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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살펴보는 옷치긴 왕가에 대한 이야기 11st?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27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8
조회수 : 89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1/27 20: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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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9년 우구데이 칸이 자리에 오릅니다, 그는 칭기스칸의 유지를 받들어 정복전쟁을 다시금 시작한 자로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인데 이 우구데이 칸의 정복 전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수 있습니다,


첫째로 칭기스칸 시대에 벌여놓았던 금나라 정벌을 마무리 지어 그 들이 차지하고 있던 중원에 대한 지배력을 공공히 하고자 했습니다.


두번째로 서아시아 지역을 정벌코자 했는데 그와 더불어 이미 정복전쟁이 마무리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하고자 했지요.


세번째로 풍요로운 러시아의 곡창지대와 동 유럽에 대한 정복전쟁을 시작하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구데이 칸은 칭기스칸의 정복전쟁을 마무리 짓는데서 그치는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더 확대하였고, 이미 정복한 지역에 대하여 행정 체계를 다지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1231년 여름 우구데이 칸은 금나라 원정을 다시금 시작하는데, 직접 친정에 나선 이 전쟁은 이른바 3단계 금나라 원정으로 통상적인 몽골의 원정 방식 즉 군을 셋으로 나누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원사 예종전 睿宗傳에 이르기를 우구데이 칸은 중군으로 알진 노얀은 우군으로 툴루이를 좌군으로 배치했다는 기록을 찾아볼수 있습니다, 알진 노얀이 좌익군의 수장으로 원정에 참여한것은 원사의 다른 기록에서도 찾아볼수 있는데 원사 악린첩목이전岳璘帖穆爾傳에서는 아린 테무르가 알진 나얀을 도와 요역 징세를 관대히 하고 치안을 바로 잡는등 점령지에 대한 행정 업무를 맡아 보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린 테무르는 앞서 언급했듯이 옷치긴 왕가의 왕부로 역시 원사 악린첩목이전에 따르자면 태조를 따라 많은 공을 세운 인물로 황제의 형제 알진이 사람을 구하자 그를 보냈는데 왕자들에게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를 중시하며 인仁을 중시하여 살상을 하지 않는 것을 제일로 해 가르치니 황제가 이를 듣고 기뻐했다 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점에서도 역시 알진 = 옷치긴이 맞다는 게 입증되는데 아린 테무르가 옷치긴의 왕부였으므로 그가 금국 원정에서 알진 노얀을 따라 종군 했다는 사실은 우구데이 칸의 명에 따라 옷치긴이 금나라 정벌에 참여했음을 말해주게 됩니다, 더 나아가 우구데이 칸의 시대에도 좌익군의 수장은 옷치긴이었음을 알수가 있지요.


그러니까 1213년 칭기스칸이 휘하의 부대를 3분分했을때 좌익군에 편성된 알진 노얀과 1231년 우구데이 칸이 휘하의 부대를 3분分했을때 좌익군에 편성된 알진 노얀은 바로 칭기스 칸의 막내동생 테무게 옷치긴이 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바 대로 1212년 야율유가와 만나서 동맹을 맺은 옷치긴은 1213년 봄 야율유가와 연합해 금나라의 군대를 물리친뒤 칭기스칸의 명을 받고 본영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1213년 금나라 원정이 시작되어 군을 셋으로 나누었을때 좌익군으로 하북에 진출해 전공을 세웠으며 우구데이 칸 시기 재차 시행된 금나라 정벌에도 좌익군으로 출정했음을 알수가 있는데 따라서 집사에서 언급된 '칭기스칸은 주치 카사르, 쿵크라트 출신의 알치 노얀, 자신의 막내 아들 주르체테이와 콩크라트 출신의 부차 등 네 사람을 좌익으로 삼아 해안으로 보내어 정복토록 했다' 기사에서 칭기스 칸의 막내 동생 옷치긴을 콩크라트 출신의 알치 노얀이라 기술한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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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장 좋은 비료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것은 실제로 일어날 뻔 했지요, 이는 지구의 미래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1211년 시작된 금나라 정벌은 신흥 몽골 제국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당장 직면한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칭기스 칸은 몽골 본토에 수비를 위한 소수의 부대만을 남기고 몽골의 거의 모든 병력과 국력을 동원해 5년동안 금나라를 집요하고 지속적으로 정벌하였지요, 칭기스 칸은 우선 금나라에 적대적인 거란인들을 휘하로 끌여들여 자국의 세력에 편입 시킨 뒤 금나라의 동북 변방을 교란시켰으며 이후 몽골군을 셋으로 나누어 만주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함으로서 금나라의 수도 중경을 고립시켰습니다.


이에 견디지 못한 금나라가 수도를 개봉으로 옮기자 그제서야 몽골은 금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할수 있었는데, 한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 이때 본토에서 메르키트 부의 톡타이 베키의 형제인 쿠투와 그의 세 아들 칠라운, 마자르, 메르겐 등이 나이만 변경의 험준한 산지와 험난한 지형을 타고 세력을 모아 반란을 도모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게 되어 1216년 칭기스칸은 급히 병력을 이끌고 본토로 귀국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떻게 시작한 전쟁인데 이렇게 끝을 내겠습니까? 칭기스칸은 이듬해 좌익군 총수 무칼리Muqali목화려木에게 태사 국왕太師 國王의 칭호를 하사하는 한편 잘라이르, 쿵크라트, 이키레스, 우르우트, 망쿠트와 웅쿠트 등 휘하의 군대와 더불어 항복해온 거란, 여진, 규糺 와 한군 漢軍,등 을 배속시켜 금국 정벌에 박차를 가하도록 하였는데...나머지는 다음글에 잇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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