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는 열세살, 마음은 서른살.
애늙은이 양치기 소년과 그의 친구 양치기 개의 대륙 탐험 이야기
1.골칫덩어리
마운틴블루 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화전민 마을 루왁. 매일 아침 마을 사람들을 깨우는 건 닭 우는 소리가 아니라 마을의 골칫덩어리 그래버와 촌장 뮈케의 목소리였다.
“너 이놈에 자식 일로와 너.”
“아 또 왜요? 아, 아 진짜! 귀 좀 놓고 말하면 안돼요?”
키는 140cm정도, 얼굴에는 주근깨가 한가득, 머리는 잡초를 짓이긴 듯 한 녹색의 어린 아이. 촌장은 그의 귀를 잡고 그의 몸을 빗자루 삼아 마을 한복판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을 하라고 이놈아. 너 어젯밤에 어디 갔었어 엉?”
그래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촌장의 배를 손으로 쑥 밀며 말한다.
“아 그러니까 집에서 잤다구요. 자라나는 어린애가 밤이 됐으면 자야지. 할배는 나이를 그렇게 잡숫고도 그런 걸 모르나? 참”
“이게 나이를 처먹더니 아주 조동아리만 살아가지고. 자라나는 어린애? 니 나이가 벌써 서른이여 이 화상아. 겉으로 나이를 안 먹으니까 지가 아직도 어린 앤 줄 아는 가베. 내가 조만간 죽으면 다 너 때문에 화병으로 뒈져 버렸는지나 알어 엉?”
“에이 할배가 죽긴 왜죽어. 내가 밤마다 그렇게 욕을 해대는데 아마 만수무병하실 겁니다요. 암 그렇고 말구요.”
따박 따박 말대꾸를 하는 그래버의 태도에 촌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새벽이라기엔 너무 밝고 아침이라기엔 아직 해가 다 고개를 치켜들지 않은 연주홍빛의 하늘이다. 그 순간, 촌장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그래버는 자신의 귀를 잡고 있던 손을 손날로 쳐내고 마을 남쪽으로 내뺀다. 촌장은 그를 잡으려 몸을 돌리다가 이미 잡기엔 그가 너무 멀리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아이고, 나이를 먹으니까 이 짓도 못해 먹겠구만. 저놈에 애새끼. 그 때 담배를 피러 가지 말았어야 됐는데잉... 에잉.”
촌장은 마을 한복판에 걸터 앉아 품안에서 긴 파이프를 꺼내 그 안으로 담뱃잎을 차곡차곡 쌓아 넣는다. 소매 안에서 성냥갑을 꺼내 익숙하게 파이프에 불을 붙인다.
“벌써 그게 30년이나 됐고만. 허. 시간 참 빠르다. 잘도 간다 망할 놈에 시간.”
“촌장님! 거기서 뭐하세요.”
촌장이 앉아있던 오른쪽, 통나무집의 창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여자가 웃는 얼굴을 내민다. 나이는 마흔쯤 되어 보이지만 아직도 눈웃음에 앳된 모습이 남아있는 여자다.
“오! 엘리자베스. 부지런도하지 벌써 깼는가?”
“그럼요. 촌장님이랑 그래버 덕분에 이때만 되면 알아서 눈이 번쩍 떠지는걸요. 호호호.”
“아이고. 이거 내가 아침잠을 또 방해했구만 그려.”
“에이, 그런 말씀 마세요. 아직 아침 안 드셨죠? 거기 앉아 계시지 마시고 얼른 들어오세요. 마침 아침 먹으려던 참이였어요. 얼릉요.”
“역시 나 챙겨주는건 우리 엘리자베스밖에 없다니까. 흠흠. 그럼 어디 한 번 가봄세.”
통나무집 내부. 한 눈에 보기에도 아늑한 집이다. 바닥에는 사슴 모양이 들어간 커다란 빨간색 융단이 깔려있다. 그 위엔 네모반듯한 4인 가족용 식탁이 놓여있다. 식탁 위엔 지금 막 만들어 김이 올라오는 스크램블 에그와 구운 감자가 놓여져 있다. 벽면 화로에서는 양동이에 담긴 우유가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손짓을 하며 촌장을 식탁으로 안내한다.
“이리로 와서 앉으세요. 아 참. 이안, 자넷. 이 잠꾸러기들. 얼른 일어나. 촌장님 오셨어.”
엘리자베스이 2층 계단쪽을 바라보며 목청을 높인다. 그녀의 목소리에 2층 계단에서 무언가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뛰어 내려온다. 엘리자베스의 쌍둥이 아들 이안, 그리고 딸 자넷이다.
“할부지! 할부지도 오늘 우리랑 아침 멍어요?”
자넷이 촌장에게 달려와 와락 그의 허리춤을 안고 아직 잠에서 다 깨지 않은 목소리로 옹알댄다. 그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어서 엘리자베스와 촌장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간다.
“암 그럼요. 먹다마다요.”
“안늉하세요. 촌장님.”
엘리자베스의 옆에서 눈을 비비고 있던 이안이 촌장에게 허리를 굽혀 배꼽인사를 한다.
“그래그래. 안녕하다마다. 자 얼른 먹자 먹어. 식으면 음식이 맛이 없어요. 엘리자베스도 고생했는데 어서 듭시다.”
“네. 촌장님. 차린 게 별로 없어서 어쩌죠.” 엘리자베스가 부끄럽다는 듯이 뺨을 양손으로 가리며 말한다.
“산골에서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지. 보자. 지금 통닭이 하나, 둘, 네 마리나 있네. 이 정도면 과식해서 체할지도 모르것네 그려.”
“촌장님도 참.”
촌장의 능청에 엘리자베스가 허공에 손을 저으며 웃는 얼굴로 답한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서서히 주홍빛에서 맑은 다이아몬드의 색채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구름한 점 없는 완벽한 가을 아침이었다. 따뜻한 색채가 밤새 그늘졌던 산 구석구석을 밝은 빛으로 씻어나가고 있었다.
달그닥 달그닥. 식사를 마친 후 엘리자베스가 주방에서 후식을 준비하고 있다.
“저기 촌장님. 그래버가 또 뭔가 저지른 거죠?” 과일을 깎으며 엘리자베스가 묻는다.
“아 별일 아닐세. 그 놈이 또 양을 팔아치웠지 뭔가. 보나마나 그 꼬부랑 수염을 비렁뱅이같이 기른 그 노인네한테 팔아먹은게지.”
촌장의 대답을 들은 엘리자베스가 살며시 웃음을 흘린다.
“촌장님이 참으세요. 그래도 그래버 덕분에 우리 마을에 심심할 일은 없잖아요. 루왁마을의 귀염둥이잖아요 그래버는.”
“귀염둥이는 무슨 얼어 죽을. 세상에 나이 서른 먹은 귀염둥이도 있는가. 나잇살이나 먹어서 할 일 없이 방바닥이나 긁고 있던 놈을 마을농장 양이나 치라고 보내놨더니 에잉. 날이 갈수록 아주 심보가 글러먹은 것만 같으이.”
촌장의 투덜거리는 사이 후식 준비를 마친 엘리자베스가 과일접시를 들고 식탁으로 와서 앉는다.
“그래도 그래버를 정말 미워하시는 건 아니시죠? 저번에 이안이 길을 잃어서 온 마을이 난리였을 때 기억하시죠? 그래버가 산을 두 개나 넘어서 이안을 데려온 날 말이에요. 머리는 나뭇가지에 걸리고 다리는 수풀에 쓸려서 넝마가 됐는데도 그래버가... ”
“크흠. 아니 뭐 내가 그걸 모르나. 엘리자베스. 영 글러먹은 녀석이면 삼십년을 내가 품어왔겠나. 내가 다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일세. 무슨 저주가 걸렸는지 나이를 먹어도 몸은 안자라지, 그래서 서른이 다 되도록 혼처도 못 정했지. 그렇다고 무슨 재주가 있길 한가. 내가 요즘 그놈만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오네. 내 나이가 벌써 70이 다 되가네. 내가 혹시라도 잘못되면...”
고민이 깊었는지 촌장의 미간 주름이 점점 깊어진다. 촌장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마치 기도하는 듯 양손을 포개고 상념에 잠긴다. 엘리자베스가 촌장의 손에 자신의 양손을 얹어 살며시 잡는다. 막 과일을 깍은 그녀의 손에서 기분 좋은 차가움이 촌장의 손에 전해진다.
“촌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 마을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촌장님 덕분인 걸요. 촌장님 뒤에도 저희가 그래버는 책임지고 보살필게요. 저희는 항상 촌장님에게 감사하는 마음 뿐 인걸요.” 엘리자베스가 촌장을 보고 따뜻하게 미소 짓는다. 그 모습에 촌장의 눈에 어렴풋한 물기가 서린다.
“어허, 어험. 벌써 중천이구만.” 촌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어머, 벌써 가시게요? 좀 더 있다 가시지 않고.”
촌장이 눈물을 숨기려는 듯 급히 몸을 문 쪽으로 돌린다.
“아닐세, 내가 약속이 있었는데 깜빡했지 뭔가. 아무튼 밥 잘 얻어먹었네. 엘리자베스.”
“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촌장님. 배고프시면 언제든지 들리시고요.”
촌장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엘리자베스. 그녀의 눈에 이안과 자넷을 바라볼 때의 따뜻함이 담겨있다.
창작 판타지 소설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