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1212년 부터 1213년까지 야율유가를 만났던 알진이 누구인가를 알아보려 합니다, 1211년 몽골 제국이 금 나라에 대한 정벌을 시작하던 시기 금과 거란의 모순과 갈등을 조장해 금국의 역량을 약화시켜 대對 금 공세의 포석을 다지기 위해 파견된 알진은 칭기스칸을 대리하는 매우 중요한 인물임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알진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일은 요동관계사에 있어 몽골 제국 내에서 요동 지역 일대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일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1212년과 1213년 야율유가를 만났던 알진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사료는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211년부터 1227년까지 몽골 제국과 요동 지역의 정세를 통해 알진이 누구인가 그 실체를 파악해볼수 밖에 없습니다.
앞서 칭기스칸이 분봉을 단행하였을때 막내동생 옷치긴이 다른 형제들이나 심지어 자신의 자식들보다 의아할정도로 많은 분봉을 받은 이유가 칭기스칸이 가진 옷치긴에 대한 특별한 애정 뿐만 아니라 금을 공격하기 위한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수반되었음은 언급드린바 있습니다, 따라서 칭기스칸은 동방경략의 창구?로 옷치긴을 생각했고 이러한 치밀한 정치적 계산 아래 옷치긴을 동방으로 파견했으리라 생각해볼수 있으며 옷치긴이 요동 지역을 자신의 영지로 확정지을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칭기스칸의 정치적 배려를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야율유가와 옷치긴의 관계를 언급하는 사료의 내용 중 원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요리씨姚里氏가 입주立奏 했다, 황제는 서역을 정벌했다, 황태제皇太弟가 요리씨에게 호부虎苻를 달고 계승하게 하고 7년동안 다스릴 권한을 줬다.'
1220년 야율유가가 천수를 다하고 사망하자 그의 처 요리씨가 몽골 제국 궁정에 입조하여 황태제 옷치긴을 만났습니다, 1212년과 1213년에 이미 야율유가를 만난적이 있던 옷치긴은 이때 야율유가의 처에게 7년동안 요동 지역의 통치권을 넘겨준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요동 지역에 대한 야율유가 가문의 기득권을 인정하여 차후의 금과의 전쟁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려는 정치적 포석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배려는 1212년 야율유가와 만나 동맹을 맺음으로서 시작되었는데 1220년 야율유가 사후에 그의 처 요리씨를 통해 다시 재현되고 있는 셈입니다, 즉 1212년과 1213년 야율유가와 만나 동맹을 맺은 알진 노얀은 옷치긴이고 이 옷치긴이 1220년 야율유가 가문에게 요동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다시 넘겨준 셈으로 요동 지역에 대한 전략은 일관되게 옷치긴에 의해 진행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략의 진행속에 1226년을 전후하여 금은 요동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완전히 상실하게되는데 이때 요동지역은 옷치긴으로 대표되는 몽골 제국과 포선만노의 동진 그리고 요리씨가 이끄는 야율유가 가문을 중심으로 모인 거란 세력으로 나누어 있습니다, 흡사 천하삼분지계를 보는 듯한 광경입니다, 물론 다른 점이 있다면 본디 제갈량의 그것은 셋 사이의 팽팽한 균형이 있었다는 점이고 지금은 몽골이 갑이라는 것이지요.
아무튼 1227년 신 원사에 따르자면 칭기스칸은 요왕 야율벽가 耶律薜闍 가 살반撒潘된후 벨구테이에게는 요서를 옷치긴에게는 요동을 위무토록하는데 이는 흑달사각黑韃史胳에서 나오는 옷치긴의 군대는 요동에 있고, 차카타이의 군대는 회회回回에 있으며 바투 부마의 군대는 하서河西에 있다는 기록과 일치합니다,
따라서 1212년 야율유가를 만났던 알진은 옷치긴으로서, 칭기스칸은 야율유가의 협력을 바탕으로 금의 변방을 교란시켜 유리한 입장에서 전쟁을 전개하기 위해 황금씨족에서 가장 신뢰하고 있던 막내동생 옷치긴을 파견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또한 이 시기는 몽골이 고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제 1218년부터 1225년 국교가 단절되던 시기까지 몽골과 고려의 관계를 살펴보려하는데 이 부분은 다음 글에 잇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