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장하는 모든 사진, 인물, 이름, 지명, 배경은 사실과 무관합니다.
‘X’ 생태 보고서
: 살인마, 돌아이 거기에 왜 하필 나?
<1>
고요함은 터무니 없다. 생떼를 부리지도 화를 내지도 않지만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재주를 가졌다. 사실 나란 인간은 그런 고요에 꽤나 익숙해진 부류의 사람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양심에 입각하여 최소한 ‘그런 척’이라도 해야한다는 중압감에 빠져 있었다.
‘드르륵’
사내가 낡은 타자기의 먹지를 갈아 끼웠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지만 흔히 보던 ‘한 대 태우시겠습니까?’ 같은 친절은 없었다. 조금 전 먹은 설렁탕을 아쉬운 듯 바라보며 이에 낀 고춧가루를 떼어내는데에 집중하는 모습에서 약간의 무신경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어딘지 소외된 느낌? 다행히 사내는 곧 앞니 정 중앙에 끼인 붉은색의 파편을 떼어내는데 성공했고 이내 손가락을 튕겨 늦은 점심의 증거물을 은폐한다. 그 순간 그와 나의 시선이 맹렬히 마주했다. 보통 상대를 빤히 바라보는 것은 충분히 실례가 될 만한 일이지만 이 곳만은 예외다.
경찰서, 팽팽한 기 싸움 정돈 예사로 이루어지는 곳이 아닌가?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이창주씨?”
‘뿌드득’ 깍지를 낀 채 팔을 뻗고, 피곤한 손마디를 푸는 동작이 흡사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의 표정은 연극표를 손에 든 관객이나 유명 작가의 신간을 구입한 애독자의 그것처럼 보였다.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겉으로 보이는 여유 만큼이나 그가 가진 이해의 폭이 넓길, 그리하여 어떠한 이야기를 들어도 놀라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쉬이 받아들이길.
그로인해 부디 나에 대한 불필요한 억측이나 오해 또한 없길...
바라마지 않았다.
* * * * * * * * *
내 이름은 이창주, 이하 편의를 위해 A라고 하겠다. 평범한 소시민이자,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의 유일한 아들이자, 납세에 충실한 평범한 직장인이다. 30년이란 긴 세월을 살아왔지만 지나온 날들을 모조리 나열해도 특이점이라곤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아니 대체 무슨 이유로 살아가는지 조차 알 수 없는, 그야말로 평범의 극치를 달리는 보통중의 보통 사람이다.
‘째깍째깍’ 쉼 없이 움직이지만 누구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시계 속 작은 부속품처럼 말이다.
그런 내 인생에 조금이나마 특별한 것을 대라면 아마도 유일(唯一)한 여사친(여자 사람 친구)인 도아이(이하 B)와 몇 년전부터 동거를 시작한 동성친구 X의 존재였다.
여사친 B가 태어날 때부터 옆 집에 살았고, 이웃이었던 부모님 간의 사이가 돈독했으며 이성적으로 끌릴만한 매력이 전혀 없어 편안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비록 동성이긴 하지만 나와 X의 관계는 그 시작부터가 모호한 애매함의 극치였다.
“나 오늘부터 여기서 같이 지내도 되냐?”
그다지 친한 관계라 여기지 않았던 X가 갑자기 짐을 싸들고 나를 찾은 건 정확히 3년 전의 일이었다.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지만 친분이 있던 것은 아니어서 약간의 당혹감쯤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갑작스런 방문자를 맞이하며 예의 하게 마련인 ‘무슨 사정이 있나? 며칠 머물다 가겠지.’와 같은 뜨뜨미지근한 애매함이 있었다.
게다가 난 부모님이 사고로 한꺼번에 돌아가신 후 혼자 살기엔 너무 넓은 집에서 적적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그게 벌써 3년이다. 제 아무리 무던하고 무신경한 나라해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느덧 X는 내 집을 제 집 마냥 살고 있었고, 방 하나를 제 몫으로 온전히 차지한 것은 물론 냉장고며 창고며 지하실이며 비어있는 곳만 보이면 제 물건들을 가져다 채워넣는 뻔뻔함까지 보였다.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못 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나도 그런 X의 무신경함엔 슬슬 지쳐가고 있었고, 언젠가 한 번은 따끔한 말을 해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마침 그때, 유일한 여사친인 B가 나를 찾았다.
오랜 친구의 방문은 나로 하여금 믿을만한 카운슬러의 방문처럼 여겨졌고 흔쾌히 마음의 빗장을 열어 쌓여 있던 불만을 쏟아내는 시간을 만들었다.
“X? 그 키 크고 잘 생기고, 목소리는 여자들이 뻑 간다는 목욕탕 울림의 중저음을 구사하며, 적당히 빗어 넘긴 연 갈색의 곱슬 머리조차 멋스럽다는 그 친구? 너랑 함께 있으면 누가 집 주인인지 오해하게 만들 뿐러 종종 너를 이 집 종 놈이나 바퀴벌레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그 신종 해충 제조기?”
“B야...”
“응? 왜?”
“나 조금 언짢다.”
“쿨 한게 또 내 매력이잖니!”
B는 예의 그 쾌활한 웃음을 터트리며 눈치 없이 내 팔을 두드렸다. B의 버릇이었다. 재밌고 즐거우면 곁에 있는 사람을 때리는 것, 그래도 머리까지 때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우유부단한 성격은 이럴 때 참 좋다. 화를 낼까 말까 고민하다 결심을 굳히기도 전에 감정이 사그라든다.
‘그때 ㅇㅇㅇ 했어야 하는데’ 같은 후회만 하지 않는다면, 종교인으로서나 인격자로선 분명 지대한 장점임에 틀림 없다.
여튼 난, 그 우유부단함의 과도기적 지점을 지나고 있는 X와의 동거에 대해 논해야 했다. 타인의 험담을 즐기진 않지만 B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고 우군을 만든다는 행위는 타인의 동조를 얻어냄으로써 심리적 안정에 기여하는 바가 컸다.
“그러니까... X와의 동거 자체엔 크게 불만이 없는데, 요컨대 라이프 스타일이 안 맞는다 이거지?”
역시나 여사친 B의 화법은 심플했다. 장장 45분이나 이어진 긴 열변의 앞 토막 중 ‘X랑 같이 사는게 싫다는 것 보다는 – 나의 쫌스러움을 포장하기 위한 그러나 이후 계속 된 X에 대한 험담을 통해 싫은게 아닌게 아니지만 아니라고 해서 아닌건 또 아닌’을 간단히 ‘불만 없음’으로 정리하고, 이후 끝없이 열거된 X의 단점들을 ‘라이프 스타일의 차이’로 귀결하는 재주는 실로 놀랍기 그지 없었다.
‘이 년... 귓구녕이 막혔나?’
문득 유년시절 팔랑거리는 내 고막을 간질이던 B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떠올랐다.
‘돌아이 그것도 상 돌아이’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학교 앞 자판에서 산 병아리 삼천원어치를 제 집 3층 옥상에서 ‘날아봐 어서!’하며 날린 것이나, 병아리가 날지 못하자 부러진 다리로 삐약거리는 그것들 위로 홧김에 나를 밀어버린 일 - 그래 기억난다. 아주 생생히! 나도 그 아이들처럼 다리가 부러져 두 달이나 깁스를 했었지 – 이후론 나도 짐짓 포기한 지 오래였다.
“라이프 스타일 정돈 남자답게 서로 이해할 건 이해하고, 타협할 건 타협해야지. 쩨쩨하게 굴지마 임마! 그보단 X하고 나, 언제쯤 자리를 만들어 볼 생각이신지? 흐흐흣”
비록 사심이 담뿍 묻어있다 하나 이런 식의 훈계를, 그것도 B에게 듣는 것은 나로서도 꽤나 굴욕적인 일이었다.
제 아무리 뜨뜨미지근한 성격의 나라도 이런 땐 본때를 보여 주고 싶게 마련이다.
나는 즉시 B를 데리고 냉장고 앞으로 갔다.
“열어봐.”
“뭘?”
“뭐긴 뭐야 냉장고지...”
“왜? 안에 술취해서 오바이트라도 해놨어? 어쩜 남자답기도 하지!”
오바이트와 남자다움의 상관관계가 무엇인지 나는 언뜻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B는 안에 든 것이 무엇이든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보고야 말겠다는 애틋한 눈빛으로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아우 냄새...”
문을 열자마자 냉기에 섞여 쏟아지기 시작한 악취, 그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격렬한 후각의 고통엔 악취미의 B도 당해낼 수 없는지 코를 감싸쥔 채 물었다.
“똥 쌌냐?”
“차라리 똥을 쌌으면... 내가 치웠지. 걍 뒀겠냐?”
“하긴... 전에도 내가 술 취해서 설사병 걸렸을 때, 니가 발가벗겨서 다 닦아 놨었지. 구석구석 깨끗이! 사랑한다 친구야. 욕실에 그냥 버려놨으면 나 그 겨울에 입 돌아갔을 거야. 내 입술에 니 지분 인정! 이따 가기 전에 뽀뽀 한 번 해줄테니 양치하고 가글 잊지마라!”
“[전에도] 보단, [전에도 몇 번]이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하지만 눈깔이 두 개 다 멀쩡하면 추억보단 현실을 직시하는게 좋지 않겠냐?”
“냉정한 새끼... 홀딱 벗은 매혹적인 몸매의 섹시 폭탄을 해체만 하고 터트리지 않은걸로 봐선 넌 고자가 99.99% 확실하지만 일단은 네 의견을 겸허히 수용토록하마.”
“망할... 고자? 그럼 나머지 0.01%는 뭔데?”
“니가 게이일 가능성.”
“그건 왜 그거 밖에 안되는데?”
“니가 지금 동거중인 우리 그이와의 관계에 선입견을 가지고 싶지 않다고나 할까? X 이따 오는거지?”
모태 신앙은 물론 모태 오지랖에 모태 솔로까지 보유한 모태 삼연벙 B는 연신 김칫국을 사발째 드링킹 했지만 이 뜻밖의 만찬은 그리 길게 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닥치고 그 안에 있는거나 꺼내봐.”
“뭐? 이 김치통?”
“그래!”
“이게 뭐? 어차피 이거 진짜 사람 머리도 아니잖아.”
“그럼 야채칸에 있는 것도 꺼내봐”
“왠 족발? 발톱에 메니큐어 칠해놨네? 발목도 나보다 얇고...”
“냉동실은 한 술 더 떠...”
“어디보자... 곱창을 하나 가득 얼려놨네. 머리도 하나 더 있고, 와! 이 비닐 봉다리에 있는 거 전부 다 손가락이야? 백개도 넘겠는데?”
“뭐 느끼는 거 없어?”
“있지... 안타깝다. 우리 X, 분장, 특수효과 그런 쪽 스탭들은 처우가 열악하다던데, 그러니까 이런 구리구리한 집에 얹혀 사는거 아냐? 돈이냐... 사랑이냐. 갈등된다 갈등 돼. 알지? 내가 워낙 귀하게 자라다 보니 험한 일 못하는 거.”
※ 등장하는 모든 사진, 인물, 이름, 지명, 배경은 사실과 무관합니다. 막막함이 밀려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갑갑했다. 내 친구 아이는 돌아이일 뿐 아니라 눈치따윈 1g도 없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이걸 죽여 살려, 혼자서 중얼거리던 순간 벨이 울렸다.
‘딩동, 딩동’
누굴까? 이 시간에 집에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인터폰을 확인하자 당연하지만 한편으론 뜻 밖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X가 이 시간에 왜...?”
<2>
의아한 일이었다. X는 보통 이런 늦은 시간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낮에는 줄창 잠을 자고 밤이 되면 새벽까지 쏘다니다 아침 해를 보고서야 돌아오는 것, 그게 X의 일상적인 생활 패턴이었다.
그런 X가 겨우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집에 돌아오다니, 게다가 돌아이 여사친 B와 수상한 동거인 X의 만남은 그닥 내키지 않는 조합이었다.
“열쇠는 어쩌고?”
“쫓기다가 잃어버렸지 뭐야.”
‘쫓기다.’ X는 늘 숨기거나 속이는 법이 없었다. 내가 우스운건지 아니면 믿음직스러운 건지 – 기왕이면 후자라고 믿고 싶다. - 늘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직설 화법의 달인 답게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A, 니가 며칠 전부터 할 얘기 있다며 일찍 좀 들어오라고 했잖아. 그 할 얘기란 거 뭐야?”
‘할 얘기? 뭐긴 뭐냐. 당연히 무 월세 동거인에 대한 퇴거 요청이지. 마침 오늘 물건 환불 받을 때 데리고 가면 얼굴부터 먹어준다는 기 센 언니 B도 함께 겠다. 나가달라고 확! 질러?’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A의 불알... 아니 가장 절친한 미모의 친구 B라고 해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호호홋”
뭘까? 이 얼토당토않음은... 느닷없이 집에 돌아온데다, 쫓기기까지 했음은 물론 옷 깃에 붉은 핏자국까지 묻혀온 X보다 나를 더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갑자기 요조숙녀라도 된 양 수줍은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는 B의 가식적인 콧소리였다.
“아... 그 B? 말씀 많이 들었어요. 듣던대로 미인이시네요.”
“호호홋 미인은요 무슨... 그냥 뭐... 연예인 할 생각 없냐 종종 물어보고 귀찮게 구는 정도? 뭐 그렇죠 뭐 호호호홋”
나는 이를 악물었다. B의 콧소리가 너무 과하다. 듣도 보도 못한 같잖은 짓거리에 웃음이 터지다 못해 방귀라도 뿜어야 할 판이다. 애써 괄약근을 다잡으며 나는 B에게 속삭였다.
“너 콧소리 뒤진다.”
“닥쳐! 내 콧구멍에 왈가왈부하지마. 원래 여자들은 번식기가 되면 호르몬 때문에 콧 평수 조절이 안된다고!”
“오늘 우리집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찍으러 왔냐? 보십시오. 하마의 교미입니다.”
“꺼져. 나 오늘 빤스랑 브라 셋트로 맞춰입고 왔어. 그러니 그 쯤하고 아.가.리 싸무세요. 오늘은 나도 내가 적응이 잘 안되니까.”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정답게 해요?”
B와 나, 우리 둘의 팽팽한 기 싸움에 X가 끼어들었다. 우리 둘 사이의 사정이야 알 리 없는 X는 그런 모습조차 귀엽다는 듯 해맑게 웃었다.
“아... 아니에요. 순도 100%의 연애감정 0.00%의 순수한 친구끼리 나누는 지극히 사소한 이야기랍니다. 호호홋”
“B씨는 미소가 참 매력적이에요. 그런 말 많이 듣죠?”
“어맛! 웬일이야 웬일! 많이 듣긴 하지만 이렇게 들으니 또 색다르네요 호호호홋 호호호홋!”
뭐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랄 똥을 싸네.’ 다소 과격하지만 이보다 더 내 심경을 잘 표현 할 수 있는 말은 단언코 없으리라.
“참! 두 사람 대화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으면 저 잠깐 뉴스 좀 봐도 될까요? 괜찮지 A?”
“그러세요. 역시나 사람이 틀리면 수준이 틀리네요. 누구는 허구헌날 미소녀 애니메이션에 야동에 가방끈 늘릴 생각은 않고 휴지끈만 늘리는데, 역시 사람은 생긴대로 논다고... 뉴스... 아 틀리다 틀려!”
“틀리긴 뭐가 틀려 이 또.라.이야! 너 저번에 우리 집에 와서 여성향 포.르.노 다운 받아 갔잖아!”
“누구세요? 전 그런 일 없는데요? 포.르.노가 뭐예요? 전 뽀로로는 알아도 포.르.노는 모르는 순수한 여자랍니다. 잇힝!”
옆구리를 찔러 귓속말로 추궁해봤지만 B는 완강하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뻔뻔하기 그지 없는 것, 이것이 번식의 역사라면 나는 그것을 거짓의 역사라 말하리라 다짐했다.
그 사이 리모컨을 든 X가 TV를 켰다. 그러자 채널을 돌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멀쩡하던 정규방송이 중단되며 긴급 속보란 거창한 타이틀과 함께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앵커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긴급 속보를 알려드립니다. 최근 몇 년간 세상을 떠들썩 하게 했던 연쇄 살인마가 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피해자는 힘없는 여성이었습니다. 마성기 기자가 현장에 나가 있습니다. 마성기 기자]
[네 안녕하십니까. 현장에 나와 있는 마성기 기자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기 그지 없는 공터, 하지만 오늘 이 곳에선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일명 망치 살인마로 알려진 연쇄 살인마가 또 다시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피해자는 일반인 조모씨로 이 곳 공터까지 유인 당한 후 두개골과 안면의 심각한 골절로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예 강남서 홍순철 경장입니다. 이번 사건은 일명 망치 살인마로 알려진 연쇄 살인마와 범행 수법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있고요. 인근 CCTV를 통해 예상 도주로를 확보 용의자를 특정키 위해 최선의 노력을...]
[현재 경찰에선 범인으로 추정되는 묘령의 남성을 쫓고 있으나 추적과정에서 놓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키 185의 호리호리한 몸, 검은색의 상의를 입고 있었는데요. 이와 유사한 복장이나 수상한 사람을 목격하신 분은 즉각 경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마성기 기자 잘 들었습니다. 들으신 대로 연쇄 살인범의 또 다시 살인 행각을 벌였고, 이번엔 우연히 범행현장이 목격돼 추격은 했지만 체포에는 실패했다. 이 말씀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185의 키에 정확하진 않으나 호남형 얼굴의 소유자라고 합니다.]
[많은 제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것으로 속보 마치고, 자세한 소식은 자정 전 마감 뉴스에서 다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속보가 끝나자 용건이 없다는 듯 X가 TV를 꺼버렸다. 안 그래도 늦은 밤, 마주보는 세 사람과 TV마저 사라진 고요, 애매한 기류가 포착됐다. 아직 거친 숨을 내쉬며 야생의 눈빛을 내보이는 X와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데 ‘나가달라’는 그 말이 그리도 어려운 나의 우유부단함.
그리고 뉴스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X만을 바라보며 X의, X에 의한, X만을 위한 눈빛으로 하트를 ‘뿅뿅’ 날리는 B가 뿜어내는 핑크빛 기류였다.
‘어찌 이런 끔찍한 혼종의 기류가...’
이상하게 등골이 서늘했다. 아니나 다를까? X가 거실 탁자 위에 품에 지니고 있던 작은 손망치를 꺼내놓았다.
“그나저나... 뭐야? 그 할 얘기란거?”
어떨 땐 섬뜩하지만 이렇게 웃으며 이야기 할 때의 X는 해맑다. 여자들은 아마도 이 순수한 미소에 속아 녀석을 따라가는 거겠지. 결과야 뭐 뉴스에서 본 대로고...
나는 ‘이 새끼 내가 무슨 말 할지 눈치까고 일부러 망치 꺼내놓은거 아니야?’하는 의구심으로 바라봤지만 녀석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이렇다할 채근은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눈치 없는 B가 재빨리 X의 손망치를 집어들며 말했다.
“왠 망치? 너무 귀엽다.”
“그래요? 제가 제일 아끼는 거에요. 아버지 유품이거든요. 혹시 영화 올드보이 보셨어요?”
“어머머머! 웬일이야. 저 제일 좋아하는 영화에요. 어쩜 이렇게 영화보는 취향까지 똑같냐...”
“그러게요. 올드보이 그 격투씬... 정말 최고예요. 전 아직도 볼 때마다 전율이 치밀어요. 이마에 한 방, 가슴뼈에 한 방... 와작하고 뼈가 부러지는 그... 손 맛?”
“어머어머... 표현도 남다르셔라. 역시 영화계에 종사하시는 분 답게 뭔가 리얼리즘이 가미된... 그런 느낌이네요. 저도 정말 좋아하는 영화거든요. 그 왜 있잖아요. 최민수씨가 정색하고 하는 대사 [누구냐 넌]”
“우와! 저 지금 놀랐어요. B씨 목소리하고 톤... 완전 똑같아요.”
‘같고 또 닮은게 어디 목소리하고 톤 뿐이겠냐. 생긴 것도 닮았지 이 여자 오대수야. 그리고 그 영화 좋아한다면서 거기 최민수가 왠 말이냐. 최민식이지.’ B의 계속된 가식적인 행태에 불만이 터져나왔지만, 일단은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약간의 오해가 있을 뿐, B도 X의 실체에 대해 알고 나면 반드시 뒤로 물러설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뒤로 물러선 건 B가 아니라 나였다.
“참! 이렇게 훌륭한 영화계 종사자를 고뇌하는 예술인을! 도와주기는커녕 내 쫓으려고만 하다니... 반성해 A, 어차피 방도 남아 돌면서 너 그렇게 사는 거 아냐! 안 그래요 X?”
X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각도상 B는 보지 못했지만 해맑음이 사라진 순도 100%의 X는 묘한 구석이 있다.
야생의 눈빛
파충류의 차가움
짐승의 굶주림...
그 X가 으르렁거렸다.
“나를... 내 쫓으겠다고?”
돌아가신 우리 엄마가 그랬다. ‘엄마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그래... 새삼 나는 또 1패를 떠 안고 엄마는 1승을 추가했다. 엄마 말을 들었어야 했다.
최소한 그랬으면 떡이 목에 막혀서 컥컥 거릴 일은 없었다.
‘옆집 B, 걔 좀 이상하지 않아요? 웬만하면 걔랑 놀지 마 알았지?’
‘안되요. 다른 애들은 나랑 안 놀아준단 말예요. B 예쁘고 착한 친구에요! 나한테도 잘 해줘요.’
‘어떡하지 여보? 얘 그때 B가 밀어서 떨어졌을 때 다리만 부러진 게 아닌가봐.’
‘그치? 웬만해선 B가 예쁘다는 소리 하기 힘든데... 애들은 원래 거짓말 못 하잖아. 그럼 심각한데?’
망상에 젖어 있는 사이 X가 B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거 돌려줄래요? 말했듯이 아버지 유품이라.”
“드려야죠. 우리 시아버지... 어머! 내가 지금 뭐라니? 호호홋! 자 여기요.”
X가 망치를 받아들고 바라보지만 않았다면 아마 난 B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쥐고 흔들었을 것이다. 유품은 개뿔, 그렇게 소중한 물건으로 남의 골통을 깨부시고 다니는게 정상이냐?
하지만 야속하게도 B는 핑크빛 기류에 빠져 헤어나올 줄을 몰랐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지금쯤 X와의 사이에서 3남2녀냐 2남3녀냐 하는 가족계획까지 세우고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어쩜 불쌍한 건 B나 내가 아니라 X일지도 모른다.
B는 심각한 금사빠 -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 - 다. 질기긴 또 얼마나 질긴지 고래심줄 못지 않다. B의 열렬한 구애 - 구애라고 쓰고 스토킹이라 읽는다. - 에 질린 나머지 이사를 가거나 없던 불치의 병을 지어내는 것은 예사고 심한 경우 멀고 먼 타국으로 급히 의료봉사를 떠난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난 공항까지 달려가서 당장 ‘콩고행’ 직항기를 띄우라는 B의 항공기 탈취시도를 막아냄은 물론 ‘김포공항’은 이제 국제선이 뜨지 않는다는 변경된 정부시책까지 일러줘야 했다.
※ 등장하는 모든 사진, 인물, 이름, 지명, 배경은 사실과 무관합니다. ‘야! 7년 전, B버리고 도망간 F! 너 이 새끼! 니가 독도로 이사간다고 구라를 치는 통에 내가 독도는 국내가 맞지만 비행기 타고 가는 곳이 아니라 김포공항에서는 못 간다고 몇 번을 이해시켜야 핬는지 아냐? 너 섬에 들어간 건 맞는데, 독도라더니 알아 보니까 여의도더라? 이 시베리안 허스키 같은 놈!’
나야 X가 든 망치가 두렵고 겁이 나지만 B라면 어쩜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회심의 일격을 내리꽂는 X와 골통이 깨어지긴 커녕 오르가즘을 느끼는 B...’
어쩌면 둘은 최상의 궁합?
“대답해!”
망상의 시간이 너무 길었을까? 정신이 나가 있던 사이 X가 성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손에는 역시나 망치가 들렸고 바라보는 눈빛 하나하나가 숨이 턱 막힐 듯 차갑고 매섭다.
보통은 집 주인이 내 쫓을라 하면 ‘사정 좀 봐주십시오 집 주인 나으리’ 내지는 ‘드... 드리겠습니다. 월세를!’ 같은 통사정을 한다고 하던데, 역시나 내 팔자에 조물주 위 건물주는 애시당초에 글른 일인 듯, X가 좀 더 바짝 다가오며 물었다.
“내가... 이 집을 나갔으면... 좋겠어?”
‘탁’ ‘탁!’ ‘타악!’ X가 망치로 제 손바닥을 두드렸다. 무언가를 암시 하려는 행위 였을까? 아니면 그저 손바닥을 자가 지압한 거였을까?
이유야 뭐든 갈 곳 없는 친구를 무정히 내 쫓기엔 내 우유부단함의 역사가 너무 깊었다.
엄마도 그랬다.
‘얘가 누굴 닮았는지 성격이 좀 뜨뜨미지근하긴 해도... 남한테 미움 살 애는 아니에요.’
그래 엄마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 순간, X가 내 코앞까지 바짝 다가와 눈을 부라린다.
누가봐도 이건 사람의 눈빛이 아니다. 제 아무리 무던한 나도 그걸 본 순간 불알이 오그라드는 걸 느꼈다.
헌데...
“제발... A야 나 지금 당장 나가도 갈 곳이 없어 그러니 제발 나가라는 말 만은... 응?”
이게 왠 일?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사정하기 시작한 X, 나는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경찰 3개 사단이 우리 집 주변을 포위라도 했나? 아니면 군부대? 의외의 반응에 당혹감이 파도를 쳤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평소대로의 나로 돌아가 중얼거렸다.
“그게... 그러니까 꼭 지금 당장 나가달라...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래 A야 라이프 스타일이 안 맞는 건 대화로 풀 문제지, 강제 퇴거는 난 반대야.”
“라이프 스타일요?”
“네 라이프 스타일이요. A가 생긴 거 같지 않게 깔끔 떠는 구석이 있잖아요. 잡동사니를 잔뜩 쌓아놓는다고 얼마나 투덜거리던지. 냉장고에 특수효과용 소품 좀 넣어둔 거 가지고 사내 자식이 쩨쩨하게...”
“아! 그게 싫었구나? 다행이다.”
중간에 끼어든 B의 훈수에 뭐가 그리 기쁜지 X는 예의 그 해맑은 표정으로 돌아와 내 손을 잡으며 다시 말했다.
“안 그래도 묻으려고 했어. 장소를 물색하느라 시간이 좀 걸린 것 뿐이야. 커다란 여행 가방도 두어개 주문해 놨고, 곧 다 치울 거야.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나가라는 말 만은 하지 말아줘 응?”
이중 인격, 그런 건 영화에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순간적으로 휙휙 바뀌는 X를 보면 그것도 허무맹랑한 얘기만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난 몇 주 내가 수도 없이 되뇌인 말은
‘X야 나는 니가 뭘하고 다니든 사실 관심도 없고 상관하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제발 이 집에서 나가줘. 그럼 지금까지처럼 너에 대해선 입도 뻥긋 안하고 모르는 사람처럼 살게’
였다.
그 말을 진지하게 상의하기 위해 여사친 B를 불렀던 거고, X가 퇴거를 거부하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 안 되면 나라도 나가야겠단 생각으로 멀리 떨어진 고시원도 알아본 참이었다.
그런데 내 우군이 되어줘야 할 B는 마치 무슨 껌딱지마냥 X에게 달라붙고, 퇴거는커녕 눌러앉게 될 판이되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그래... 사정이 그럼... 그렇게 해... 어쩔 수 없지.”
“와 잘 됐다.”
“고마워 A... 역시 넌 내 소중한 친구야.”
기쁨이 애매하게 충만한 밤이었다. 해맑은 X와 상황파악 못 하는 B, 그리고 진퇴양난에 빠진 나, 그래도 최악의 상황만은 아니었다. X가 순순히 내 집에서 나가주는 플랜 A는 실패했지만, 나에겐 앞서 말한대로 플랜 B가 있었다.
비록 집주인이 동거인에 등떠밀려 나간다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이대로 있다가 X에게 엮여 험한 꼴을 보느니, 짐도 다 싸놨겠다. 미리 알아둔 고시원에 찾아가 상황을 주시하며 며칠 떨어져 있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었다.
소극적인 방법이지만 위험도도 제일 낮고 안전해 보였다.
그런데 늘상 그렇듯 플랜B에서도 B가 문제였다.
‘비록 플랜 A에선 A인 내가 문제였지만.’
“친구끼리 오해도 풀렸겠다. 우리 기분 좋게 술이나 한 잔 하러 갈까요? 요 앞에 신장개업한 중국집 탕수육 시키면 군만두 무한 서비스래! 군만두에 빼갈 한 잔... 캬아! 어때?”
사실 이건 B가 한 일 중 제일 잘 한 일이었다. B와 X를 적당히 짝지워 내보내고, 그 사이 난 가방을 챙겨 떠난다.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핑계도 좋지 않은가? 젊은 두 남녀를 짝지워 내보내고 주선자는 조용히 사라진다.
#소개팅의 미덕, #이것이 주선자의 길, #최민식 #군만두 무한 서비스
“가자! 가자! 응?”
“아 그게 난... 좀 정리 할 게 있어서... 둘이... 가!”
최대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치자, 망할 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등 돌려 X의 팔짱을 낀다.
“그럼 어쩐다? 그럼 우리 둘이 가야겠네? 어쩔 수 없이?”
#영악한 년, #배신의 아이콘, #니 얼굴 최민식 #그게 바로 번식의 길
완벽한 상황 설정에 콧노래가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X가 침울한 얼굴로 B의 팔짱을 풀어내며 말했다.
“A가 안 가면... 나도 안 갈래...”
‘뭬! 뭬야!’
나는 그때 처음 봤다. 30년을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얼굴, 분노와 절망 그리고 광기가 서린 공포스러운 B의 얼굴을...
비록 이건 비밀이지만 너무 오랜 세월 친구로 지낸 탓인지 난 여사친 B의 표정을 통해 그 애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들었지? 따라와 이 새끼야!’
‘싫어! 두.. 둘이서 가...’
‘너 안오면 X가 안 간다잖아! 이 조카신발, 시베리안 허스키 같은 놈아!’
‘안돼! 그래도 안돼! 내 목에 칼이 들어가도 안돼!’
서로의 눈빛속에 오가는 정다운 폭언의 말들, 비로소 난 천형의 업이었던 우유부단함을 벗어내고 차도남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을 하다니!
실로 나조차 놀랄만한 일이었다. 물론 B가 그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기 전까지는...
‘김포공항 갈까?’
이대로 B와 콩고 행 항공기 탈취범이 되어 착륙불가의 독도 상공을 떠도는 범법자가 될 것이냐, 아니면 탈출시기를 조금 미루고 가볍게 술 한잔 적실 것인가?
애초에 어려운 계산은 아니었다.
“양장피! 양장피를 시키자!”
“콜! X두 갈꺼징? 아이이잉! 같이 가자아앙!”
B의 콧 소리가 순간 내 고막을 파괴하는 듯 했으나, 다행히 X는 패시브 스킬을 기본장착한 듯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급히 옷을 챙겨 현관으로 향하는 B와 X, 한 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이 판국에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니들이랑 빼갈에 군만두를 먹어야 하는거냐?’
갈 곳없는 원망만이 메아리쳤다. 무언가 거대하고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과 함께...
<3>
“그 사이 비가 왔었나?”
싸늘한 밤공기에 축축한 습기가 묻어났다. 유달리 더 어둡고 기분 나쁜 밤이었다. 낡고 오래된 가로등은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희미한 빛을 내뿜다 그마저도 몇 초에 한 번씩은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그래서일까? 그닥 멀지 않은 사거리 앞 중국집으로 가는 길이 이상하리만치 멀고도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찝찝한 기분을 애써 달릴길 없는 나와 달리 앞 선 두 사람은 희희낙락, 알콩달콩 요상한 달콤함을 내뿜으며 그 길을 걷고 있었다.
“말 편하게 해앵~ 친구에 친구면 다 친구지 뭐!”
“내가... 낯을 좀 가려서...”
‘망할! 나한텐 관심도 없는 것 같은데 슬쩍 도망칠까? 응?“
안 그래도 불편한 밤 마실이었다. 부질없는 고민까지 떠올라 발목을 잡으니 더 가고싶지 않았다. 마침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난 주제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하하, 호호’ 이미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도망친다면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 때마침 갈림길이 나타났다. 여기서 반대방향으로 뛰면 어쩜 자유의 몸이 될 지도 몰랐다. 오랜 친구인 B에겐 미안하지만 더 이상 X와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미리 준비한 짐가방은 아깝지만 그거야 어차피 사건이 해결된 후 천천히 찾으면 그만일 터였다.
그쯤 하면 더 망설일 것도 없건만, 내내 의식 저 편에서 무위도식(無爲徒食)하던 현실감각이 하필 그 때 내 마음의 건물주 ‘우유부단함’의 등 뒤에서 고개를 들며 묻는다.
‘근데 너 돈은 있냐?’
그 간의 나태함도 마음에 안 들고, 의지박약의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도 영 불만이긴 했지만 과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미리 알아 둔 고시원은 보증금은 없지만 월세가 무려 20만원이다. 고작 1평 남짓한 방이 창문이 있다는 이유로 무려 20만원이나 받아 먹는 것이다. 급히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다발을 세어보지만 스무장은커녕 예닐곱장이나 될까?
그나마 몇 장은 붉그죽죽 처량하기 그지 없는 천원 짜리다. 이대로 튀었다간 말 그대로 노숙자 신세를 못 면할 판이다.
‘엄마가 밥은 아무데서나 먹어도 잠은 한 군데서만 자라 했는데...’
엄마의 말은 틀린 적이 없다. 급히 나온다고 하필 옷도 제일 얇은 것을 걸쳤다. 비온 뒤의 바람은 매정한 추위로 나의 의지를 꺽어 놓고, 나는 그렇게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안돼 가야돼! 이쯤에서 도망쳐야 해! 그런데... 그런데 왜! 왜 이리 추운거냐! 으... 춥다! 바람이 내 의지를 날려버리고 있어! 의지박약! 네 놈은 왜 거기에 있는 거냐!’
놈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 의식의 건물주, 우유부단의 사촌뻘 쯤 되는 사실상 내 인생 최강의 훼방꾼 의지박약군이었다. 우유부단이 이런저런 고민들 사이에서 망설이는 것이 특기라면 놈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멍한 눈빛으로 나를 볼 뿐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무섭다. 멍하니 놈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정기가 빨리 듯 내 안의 모든 의욕이 빨려 들어간다.
마치 블랙홀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정신을 차리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 있다. 간단하게, 편하게 시류에 영합하여 한 점의 고민도 없이, 인생의 관성에 따라 휘둘리는 잉여인간이 되어 있는 것이다.
고3때도 그랬고, 재수, 삼수, 영장이 나온 줄도 모르고 있다 끌려간 군대도 그랬다. 어디 그 뿐인가? 원서만 넣으면 들어가는 3류 지잡대긴 하지만 꼴랑 2년 뿐이었던 나의 황금기 전문대 시절에도 그랬다. 남들이 졸업이다 뭐다 바쁘게 움직일 때, 나는 동네 PC방의 우량고객이었다.
모두 의지박약군의 타임워프 때문이었다. 놈이 나타나는 순간, 나는 의지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그 무한의 공간을 유영하다 어느순간 비틀어진 시공간의 한 점에서 타임 워프. 정신을 차리고 나면 어느새 가까운 미래의 어디쯤에 와 있다. 중차대한 인생의 기로는 이미 상황 종료, 함께 하던 친구나 동기들이 미래인으로 변모해 있을 때, 나만 혼자 과거의 모습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다.
한 치도 성장하지 못한 유년시절의 모습 그 어디쯤에 말이다.
‘어른이 되는 것이 두려웠을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의 난 늘 그런 식이었다.
피하고, 숨고, 도망치고, ‘어떻게 되겠지 뭐’란 말로 내 자신의 죄를 사하며... 하지만 언제까지고 멈춰 있을 순 없었다. 지금이라도 의지를 보인다면 최소한의 희망이 있지만, X와 함께하는 미래엔 파멸과 절망 뿐이다.
멈추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산산히 부수어진다.
그렇게 되고 싶진 않았다.
갈라진 두 개의 길... 기분 탓일까? X와 B가 없는 그 길가 가로등이 무척이나 따스하고 밝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은 신이 내게 주신 마지막 구원!
무가치하고 무책임하게 살아온 내 인생에 주어진 최후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그런 생각에 온 몸의 털이 쭈뼛하게 섰다.
그래 나는 간다.
이 질주는 미약하지만 인생이란 이름의 마라톤을 시작하는 위대한 첫 걸음이 될 것이다.
하지만...
“거기 우두커니 서서 뭐해? 빨리 오지 않고!”
“그래!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냐 쪼.다 같이! 호호홋!”
“어! 어... 그래... 가야지 가야지... 하하핫”
X와 B, 언제부터 보고 있었냐? 가던 길이나 갈 것이지 왜 나를 빤히 보는 것이야.
사람 민망하게...
“설마 저 쪽으로 혼자 도망치려고 그런 건 아니지? 그치 A야?”
“그... 그럴 리가... 가자 야! 허기지다... 아우...”
거창한 이상은 결국 공염불(空念佛)에 그치고,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나의 의지는 먼지가 되어 흩날린다.
나는 다시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뒤 따르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그 사이 저 멀리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로변의 번화가였다. 늘어난 행인들이 하나 둘 스쳐 지나고 번화가 초입 조금 못 미친 곳에 ‘신장개업’이란 현수막을 걸어놓은 중국집 하나가 보였다.
‘중화요리 전문점 사망유희(死亡遊戲)’
이소룡 주연의 영화 제목을 차용한 듯한 상호는 그닥 센스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까짓 중국집 짬뽕국물 얼큰하고 탕수육 바삭하고, 군만두 서비스 인심만 푸짐하면 그 뿐, 상호 따위 알 바 아니란 게 내 지론이었다.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 중국집 앞은 신장개업이란 문구가 무색하리만치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 등장하는 모든 사진, 인물, 이름, 지명, 배경은 사실과 무관합니다. “B야! 이 시간에 사람들이 짜장 먹으러 줄 선 것 같지는 않고, 이 집 짬뽕이 죽이나 보지?”
“아니.”
“오호라? 그럼 탕수육이 끝장나는게로군?”
“아니!”
“뭐야. 그럼 중국집에서 뭐 먹겠다고 이렇게 사람이 많아?”
“이런 바보!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군만두가 바로 이 집의 핵심 세일즈 포인트란다! 더 놀라운 사실은 히트메뉴인 군만두가 오직 서비스로만 나온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지!”
“엥? 서비스로만? 따로 안 팔고?”
“그렇다니까! 기발하지 않아? 제일 맛있는 메뉴가 메인이 아니라 서비스로만 나오다니! 필경 이 집 사장님은 군만두의 신이거나 아니면 마케팅의 귀재가 분명해! 저 테이블을 봐! 방금 나온 김이 모락모락한 탕수육은 외면한 채 한 점의 군만두라도 더 먹겠다며 난리가 아닌가!”
B의 말은 사실이었다. 창가 앞 테이블만이 아닌 모든 테이블의 손님들이 값비싼 탕수육은 내버려둔 채 서비스로 나온 군만두를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젓가락의 향연, 그 우아한 모습은 마치 중국 무협 영화 속의 비무(比武)를 연상케 했다.
“세상에... 타... 탕수육이 저런 굴욕적인 대우를... 부먹파와 찍먹파가 대립하긴 커녕 외면이라니... 진정 나는 꿈을 꾸고 있는가?”
“훗 A군, 그 정도에 놀라긴 아직 일러. 최근 방문한 모 유명 음식 평론가는 이 집 군만두를 가리켜 이런 말을 했지. [한 접시면 정치가와 재벌 총수도 아래로 보게 만드는 절대적인 맛의 힘] [미각을 온통 사로 잡은 군만두의 발칙한 반란은 한 낱 조연에 불과했던 우리 소시민들도 언젠간 탕수육을 밀어내고 세상의 주연으로 당당히 설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정도다!] 유명 블로거 쿡슐랭 가이드 별점 0.0 [이 세상의 맛이 아니다. 고로 평가를 불허한다. 당면과 고기와 부추가 어우러져 만드는 절정의 미각 저격!] 재료가 떨어지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집 100선, 최단시간 등록, 이제 막 시작했지만 머지않아 전설이 될 군만두의 성지. 그게 바로 여기야 중화요리 사망유희!”
“그게 정말이야?”
“아니, 뒤에는 내가 좀 지어냈지. 그럴 듯 해? 호호홋 순진한 자식! 넌 왜 만날 속냐? 크흐흐흥!”
역시나 B는 나를 골려먹는게 세상 제일 즐겁고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어댔다. 돌아보니 어느새 X도 따라 웃는다.
‘이것들... 점점 더 마음에 안 든다.’
‘그래도 제일 오래된 소꿉친구인데, X곁에 버려둔 채 나만 홀랑 도망쳐서야 되나...’라던 일말의 양심이 끝내 뒷 목을 잡고 쓰러진다. 그러자 그 자리는 자연스레 2인자이자 평소 ‘나부터 살고보자!’를 주창하던 후안무치한 얼굴의 킬러 냉혹함이 자리했다.
보라! 쓰러진 자의 안위 따윈 1g도 신경쓰지 않은 채 기절한 양심의 겨털을 어루만지는 냉혹함을, 잔혹한 얼굴로 양심의 털을 한웅큼 뽑아 허공에 흩날린다.
이것이 바로 만천화우(滿天花雨)의 수법?
A실록 32장 22절 3번째 줄, 하늘에서 양심의 겨털이 비처럼 내리자, 지상의 모든 정의(正意)가 눈을 감고, 입을 닫고 모른척 했다하더라. 그때 홀로 남은 광야의 초인(超人)이 비겁함에 분개하자 냉혹함 가라사대 ‘내 맘이거든? 흥’ 하였다 하더라.
‘미안하다 B. 사과와 후회는 다음 세상에서 만나 하는 걸로 하자...’
“너 또 뭘 혼자 중얼 거리냐?”
“어? 아아... 왜 왜?”
“자리났어 얼른 들어와!”
“어! 어!”
밤 10시, 번화가의 술집으로선 한참 붐빌 시간이건만 냉혹함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자리가 나버렸다. 나는 조금은 싸늘해진 눈빛으로 B의 뒤를 쫓아 ‘쫄래쫄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터져 나온 B의 전매특허, 사자후(獅子吼), 자리에 앉기도 전에 들려온 포효에 안내하던 알바생이 떨고 주변의 손님들이 모두 놀라 바라보았다.
“니취 팔러마! 탕수육 대자 같은 중자 하나에, 빼갈 한 병, 서비스 군만두 OK?”
시원시원하다. 이럴 때 보면 여장부가 따로 없다. 누가 여자 최민식 아니랄까봐 명량 앞 바다에 회오리치는 파도처럼 우렁차다. 눈이 휘둥그레진 X를 보곤 뒤늦게 수줍은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소용없다. 이미 딱 걸렸다. 잘은 모르지만 벙찐 얼굴이 X도 확 깬다는 느낌이었다.
“어머! 목소리가 왜 이렇게 커졌지? 삼촌~ 라희는 술 쪼끔 밖에 못하니까 사이다도 한 병 주세효. 고맙습니다.”
음식도 안 나왔는데 오바이트가 쏠리는 건 무슨 이율까? B의 콧소리에 심각한 혼란을 느낀 나의 내분비계가 구토감으로 즉각적인 생존본능을 표출했다.
속이 많이 안 좋았다. 이대로 있다간 X는 커녕 B의 끔찍한 교태에 실신할 판이었다.
나는 급히 문자를 보냈다.
[엥간히 하지 쫌?]
[무슨 소리 하긔? 나 원래 한 여성미 하거든요?]
[여성미? 개가 웃지]
[님아 복날의 개처럼 뒤지게 맞을래요? 아니면 닥칠래요? 시끄럽고, 나 낯뜨거워 뒤져도 좋으니까, X한테 내 칭찬 좀 해보라규! 아님 나랑 콩고행 비행기 타러 김포 한 번 뜨던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라 했다. 오랜 세월 시시콜콜한 것까지 공유한 친구 답게 녀석은 내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술취한 지인의 생떼, 그 막무가내식 행패에 덩달아 끌려간 공항 보안대, 그 굴욕과 황망함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마침 메뉴가 나오기 전의 어색함이 느껴졌다.
어쩜 다행일지도 몰랐다. 내 인생 최대의 위기 X를 B에게 던져주고, 역시 내 인생 최악의 골치덩이인 B는 X에게 떠맡기는 것이다. 최대의 위기와 최악의 골치덩이의 만남, 이 얼마나 환상의 궁합인가.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다 화기애애해진 순간 튀는 것이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그대로 바이바이, 심플하지만 완벽한 복안이었다.
단숨에 집까지 내달리면 미리 싸둔 짐가방은 물론 당분간의 내 생활과 방세를 책임질 비상금도 챙길 수 있다.
‘물론... 그 후의 일은 내 알 바 아니고... 잇힝!’
X와 B, 두 사람의 뒷통수를 치고야 말겠다는 복수심이 사악함의 불길 위에 타올랐다.
그런데...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무리 노력하고 떠올려봐도 도무지... B의 장점들을 찾을 수 없다.
[B... B는 최민식을 닮은 호탕한 표정이 장점이야!]
[B... B는 종종 터져나오는 트림의 우렁참이 마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상시키는...]
[B... B는 이상의 장점들이 만들어낸 시너지 효과로 모태 솔로로서의 순결함을 지녔지만 정신적으론 이미 닳고 닳아 헤질정도라 일단 사귀기만 하면 야동으로 배운 음란함이 너의 정기를 쪽쪽 빨아 먹을 것이야.]
‘하아... B에겐 이다지도 장점이 없었던가?’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B랑은 제발 좀 어울리지 말라니까?”
엄마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더니, 무언가 칭찬을 해야하는데 목구멍이 커다란 가래떡으로 틀어막힌 듯 답답하고 불편했다.
‘시원하게 통수를 날리고 돌아서리라던 나의 원대한 계획은 시작조차 못해보고 이대로 좌절인가?’
불안했다. 위험신호가 찡찡거리며 사이렌을 울렸다. 이대로 머뭇거리다간 지옥행 편도열차에 강제로 끌려갈 분위기다. 뭐라도 해야 했다. 시덥잖은 칭찬이라도 해서 둘을 이어주지 못하면 내 인생도 끝장이 나는 것이다. 그런 위기감에 혀 끝이 말리고 입술이 떨려왔다.
하지만 바로 그때, 내내 침묵하던 X가 그윽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유쾌한 사람 같아요. B씨는... 나한테는 없는, 밝고 너무나 환한 한 줄기 빛 같은 사람.”
‘콜록콜록!’ 침을 삼키다 사래가 들렸다. 모두 X가 내뱉은 경악스런 표현 때문이었다. 황당함이 파도를 치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구토감이 몰려왔다. X가 B에게 호감을 보이는 거, 나 또한 바라마지 않는 일이긴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닭살이 돋아 내가 사람인지 튀김기에 다이빙을 앞둔 닭새끼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이거 대체 어찌되려고 이러냐? X, 이 자식 혹시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거 아냐?’
의외의 상황, 의외의 표현, 의외의 호감, 미지의 삼연타가 몰아친 테이블엔 공허한 침묵만이 흘렀다.
그리고 들려온 것은 절규에 가까운 B의 호들갑이었다.
“옴마나! 옴마나! 하... 한줄기 빛?”
상황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국면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한글 문서로 작업 한 것을 그냥 올리면 이상한 태그가 따라 붙어서 지우느라 시간이 한참 걸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