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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살펴보는 옷치긴 왕가에 대한 이야기 열 두번째 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27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7
조회수 : 63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11/28 17:15:56


소  속   소 속 부  인 원 수 령 


몽 골 군   우르우트 4,000   케흐티
 망구트  1,000 뭉케 칼자 
 쿵그라트 3,000   알치
 이키레스  2,000  보투 쿠레겐
 잘라이르  2,000  다이순
그 외  1,000   카시르
몽 골 탐 마 치 군  우르우트, 망구트, 쿵크라트, 이키레스,
잘라이르에서 뽑은 인원 + 웅구트 부 
 약 10,000  안차르
볼로르
실레체
부리케 바투
쿠쿠부카
거 란

여 진

한 군
     약 10,000  吾也而
   약 10,000   石抹孛迭兒
   약 10,000  耶律禿花
   약 10,000   史天倪
   약 10,000    劉伯林
   약 10,000   石抹也矢
 몽 골 군  약 100,000  무칼리 


글을 시작하기 앞서 지난 글 말미에 짧게 언급한 무칼리에 관해 정리하고자 합니다, 칭기스칸의 위임 아래 군은 상기의 도표와 같이 조직화 되었지만 우르우트와 망구트, 쿵그라트, 이키레스, 잘라이르 는 몽골 제국 초기 부터 무칼리와 함께해온 무칼리의 군대를 지탱하는 기둥과 같은 이 들이었습니다.

금국에 대한 정벌을 무칼리에게 일임한 징기스칸은 서방원정에 대한 준비로 오트라르에 대하여 사절단을 파견해 정보를 수집하고 원정로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시간이 흘러 1219년 가을 칭기스칸은 막내동생 테무게 옷치긴에게 국정 운영을 맡기고 서방 원정을 떠났습니다. 이후에는 정치 및 재정은 옷치긴이 금국 원정 및 요동 정벌은 무칼리가 담당하는 이원화 체제로 몽골제국이 운영된 것이지요.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1227년 재차 서하 원정을 단행하던 칭기스 칸이 돌연 사망한 이후 1229년에 우구데이가 몽골 제국 제 2대 칸의 자리에 오릅니다, 일반적으로 유목민들이 세운 제국에서는 이 칸의 자리가 멸망과 분열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유목민의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지위는 장자가 아버지의 재산은 막내가 계승하는 원칙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데 반하여 당시 몽골 제국에서 칸을 계승할수 있는 자격 요건은 아직 원칙조차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목국가을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는 그 기저에 흐르고 있는 기본 정신은 물론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를 통해 유목 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사람을 선발한다는 적임자 계승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수가 있는데 이 때문에 몽골 제국에서는 새로운 대칸이 선발될때마다 가장 적합한 적임자를 찾기 위한 쿠릴타이가 개최되었고 그 과정에서 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칸위 후보자들은 소모적인 이합집산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이 쿠릴타이라는 것은 북방민족들간의 역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종의 대의기구가 변모하여 국가 최고 의결 기관이 된것입니다, 운명공동체인 전 구성원의 합의 아래 결론을 도출한다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몽골 제국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수 있는데 유목 제국에서는 유목 경제의 생태상 비슷한 성격의 부족들의 연맹체로 출발 하였기 때문에 쿠릴타이에는 황금씨족 전체가 모여 새로운 대칸을 선출하거나 중요한 정복전쟁을 논의하고 법령의 반포등을 토의하여 합의를 도출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쿠릴타이에서 결정된 사안은 몽골 제국 전체가 수용해야만 하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요.

칭기스칸의 분봉을 통해 독립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 올루스의 제왕들은 만장 일치 합의의 합의 도출 기구였던 이 쿠릴타이에서 몽골 제국의 칸위 계승 권자의 자격에 대한 불확실성을 이용해 몽골 제국의 칸위 계승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몽골 제국에서는 그 들보다 앞선 요나라의 적장자 계승이나 금나라의 형제 계승과 같은 명확한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칭기스 칸이 우구데이를 후계자로 지목했다고는 하나 1229년 쿠릴타이에서 벌어진 차기 칸위 계승자에 대한 극심한 논쟁은 몽골 칸위 계승권자 자격 규정의 이런 모호성에 비릇된 것 입니다.

이런 모호성은 독립적 성향을 가진 제왕들의 분권화 지향과 맞물려 그 후 몽골 제국의 칸위 계승과 관련한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쿠릴타이를 통해 선발된 대칸에 반대하는 세력의 불만은 그칠줄을 몰랐고 이는 제국의 분열과 혼란을 야기했기때문에 신임 대칸은 여러 제왕들과 반대 세력을 잠재우기 위하여 대외 원정을 계획하거나 대규모의 경제적 사여를 더 많이 자주 지급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대외 원정 이후 원정에 참여한 제왕들에게는 몽골 제국의 전통에 따라 다시 분봉을 해야 했지요.

그렇다고 이걸로 입막음이 되는것이 아니라 대규모의 사여를 받거나 분봉을 받은 여러 제왕들은 칸위 계승 분쟁을 이용해 더 많은 이득을 편취하였고 올루스 내에서 독립적 성향을 더 확대해 나갔습니다.


CEM-36-Regno-della-China-2355.jpg


몽골비사 254와 255절에 따르자면 칭기스 칸은 서방원정을 떠나기 전 이미 후계자를 결정하는 그러니까 차기 칸위 계승자를 선발하는 논의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수 있는데, 이 후계자 문제가 표면화되었을때 차카타이는 주치에 대하여 '메르키트의 사생아'라는 극단적인 욕설을 퍼부으며 주치를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또한 주치를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언급하며 사실상 주치의 장자권을 부정함으로서 주치가 차기 칸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불가함을 역설했지요.

몽골비사에 기록된 이때의 상황은 이렇습니다.'큰 나무와 같은 그대의 몸이 기울어지면 난마와 같은 당신의 나라는 누구에게 맡기시겠습니까' 하고 칭기스 칸이 제일 총애하는 세번째 부인 예수이가 묻자 징기스칸이 답하기를 '내 아들들의 맏이는 주치이다, 주치야 너는 무슨 말을 하겠느냐' 라고 주치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벌어진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치가 무슨 소리도 내기 전에 차가타이가 "주치가 말하라고 하실 때에는 주치에게 맡기고자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가 어찌 이 메르키드의 사생아에게 통치를 받겠습니까?' 하고 뱉어 버렸다. 

주치가 일어나서 차가타이의 옷깃을 틀어쥐고 "칸께서도 달리 말씀하신 적이 없다. 네 놈이 어떻게 나를 차별하느냐? 네 놈이 무슨 재주로 나보다 더 나으냐? 너는 단지 괴팍스러운 것만 나보다 더할 뿐이다. 멀리 활을 쏴서 네게 떨어지면 내 엄지 손가락을 잘라 버리겠다. 씨름을 해서라도 네게 지면 넘어진 자리에서 안 일어나겠다. 칸이시여  당신의 뜻을 알게 하소서." 하고 말했다. 

주치와 차가타이가 서로 옷깃을 틀어쥐고 다투고 있을 때 주치를 보르추가 말리고 차가타이를 무칼리가 말렸지만 칭기스 칸은 듣고서도 잠자코 앉아 있었다.'


톨루이가 칭기스 칸의 명령에 복종하여 형인 우구데이 곁에서 조력자로서 그 역할을 다하겠다 약속하여 이 제1차 칸위 계승 논쟁은 일단락 되었지만 이러한 논쟁은 이후 또다른 계승 분쟁을 불러오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칭기스 칸은 살아생전 자신의 아들 들의 역할을 비정했습니다, 장자 주치는 사냥을, 차자 차카타이는 법령을, 우구데이는 국정을,막내 아들 톨루이는 군대를 관리하도록 했다고 하는데 사실상 여기서 우구데이와 톨루이를 두고 깊은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능력만 본다면 톨루이였습니다, 항상 아버지 곁에 머물며 중국에 대한 원정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뽐냈으니 말이지요, 그러나 그 냉혹하고 잔인한 성품에서 칭기스 칸이 우구데이에게 바랬듯이 몽골의 전통을 잘 수호하리라 바라는 것은 무척 어렵다 판단했던것 같습니다, 결국 호의적이고 타협적이며 관대했던 우구데이가 차기 칸위 계승권자로 낙점되었지요.

즉 엄밀히 말하자면 칭기스칸은 주치를 장자로 다시금 인정하려 했으나 차카타이가 출생이라는 최대의 약점을 끄집어내어 주치의 발목을 잡음으로서 주치가 후계자 구도에서 밀려났다고 볼수 있지만 생각해보건데 후계구도의 안정을 바랬지만 오히려 시쳇말로 개판 오분전으로 번졌기때문으로 이는 몽골 제국 전체의 분열로 번질수 있기에 황금씨족 내부의 단결을 중요시 하는 정치적 배려에서 그나마 성격이 괜찮았던? 우구데이를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우구데이는 황금씨족의 불화를 결코 멈출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집사에 주치에 대한 부분을 보자면 내용중 한 곳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그의 형제들 차카타이와 우구데이 사이에서는 항상 반목과 불화 다툼이 벌어졌고 --- 때문에 그와 툴루이 칸 및 툴루이의 일족 이 양측은 서로 일치 단결의 길을 걸었으며, 그들은 결코 비난하는 일이 없었고 그의 출생의 건전함을 인정했다'

위 기사중 ---는 주치가 메르키트 인임을 기술하지 않고 비워둔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이 기술을 통해 톨루이는 차카타이나 우구데이에 비하여 주치의 출생에 대하여 비난하거나 혐오하지 않았음을 알수 있는데 여기에 더하여 주치의 처인 백투드미쉬 푸진과 톨루이의 처인 소르칵타니 베키는 케레이트 부 옹칸의 동생인 자카 감부의 딸들로 자매사이였기때문에 차카타이와 우구데이로 부터 따돌림당해 제외된 톨루이와 역시 곤궁한 처지였던 주치의 우호 관계는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일수 있습니다.

이렇듯 주치와 톨루이 양 가문이 연합해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공동으로 대처해 나갔다면, 차카타이와 우구데이의 가문 역시 손을 잡고 대응할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몽골 제국의 칸권 계승의 앞날이 순조롭지 않을 것을 말해주는 것인데, 나머지는 다음글에서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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