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경찰의 출현, 머리를 겨눈 총, 선혈이 낭자한 시체들, 동시에 처리하기엔 너무 엄청난 위기들이 한 꺼번에 몰아닥치자, 위기감을 이겨내지 못한 두뇌의 사고 회로가 블루스크린을 띄웠다. 극단적 패닉상태가 찾아왔다. 유일하게 동작하는 것은 '행복회로'뿐이었지만 놈에겐 치밀어오르는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낼 힘도 의지도 없었다. 역경의 극복 대신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틀며 현실을 도피한다. 그리곤 곧 현실도피로만으론 성에 안 찼던지 '정신승리'를 위해 음악의 볼륨을 높였다. 푸르딩딩한 화면처럼 먹통이 된 나, 급기야 머릿속에서만 흐르던 리드미컬한 리듬이 입밖으로 튀어나오고,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과 함께 읽으시면 더욱 좋습니다. +_+
“둥둥따리 둥둥따리... 빰! 빰! 빰! 빰!”
“입닥쳐! 이 미.친 '또.라.이 사.이.코.패.스 살.인.마 새키'야! 넌 지금 이 상황에 노래가 나오냐?”
총을 겨눈 경찰도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나도 억울했다.
돌아이는 B다.
사이코패스는 X다.
살인마란 호칭 또한 인육만두를 만든 주방장에게 돌아가야 마땅했다.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내 지분은 1g도 없다. 헌데 쥐뿔도 모르는 경찰이 억울한 누명들을 모두 나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미치고 팔짝 뛸 일 이었다. 속상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피해자고, 죄라면 그저 모진 년놈들 옆에 있었던 것 밖에 없다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둥둥따리 둥둥따리... 빰! 빰! 빰! 빰!”
“그만하라고 이 미.친.새.끼야!”
불행히도 행복회로는 정신승리중이었다. 경찰관은 흥분해 소리치고, 주둥이는 놀라 멈췄는데, 주책맞은 어깨가 상황파악 못하고 들썩였다. 나는 왜 늘 이 모양일까? 그렇게 주방장과 내가 신나는(?) 음악에 맞춰 ‘Put your hand up!’의 추임새를 몸소 실천하고 있을 때, X와 B가 있는 정문 쪽의 상황도 얘기치 않은 국면으로 흐르고 있었다.
“으으... 으아악... 우웩!”
초짜였을까? 시체가 처음 일까? 혹 봤더라도 이렇게 많은 시체는 경험 밖일 것이다. 문이 열리자 펼쳐진 지옥도의 처참한 풍경이 젊은 경찰을 압도하고 있었다. 겁에 질리다 못해 경악에 찬 눈빛, 미.친듯이 떨리는 손, 끝내 주저앉아 버린 두 다리, 그 역시 나처럼 정신줄을 놓은 채 토악질에 매진하고 있었다. 마치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그래... 나도 처음 X가 냉장고에 채워 넣은 것을 봤을 땐 저랬었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담한 광경에 무기력해진 경찰, 그가 현실에 매몰된 채 주저앉아 시선마저 회피하자, X와 B가 희희낙낙 그 곁을 지난다.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음은 물론, 흡사 마실 나온 사람마냥 유유히 말이다.
그럼 그냥 조용히나 갈 것이지, 기껏 한다는 소리가 또 걸작이다.
“갑자기 곱창전골 땡기지 않아?”
“옴마나... 곱창전골? 완전 굳이지!”
“우리집 냉장고에 저런 거 되게 많은 데, 재료도 있겠다. 내가 끓여줄게 먹고 갈래?”
“어머머 요리까지? ”
묻고 싶었다. 왜 나는 잡고, 쟤들은 보내주는지, 납득할 수 없는 경찰의 검거방식이 나를 분노케 했다. 피칠갑에 죽은 사람들의 장기가 쏟아져 나온 상황에도 곱창전골 운운하는 미.친.삐리리들을 말이다. 억울해진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둥둥따리 둥둥따리... 빰! 빰! 빰! 빰!”
행복회로가 어깨를 들썩였다. 땀(?)으로 흥건해진 골반도 춤을 춘다. 그러자 주방장도 신이나서 외쳤다.
“가만 있어라해! 지린내가 올라와서 숨을 못 쉬겠다해!”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총을 겨누던 경찰이 떠나려던 X와 B를 불러 세웠다는 거였다.
“저기요. 거기! 당신들은 뭐...세요?”
“손님이요! 다 먹고 이제 막 가려는 참인데 왜요?”
대체 어떻게 생겨먹으면 저리 당당할 수 있는걸까?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식의 귀찮음이 황당하기까지 했다. 대체 대한민국 경찰을 얼마나 허술하게 봤길래! 나는 슬며시 코웃음을 치며 생각했다.
'훗! 그래, 저 자신감은 이제 곧 똥이 된다. 그것도 빅 똥이! IT'S BIG SHIT!'
아니나 다를까,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던 경찰은 다시 내 머리에 총구를 겨누며 말했다.
“아 그러세요? 난 또... 그럼 살펴가십쇼!"
여긴 어디인가? 난 또 누군가? 그리고 난 왜 여기에 있는가? 또라이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쟤도 또라이, 얘도 또라이, 나도 또라이, 그리고 신고받고 출동한 너도 또라이. 현실감각이 소멸되고 있었다. 이건 꿈인가? 아니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마에 닿은 총구의 차가움은 현실, 비로소 고장났던 머릿속의 회로가 제 자리를 찾기 시작하자 나는 다급히 속삭였다.
"저... 저기요..."
"왜 임마!"
"쟤... 쟤들 그냥 보내셔도 되겠어요?
"아 참 그렇지! 내가 큰 일 낼 뻔 했네!"
다행이었다. 이 경찰도 약간 맛이 갔나 싶었는데, 그래도 한 번 짚어주니 바로 정신을 차리고 외친다.
"저기요 거기 두 분... 그냥 가시면 안되는데."
"예 저희요? 아 왜요?"
B가 짜증스레 묻자 경찰관이 대답했다.
"아 목격자시라 조서 쓰려면 함께 좀 가주셔야 합니다. 보시다시피 딱히 상황설명 해주실 분도 없고..."
“아 정말 귀찮게...”
“하하하 죄송합니다. 바쁘시더래도 잠깐만 시간을 좀...”
"저희 지금 곱창전골 먹으러 가야되거든요? 그리고 저기 저 아저씨가 아까 자수한다 했데요! 그러니까 궁금하신 거 있으면 저 아저씨한테 물어보세요!"
"저 아저씨?"
B의 말에 경찰의 시선이 주방장을 향했다. 그의 손에는 아직도 크고 날카로우며 피까지 묻어 흉칙하기 그지 없는 인육다짐용 중식도가 들여있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어쩌면 이것이 오해를 풀 수 있는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놀란 주방장은 다급히 들고 있던 식도를 등 뒤에 숨겼지만 경찰의 시선은 이미 싸늘해져 있었다.
“너 뭐야! 들고 있는 그거! 카! 칼이지?”
“아... 이... 이건 요리용이다해. 위험한 물건 아니다해!”
“외국인이야?”
“우리 사람 중국사람이다해. 예의를 갖춰달라해!”
“예의는 무슨 조선족이야 한족이야?”
“조선족이다해”
“뭐야! 그럼 한국 사람이잖아.”
“아니다해! 나는 중화민족 사람이다해! 대만유학도 다녀온 나름 엘리트다해!”
“아... 암튼! 우! 움직이지마! 우...움직이면 쏘...손다.”
콧노래가 절로 흘러 나왔다. 내 머리통을 겨누던 총구가 방향을 바꿔 주방장을 향한 것은 물론, 의혹의 눈초리 역시 오롯이 주방장을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도 생겼다.
그러자 내내 잠자고 있던 나의 생존회로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그래... 사실대로 밝히자. 어차피 난 죄도 없잖아. 만두 만든 것도 쟤고, 여기 사람들 다 죽인 것도 쟤 부하들이고... 그래! 솔직히 얘기하는 거야! 왜 거 그런 말도 있잖아. 이 세상 진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 진실! 진실이야말로 나를 이 암담한 상황에서 구해 낼 가장 큰 무기일지 몰라!’
그러고보니 지금까지의 나는 너무도 얼어 있었다. 여기 죽어있는 사람들은 물론, X가 집 안에 방치해놓은 시체들도 모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애꿎은 나까지 공범으로 몰릴까 두려웠을 뿐, 실상 나는 어떠한 죄도 저지른 적이 없다.
구태여 죄를 찾아 봐야 살인 방조죄나 해당 될까? 그나마도 X와 B의 가공할 실체를 감안하면 충분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다.
‘그래... 이제 억울한 누명과 오해에 대한 두려움은 이제 그만! 진실이란 강력한 무기로 말미암아 나는 끝내 승리하리라! ’
최후의 최후, 마지막에 남는 것은 오직 진실 뿐이란 누군가의 말을 되뇌이며, 나는 다짐을 굳혔다.
그렇게 모든 진실을 털어 놓으려던 찰나, 주방장이 나를 보며 말했다.
“정신적인 지주! 어떻게 좀 해봐라해! 우리 사람 이러다 죽는다해!”
“뭐? 정신적인 지주? 이 놈들 한패였구만!”
“으아아악! 야! 내가 왜 니네 지주야!”
총구가 다시 나를 향했다. 차가운 쇳덩이의 끝이 금방이라도 불을 뿜을 듯 움찔댔다. 오! 신이시여! 대체 어떤 새끼가 진실이 최고입네, 진실이야 말로 최강의 무기입네하고 입을 털었단 말입니까?
보십시오. 오해와 거짓이 승리하는 이 억장터지는 지옥의 순간을...
“왜 그러냐 정신적 지주! 니가 뒷문으로 도망치자해서 이렇게 된거 아니냐해! 다 니 책임이다해!”
“이 자식 한 패 맞구만! 꼼짝마! 처음부터 이 상황에 노래를 부르지 않나. 이 돌아이! 이 사이코! 이 엽기적인 살인마!”
"으허허허헝!"
눈물이 났다. 세상에 나보다 억울한 사람이 또 있을까? 주방장의 대책없는 한 마디가 나를 모든 죄악의 근원으로 만들었다. 돌아이, 사이코패스 그리고 살인마, 나는 어느새 인육만두를 만들기 위해 살육을 자행한 미치광이 집단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있었고 누군가가 말했던 진실의 힘은 꼬리를 감춘채 사라진 후 였다.
나는 뒤늦게 항변하려 애썼지만 이미 주방장의 말을 철썩같이 믿어버린 경찰은 도무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에요. 쟤! 쟤네가 사람을 죽여서 인육으로 만두를...”
“뭐야! 이 미.친 놈들 사람으로 만두를 만들어? 이거 진짜 생또라이들 아냐? 그러니까 니가 그 만두를 만든 정신적 지주란 거 아냐?”
“아니! 그게 아니라요! 저는 손님인데, 재수 없게 엮이는 바람에...”
“원래는 손님이었는데 재수없게 엮이는 바람에 이 무리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고?”
“아 놔! 이 양반 진짜 말귀 안 통하네! 아 나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라니깐!”
“거짓말 하지마! 전혀 상관이 없는데 어떻게 정신적 지주가 됐지?”
"아니라고! 정신적 지주..."
"아니다 맞다해 정신적 지주다해!
"뭐야 이 자식아!"
"흠... 역시 정신적 지주야,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저 중국인 주방장이 전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어. 사악한 놈! 끝까지 발뺌을 하려고 하다니!"
"으아아! 젠장!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 및 인물, 지명, 배경등은 사실과 무관합니다.
처음이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꽉 막힌 인간은... 내가 어떤 말을 하든 주방장의 ‘정신적 지주’ 그 한마디에 자신의 결론을 짜 맞췄다. 설득은 커녕, 대화조차 되지 않았다. 누가 그랬던가? '말이 통하질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고... 급기야 분노한 나는 억울한 심경을 담아 큰 소리로 외쳤다.
“둥둥따리 둥둥따리... 빰! 빰! 빰! 빰!”
"역시 정신적 지주야! 이 상황에도 노래를 부르는 저 담대함! 배짱! 무섭군. 경찰인생 20년에도 이런 엄청난 놈은 처음이야! 하지만 난 그 덕에 1계급 특진을 하겠군, 캬하하하!"
‘행복회로 풀 가동! 정신 승리로 위기 극뽁!’은 개뿔, 미.친 놈들과 어울려 다니다보니 나도 따라 미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경찰은 총을 겨누고, 빠져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미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는데, 경찰은 불난 집에 기름 붓듯 무전기를 들고 말했다.
“칙칙, 본부 나와라 본부! ㅇㅇ지구대 홍순철 경위다. 살인사건 발생, 살인사건 발생, 긴급 지원 요청 바란다. 오바!”
‘살인 사건? 무슨 일인가?’
“아 여기 ㅇㅇ동 사거리 인근 중국집인데,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사상자 다수, 내가 지금 유력한 살인 용의자와 그 정신적 지주를 붙잡고 있다! 빠른 지원 바란다 오바! 아 참! 그리고 전에 공고된 연쇄 살인범 검거 시 포상금과 1계급 특진 건도 확인 바란다. 흐흐흐”
그의 무전이 나를 한층 더 깊은 절망의 수렁으로 인도했다. '유력한 살인 용의자' '정신적 지주' 왜 나를 둘러 싼 오해는 풀리긴 커녕 점점 더 꼬여만 가는 것일까? 특진이니 뭐니 나불대는 것만 봐도 그랬다. 이대로 잡혀가면 100% 나를 살인범으로 몰아갈 것이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애꿎은 사람을 범인으로 몰았다는 고발성 다큐들이 떠올랐다. 그들처럼 나도 죄도 없이 수십년을 감방에서 썩게 되는 것일까? 다큐멘터리 속 피해자들의 얼굴이 내 얼굴 위로 오버랩됐다.
이대로는 안됐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오직 그런 생각만이 머릿 속에 가득 차 있었다.
‘뭐? 살인사건! 정신적 지주? 알겠다. 긴급 출동하겠다. 상황을 좀 더 설명해라.’
“상황은 무슨 상황! 여기 지금 시체가 하나 가득 있고, 칼 든 조선족 놈 하나 그리고 그 놈의 정신적 지주라나 뭐라나 하는 사이코를 하나 잡아두고 있다. 얼른 와라! 내 생전 이런 광경은 처음이다.”
“아저씨 나 얘네 정신적 지주 아니라니깐요!”
나는 억울함으로 울부짖었다. 누명을 쓰고 복역한 이들의 심경이 어떠했을지 느껴졌다.
하지만 머릿 속이 온통 1계급 특진으로 가득 찬 경찰은 도무지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지금 들었다시피 정신적 지주라는 살인용의자의 심리상태가 몹시 불안하다. 그러니 빠른 지원 바란다. 이상!”
"아 놔 이 아저씨 진짜!"
‘치지직. 알겠다. 목소리만 들어도 매우 위험해 보인다. 주의하기 바란다. 보고 후 곧 출동하겠다.’
억울함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마지막에 이기는 것은 결국 진실이라더니 그 마지막이 설마 나 죽고 난 다음, 혹은 넉넉히 30년 정도 감방에서 썩고 난 다음이었던가?
‘진실은 결국 인생의 말미에 이르러 비로소 승리하고, 일 평생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오해와 거짓 그리고 기만이다. 선택은 결국 당신의 몫!’
숨겨졌던 인생의 심오한 진리가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냈다. 진실이 끝내 승리 할 지는 몰라도 '평생 고생만하다 힘 없고 초라해진 말년에 겨우 행복을 거머 쥘 것인가? 아니면 쌩쌩하고 건강한 젊은 시절 내 즐겁고 부족함 없이 살다가 거동조차 힘든 말년에만 초라해 질 것이냐?'하는 원초적 담론에 대한 깨달음이 나를 혼란 속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허나 위기로부터 얻은 값진 깨달음의 순간은 개뿔, 화딱지가 나고 열불이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졸지에 나를 절망으로 내몬 주방장과 말귀조차 못 알아 먹는 이 경찰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선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하늘은 그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
기회의 여신은 생각보다 더 빨리 '성큼성큼'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별 것 아닌 한 마디 말을 반전의 열쇄 삼아 말이다.
“아 참! 본부! 그리고 여기 목격자 겸 생존자도 두 분 계신다. 혹시 모르니까 엠뷸런스도 함께 보내기 바란다 오바!"
"목격자 겸 생존자? 119센터에 연락하겠다. 신상에 대해 알려달라 오바!"
"음... 신상이라... 생존자는 남성 하나, 그리고... 음... 음? 흐으음... 그래! 머리 긴 저기 누구야! 영화배우 최민식씨 닮은 중년 남성 분 하나!”
"뭬! 뭬! 뭬! 뭬야!"
생각지 못한 곳에서 벼락같은 분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이것이 상황을 뒤집는 거대한 반전의 열쇠가 될 줄은...
그리고 그 반전의 후폭풍이 초래할 황당무게한 상황도...
나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다만 보이는 것은 분기탱천하여 허공에 솟구친 장군님의 무시무시한 모습 뿐이었다.
"육시랄 놈!"
그렇게 또 한 번의 포효가 고요했던 사망유희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9>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분노를 폭발시킨 B와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경찰, 바라보는 내 호흡도 따라 거칠어졌다. 위기에서 벗어나고파 간절히 바랬지만, 맹세컨대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쓰러진 경찰의 상태를 확인하니, 다행히 숨은 붙어 있으나 의식은 불명이었다. 하나의 매듭을 풀면 또 하나가 꼬여 있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나는 급히 지나온 상황을 복기했다.
우리 집 냉장고에 쌓여 있는 시체들 – 처리 불가
사망유희에서 벌어진 일련의 살인극, 아니 대 학살극 – 처리 불가
출동한 경찰에 대한 폭행! - 처치 곤란
그리고 그 모든 사건에 빠짐없이 연루되어 있는 나 - 어이상실
위기는 극복되긴 커녕, 예정된 재앙으로 분해 눈덩이처럼 몸을 불리고 있었다.
화가 치민 나는 소리쳤다.
“야! B, 너 미쳤어? 경찰은 왜 때리니?”
특진에 눈 먼 경찰을 해치운 B가 고맙지만, 한 편으론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든 B가 원망스러운, 복잡미묘한 기분이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X가 다가와 B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아니! 잘했어. B가 하지 않았으면 내가 했을거야. 경찰이든 뭐든, 내 여자를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어!”
“옴마나 X!”
“미안해 B, 아직은 내 사랑이 모자라나봐. 먼저 화를 내는 건 나였어야 해.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흐아아앙 X!”
감동한 B가 X의 품에 파고 들었다. X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체취를 만끽한다. 이것들 지금 대체 뭐하자는 시츄에이션인지 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사소한(?) 것들까지 따지기엔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금방이라도 경찰의 사이렌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이제 어쩌지?”
아무도 대답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물었다. 우유부단한 나로선 어떠한 판단도 내릴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누구라도 속시원히 결단을 내려주면 좋으련만, 명석한 두뇌를 가진(?) 나로서도 해결의 방안은 묘연하기만 했다.
‘자수해? 아냐... 그랬다간 이것들이랑 엮여서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거야!’
‘도망칠까? 어디로? 이 새끼야 생각을 좀 해!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되어 있고, 위로는 휴전선이 펼쳐져 있단 말이다! 이 멍충아 도망쳐서 어디로 갈 건데?’
그때, B가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콩고로 간다!”
“야 임마! 지금 이 상황에 너 싫다고 도망친 그 의사새끼 잡으러 가자고? 너 미쳤냐?”
나도 모르게 또 버럭 소리를 질러 버렸다. 화가 났다. 복잡하게 엉켜버린 상황도, 그 상황에 파묻혀 허우적대는 나도, 모든 것이 짜증스러웠다.
그때 부쩍 날카로워진 눈빛의 X가 물었다.
“싫다고... 도망친... 의사... 새끼?”
“그래! B 쟤가 죽자고 따라 붙으니까 감당을 못하고 아프리카 콩고로 의료봉사 떠난 그 의사 새끼! 내가 그 새끼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어휴... 아... 아?”
입이 방정이었다. X에게도 그런 얄팍한 감정이 있을 줄은 몰랐다. 두 눈이 화르륵 질투에 사로잡혀 타오르고 있었다.
“많이... 사랑했나?”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 지 모르는 이 상황에 적절한 질문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기분탓인지 순간 X의 얼굴이 조금 슬퍼 보였다.
“미안해 X... 좀 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뭘?”
“나 분명히 니가 좋아. 하지만 아직은 널... 널... 받아들일 수가 없어!”
“아니 왜! 내 가슴이... 내 심장이 이렇게 널 원하는데 대체 왜!”
“나 사실... 그 사람 완전히 못 잊었어. 술을 마시면 잊을까 취하고 나면 사라질까,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결국 난 알게 됐어. 그 사람과 내 관계, 완전히 끝내기 전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거란 걸...”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비련의 여주인공 모드로 돌변한 B도 그렇고 쿵짝을 맞춰주며 활활 타오르는 X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B야. 니가 대체 그 의사양반하고 무슨 관계였는데? 혼자서 좋다고 죽자고 따라다닌게 다잖아! 이 미.친 스토커 삐리리야!’
냅다 끼어들어 이 어처구니없는 신파극의 산통을 깨놓고 싶었지만, 둘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래서였나? 내가 다가갈때마다 흔들리던 네 눈빛...”
“미안해 X, 나 아팠어. 네가 다가올 때 마다, 한 걸음씩 내 마음으로 네가 들어올때마다 아팠어. 그래서 이제라도 이야기하는 거야.”
‘얼래? 쇼를 해라 쇼를...’
“안돼... B! 너... 넌 모르겠지만... 내... 내 심장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게 되어 있었어. 그걸 네가 깨우쳐 준거야. 한 사람... 단 한 사람만 사랑하게,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게 무슨 소리야! 지난 사랑을 잊지 못하다니!”
‘아악! 손발이 오그라든다. 시공의 벽이 무너지고 있어!’
X가 주저앉아 오열했다. ‘야! 너 계 탔다. B가 됐다고 할 때 빨리 마음 접어! 그게 너를 위해서도 모두를 위해서도 좋아’ 라는 충고가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일단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게 나를 위해서도 모두를 위해서도 좋아보였다. X와 B, 서로가 아니면 누가 이 애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제3자인 나도 이렇게 고통스러워 하는데 말이다. 핵 폐기물은 한 데 모아 가지런히 묻어두는 것이 최선이다. 여기저기 난립하면 대책이 없다.
“X, 모든 일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 그 끝이 무엇이든 그걸 확인하려면 난 콩고에 가야만 해!”
“내가 여기 있는데... 이렇게 널 원하는데, 그 사람... 안 만날 순 없는거니?”
“그래! 안돼. 사실 나 그 사람 떠나기 전에 고백했었어. 하지만 그 사람은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답을 주지 않고 떠났지.”
‘야! 그 의사양반 너 무서워서 도망친거야! 제발 그 분 좀 이제 그만 놔줘! 응?’
“미안해 X, 그 답... 듣기 전까진, 너도 그 무엇도... 난 받아들일 자신이 없어. 그게 싫다면 나를 떠나도 좋아. 남들이 뭐라건 이미 시작한 사랑이야. 그 끝이 뭐든 난 보고 말거야. 내 사랑의 끝을...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내 가슴 안엔 남을거고, 난 죽을때까지 반쪽짜리로 살아야 돼. 그런 찝찝한 마음으로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너와 함께 할 순 없어. 그게, 지금 내 심정이야...”
“만약 그 사람이 너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플 거야... 그것도 많이...”
“아플게 뻔한 사랑, 그런 사랑의 끝을 왜 보려고 하는건데!”
“아프겠지. 그래 나 같은 앤 아파야 돼. 너처럼 좋은 사람을 힘들게 했으니까! 나도 그만큼 아파야하는 게 맞아. 열병에 걸린 것처럼 죽도록 아프겠지만, 그 병이 낫고, 감정의 열이 내리면... 그때의 난 아마 더 강해져 있지 않을까? 비록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때 X 네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땐 아마 내가 널... 더 좋아하게 될 거야.”
“B!”
※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 및 인물, 지명, 배경등은 사실과 무관합니다.
X가 B를 강하게 끌어 안았다. 두 사람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감격스런 사랑의 완성에 하늘도 감격했을까? 저 멀리서 축하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망했어! 우린 망했어! 경찰이 코앞까지 들이 닥쳤어! 흐허허헝! 나는 니들 땜에 살인자로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그것도 평생! 흐허허헝!”
하지만 그 순간 X가 결단을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콩고로 간다!”
“고마워 X!”
“뭐? 야 이 썅썅바들아! 콩고가 무슨 뉘집 개이름인 줄 알아? 그게 동네 제과점 이름인 줄 아냐고! 니들 지금 제 정신 아니지? 야 주방장! 너도 말 좀 해봐! 니 눈엔 지금 이게 제정신으로 보이냐고?”
X의 콩고행 결정이 나를 분노케 했다. 어차피 X와 B, 두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니니 최소한 주방장만큼 현실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해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주방장은 어느틈엔가 겁먹은 젊은 경찰에게 다가가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말했다.
“정신적 지주! 콩고든 어디든 나는 상관없다해! 만두는 내 인생이다해! 최고의 만두를 만들 수만 있다면 아프리카든 어디든 나는 갈꺼다해! 그나저나 이 경찰은 어쩌냐해? 젊은 게 다짐육으로 만들면 육질이 끝내주겠다해!”
“야 이 미.친.놈아 뭘 또 다져! 너한테 물은 내가 바보지!”
“사... 살려주세요! 으허헝”
내가 미.친 놈이었다. 인육만두나 만드는 정신빠진 인간한테 정상적인 사고를 요하다니, 애띈 얼굴의 경찰은 겁에 질린 얼굴로 살려달라 애원하고 있었다. 바지춤이 축축해보이는 게 동병상련이랄까?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그 사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X와 B가 활짝 웃는 얼굴로 앞장 서며 말했다.
“뭣들 하고 있어! 어서 가자! 콩고로 가는 길은 멀다구!”
“빨리와! A! 우린 지금부터 콩고로 간다!”
“자! 잠깐! 나도 데려가달라해! 나는 여권도 있다해!”
내 머릿속의 사고회로가 또 다시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 정신나간 인간들을 따라가면 그 날로 내 인생도 종치는 거라고, 절대 따라나서면 안된다고 애원했다.
하지만 어쩌랴. 경찰의 사이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차피 이리 된 거, 나도 이판사판이었다.
“이 미.친것들! 니들은 다 미쳤어!”
구슬픈 절규가 울려퍼지고, 그렇게 우린 사망유희를 벗어나 차에 올라탔다.
* * * * * * *
답답했다.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미칠지경이었다. 시체로 가득한 사망유희에 홀로 남을 순 없어 따라나서긴 했지만, 후회만이 맴돌았다. 한시 바삐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 안전한 곳에 숨거나 상황을 모면할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그렇게 해도 불안해 미칠지경인데, B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콩고행이라니, 이건 황당함의 수준을 넘어 이해불가, 어이상실이었다.
“하하하! 그렇게 옷까지 바꿔입으니 정신적 지주! 너 정말 경찰같다해!”
“시끄러워 주방장 너는 지금 웃음이 나오냐? 어휴! 내가 미쳤지 정말!”
나는 불안해서 미칠지경인데, 주방장은 물론 모두가 하하호호 신이 나 있었다. 꼭 무슨 여행을 떠나는 관광객같았다. 대체 뭐가 그리 즐거운 걸까? 모두가 웃고 있는 가운데 나 혼자 지옥이었다.
다들 면허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옷을 바꿔입고 운전석에 앉아있노라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확... 죽어버릴까? 아이고 내 팔자야!’
극강의 돌아이에 타고난 괴력까지 지닌 B만으로도 애로가 차고 넘치던 내 인생이었다.
거기에 남의 집 냉장고를 제 것 마냥 시체 보관소로 만든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X가 뛰어들었다. 애로가 꽃을 피우다 못해 포르노가 될 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 죽이기를 밥먹듯이 하는 만두에 미.친 살인마 주방장이 무임승차했다. 이쯤되면 보통은 원형탈모가 시작되고, 피가 바싹바싹 마르며, 시름시름 앓다 홧병으로 죽을 판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냐? 그것도 경기도 오산이다.
내 인생을 파멸시킬 치명적인 부록까지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뭐가 그리 신기한지 연신 우리를 훑어보며 웃고 있는 정신나간 신참 경찰이 인질이란 이름으로 잡혀 있는 것이다.
“넌 이 새끼야! 경찰이 되가지고 이 상황에 뭐가 좋다고 그렇게 쳐 웃어?”
“하하하! 이건 꿈이니까요! 제가 모를 줄 알았죠? 이건 100% 꿈이에요! 그러니 뭐 심각할 필요 있나요? 그나저나 아무리 꿈이라지만 연쇄살인마들에게 납치되다니! 저 지금 흥분되서 미치겠어요! 잇힝!”
“어휴! 내 팔자야! 저거도 돌아이네! 야! 넌 지금 이 상황을 보고도 꿈이란 말이 나와? 꿈?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이게 꿈이면 좋겠다고 임마!”
그나마 유일한 정상인이길 기대했던 경찰(이하 Z)도 자신이 겪은 충격적인 상황에 자아를 잃고 살짝 맛이 가 있었다.
“에이 누가 모를 줄 알고요? 꿈이 아니면 관할 변두리 중국집에서 어떻게 그런 학살사건이 나요!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건 너무 허황되다! 끽해야 무전취식이나 주취자 신고 들어오는게 현실적이지. 히히힛! 암튼 이건 말도 안돼! 그러니까 이건 꿈이야 꿈! 하하핫! 사실 또 제가 전부터 루시드 드림 – 자각몽(自覺夢) : 꾸준한 훈련을 통해 꿈을 스스로 인지하며 생각대로 조종까지 가능, feat 인셉션 – 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평소 연습을 한다고 하긴 했는데, 야! 그게 이렇게 신기한거였구나! 완전 진짜 같아요! 하하핫! 내가 살인마들 옆 자리에 앉아 납치되다니! 이야! 신난다 신나! 다음엔 어떻게 전개될까나?”
나는 생각했다. 경찰인 Z도 필시 모든 회로가 망가졌을 거라고, 그래서 행복회로가 가동됐을거라고, 앞선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현실도피, 자아상실, 환상구현, 정신승리! 모두가 행복회로 구동의 전형적인 증거였다.
‘현실을 일깨워 주는 것도 귀찮고, 또 본인이 즐겁고 행복하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냐? 그래! 제발 사고만 치지마라 쫌!’
사실은 나도 행복회로가 가동중이었다. 그래서 더 Z의 말에 공감이 갔을지 몰랐다. 지금 상황은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겨낼 재간이 없는 최악중의 최악, 긍정적 사고방식이란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화끈하게 인생을 끝장내던가 아니면 행복회로가 만들어낸 환상의 달콤함에 젖어 끝까지 가던가. 선택은 두 가지 뿐이었다.
그리고 의지박약한 나의 선택은 첫 맛이 달콤한 후자였다.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이왕 버린 운명, 될 대로 되라지!’
그나마 다행인 건 도피가 신속했던지 쫓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쫓기지 않는다는 건 참 마음 편한 일이었다. 웬지 이대로 차를 타고 가다보면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땅에 도달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살인도 인육만두도 경찰관 폭행, 납치사건도 없는 안식의 땅...
그 곳에서 한 몇 달 푹 쉬다 오면 세상 모두가 오늘의 사건을 잊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생겼다.
물론, 모두가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왜 갑자기 차들이 멈춰서냐해? 저거 혹시 검문 아니냐해?”
가장 먼저 위기를 감지한 건 주방장이었다. 녀석은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모습이 무색하리만치 겁에 질려 있었다. 물론 긴장한 걸로 치면 나도 만만치 않았다. 핸들을 쥔 손이 너무 굳어버려 유턴조차 못 할 정도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