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한 정리 라고 해도 이미 글이 여섯번째에 들어온 이상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뺐습니다,
원체 글 솜씨가 미흡한 점도 문제이지만 줄인다고 줄여봐도 줄여지지 않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고 있다보니 참 그렇네요.
아무튼 음 텀이 길었던 만큼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고려라는 국가가 북방의 유목 제국과, 대륙의 제국 들의 틈바구니 에서 살아 남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외교입니다, 늘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틈타 미묘한 균형을 이루어왔지요, 송과 요, 송과 금을 넘어 유목 민족들이 일통한 원나라 시기에도 원나라 내부의 노골적이기까지한 정치적 갈등을 타고 살아남을수 있었습니다,
이 노골적이기까지한 정치적 갈등은 바로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원나라 황가와 원나라 왕가의 대립으로 서방 왕가야 원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별 다른 영향이 없었지만 한반도 바로 위 만주 지역과 초원의 동쪽을 석권한 옷치긴 왕가를 필두로한 동방 3왕가는 왕가의 특징상 독립적인 정치체계와 조세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무시 못할 군사력과 황금 씨족으로서의 힘 즉 명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늘 지척에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를 두고 있던 황가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 고려라는 그 들 바로 아래에 붙어있는 나라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원나라 황가에게 몹시도 갈망할수 밖에 없는 나라였습니다, 비단 그 힘이나 능력이 좀 많이 미흡했다는게 문제였지만 말이지요.
본 글을 연재? 하는 바는 단적으로 이러한 균형점에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존재이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옷치긴 왕가를 조명하고자 함입니다, 그리하여 지난 편 까지 옷치긴의 재정, 국가의 구성 등을 간략하게 살펴보았고, 끝으로 옷치긴 왕가의 성립에 대해 언급하고자 금나라 정벌을 언급하며 짧게 끝을 냈습니다, 이번 편 부터는 당분간 금나라 정벌을 다루어 볼 생각이고 말이지요.
칭기스칸의 금국 정벌은 선조 암바가이 칸의 원한을 풀고, 금나라의 압제를 떨쳐 버린다는 대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듭된 개혁으로 축적된 불만을 전쟁을 통해 일소함과 동시에 막 건국된 국가를 전시 체제로 돌림으로서 완벽하게 지배력을 강화할수 있다는 실리적 취지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금나라와 몽골 부족 간의 역사는 지리한 갈등과 또 대립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징기스칸은 그 것의 끝을 맺어준 이에 불과하지요, 물론 칭기스칸이후로 완전히 없어졌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그 시작은 요나라의 쇠락에서 비릇됩니다.
요나라가 금나라에게 멸망당한 직후 요나라의 왕자 야율대석은 남은 세력을 모아 몽골 초원으로 이주..아니 그냥 까놓고 말해 도망갑니다, 당연히 재기의 씨앗을 남길수 없던 금나라는 급하게 추격대를 편성하여 따라붙는데, 이 당시 몽골 부족의 시각에서는 아닌말로 쇠락한 요나라 잔존 세력이야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당장은 넘길수 있지만 동북아의 떠오르는 패자였던 금나라의 추격대는 침략으로 비춰질수 밖에 없었지요.
그리하여 위구르 제국이 멸망당한 이래 수 많은 부족단위로 흩어져 있던 당시에 그 부족들중 하나였던 몽골 부족을 이 끌던 키야트 가문의 카불 칸은 금나라의 추격대를 공격하여 몽골 초원 밖으로 몰아내버립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게 아니라 금나라와 숱하게 멱살잡이를 하며 갈등을 키워나갔다는 점인데, 이 당시 금나라의 알탄 칸은 송나라 만으로도 골치가 아픈터라, 일단 이 들의 입장에서는 이민족인 몽골 부족을 달래기 위해 궁궐에 초대하여 화친을 도모하나 카불 칸은 금나라 = 교활함의 공식을 믿고 먹은 음식을 몰래 토하는 것은 물론이고 알탄 칸의 면전에서 춤을 추고 알탄 칸의 수염을 잡고 희롱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은 당연히 분노하여 카불칸을 처단하려 했지만 알탄 칸은 카불칸의 기행?을 술이 취한 호의의 표시로 이해하고 그를 용서한 후 많은 금과 보석 및 의복 등 선물을 하사하였습니다.
이렇게 끝나면 해피엔딩이지만 실상은 문제가 다릅니다, 왕은 용서했지만 대신들은 용서하지 않은 것이지요.
대신들은 돌아가는 카불 칸을 사냥하기 위해 추격대를 붙였는데 카불 칸은 의형제 살지우다이의 희생으로 살아남아 무사히 돌아간뒤 쫓아오는 추격대를 전멸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몽골과 금나라 양 측의 지리한 전쟁의 서막을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139년 먼저 밀고 올라간 금나라의 몽골원정군은 보급문제로 퇴각하게 되었고 몽골군은 이들을 뒤쫓아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4년뒤 금나라 노국왕 완안 창의 아들이 아버지의 처형에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몽골과 연합하여 20여 개의 성채를 함락시키자 금나라는 8만 명의 군대를 보내 몽골을 쳤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습니다.
결국 알탄 칸은 이 들과 화친을 맺을 수밖에 없어 27개의 성을 넘겨주는 한편 많은 양의 공물을 준 후 몽골 부족장에게는 왕의 칭호를 주게됩니다, 굴욕적인 일이지요.
1150년 카불칸은 세상을 떠나고 싸움은 2대 칸인 타이치우드 가문의 암바카이에게 인계되었습니다, 카불 칸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지만 이때 칸의 계승형태는 키야트 가문과 타이치우드 가문의 윤번제로 암바카이 칸에게 칸위가 돌아갔던 것인데, 이 암바카이 칸은 당시 몽골 부족과 지리한 갈등을 맺고 있던 타타르 부족과 화친하기 위해 딸을 시집보내기로 결심합니다, 이 갈등은 또 뭔가 하면 카불 칸이 살아 생전에 카불 칸의 처의 동생이 병에 걸렸었다고 합니다, 이때 용하기로 소문난 타타르 족의 텡그리를 불러왔는데, 환자가 죽어버렸습니다,
문제는 이 죽은 환자와 카불 칸의 아들 들은 안다, 즉 의형제 간이었다는 점으로 본디 지금도 수술중에 죽은 환자의 가족들과 의사의 관계가 그렇듯 당시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은터라 자연스럽게 타타르 족과 멱살잡이의 수순으로 나아갔던 것인데 이게 두고두고 문제가 된 것으로, 여기에 더하여 금나라가 이전의 그 들과 마찬가지로 택했던 이이제이 방식의 견제책이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즉 금나라의 입장에서 골치아픈 몽골을 덜 골치아픈 타타르를 이용해 견제한다는 것인데 이에 따라 암바가이 칸이 딸을 데리고 도착하자 타타르 족은 암바가이 칸을 사로잡아 당시에 자신들을 후원해주던 금나라에 넘겨버립니다, 그리고 금나라에서는 당연히 사로잡은 암바가이 칸을 사형에 처하는데 죽이는 것도 곱게 죽이는게 아니라 몽골에서 가장 경멸하는 방식인 피를 쏟게 만들어 죽여버립니다, 대략 묘사를 보면 유목민이니 말 위에서 죽어야 된다며 나무로 만든 당나귀에 못박아 죽였다고 하니 뭐...음 참 그렇지요.
이에 몽골 족은 멋지게 뒤통수를 후려친 타타르 족과 지리한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13번이나 전쟁을 벌였는데, 원한을 풀지도 복수를 하지도 못했다는 표현 그대로 별 다른 성과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한게 메르키트 부족에게 손을 벌려 거부 당하자 메르키트 부족도 공격하는 등 외교, 정치적으로 무능함의 절정을 달렸던데다, 키야트 가문과 타이치우드 가문의 윤번제에 불복하는 이 들이 늘어나는 것에 더하여 전쟁에서 별 다른 성과도 없자 부족 내의 갈등도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결국 몽골 부족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립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예수게이의 암살에서 볼수 있듯 타타르 부족과의 갈등은 멈출길이 없어보였는데 이러한 배경에서 볼때 몽골부족에게 금나라와 타타르 부족은 불구대천의 원수 임은 당연한 노릇입니다. 그렇기에 칭기스칸에게 개인적 감정은 차지하더라도 명분은 더 없이 충만했지요.
다시 현재? 로 돌아와 보자면 칭기스칸의 금나라 원정은 순수하게 몽골만의 전쟁은 아니었습니다, 거란 역시 금나라에 갚아줄 혈채가 남아있었던 것인데, 글이 길어지니 이 부분은 다음편에 적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