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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민주주의는 그냥 얻어진 게 아닙니다
게시물ID : sisa_77332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urelius
추천 : 10
조회수 : 56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10/28 20:51:00

최순실 게이트... 사상 초유의 국기문란 사태에도 불구하고 검찰의 조직적인 은폐와 친박(친최) 근위대의 뻔뻔함이 극치에 이른 지금

 

적지 않은 분들이 행동을 해야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지금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주제인 거 같아서 다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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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과 87년의 민주주의는 결코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니라 수많은 행동하는 양심들의 노력, 그리고 이들의 철저한 계획과 조직 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전개과정을 잠시 살펴보죠. 

먼저 6월 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1월 14일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그 유명한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이 나왔죠. 정부는 물론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양심있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다행히 박종철의 죽음이 묻혀버리는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박종철이 고문당해서 죽었다는 것이 최초로 밝혀진 것은 당시 서울지검 공안검사 "최환"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은 자체적으로 박종철의 사인을 규명하려고 했지만 최환 검사는 청와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검찰로 넘기는 데 성공합니다. 

무엇보다 부검의의 용기있는 행동도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오연상 교수가 박종철이 물고문에 의해 죽었고 이를 은폐하려는 경찰의 음모를 알아채고 중앙대병원 측에 시체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요청하였다. 경찰은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이 아닌 병원에서 숨졌다고 조작하려는 것이었다. 당연히 같은 죽음이라도 고문실에서 사망과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 중 사망은 뉘앙스 자체가 다르다. 경찰은 이후 오연상 교수에게 수사관 3명을 붙여 감시하였고 그 다음날(15일)에도 감시를 당하였으나 화장실에서 언론사 기자를 만나서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었음을 알렸다. 소리소문없이 은폐될 수도 있었던 박종철 사건은 한 의사의 양심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 나무위키

물론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분노하였고 이를 규탄하는 산발적 시위가 여기저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책임자(라고 쓰지만 실제로는 그냥 말단직원 2명)들을 처벌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우리가 현재 목격하고 있는 시위의 양상이 그러하듯 시위는 추동력이 약해지면 결국 사그라들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1987년 5월 17일 노동자였던 부산상고 출신 황보영국씨는 "독재타도"를 외치며 분신을 하고 그 다음날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인해 분노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1987년 5월 18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의 폭로로 진상이 드러난다. 처음 제5공화국은 보도지침과 언론통제를 통해 이를 은폐하려고 했다. 5월 21일,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이 추가적으로 3명의 범인이 있음을 인정했다. 당시 정 검사장의 회고에 따르면 수사 중 3명의 공동정범이 있음을 인지했고 이를 서동권 검찰총장에게 보고했고, 서 총장은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당분간은 우리만 알고 있자고 했다고 한다. 덮을 생각이 없었고 3명을 사법처리할 시기를 정하고 있을 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폭로했다는 것이다. -나무위키

상황이 이에 이르자 국민의 분노는 치밀어 올랐습니다. 대학가는 물론, 재야인사들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전두환 정부는 점점 타도의 대상으로 비춰졌습니다. 반대로 이는 다시 일반인들은 1980년대 초부터 학생들이 부르짖던 '민주주의' 따위의 가치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너무도 부도덕하고 잔인한 사건이 터지고 이에 대한 은폐시도가 일파만파로 드러나자 그제서야 문제의식을 느꼈다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6월 9일 연세대학교의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야당인사들도 점점 조직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전국의 재야인사 2200여명이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이 결성됩니다. 국본과 같은 거대 조직은 결코 장난으로 결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종교계의 진보인사들 - 현재 소위의 친북좌ㅃ ㅏㄹ로 지칭되는 -, 예컨대 문익환 목사나 함세웅, 문정현 신부와 같은 사람들, 그리고 통일민주당과 같은 정치집단이 주도하였고 그 외에도 많은 재야정치인들 그리고 대학교 학생회들이 비밀스럽게 서로 연락하면서 행동을 기획한 결과입니다. 

당시의 연대, 연계, 조직 등은 요즘 학부생 조모임 짜듯이 했던 것이 아니라 투철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사회각기 계층의 용기있는 사람들이 다음 행동을 공동으로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6월 10일 국본의 주최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합니다. 

그리고 국본은 민중항쟁의 뜻으로 오후 6시를 기해 차를 세워서 경적을 울려줄 것 또는 흰 손수건을 흔들어 달라고 지침을 만들고 이를 전국의 뜻있는 사람들에게 배포합니다. 그 결과 택시운전수, 버스기사는 경적을 울리고 또는 손수건을 흔들게 되고 사무실에서 흰 휴지 두루마리가 내려오고 시민들은 흰 손수건을 들게 되었습니다. 전국민적 저항이 명백하게 '시각화'되고 따라서 정부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중요한 기획이었죠. 

이렇게 재야단체와 시민단체의 시위가 터지자 정부는 야권의 집회가 '폭력성을 드러낸 법질서 유린행위'였다고 지적하고 '앞으로 법질서 파괴 행위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발표합니다. 

물론 국본은 비폭력을 고수하였지만, 일부 학생단체가 화염.병이나 짱돌등을 이용한 '폭력(?)'을 사용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용기있는 행동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학생들은 "국민대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고 저항에 계속 에너지를 부여했습니다. 특히 이들이 시위를 계속하면서 명동성당에 들어가서 농성한 것은 각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취지에 공감했던 사람들은, 학생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게 됩니다. 故김수환 추기경과, 당시 박원순 변호사와 조영래 변호사가 명동성당에서 이들을 지원했습니다.

이에 따라 6월 12일에는 시위의 규모가 커지고 오후 1시 쯤에는 코스모스 백화점 앞에서, 그리고 그 이후 명동, 삼일 고가도로, 을지로, 광교 사거리, 시청 등에서 기습시위와 해산을 거듭했습니다. 

자칫 단발적인 이벤트로 끝날 수 있었던 "국민대회"는 대학생들의 투지로 인해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또한 시위의 효율성을 재고하기 위해 대학교 학생회와 재야인사들은 전국 주요 도시에 동시다발적인 시시위를 기획하게 되고 이를 통해 경찰력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6월 18일 경찰의 최루탄 사용과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전국 주요 도시에 발발하고 거의 150만명이 되는 사람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이에 전두환 정부는 '군투입'을 진지하게 고려하였으나 당시 치안본부장은 경찰력으로 어떻게든 해결해보겠다고 전두환을 설득하였고 궁극적으로 당시 한국군의 평시통수권을 쥐고 있던 미국은 전두환에게 군사개입을 반대한다는 명백한 메세지를 보냈습니다. 

이로써 다행히 서울에서 광주와 같은 참극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6월 26일 국본은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을 개최하고 이는 정부에 대한 엄청난 규모의 압력이었습니다.

그 결과 6월 29일 호헌철폐가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의 이야기는 모두 아시는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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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가 6월 항쟁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당시의 항쟁은 수많은 용기있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누구는 분신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알렸고, 누구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음으로써 죽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안기부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도 다른 세력들과 비밀스럽게 연락을 취하고 조직을 결성하였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검사나 의사의 신분으로서, 그 직무에 따른 양심을 지키면서 정의를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각자 모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학생들은 학생회를 조직해서 그들의 '전매특허(?)'였던 시위를 하고

종교인들은 신의 가르침을 설파하면서 악을 규탄하고

의사는 부당한 압력에 맞섰으며

기자는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했고

검사는 범인을 밝히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인은 사람들의 의지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고

평범한 택시기사, 버스기사, 직장인, 학부모들은 경적을 울리면서 또는 손수건을 흔들면서 의로운 양심들을 외롭지 않게 하였습니다. 

정말 각자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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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 행동, 조직력이 호헌철폐와 직선민주주의를 가능케했던 것입니다. 

 

어렵게 얻은 민주주의가 다시 죽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도 JTBC를 외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비선실세의 정체를 밝히려고 했다가 자살당한 최 경위의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 함께 다 같이 서로를 위로하며 

 

이 땅에 찾아보기 힘든 정의를 다시 되찾아와야 합니다. 


#10/29일, 청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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