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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남자들이 떠나는 기차의 꽁무니를 향해 달립니다. 양손에 달린 큼지막한 오렌지 색 가방이 위아래로 크게 요동칩니다. 곧 따라 잡을 듯
가까워졌던 그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빨라지는 기차의 속도를 끝내 이기지 못하고 벌어져버릴 듯 흔들거립니다. 남자와 함께 달리던 노인은 끝내
기차를 놓쳐버리고 그들은 고민합니다. 꼭 타야만 하는 저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덜커덩 거릴 때마다 손에 쥔 가방도 덩달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거립니다. 각각을 번갈아 쳐다보던 남자는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지금임을 깨닫습니다. 놓치면 다시 오지 않을 삶의 선택, 한 번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의 결정, 그는 결심합니다. 인도의 광활한 대지를 달리는 열차 다즐링 리미티드 열차가 풍경을 가로지르며 달립니다.
영화 <다즐링 주식회사>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한 장면입니다.
18세기 영국 귀족 사회는 난리가 났습니다. 유행이라는 것이 오늘 내일의 일만은 아니지만 당시 영국 상류 사회를 휩쓸었던 광적인 유행은 바로
저 멀리 태양이 뜨는 대륙, 중국에서 건너 온 말린 식물 잎사귀 때문이었습니다. 살며 여태 본 적 없던 작고 우아한 곡선의 기예를 뽐내는 그릇에
끓는 물을 붓고 담아 잠깐의 시간을 기다리면 진한 황갈색 또는 진홍색의 액체나 조르르 흘러나옵니다. 이들은 물 건너 온 중국의 다완을 쥐고
있기가 힘들었습니다. 뜨거웠기 때문이죠. 그래서 옆구리에 작은 손잡이가 달린 찻잔을 만들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며 중국산 차는 천정부지로
값이 뛰기 시작합니다. 그야말로 영국 시장을 점령하고 막대한 양의 은이 유출되기 시작합니다. 맛 좋고 귀한 차 한 통을 구하기 위해 귀족들은
서민들의 주택 한 채 값을 쉽게 지불합니다. 유수의 영국 차 회사들은 유통사업을 하며 동시에 그들 사정에 맞는 찻그릇을 만들어 보급합니다.
여태까지 존속하는 유수의 홍차 브랜드들이 거의 19세기 이즈음에 탄생합니다. 그들은 중계와 유통을 담당하며 부를 축적합니다. 낮은 품질의
도자기를 보완하기 위해 중국에서 흙도 수입해 옵니다. 찻그릇들을 만들어 팔기도 합니다. 하지만 찻잎만큼은 따라하기 어려웠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한 통에 수 백 만원을 호가하던 차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만큼 나라 사정은 우려의 길로 한 발 한 발 들어섭니다. 그래서 영국은 중국에서
차 씨앗을 식민지였던 인도에 보급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합니다.
하지만 차나무를 심고 키우는 일이 텃밭에 상추씨를 뿌리고 콩 씨앗을 뿌려 기르는 일처럼 수월하다고 생각했던 까닭일까요. 기술도 없고 경험도
없고 무엇보다 원재료의 양이 적었던 때문에 이 소규모 프로젝트는 처참하게 실패하고 맙니다. 절망적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1823년 로버트
브루스가 인도의 아쌈 지방 정글에서 중국의 차나무와 비슷한 모양새의 나무를 발견하고 인근 부족들이 이 잎을 씹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장을 독점한 중국에 대한 우려는 정부 차원으로 발전한 까닭으로 로버트 브루스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인 찰스가 재래종
차나무로 차를 만드는 개발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됩니다. 첫 발견 이후 13년 만에 드디어 인도의 차나무로 만든 첫 차가 캘거타에서 출시됩니다.
대영제국이 주목하는 가운데 등장한 이 아쌈의 차는 결과적으로 대실패였습니다. 영국의 두 번째 실패였지요. 중국차와 비교하면 품질이
형편없었으니까요. 이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실패 원인은 ‘독자적’인 노선을 강경하게 밀어부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너무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랄까요. 13년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3천 년의 노하우랄까요.
영국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중국에 스파이를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뛰어난 품질의 차를 만들어 내는 비밀 기술을 캐내고 동시에
중국에서 대량의 종자를 빼내 와 인도 식민지에 대규모의 차 농장을 세우려는 계획이었지요. 로버트 포춘이 파견됩니다. 언제나 서양 홍차의
역사 맨 앞머리를 장식하는 인물의 등장이지요.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식물학자이면서 동시에 종자 사냥꾼이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현재
이미 종자전쟁의 패권을 쥔 서양 선진국을 있게 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1848년 중국으로 잠입합니다. 그리고 식물학자의
능력을 살려 표본을 채취하고 분석하고 분류합니다. 대단한 열정으로 2천 그루가 넘는 어린 차 묘목을 수집하고 영국을 등에 업은 까닭으로
뿌릴 수 있었던 거대한 자본력을 투입해 여든 다섯 명의 숙련된 차 생산자를 데리고 인도로 돌아갑니다. 요즘 기업에서 산업 스파이 주의보가
대단하다지요. 십 수 년을 일군 회사의 독보적 기술력이 한 사람의 스파이로 인해서 유출되면 채 반 년도 되지 않아 회사가 문을 닫게 됩니다.
중국은 기원 전 진 시황제 이후부터 차와 소금을 대표적인 국가 단위 산업으로 보호했습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기 때문이지요.
차에 관해서는 일종의 글로벌 스탠다드의 입장이었던 중국이 이제는 경쟁자를 맞이해야 한다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이죠. 영국은
신이 났습니다. 인도에서 본격적으로 차를 재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품종 개량도 시작되었죠. 예상과 달리 첫 수확물부터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둡니다. 인도는 중국 만큼이나 거대한 나라죠. 그에 걸맞게 넓고 광할한 산지와 구릉지대가 알맞은 기후로 차를 보살필 준비가 이미
오래 전부터 되어 있었던 겁니다. 1854년 닐기리 언덕에 심어 두었던 묘목들이 마침내 상업적으로 생산가능한 수준이 되었고 드디어 1859년
히말라야의 산기슭, 작은 언덕이었던 다르질링 지역에 추가로 차 농장들을 조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쌈이 인도차의 개발 프로젝트를 선도했던
곳이라면, 다르질링은 본격적인 차 전쟁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위해 만발의 준비를 갖추고 뛰어 든 곳이라는 얘기지요. 1887년, 그러니까
인도에서 첫 차를 개발했던 때에서 무려 50여 년이 지나고서야 영국에 들어 온 인도의 차가 중국차를 품질 면에서 부분적으로 앞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르질링은 인도차의 선봉장이자 세계 차 시장에서 독보적이었던 중국을 견제하고 시장을 양분화시키는 첨병이 되었죠.
다르질링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글을 들으신 여러분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셨을겁니다. 이 탄생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짧은 한 장면에 대한 묘사가 첫 머리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세요. 사실 <다즐링 주식회사>라는 영화는 제목에만 다즐링이
들어갈 뿐 차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차 마시는 장면도 별로 나오지 않죠. 그리고 제목의 ‘다즐링 주식회사’는 인도의
국영철도회사 이름입니다. 별 상관 없는 얘기지만 국내의 유일한 흑자노선이라고 하네요. 음.. 이 영화는 한동안 얼굴도 마주한 적 없는 소원한
세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년 만에 만난 세 형제가 수녀가 되어버린 어머니를 찾아 인도를 여행하는 로드 무비죠. 그런데
이 남자들의 모습을 보면 나이만 먹었지 아직 철이 덜 든 미성숙 소년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부잣집 도련님들의 좌충우돌 인도 여행기랄까요.
이 영화의 감독은 자신의 전작들에서 언제나 늙어서까지 소년의 내면 세계를 벗어 던지지 못하는 아버지를 등장시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던 노년의 남성 (빌 머레이 분)을 초반에 다즐링행 열차에 탑승하지 못하고 그냥 사라져버리게 합니다. 어른이 되는
과정은 곧 성숙해 지는 과정이라고들 하죠.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세 남자의 인도 여행은 어쩌면 인생살이 쓴 맛을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맛보게
된 어른아이의 성장담 같아 보입니다. 명품 가방 한 무더기씩을 언제나 품에 안고 다니는 이들은 기차가 서고 출발할 때마다 풀세트의 명품
가방을 들고 달음박질치며 뛰어 오릅니다. 열차 밖에서 이들은 고단하고 특색 있는 경험들을 마주하며 달라도 너무 달랐던 서로 간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던 기억을 공유하며 관계를 회복합니다. 셋은 한 몸에서 나고 자랐으니까요. 한 뿌리에서 난 서로 다른 가지의 은유로서
가족의 갈등은 이렇게 뿌리를 되짚는 과정을 통해 해소되곤 합니다.
다르질링 차는 세 등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퍼스트 플러쉬, 세컨드 플러쉬, 그리고 서드 플러쉬가 그것이죠. 이는 각각 태어난 잎의 시기에
따라 구분한 것입니다. 이른 봄에 태어난 잎들을 모아 퍼스트로, 늦봄에서 초여름에 태어난 이들을 모아 세컨드로, 늦여름에서 가을에 수확한
녀석들을 모아 서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들은 각각의 풍미가 다릅니다. 첫째는 은빛과 푸른빛을 골고루 담고 있습니다. 겨울을 이겨내고
서도 가을의 노란 호박처럼 짙은 노랑 빛으로 우러납니다. 약간은 시고 동시에 약간은 쓴 맛이 섬세하게 퍼지는데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알아
채기 힘들만큼 복잡미묘한 향들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만큼 넓게 아우르는 힘도 있죠. 영화에서 첫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오토바이 사고를 크게 당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형제들을 불러 모아 인도로 떠나버린 어머니를 찾아 갈
계획을 세우게 되었죠. 이에 비해 둘째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친구와 헤어질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삶의 매무새보다 옷매무새에 더 신경
쓰고 있는 이 친구를 보고 있자면 인생의 쓴 맛을 좀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언제나 둘째는 고달픕니다. 형의 책임감과 동생의
천진함 사이에서 고민과 갈등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까요. 세컨드 플러쉬는 형이 뿜어내던 노란빛을 약간은 잃어버린 듯 구릿빛으로
빛납니다. 하지만 광택이 두드러지죠. 그 자체로 빛을 발하지는 못해 옷매무새에 신경 쓴 모습 같달까요. 향이 화려합니다. 꽃향기가 풍부하게
일어나 사라지고 나면 쌓아 놓은 목재들 사이로 걷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는 쓴 맛이 찾아오죠. 하지만 점차 옷매무새보다 삶의 매무새를
생각하는 듯 성장하는 모습처럼 쓴 맛의 곁에 마치 바닐라 향처럼 묘한 부드러움이 소리 없이 다소곳이 앉아 있습니다. 여름의 지독한 더위가
지나고 나면 차나무는 겨울을 준비하며 잎들이 굵어집니다. 억센 이들을 가려 딴 서드 플러쉬는 노란빛을 잃어버리고 짙은 갈색으로 화합니다.
화려한 꽃의 향기, 진득하게 우러나는 색채의 향연을 그리워하는 듯 하지만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던 오묘함을 벗어 던지고 오히려 선명한
향기를 내뿜습니다. 막내는 태생적으로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집착할 수밖에 없다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서드 플러쉬가 그러하듯 막내는
헤어진 여자 친구의 전화 사서함을 매일 체크하는 등 과거에의 집착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듯하지만, 결국 여행하는 형제 자신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기록하고 쓰기 시작합니다.
다르질링은 훌륭한 품질과 그에 걸맞는 높은 가격 때문에 그만큼 세계에서 가장 모조되는 (흉내 내 따라 만든 위조품을 뜻합니다) 차로도 유명
합니다. 매년 약 4만 톤 정도가 거래된다고 하지만 이는 원산지 생산량의 4배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즉 우리는 75%의 확률로 가짜 다르질링을
마실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죠. 이 사실이 저에게 던지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품질이 낮으면 위조할 가능성도 적겠지요. 그렇다면 이 차의 특별한
품질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르질링의 탄생 스토리를 따라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르질링은
삶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줄 아버지 없이 자라난 외로운 아이들이구나. 방황하고 방랑하고 중심을 잡지 못하던 아이들이 인도의
대지 위에서 만나는 이들과 좌충우돌 모험하며 시간을 두고 성숙해진 결과물이구나 라고 말입니다. 인도라는 어머니의 대지 위에 강제적이고
폭력적으로 옮겨 흩뿌려진 중국의 차나무 씨앗들이었으니까요. 인도라는 대지가 수 십여 년의 세월을 거쳐 불어 넣은 강한 개성이 역사와 숙련의
상징과 어깨를 견주게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개성의 세 가지의 차는 한 뿌리에서 났습니다. 태어난 날은 다르지만 같은 대지와 같은 손길과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며 자랍니다. 그리고 각각의 개성에 맞는 방식으로 가공되어 우리 앞에 도달하게 되었죠.
자, 여러분. 이제 다르질링 한 잔 마셔볼까요.
다르질링편은 두 회로 나누어 써 볼까 합니다. 너무 길어지면 여러모로 불편하실까봐...
추천은 제 손가락을 춤추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
출처 | www.projecte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