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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비선실세 무당 진령군
게시물ID : history_2706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드림해적선장
추천 : 5
조회수 : 206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11/01 20: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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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894년 고종31년에 전해 드리는 JYBC 역사 룸의 손숙회 입니다.
오늘은 민완기자 동북현 기자와 함께 명성왕후와 고종의 비선실세로 지목된 진령군 사태에 대해서 속보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동복현 기자 우선 진령군은 관우를 모시는 무당인데 어떻게 이런 무당이 궁 안에서 비선실세가 되었는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들이 처음 만난 것은 언제인지부터 말씀 부탁 드립니다.
 
. 무당 진령군과 명성황후의 첫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1882 724일 임오군란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동북현 기자! 임오군란이라면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극심한 차별을 받던 구식군대가 일으킨 난이죠?
 
네 이 당시 구식군대는 13개월간 급여를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4개월 만에 봉급으로 지급 된 쌀은 함량부족에 그마저도 반 이상이 모래가 섞여 있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구식 군대가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흥선대원군을 업고 명성황후를 내친 사건이라고 간략하게 정리를 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당시 명성황후는 성난 민중을 피해 의관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최소한의 인력과 함께 충주의 장호원까지 피신을 갔었죠?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태였겠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한 나라의 왕비로 살다가 하루아침에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한 마디로 멘탈 붕괴의 상태였다고 추측이 가능합니다. 이런 불안한 시기에 둘의 첫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 들의 첫 만남을 주선한 것은 명성왕후의 친척 민응식 이었습니다. 그러나 진령군은 황후의 방에 갑자기 들어 닥치며 관우장군의 계시를 왕후님을 도우러 왔다는 말도 안 되는 퍼포먼스를 펼칩니다.
 
그러니까 둘의 첫 만남은 지역에서 나름 유명세를 떨치는 무당과 권좌에서 쫓겨난 왕후의 위치였군요? 진령군이라는 작호는 후에 내려지게 되죠?
 
. 조선시대 역사를 통틀어 여자가 당호도 받지 않고 군호를 받은 것은 진령군 뿐입니다.
 
아무리 몰락한 왕후지만 어떻게 일개 무당을 갑자기 이렇게 신뢰 하게 된 겁니까? 그것도 어린 아이가 아닌 40대 초반의 성인여자였는데 말이죠?
 
진령군이 심리적으로 완전히 바닥을 치고 있던 명성황후를 각종 점을 통해 위로하면서 황후는 전적으로 의지를 하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진령군이 음력 8월 초하루 그러니까 양력 912일에 황후께서 환궁을 하게 될 거라는 점괘를 보여줍니다. 점괘에 나온 날짜는 불과 50일도 안 남은 시점 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환궁은 고사하고 생명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잖습니까?
 
. 이때 명성황후를 더 곤경으로 모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황후를 암살하기 위해 백방으로 찾아 다니던 때였습니다. 결국 며느리를 찾아내지 못하자 가짜 시체로 명성황후의 거짓 사망선고를 전국에 내립니다.
 
혹시라도 살아있다면 돌아오지 말라는 시아버지의 무언의 메시지였군요? 또 환궁을 명분적으로 막는 궁여지책이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런 악 조건 하에서 명성황후는 정말로 진령군이 예언에 날짜에 정확하게 환궁을 하게 됩니다. 그 동안 황후가 고종임금과 긴밀히 연락을 하며 청나라 군대를 끌어 들였던 거죠. 명성황후가 화려한 궁중복귀를 할 때 진령군이 함께 입궐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진령군의 횡포가 시작 되었습니다.
 
황후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가장 어려울 때 도와준 지인을 도와주고 싶었던 마음이 컸겠죠?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죠?
 
. 황후의 무한신뢰를 등에 업고 아무 직책도 없이 대한제국의 모든 정치문제에 개입을 했습니다. 우선 관리를 임명하는 인사권이 진령군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 당시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는데, 이렇게 받은 뇌물을 통해 진령군은 엄청난 자금을 축척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진령군의 아들은 아무 관직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당상관 복을 입고 궁을 돌아 다니며 진령군의 행동대장 노릇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무당모자가 국정을 농단 하는 동안 조정의 대신들이 진령군을 누님이라고 부르며 애완견처럼 꼬리를 흔들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의남매를 맺거나 심지어는 스스로 양자로 입적을 했다고 합니다.
 
실로 참담함을 금할 수 없는데요. 왕과 왕비를 위해 직언을 해야 할 조정 대신들이 자신들의 영달만을 위해서 비선실세에 대해서 눈을 감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을 했군요! 이 외에도 굿을 하기 위해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채워진 국고를 탕진하였다고 하는데 이 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 진령군은 각종 명목으로 궁내에서 굿 판을 벌였습니다. 세자가 몸이 허약하니 금강산 일만이천봉 각 봉우리에 재물을 바쳐야 한다며 곶감 빼먹듯이 국고의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관우의 딸을 자칭하였기에 북묘라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을 국가의 재산으로 건립하고 이 곳에서 본격적으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는 저희 JYBC가 개국 전이었기 때문에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데요. 어느 누구도 이런 진령군의 비리에 대해서 지적을 한 사람이나 언론이 없었습니까?
 
이 당시 사간원에서 근무하던 안효제라는 분이 진령군의 강력처벌을 주장하였는데 오히려 역풍을 맞고 삭탈관직 되어 귀향을 가게 됩니다. 이 당시 조정대신의 말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이 무슨 삼국시대 같은 봉건시대도 아니고 무당이 비선실세라는 주장은 너무나 터무니 없고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어리석은 주장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결국 사실로 밝혀지고 갑신정변을 통해서 결국 진령군도 쫓겨 나게 되었습니다.
 
. 동복현 기자 수고 하셨습니다.
무당출신 진령군은 12년 동안 왕과 왕비를 기만하고 비선실세로 활동해 왔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녀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의 눈을 가렸던 대신들과 부호들은 아무런 피해 없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점도 보지 않고 무당에게 복채로 자신들의 세금을 낸 백성들의 정신적 물질적 피해는 어느 곳에서도 보상 받을 수 없었습니다.
역사는 반복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한제국에서 일어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은 우리 후손들에겐 절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하며 역사 룸을 마치겠습니다.
 
저희 JYBC는 내일도 글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자 여려분의 각종 제보와 격려는  아래의 블로그로 받도록 하겠습니다.
http://blog.naver.com/jy3180
P.S : 이 글을 정독 해주신 당신의 러블리한 댓글은, 다음 글을 위한 산삼보다 귀한 자양 강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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