 되고, ‘내가 얼굴만 봤구나. 내가 내 고집만 하니까 여자가 떠났구나.’ 이런 걸 터득해야 합니다. 예쁜 사람은 요구가 많을 수 있습니다. 그 요구를 다 들어주려면 내가 전전긍긍해야 됩니다. 내가 그 여자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열등감을 느낄 게 아니라 내가 기준을 높이 잡다보니 따라가기 어렵다는 걸 알아야합니다. 만약 서울대 커트라인이 200점이라면 거기 온 사람들의 실력은 200에서 300점은 됩니다. 내가 요행히 180점으로 서울대 미달학과에 들어가서 기뻐했지만 4년 동안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꼴지 일 수 있습니다. 그럼 열등의식이 얼마나 심하겠어요.

그런데 지방대 수석 점수는 200점이에요. 내가 180점으로 들어가면 설렁 설렁 놀아도 2, 3등은 합니다. 너무 좋은 대학, 좋은 회사 가려면 피곤합니다. 너무 좋은 남자, 좋은 여자 만나면 평생 열등의식 가지고 피곤하게 살아야 해요. 내 수준에 너무 높게 만나면 늘 딴 여자, 딴 남자 만날까 전전긍긍하고 내가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됩니다.

실수를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실수가 두렵기는 두려울 겁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시험 치고 조마조마하면서 살아왔으니까요. 누구를 만나도 조마조마하고 어떤 일을 해도 조마조마합니다. 그렇게 살아와서 그래요. 스님같이 어릴 때 농사짓고 살던 사람들은 조마조마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모내기해놓고 이게 죽을까 살까 조마조마하지 않습니다.(청중 웃음)

스님은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가난한 집에 태어나 조기교육을 잘 받았고, 여러분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부잣집에 태어나 나이 서른에 이제야 생존교육을 받는다고 고생하는 거예요. 안 되는 게 당연하다는 관점을 가져도 조마조마한 것은 오랜 습관이 되서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많은 시험을 치면서 잘해보려는데 안 되는 습관이 들어서 그래요. 트라우마란 습관화 된 거예요. 이건 극복해야 합니다. 극복이란 이를 악다물고 참는 게 아닙니다.

실수했다고 약간 처지는 마음이 일어날 때 ‘습관이지 문제가 아니다’고 다시 도전하고, 다시 도전하면 됩니다. 조마조마할 때 확 해버려요. 저 여자한테 말 걸어볼까 말까 할 땐 확 걸어 보세요.(청중웃음) 그래서 퇴짜를 확실하게 맞아 봐야 해요.(웃음) 그런 식으로 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수행이란 것은 절만 하는 게 아닙니다. 말을 확 걸어보고 퇴짜를 확실하게 맞는 것도 연습이에요. ‘저 사람은 나를 별로 안 좋아하구나’ 하고 확인 작업해보는 것뿐이니까 손해날 일은 없어요. 그래도 계획을 딱 세워 작업을 하고요. 아니면 나 좋다는 사람도 천지인데 나 싫다는 사람에게 관심 둘 필요 없어요. 그럼 쓸데없는 낭비는 줄이게 되어서 삶이 굉장히 효율적이게 됩니다.
이런 거 네이버에 검색하면 있나요, 없나요?”

(청중) “없어요.”

(질문자) “감사합니다.”

문제는 실패가 아니라 욕심이란 것,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가는 과정이란 말씀을 들으니 시원하고 기운이 났습니다. 세상 두려울 것이 없네요.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고 나니 3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스님은 3시간 내내 갖가지 비유를 들어가며 청년 불교대학 수강생들의 궁금한 점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현재 일어난 상황은 긍정적으로 보되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할 것을 권유하며 강연을 마무리 했습니다.

“지금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하지 말고 ‘좋아요’를 누르든, 댓글을 달든, 집회를 가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만 첫째, 댓글을 달 때 욕설을 하면 안 되고 둘째, 집회에 가되 폭력 시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보수 세력이 빠질 수 있습니다. 8, 90퍼센트 지지를 받으면 개혁할 힘이 되지만 100만 명이 모여도 절반밖에 지지가 없다면 개혁 동력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들이 유리하다고 너무 과격한 주장을 하거나 과격한 행동을 하면 반대편에게 빌미를 주게 되는 겁니다. 상대의 작전에 말려들면 안 됩니다. 대신 그렇다고 침묵하면 얕잡아 볼 수 있습니다. 어디든지 자기 처지 되는대로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되 기본 예의에 벗어나지 않도록 유의하셔서 하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http://www.jungto.org/buddhist/budd8.html?sm=v&b_no=75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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