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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스압]'X 생태 보고서' 4~5편
게시물ID : panic_914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야설왕짐보
추천 : 10
조회수 : 1926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6/11/06 16: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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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X생태보고서_표지_긴것_최종.jpg
 
      ※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 및 인물, 지명, 배경등은 사실과 무관합니다.
 
 
 
 
 
X생태 보고서
: 살인마, 돌아이 거기에 왜 하필 나?
 
 
 
<4>
 
 
이시여, 정녕 제 앞에 앉아 있는 저 아이가 제가 아는 B가 맞사옵니까? 좋아서 헤벌레 벌어진 입, 반달모양으로 눈 웃음 치는 참혹한 교태, 순간순간 치고 들어오는 윙크의 끔찍함
 
누구냐 넌...’
 
괴로운 건 둘째 치고, 소꿉친구로서의 충정이 야 너 그럴수록 오대수- 올드보이 최민식 - 같애란 진심어린 충고를 떠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서지 못한 이유는 하나였다.
 
‘X가 웃는다.’
 
배시시, 은근한 눈빛으로 조금은 수줍은 듯 흡사 첫사랑을 대면한 소년의 표정처럼 완전히 무장 해제된 X가 그 곳에 있었다.
 
오호라 통재라 짚신도 짝이 있다더니 네가 바로 그 지상 최고의 불행아로구나.’
 
 
회심의 미소가 입가에 어렸다. ‘손 안대고 코 푼다.’더니 이게 바로 그 짝이로구나 이제 난 자유다! 보는 이만 없다면, 잠시만 시간을 멈출 수만 있다면, 아마 난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삼창은 물론 환희의 팡파레를 울렸을 것이다.
때 마침 술과 안주가 나왔다. 이대로 밀어붙이면 나를 위협하던 두 개의 골칫덩이를 단 박에 해치울 수 있단 생각에 두 손과 입이 분주해졌다.
 
! ! 뭣들 하고 있어! 잔을 채우시게! 잔을! 자 레이디 퍼스트!”
 
늘 하던대로, 술병을 들어 B에게 먼저 권했다. 정말이지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어머! A. 나는 술을 잘 못 하잖아. 그러니 어서 내게 저 쪽에 있는 무알콜의 탄산음료를 따라주지 않으련?”
?”
사이다. 꼭 상호까지 말해야 돼?”
?”
옴마옴마! 나는 순진해서 술을 잘 못하잖아.”
언제부터?”
원래부터... 태어난 이후로 쭈욱...”
누가?”
내가! 내가! 내가!”
 
B가 이를 악물 채 대답할 때 눈치 챘어야 했다. 번식기의 암컷은 종종 교미를 목적으로 자신의 행동양식을 바꾸기도 한다는 걸, 주량은 물론 성격과 말투까지 모든 것이 고무줄처럼 변한다. 하지만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B의 발끝이 정강이를 걷어 찬 후였다.
 
으헙!”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까짓 아픔, 너희 둘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한들 못 참을까? 악에 바친 다짐이 나로 하여금 참을 인()자를 가슴에 아로새기며 억지미소를 짓게 했다.
 
그렇지... 그래! 우리 B는 말술... ... 아니! 술이 약한 여리디 여린 참으로 순수한 아가씨였지? 하하핫 내가 아주 잠깐 잊고 있었네!”
 
그렇게 급히 들고 있던 술병을 내려놓고 사이다를 권하려던 찰나, 갑자기 X가 내 손의 술병을 빼앗아 들더니 말했다.
 
첫 술자리니까. 한 잔은 마셔요. 한 잔도 힘들어요?”
어머!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마음이 약해진다. 성의를 봐서 딱 한 잔만 받을게요. 근데 나 이거 먹고 취하면 어떡하지? 나 취하면 막 정신 잃고 그러는데...”
잠들면 오늘 우리 같이 A네 집에서 자요. 재밌잖아요. 또래들끼리 어울려서 밤새 얘기도 하고 노는 거...”
어머! 그럴까? 호호홋
 
워낙에 같잖은 짓거리를 보고 있자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다 끝내 말문까지 막혔다.
 
아니야 X 속지마! 저 계집애 말술이야. 말술! 별명이 인간 정수기라고! 위로 넣으면 아래로 걸러내는... 살아있는 삼투압 필터!’
 
내 마음의 마지막 선의(善意)X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허나 다가가 닿을 수 없는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버젓이 B가 두 눈 부릅뜨고 있는데 그 따위 소릴 했다간 정강이가 박살이 날 것이다. 두고두고 그 일을 빌미로 괴롭히는 것은 물론 도망친 짝사랑의 남자를 만난다며 또 다시 김포공항으로 나를 이끌 것이다.
어후! 그건 안 되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악몽에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그 사이 B의 술잔을 가득 채운 X는 아찔한 도발을 시도하고 있었다.
 
뭐해 B? 나도 한 잔 줘.”
 
순간 나도 모르게 다급해졌다. 파블로프의 개, 이른 바 조건반사 실험을 아는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전기 자극을 받은 개는 음식이 없어도 전기 자극을 받으면 조건에 따른 반사행동으로 침샘이 자극되어 침을 흘린다.
한국식으로 이야기하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달까? 주사(酒邪)가 남다른 B에겐 김포공항 난동 외에도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이른 바 극단적 페미니즘 성향의 발현이라 부르는데, 완벽한 페미니즘 전사로 분하곤 하는 B는 여성 폄하 또는 전통적 여성상에 대한 발언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혹여 실수라도 하는 날엔 반드시 피의 응징을 하곤 했는데, 그로 인해 수많은 남자들의 얼굴이 묵사발이 되거나 뒤통수가 깨진 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리고 그런 피해자들을 가장 많이 양산한 주범이 바로 ‘B 너 술 한 잔 따라 봐라.’였다. 관점에 따라 별 것 아닌 말일지 모르지만 B는 그 말에 유독 날 선 반응을 보이곤 했다.
 
[내가 술집 작부야? 여자한테 술 받아먹고 싶으면 집에 가서 니 마누라한테나 따라 달라고 해! 이 씨X 호랑말코 같은 개XX! 왜 뜳니? 뜳으면 여기서 한 판 뜰까?]
 
소꿉친구에 마누라는커녕 애인마저 없는 나도 예외는 없었다. 일단 그냥 들이 받고 보는데다 상대가 누구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응징하기 일쑤였다.
그 생각에 화들짝 놀란 나는 재빨리 X를 만류하며 꾸짖고자 했다.
 
! 떼기! 임마! 어디 여자한테 술을, 자고로 여자는 술 따르는 거... !”
 
왤까? 갑자기 B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내 입을 가로 막았다. 이제부터 시작될 X의 응징에 시끄러우니, 지방방송일랑 꺼버리라는 경고에 일환이었을까?
하지만 나의 예상은 무참히 깨지고,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전혀 다른 미지의 B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어머! 역시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이지! 그것도 나처럼 예쁜 여자가! 호호홋
 
마지막의 몇 마디는 비록 무언가 잘 못 듣지 않았나 싶긴 하지만 놀라운 변화였다. 아직 취하질 않아서일까? 아니다. 안 취했을 때도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니 술은 니가 따라 마셔!’ 라고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우리 민식이 아니 B를 보며, 나는 새삼 번식기 여성의 신박한 의식변화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자 한 잔 하자... 오늘 우리의
우리의? ...”
 
우리의누구나 흔히 하는 건배사 사이로 B의 감탄이 끼어들었다. 그 까짓 형식적 멘트에 의미를 두는 것은 아직 너무 이르지 않나 싶지만, 별 것 아닌 말 한 마디에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영락없는 여자 B를 보며 그래 이 순간을 즐겨라. 끝내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으로 끝나더라도 한 순간의 불꽃을 찾아 나방은 날아든다.’ 축복 반, 안쓰러움 반의 묘한 심리상태에 접어 들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마시네. 어때? 한 잔 더 줄까?”
어머! 나 이렇게 주는 술 넙죽 넙죽 받아 먹는 여자가 아닌데, 얼굴 빨개진 것 봐, 원래 나는 술을 쪼끔만 먹는 사람이지만, X 너의 성의를 봐서 오늘은 내 마음의 빗장을 열고 모두 받아들이고만 싶구나!”
 
X 염병도 이런 지X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짜증스런 광경에 압도되어 입을 샐쭉 내밀고 있자니 어느 틈엔가 B에게서 긴급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나 안하던 짓 하려니까 감질나서 죽겄다. 나가서 글라스에 소주 9, 사이다 1로 한 잔 말아 오니라. 찐허게 알았지 친구얌!]
 
어찌합니까. 어떻게 하나요.’ 나도 모르게 내 입은 임재범이 되어 고해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렇게라도 두 사람을 떨쳐 낼 수만 있다면, 뭐든 못 할까 싶었따.
물론 마음이야 이대로 냅다 뛰어서 도망치고 말자 싶지만, 인생이 달린 문제를 그렇게 기분 내키는 대로 결정할 순 없었다. 완벽한 기회가 필요했다. 그렇게 신중론에 사로잡힌 나머지 머뭇대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B가 또 다시 내 정강이를 걷어차며 태연히 물었다.
 
“A야 너 갑자기 목이 좀 마르지 않니?”
... ! 이상하게 나도 갑자기 갈증이 나네. 어휴! 목말라라. 사이다를 한 병 더 가져와야겠는데? 커다란 컵에 따라서.”
그래? 우리 A, 목말랐구나? 갈증은 몸에 해로우니 어서 빨리 가려무나. 주저하지 말고 어서... 어서!”
 
B의 채근에 등 떠밀려 일어서자 이번엔 X가 의아한 듯 바라봤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시선이다. 나는 자연스레 500cc짜리 맥주잔을 들었다. 놈이 빤히 보고 있었지만, 떨리진 않았다. 괜찮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 사이다를 따르는 척 하다. 재빨리 밑장을 깔 듯 소주를 부었다.
여기까지 성공했다면 다음은 더 쉽다.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B와의 약속된 플레이로 A의 시선을 빼앗은 후, 나와 B의 컵을 바꿔치기 한다. 완벽하다. 바꾸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걸죽하게 한 잔 들이킨 B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잔에 얼음을 담아 사이다인지 술인지 알 수 없게 만든 내 센스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술자리가 점차로 무르익어 갔따.
 
어머 아까 한 잔 마신 게 이제 막 올라오나봐 어머 나 왜 이렇게 덥지?”
 
갑자기 B가 덥다며 겉옷을 벗어 제꼈다. 그야말로 뻔한 수작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 편으로 이해가 되는 바도 있었다.
 
그래 너에겐 그것뿐이다. 비록 얼굴은 명량 앞바다지만 몸매는 최소한 평균!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 하는 것이야 말로 승리의 열쇠지!’
 
여자임에도 최민식을 닮은 B의 얼굴은 다소 위압감을 주는 편이었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몸은 제법 평균에 수렴했다. 힘을 주면 사내처럼 튀어나오는 알통은 다소 아쉽지만 나름 글래머러스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본인도 그것을 알았던지 보란 듯이 승부수를 던지기 시작했다.
 
어머!”
 
젓가락을 하나 떨어뜨리고 그걸 핑계로 상체를 숙인다. 헐렁한 상의 앞 섭이 너풀대며 떨어지고, 아찔한 B의 가슴골이 X를 향해 일제히 개방된다.
 
아 눈이 썩을 지경이다.’
 
하지만 아쉽다. 어느 순간부턴가 군만두에 심취해버린 XB의 섹시 어택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소냐? 아니! B의 사전에 포기란 없었다. 줄기차게 들이대는 이 뻔뻔함이야말로 B를 이제껏 지탱해온 삶의 원동력이었다. ‘쨍그랑소리와 함께 이번엔 수저가 떨어졌다.
 
어머 나 취했나? 왜 자꾸 이러지?”
 
필요 이상의 혀 짧은 소리가 내 고막을 썩게 만들었다. 그리곤 갑자기 웨이브를 추며 허리를 숙인다. 그야말로 가관이다.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번식기에 접어든 암컷의 절박함이란 이다지도 절실한 것인가?
하지만 웬 걸? 만두의 오묘한 맛에 반해버린 걸까? XB는 뒷전이고 만두의 맛과 색, 그리고 냄새를 확인하는 등, 미식가 모드로 변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갓 지방덩어리에 불과한 가슴보단 눈앞의 일용할 양식에 집중하는 자세에서 뜻하지 않은 명인의 풍모가 느껴졌다.
그러자 당황하기 시작한 건 B쪽이었다. 급히 노선을 바꿔 다리도 꼬아보고 혀로 입술도 핥아보는 등 별별 수작을 다 해댔지만 X는 요지부동이었다.
녀석의 모든 신경은 오로지 만두에만 쏠려 있었다.
왜지? 만두가 그렇게나 맛있었나?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만두의 맛 > 넘을 수 없는 통곡의 벽 > 차원의 벽 > B의 매력
 
어렵지 않은 계산이었다. 나라도 그럴 것이며, 누구라도 그러지 아니할 수 없는 매력 총량의 보존 법칙 매력의 총량은 질량과 같아서 다른 형태로 바뀔지언정 그 총량은 완벽히 보존된다 에 의거하며, 아울러 이다지도 부담스러운 행태는 애초에 무시하는 게 답이었다.
 
아뿔싸 B, 어쩌겠냐. 너의 매력 없음을 탓 할 수밖에...’
 
갑자기 식어버린 듯 차가워진 X, 그런 녀석의 무심함을 B도 느꼈을까? 오랜 소꿉친구의 얼굴에서 거역 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나 잠깐 화장실 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화장실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축 쳐진 게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나로서도 도리가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원래부터 강제할 수 없는 법이다.
 
한편 X는 그런 B의 마음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여전히 만두에만 심취해 있었다. 처음엔 그저 맛과 색, 향을 음미하는데 그치더니 어느 순간부턴 마치 의사라도 되는 양 만두의 배를 가르고, 안에 든 소를 하나하나 떼어내 고기와 당면 그리고 부추를 분리해내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XB의 부조화, 비록 예상 못 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이러다간 도망은커녕, 지옥행 완행열차구나 싶었던 바로 그때, 누군가 나에게 다가왔다.
 
저기요 혹시 합석 안하실래요?”
 
처음 보는 여자, 그것도 둘이, 예쁘긴 또 얼마나 예쁜지, 한껏 몸매가 드러나는 타이트한 미니 원피스에 짙은 화장 그리고 모래시계처럼 올록볼록 엠보싱 몸매가 돋보이는 그야말로 바람직한 처자들이었다.
아니 이게 왠 떡, 아니 일생일대의 기회란 말인가. 나는 위급한 상황도 잊은 채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그녀들을 바라봤다.
 
괜찮으시면 저희랑 술한잔 하실래요? 여기 제 친구가 그 쪽 너무 마음에 든다고...”
 
게다가... ...헌팅? 그것도 여자 쪽에서 먼저? 호흡곤란이 찾아왔다. 이런 내가 창피하지만 그런 말을 듣자 제일 먼저 생각난 건 불법 장기 밀매였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나 자신에 대해... 그것도 철저히!
 
1. 여자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2. 혹시라도 의심이 간다면 1항을 다시 확인한다.
3. 그래도 영 낌새가 수상하면 유료 또는 장기밀매 여부를 유심히 살피도록 한다. 모든 결과는 1항에 수렴한다.
 
나는야 차가운 도시 남자. 헛된 꿈은 꾸지 않는다. 이럴 때 어떤 식으로 거절해야 하는 지 정도는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돈도 별로 없구요. 백수라 카드 발급도 안되는데 또 건강은 드럽게 나빠서 지병도 있어 장기 이식에 적합하지 않아요.”
?”
장기이식에 부적합 하다구요. 저 약간 당뇨도 있어요.”
뭐래...”
 
여자의 표정이 이상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 ‘이건 뭥미?’, 황당하다는 반응 그리고 재수 없어!’까지 4연타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미묘한 부조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부조화는 그녀들의 시선을 쫓아가자 즉시 명확해졌다.
 
방향!’
 
그래 방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들은 예쁜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마치 벌레라도 본 양 비웃으며 말했다.
저기요. 미쳤어요? 그 쪽 말구요.”
뭐 꼭... 미쳐야만 나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만 뒀다. 이미 끝없이 0에 수렴하던 자존감은 더 완벽한 0을 향해 소멸되고, 나의 시선은 쌔끈, 섹시, 오부지게 매력적인 그녀들 대신 갑작스레 군만두 덕후가 되어버린 나의 친애하는 동거인 X에게로 향했다.
저기요. 잘생긴 오빠.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놀아요. 내 친구가 사실 피팅 모델 출신이거든요? 알죠? 피팅모델, 나도 쟤가 저러는 거 처음 봐서 신기하긴 한데, 이상형이라는데 그냥 둘꺼에요? 그리고 여기서 친구랑 칙칙하게 노는 거보단 우리랑 노는 게 더 좋잖아요. 그쵸?”
거하게 까임을 당한 주제에 쪽팔린 것도 모르고 나는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설득력 있는 말과 몸매였다. 나였다면 당장 일어나 넙죽 90도로 인사하며 따라 나섰을 것이다.
두 명의 섹시 폭탄, 그리고 화끈한 술자리와 그에 뒤 이은... 폭풍같은 사랑의 응응응...’
생각만 해도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그때 X가 말했다.
꺼져.”
?”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잘 못 들은 것은 아닐까? 왜 제 발로 굴러 들어온 떡을 발로 차지? 내가 두 눈만 꿈뻑거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X는 이내 귀찮다는 표정으로 재차 소리쳤다.
꺼지라고. 안 들려?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어머! 어머! 뭐야? 좀 잘생겼다 싶어서 놀아줄까 했더니 뭐래? 재수 없게...”
이 것이 바로 소위 말하는 있는 자의 여유란 말인가? 나로선 상상조차 못할 일이 눈 앞에서 벌어졌다. 화끈하게 차려진 밥상을 냉정하게 걷어 차 버리는 X의 모습에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나야 이미 까인 몸, 부러움 반 시기심 반의 표정으로 바라보면 그만이지만 마음 한 편으론 은근히 후련한 기색도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르릉하고 천둥 번개가 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돌아왔다.
‘B’ Is Comming Back!
Welcome to the hell!
그리고 B가 날린 첫 마디.
뭐야 이 애기들은?”
 
4-2.jpg
 ※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 및 인물, 지명, 배경등은 사실과 무관합니다.
 
 
말에 그런 말이 있다. ‘마른하늘에 날 벼락분명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인데 내 귀엔 뇌우가 쏟아지는 웅장한 소리가 들렸다. 여자들 특유의 기 싸움, 흔히들 여우짓또는 영역 다툼이라 말하는 본능적 투쟁심이 만들어 낸 묘한 기류 탓이었다. 애매한 위치와 상황에서 만난 그 두 개의 뜨겁고 차가운 구름대는 비좁은 공간 안에 강력한 폭풍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첫 포문을 여는 태풍 최민식의 성난 황소 같은 우뢰!
니들 어디서 꼬리치니? 대가리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어디서 여우짓이야? 니들 혼나 볼래? ?”
보통은 여기서 끝이다.
누차 강조했지만 분노한 B의 얼굴은 성웅 이순신 장군님을 떠올리게 할 만큼 압도적이다. ‘신에겐 아직 12척의 배가 남았습니다.’ 하고 포효할 것 만 같은 그 위엄서린 표정은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는 것도 모자라 경외심마저 느끼게 했다.
살고자 하는 자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 살 것이다.’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덤빌 수 없는 전투형 낯짝이었다.
헌데 이 여자들... 생각보다 당차다.
꼬리를 쳐? 이건 뭐 어디서 너구리 같이 생긴 게 튀어나와가지고 난리야 난리가! ! 너 손에 든 건 또 뭐니? 다시마니? 오동통통한 게 불어터진 면발같이 생겨가지고는...”
? 너 몇 살이야... 몇 살...”
그건 알아 뭐하게? 무조건 너보다 열 살은 어려! 이 아줌마야!”
... ...줌마?”
당찬 정도가 아니라 이건 핵폭탄 급이다. 나이가 제법 어려보이던데, 요즘 초등학교에서 임진왜란과 성웅 이순신 장군님에 대해 전혀 배우지 않는 것일까? 구국의 영웅에 대한 존경심마저 거세당한 아해들의 되먹지 않은 망발에 장군님의 노여워하고 계셨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과 눈매, 꽉 다문 입술, 나는 생각했다.
오늘 또 하나 거북선 타고 요단강 건너겠구나.’
안 그래도 B의 표정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활화산 같았다. 겉으로 보기엔 그다지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그것이야 말로 진짜 위험 신호였다. 폭풍전야,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 고요는 단순히 추진력을 얻기 위한 발판일 뿐, 터지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난다.
게다가 B는 지금 한낱 만두에게 밀려 까임을 당한 뒤 심경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그 뿐인가. 번식기에 접어든 B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흉폭한 1급 위험 조수에 속했다.
하지만 아뿔싸. 그런 B의 무서움을 몰랐던 우리의 섹시 폭탄이 잠자는 사자의 콧 털을, 아니 B의 겨털을 잡아 당기 듯 발칙한 도발의 포문을 열고야 말았다.
우리랑 놀기 싫다 길래 왠가 했더니, 너 엄마 모시고 왔니? 술 맛 참 좋겠다. 엄마 뻘되는 이런 X랑 술 마셔서!”
이젠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동정심이 들 뿐이었다.
너네 그만해. 그러다 진짜 죽어...’
그리고 그 순간, B의 눈이 뒤집혔다.
야 이 삐리리 년들!”
사나운 발정기의 맹수가, 아니 성웅 이순신 장군님께서 큰 소리로 출정의 북을 울리고 있었다.
 
 
 
<5>
 
 
는 보았다. 휘둥그레진 그녀들의 눈동자를, 앞트임 뒷트임 거기에 눈매교정까지 받은 안그래도 큰 눈이 눈알을 토해낼 듯 벌어졌다. ! 왜 꼭 후회와 깨달음은 두 손을 맞잡고 찾아올까? 짐승의 포효를 듣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무모함을 깨닫지만 후회는 무릇 아무리 빨라도 늦게 마련이다. 분노한 B는 어느새 한 마리의 맹수로 돌변해 있었고, 흡사 미.X 마냥 머리칼을 헝클이며 시동을 거는가 싶더니 이내 날카로운 발톱을 들이밀며 날아들고 있었다.
 
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자 문득 유년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불과 11살의 나이에 학교를 평정한 소녀는 모두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자정쯤 살아 움직인다는 이순신 장군 동상의 괴담조차 B의 분신이란 괴소문까지 나돌았을까? 같은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라면 모두 운동장 앞 장군님 동상 안에 B의 조종실이 있다 믿을 정도였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의 절친이었던 난 아이들이 왜 B를 무서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 번은 B와 같은 반이었던 여자아이에게 물어 본 적이 있다.
 
대체 B가 왜 무서운거야? 못 생겨서?”
 
그러자 그 애가 대답했다.
 
물론 고등학생 언니라 해도 믿을만큼 원숙한 얼굴에서 일단 먹고 들어가는 것도 있지만, 단순히 얼굴 때문만은 아니야. 보통의 여자애들 하면... 할퀴거나 머리채를 쥐어 뜯거나, 그도 아니면 깨물잖아. 그런데 B는 그런 게 없어. 걔는 타고난 파이터야. 여자애가 눈 하나 깜짝 않고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리잖아. 거기다 독학으로 터득한 태권도 덕에 치마를 입은 채로 뒤돌려 차기를 하지. 맞은 사람들은 모두 벼락이 친 줄 알았다고 했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아마 B를 위한 만들어진 말일지도 몰라. B는 살아있는 싸움의 신이야.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런 폭력의 역사를 이루는데 B의 역량이 고작 30% 밖에 쓰이지 않았다는 거야. 저 아이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시대를 잘 못 타고난 거지. 삼사백년 전에 태어났다면 B는 분명 장군이 됐을거야. 소드마스터. 원터치 파이터, 왜구와 오랑캐를 물리쳤겠지. 애석해... 저 아이의 재능을 쓸 수 없다니 말이지.”
 
그 순간 나의 회상을 방해라도 하듯 하는 소리와 함께 좌우 양옆 돌려깍기에 필러로 다듬은 그녀의 고운 턱선이 어그러진다. B의 뒤돌려 차기가 정확히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굉장했다. 소리만 들어도 이건 최소 사망 아니면 중상이겠구나, 앞으로 저 여자는 평생 죽만 먹고 살아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광석화, 1톤의 파괴력, 이것이 바로 B의 무시무시함이었다. 하지만 어린시절부터 B를 보아온 나로선 이정도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이어진 잽, , 어퍼컷, 그리고 대미의 엘보우 촙!
저 현란한 풋워크와 경쾌한 손놀림을 보라. 이걸 어찌 인간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을까? 제 영역에 침범한 적을 사정없이 물어 뜯는 맹수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의 눈빛도 경악으로 물들었다.
 
!”
 
절망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뒤돌려 차기에 이은 4단 콤보를 소나기처럼 얻어맞은 여성이 실신하자 극단적 두려움과 마주한 일행의 피팅모델 아가씨가 내지른 비명이었다.
 
5-2.jpg
※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 및 인물, 지명, 배경등은 사실과 무관합니다.
 
간이 야생의 곰을 철창 밖에서 만난다면, 그 두려움을 여기에 비할까? 안그래도 가냘픈 모델 아가씨의 어깨가 한 겨울의 나뭇가지처럼 떨려왔다. 두려울 것이다. 살면서 죽음이란 두 글자를 이리도 가까이 마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의 어깨 위에 새겨진 문신으로 추정해 보건데, 나름 놀았다면 놀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범주.
단언컨대 B는 사람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계 최강의 존재로 운명지어진 외로운 존재.
B의 전설은 이미 문학 작품으로도 다뤄진 바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드래곤 중에서도 최강 B가 울부 짖었다.
B는 졸라 짱 쎄서 드래곤 중에서도 최강이었다.
신이나 마족도 이겼다. 다 덤벼도 이겼다.
B는 세상에서 하나였다.
어쨌든 걔가 울부짖었다.
 
으악 제기랄 도망가자
 
모델아가씨가 도망갔다. B가 짱이었다.
그래서 모델 아가씨는 친구를 버리고 도망 간 것이다.‘
 
전설의 명작 ‘B 드래곤
 
 
믿거나 말거나, 이 전설의 모티브가 B일 꺼라는 사실은 B를 아는 모든 이들의 암묵적인 비밀이었다.
누차 말하지만 믿거나 말거나다.
 
하아... 하아...”
 
일방적 학살이 끝난 중화요리 전문점 사망유희안엔 고요가 맴돌았다. B의 살의(殺意)에 찬 숨소리만이 들려오고 자리에 앉은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 흔한 젓가락질 소리마저 사라진 절대의 고요, 주방장 마저 놀라 뛰쳐나온 홀 안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갈 곳 없는 시선으로 회오리쳤다.
우리의 소원은 하나 통일이건데, 하나로 뭉친 모두의 바람은 그것 뿐이었다.
 
신이시여. 제발 저 짐승과 제 눈이 마주치지 않게 해 주소서
그리고 부디 바라옵건데 이 광폭한 고요가 하루 빨리 끝나기를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숨소리마저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적막함에 모두가 떨고 있을 때,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누군가는 호흡곤란으로 쓰러지려 하던 바로 그 순간, 비로소 B가 입을 열었다.
 
뭘 봐 이 씨XXX 구경났어?”
 
허둥지둥 벽을 향하는 시선들, 극단적 공포는 정상적인 사고를 마비시켜, 119를 부르는 것은 물론, 경찰 신고 또한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벽에 시선을 박아 넣은 채 미동조차 하지 못하는 인간군상들...
그 사이로 갑자기 우렁찬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상황에 박수를 왜 쳐, ..놈인가? 죽고 싶어 환장한 놈?’
 
또 한 생명이 이렇게 사그러드는 구나 싶었던 그 때, 박수의 주인공이 입을 열었다.
 
아름다워.”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사정없이 헝클어져 얼굴조차 가려버린 긴 머리, 강렬한 남성성을 드러내며 튀어나온 이두박근, 어깨 위에 강호동을 올려놓아도 끄떡 없을 것 같은 튼실한 장단지...
거기에 추가로 떡실신 하여 쓰러진 피해자의 처참한 몰골.
 
이 광폭한 피의 현장을 아름답다고 할 그런 미..놈이 세상에 어딨...’
아니다.’
있다!’
묻을 데를 못 찾았다며 냉장고에 사람 머리를 넣어두는 정신나간 미치광이...’
 
그래 X’
 
놈이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B를 바라보고 있었다. 환희에 가득 차 울먹이는 눈으로 자신을 매혹시킨 완벽한 존재를 향해 경배의 시선을 보낸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나 화장실에서 너무 오래걸렸지? 근데 이 아가씨는 왜 남의 테이블 앞에서 누워있데? 이봐요. 이봐요. 찬데서 자면 입돌아가요. 어머 술이 좀 과했나봐 어쩌지?”
 
실로 놀라운 순간이었다. X의 한 마디가 투명드래곤 모드의 B를 다시금 여자로 바꾸어 놓았다. 무엇이 그리 수줍은 지 B는 새삼 유체이탈 화법으로 조금 전 제가 저지른 만행을 무마하려하지만 그런 건 아무 의미 없었다.
어느덧 X의 눈동자엔 흠모의 감정이 가득차 있었다.
대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껏 이루어진 감정의 교류가 B에서 X로 향하는 지극히 일방적인 짝사랑의 형태였다면, 지금은 그 흐름이 바뀌어 X에서 B로 향하는 완벽한 역전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X, 저 차갑고 무미건조한 눈에서 사랑의 불꽃이 튀다니...
X, 저 무심한 시선에도 봄은 오는가?
X, 저 울먹이는 눈동자 속에 여인의 그림자가 아로새겨지다니...
X, 이젠 나도 손발이 오그라들어 더는 묘사 못하겠다.
 
그런 X의 눈빛 때문일까? 유체이탈 화법에 여념이 없던 B가 새삼 머리칼을 매만졌다. 얼굴을 가린 커튼을 치우고 끝을 돌돌 말아 베베 꼰다. 그러자 이제껏 포효하던 짐승의 내음이 가시고 그나마 사람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사람, 성웅 이순신 장군님...’
 
충분히 부담스러운 얼굴이지만, 누가 그랬던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엔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X 역시 그랬다. 그윽한 눈빛으로 제 앞에 선 한 여자를 바라본다.
누구보다 강한 외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면은 상처입고 여리다.
사람을 때려죽일만큼 무시무시한 손이지만, 그처럼 누군가 잡아주기를 바라는 손도 없다.
X가 갑자기 B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어딨다가 이제 왔니?”
? ?”
 
갑작스런 X의 포옹에 B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지만 싫지만은 안은 듯 어쩔 줄 몰라 한다.남들이 뭐라해도 X에겐 심장을 뛰게 하는 유일한 여자, 어쩌면 지구에 다시는 없을지 모를 최초이자 최후의 이상향...
 
[흉폭한 매력의 금사빠 돌아이 BX의 유토피아이자 낙원이었다.]
 
감동의 폭풍이 몰아치고 참을 수 없는 감정의 파도에 내 가슴도 뛰었다. 비록 그 역할은 미비했지만 두 사람을 잇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낸 나의 공을 치하하며, 부둥켜 안은 두 사람을 향해 나는 축복의 말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삐리리들! 영화 찍냐? 빨리 떨어져! 경찰 오기 전에 튀어야지! 이것들이 정말 누구 인생을 망칠라고! 어휴!”
 
감동은 순간의 유희, 철창의 고독은 영원히...
누가 나를 욕하랴. 감동 파괴자라 말해도 좋다. 신랄한 독설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끌어 안은 채 떨어질 줄 모르는 망할 커플의 등을 떠밀며, 나는 가게 밖으로 향했다. 지들은 좋아 죽을지 몰라도, 폭행사건 신고를 접수하고 달려온 경찰에게 붙잡히면 애먼 나까지 공범으로 은팔지를 찰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두 사람을 떼어내 가게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의 두꺼운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불길한 예감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스멀스멀 밀려오는 공포의 전조, ‘설마 벌써 경찰이?’ 고개를 돌리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경찰제복이 아닌 다른 것이 보였다. XB, 내내 두 사람이 쏟아낸 사랑의 세레나데를 감동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던 중화요리 전문점 사망유희의 주방장이자 실질적인 오너 C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감정에 북받혀 소리쳤다.
 
왜 돈 안내고 가냐해! 부가세 포함 음식값만 28천원이다해. 부서진 집기랑 접시도 계산해야 한다해. 저 여자 넘어지며 박살낸 의자에 깨진 접시까지 하면, 대충 해도 8만원은 주고 가야 한다해
 
빌어먹을, 제 아무리 감성이 메마른 세상이라 하지만 세상에 다시 없을 숭고한 사랑의 순간에 천박한 황금만능주의에 물들어 돈 얘기를 꺼내다니,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화가 났다. 정말이지 맹세코 돈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돈이 없기는 했지만...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바보! 가자 X, B”
 
그렇게 모른 척 XB의 등을 떠밀자, 왠 걸? 커다란 중식도(中食刀) 하나가 우리의 앞을 가로 막았다.
아니 축복받아 마땅할 사랑의 앞 길을 막는다.
 
중국인이라 무시하면 화난다해. 우리 사람 화나면 무섭다해. 수작부리지 마라해!”
 
역시나 대충 넘어가려던 것은 무리였을까? 주방장의 어눌한 한국어 사이로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졌다. 차갑고 매섭기 그지 없지만 어딘가 익숙하다. 예전엔 아니었지만 최근엔 어쩐지 너무 익숙해져서 급기야 일상의 단면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묘한 이질감이 나를 사로 잡았다.
그리고 그 묘한 이질감 속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기시감...
 
그래 나는 이 느낌을 알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잘... 생각해라. 생각해내라. 주머니엔 다 털어봐야 5만원도 없단 말이다. 인생 조지기 싫으면 얼른!’
 
그제야 비로소 떠올랐다. 내가 이 날카로운 살의(殺意)의 감각에 익숙해진 이유.
 
‘X’
 
그리고 드디어 그 기시감의 주인공이 B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주방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돈을... 받겠다고?”
음식을 먹었으면 돈을 내야한다해.”
그런 쓰레기를 음식이라고 내놓고?”
무슨 소리냐해! 대륙의 진미(珍味)다해!”
 
그때였다. X의 손이 카운터 옆 자리의 군 만두 하나를 덥썩 움켜 쥐었다. 실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리곤 즉시 손에 든 만두 한 쪽을 보란 듯이 우걱우걱 씹어 삼키는 X, 갑작스런 그의 기행에 우락부락한 주방장조차 당황한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씹던 만두를 바닥에 내팽개치는 X
 
쓰레기! 이런 건 쓰레기야!”
? 지금 뭐라했냐해?”
쓰레기라고 했다.”
쓰레기? 나를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내 만두를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해! 당장 사과해라해!”
사과? 이딴 걸 음식이라고 내놨는데 사과를 하라고? ! 웃기지마!”
 
그때였다. 사람들이 놀라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그럴만도 했다. 우락부락한데다 커다란 중식도를 든 주방장을 앞에 놓고 그의 자부심인 만두를 발로 짓밟다니, 내 눈도 따라 휘둥그레졌다. 어느새 주방장의 얼굴이 울그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몹시 화가 난 얼굴이었다. 날카로운 중식도에선 살의마저 느껴졌다. 중식도를 높이 치켜든 채 분노에 떠는 그의 모습에 몇몇 여성은 아찔함을 느껴 실신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 X가 말했다.
 
더러워, 식감이 너무 더러워... 70? 아니? 최소한 그 이상이야. 질기기 그지없지. 맛은 또 어떻고? 야채와 기름으로 가렸지만 육즙에선 고통의 쓴 맛이 베어나와. 단박에 숨통을 끊지 못하고 질질 끌었단 얘기지... 저질 중의 저질이야. 게다가 부위는 또 어때? 제일 질기고 맛 없는 발과 팔뚝 살을 저몄군. 왜 내 말이 틀렸나?”
... 그게 무슨... 소리냐해!”
 
당황스러웠다. 사람들도 술렁였다. X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말을 듣자마자 당황하다 못해 말을 더듬기 시작한 주방장의 태도였다. 화가 치밀어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던 그는 어느새 사라지고, X의 신랄한 품평에 담긴 팩트 폭격에 당황한 배덕한 주방장만이 남았다.
마치 육수인양 그의 이마와 얼굴은 온통 비오듯 땀을 쏟아내고, 누구 하나 인정하지 않지만 이것이야 말로 말로만 듣던 침묵의 긍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순간 테이블 구석의 누군가가 먹고 있던 만두를 바닥에 토해내며 소리쳤다.
 
젠장! 내 만두 속에 바... 발톱이 들어 있어! 우웩...”
설마...”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누군가는 펑펑 눈물을 쏟아내며 절규했다.
 
저 여기 단골인데... 저도 지난 번에... 여기 만두에서 손톱을 봤어요... 손톱을... 너무 맛있어서, 위생문제는 그냥 넘어가자 했는데... 그게 설마... ... 인육(人肉)일 줄은...”
꺄아아악!”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토악질이 스테레오로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직은 애매한 반응의 사람들도 있었다.
 
말도 안돼! 그냥 위생상의 문제겠지
어쩐지 비상식적으로 맛있더라니... 비밀은 인육만두?’
 
두 갈래로 나뉘어진 의혹의 시선에 좀처럼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주방장이 들고 있던 중식도를 문짝에 내리꽂으며 외쳤다.
 
문 잠궈! 꼼짝마! 오늘 아무도 못나간다해!”
 
비로소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토악질의 파도가 휘몰아치고, 사람들이 술렁였다. 그 사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하얀 주방가운을 차려 입은 건장한 청년 넷이 가게 안의 모든 문과 창문을 가로 막았다.
 
흐흐흐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해. 본국에서도 이 문제로 공안을 피해 도망나왔는데, 여기서 내 만두 맛의 비밀을 알아채는 놈이 나올 줄은 몰랐다해. 애초부터 폐지 줍는 노인들을 잡아다 저미는 게 아니었는데, 대체 네 정체가 뭐냐해?”
 
주방장이 X의 면전에 식도를 들이대며 물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평소라면 이대로 X가 헛소리를 지껄여 저 식도에 반토막이 나길 바랬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섬뜩한 중국인 백정들로 인해 모든 퇴로가 막힌 상황에서 나에게 비빌 언덕은 오직 X뿐이었다.
초록은 동색이고, 극과 극은 통하며 또한 이이제이(以夷制夷 : 오랑캐는 오랑캐로 물리친다.)라 하지 않던가.
나는 처음으로 바라마지 않았다.
X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불쌍한 폐지 노인들을 학살해 인육만두로 만든 저 악의 무리들을 물리쳐주기를...
 
당신이 말했지? 당신을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당신이 만든 만두를 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고...”
그랬다해!”
나도 똑같아
무슨 소리하냐해?”
나도 똑같다고, 당신이 사람을 죽이건 말건 그런건 신경 안 써, 하지만! 이 따위 저급한 육질의 고기를 먹으라고 내놓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히익!”
 
놀라운 광경이었다. 말을 마친 X가 돌연 제 옆의 탁자를 밟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추임새 하나 없이 간결한 동작에 황급히 날아든 주방장의 식도는 허공을 가르고, 날카로운 칼 마냥 내지른 X의 발 끝이 주방장의 손목을 후려쳤다.
 
으악!”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중식도, 벌겋게 달아오른 주방장의 얼굴은 낭패감이 번져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안도의 순간도 그 뿐,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주방장의 일갈과 함께 홀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야 말았다.
 
죽여! 모두 죽여서 증거를 없애라해!”
 
이 세상에 지옥이 존재한다면, 여기가 바로 그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 속을 스쳐지났다. 주방장의 한 마디는 4명의 거한을 순식간에 사람에서 살인귀(殺人鬼)로 변모시켰다. 칼과 몽둥이가 난무했고, 인정사정 없는 그들의 도륙에 죄없는 손님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헉!”
크악!”
 
연신 터져나오는 홀 안의 비명소리, 지옥의 아수라장이 따로 없을 피의 향연이 벌어졌다. 누군가는 절규하고 또 누군가는 애원하지만 그들의 손에는 자비가 없었다. 머리채를 잡아 목덜미를 가르고, 도망치는 이의 등을 찍어 내렸다.
끔찍하기 그지 없는 잔혹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으스스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주방장이었다. 비록 불의의 일격에 칼을 떨어트렸지만 든든한 숫적 우세가 그를 기쁘게 한 모양이었다.
하나둘 피를 흘리며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사람들, 그와 함께 삶에 대한 희망도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 말 모르니?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더라. 그러니까 제발 B랑은 놀지 말라니까?”
 
생의 절망적 위기가 찾아오자 또 다시 문득,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역시나 엄마는 옳다. 무조건 옳다. 지금 이 순간도 엄마가 하는 말을 잔소리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늦지 않았으니 반성하길 바란다. 회개하고 또 속죄하라. 엄마의 말씀은 하나하나가 다 떡(?)이 되고 살이 된다.
빌어먹을, 어떻게든 도망쳐야 하는데 엄마 말 안 들은 내 두다리도 불어터진 떡 마냥 움직일 줄을 모른다.
번뜩이며 다가오는 식도의 춤사위가 흐드러지고 홀안 곳곳, 붉은 꽃이 핀다. ‘하고 터져올라 벽과 탁자, 사람들의 얼굴을 물들이는 고약한 꽃이다. 향기는 고사하고 치밀어 오르는 비린내에 토악질이 날 것만 같은 끔찍한 꽃놀이에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로 속담을 바꿔야 겠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가 아니라, 모진 년이랑 친구했다가 칼침 맞는다로...
그렇게 시뻘건 핏물을 뒤집어 쓴 중식도의 사내 하나가 나를 향해 달려 들고 있었다.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용기있게... 아니 기겁을 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사람 살류~”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6~7편 바로가기 : http://todayhumor.com/?panic_91432
 
파일이 잘 안 올라가네요 ㅠㅠ 4차 시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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