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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20세기 중국 현대사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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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aurelius
추천 : 5
조회수 : 179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10/18 11: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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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내내 이어진 대규모 민란과 서양 열강과의 전쟁으로 쇠약해 질 대로 쇠약해졌던 청나라에게 청일전쟁의 패배는 결정타나 다름없었다. 이로써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벤치마킹 해서 청나라 체제 내 개혁과 근대화로 중화의 힘과 지위를 유지하자던 점진적 개혁주의자들은 크게 위축되었고 혁명을 통해 썩어빠진 왕조를 타도하고 공화국을 세우자던 급진적 공화주의자들의 발언권과 영향력이 급속도로 커져갔다. 결국 지극히 전통적이고 전근대적인 방법으로 청조를 도와 외세를 무찔러 중화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겠다는 의화단 운동이 실패하고 몇 년 후 우발적으로 터진 부대 내 반란으로 인해 껍데기 밖에 남지 않았던 청나라가 공식적으로 무너지고 중국에서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 성립된다. 하지만 청나라 말기 실제 전투력을 상실하고 유명무실해진 중앙정부 군대를 대신하여 각지에서 터져 나오던 민란을 막기 위해 조정에서 묵인 장려한 각 지방 유력자의 사병 육성은 청조 몰락 이후 그러한 각 지방 유력자들이 그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군벌이 될 수 있는 군사적 자원이 되어 주었고 이렇게 중국은 청나라 멸망 후 각 지에서 난립하는 군벌들에 분점 되는 대분열 시기를 맞는다. 비록 쑨원이라는 혁명가 덕에 초기 혁명적 성격을 갖고 탄생한 국민당이라는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십 수년이 지난 후 중국은 형식상 다시 중화민국으로 재통일 되지만 국민당이 북벌 과정 중 각 지의 군벌세력과 담판과 협상을 통해 그 들의 영향력과 세력을 인정한 탓에 통일 후에도 국민당 중앙정부가 실질적인 통제권과 행정권을 행사하는 지역은 제한적이었다. 쑨원의 공식 후계자이자 중화민국의 최고 통치자로써 장개석은 중화민족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나름 분투했지만 중앙정부에 대놓고 저항하는 각 지역 군벌들과 소련을 벤치마킹하여 대륙에 공산혁명을 도모하는 공산당의 반란에 대응하느라 부국강병에 자신과 정부의 모든 역량을 쏟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당시 중국을 둘러싼 혼란스런 지정학적 상황은 장개석이 중국을 통일되고 근대적인 국가로 발전시키게 해줄 시간적 여유를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연이은 승리와 대만, 조선의 식민지화를 통해 동아시아 지역 최강대국으로 떠오른 일본이 중국의 영토인 만주까지 장악하며 중국에 엄청난 안보적 압박을 가해왔기 때문이었다. 1927년 북벌 종료부터 1937년 중일전쟁까지 장개석에 주어진 시간은 10년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상술했다시피 半 독립국이나 다름 없던 각 지역 군벌과 공산당의 반항과 저항에 대항하느라 전국적 규모의 국가발전에 온전히 매진하는 것은 그에게 언감생심한 일이었다. 결국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떠오른 일본의 아시아 2등 국가로 몰락한 중국에 대한 전면 침략으로 인하여 중국은 국토의 핵심 지역을 거의 상실한 체 다시 8년간의 항전에 몰두하게 되고 중일전쟁이 2차세계대전으로 확대된 덕에 미국 등 동맹국의 도움으로 중국은 간신히 침략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중국에게 있어 청일전쟁으로 몰락한 후 실로 반세기 만의 첫 승리였다. 하지만 8년간의 전쟁으로 이미 기력을 상실한 국민당은 고질적인 부패와 무능으로 점차 집권 기반을 상실해 가고 있었고 중일 전쟁으로 멸망 직전에 살아난 공산당은 토지개혁이라는 무기로 농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으며 이미 국민당과 천하를 다툴 정도로 크게 성장한 상태였다. 결국 몇 차례 형식적인 평화 협상 끝에 발발한 국민당의 공산당간의 전쟁은 다시금 중국을 3년간의 내전 상태로 몰아갔고 공산당의 최종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1949년 가을이 되어서야 청나라 멸망 후 반세기 가까이 지속된 중국 내부의 정치적 분열 상황이 드디어 그 끝을 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청일전쟁 후 한때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떠오른 일본이 미묘한 시기에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감행해 공산당의 기사회생과 급속한 성장의 기회를 마련해 주어 중국의 정권교체 까지 초래하게 만든 것이었다.



국공내전에 최종 승리하고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망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공식 선포하는 모택동



공산당의 분열되어 있던 중국통일은 중국에게는 거의 반세기만에 지속적 발전과 국력신장을 이끌어줄 안정적 정치환경을 마련해 주었지만 지정학적으로는 유럽에 이어 동아시아에서도 냉전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동아시아 패권국인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일본을 대신해 동아시아에서 이제 지배적 패권자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 순리였으나 2차대전 당시 동아시아 핵심 동맹국이었던 중국에서 친미적 우파 정권인 국민당이 패배함으로써 중국 공산당이 쌓은 죽의 장막 앞에서 좌절을 겪고 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국전쟁에서 두 나라가 정면으로 맞붙고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미국이 중국의 통일 시도로부터 대만을 보호하기 위해 대만해협에 항공모함을 파견하자 미중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단절과 적대로 이어지고 만다. 중국은 이제 반세기 동안 꿈꿔왔던 오랜 꿈인 중화의 부흥을 서방의 어떠한 지원 없이 공산진영 종주국이자 냉전의 핵심 동맹인 소련과 인민들의 자력갱생만으로 이룩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물론 15년간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자로써 절체절명의 온갖 위기와 무수한 장애물을 뛰어넘어 극적인 승리로 공산당의 천하통일을 안긴 모택동에게 중화의 부흥은 오로지 인민들의 혁명적 의지만 유지한다면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얼마든지 성취 가능한 꿈이었다. 그에게 있어 공산주의와 혁명적 의지야 말로 중국이 다시 부활하고 강대국으로 서서 예전의 중화의 자존심을 다시 세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자 방법이었다. 단기간에 미국과 전 세계 패권을 다투는 초강대국으로 극적으로 발전한 소련이나 객관적인 전력상 압도적으로 강했던 국민당을 무찌른 가난하고 변변치 못한 게릴라 세력에 불과한 중국 공산당의 승리가 그의 생각이 옳다는 걸 현실 사례에서 증명하는 강력한 예시였다.



하지만 혁명가로서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 모택동이 통치가로서는 최악의 인물이었던 탓에 신생국중국인민공화국은 중화의 부흥은커녕 다시 한번 끔찍한 재난과 기나긴 낙후상태와 가난, 극심한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된다. 모택동의 의지주의와 반지성주의, 계급 투쟁과 영구적 혁명에 대한 낭만적 열정은 수십 년 간 중국과 중국인민들에게 치명적인 재난을 가져다 주었고 과거의 성공에만 집착하는 그의 권위가 이미 신격화 되어 그 누구도 도전하지 못하는 상황은 상황을 더욱더 악화시켰다. 농민들의 쟁기와 쇠그릇을 주물로 하여 농촌에 수 많은 소형 용광로를 만들어 철강생산을 획기적으로 늘여서 십 수년 내에 영국과 미국을 띄어 넘는 강대국이 되겠다는 대약진 운동의 발상은 모택동의 의지주의와 반지성주의가 중국에 얼마나 큰 재난을 초래했는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수천 만명이 기아와 폭력으로 희생당한 반우파 투쟁, 대약진 운동에 뒤이어 관료주의와 친자본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모택동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은 급기야 중국의 정상적인 정부 기능화 행정체계까지 붕괴시켰고 중국의 상황은 발전은커녕 그야말로 극빈적 무정부 상태의 참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당시 일본, 한국, 대만 등 자유진영에 속한 국가들이 미국의 지원과 각 국가별 내부 내부 노력이 결합되어 고도성장을 구가하며 경제적 번영의 시기에 도래하는 것과 마침 비교되어 중국의 낙후와 빈곤은 더욱더 두드러져 보였다. 거기다 이 시기 중국은 스탈린 사후 집권한 흐르쇼프의 소련과 이념적 지정학적 지리적 이유로 인하여 심각하게 대립하게 되고 급기야 대 소련 전쟁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자 중국 최고 지도부 내의 위기의식은 최고조로 달하게 된다. 이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중국은 미국, 일본 같은 자유진영초강대국과 그 동맹국 뿐 아니라 아니라 공산진영의 종주국이자 다른 초강대국인 소련까지 적대하며 대립하게 되는 절대절명의 안보적 위기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절대절명의 지정학적 안보적 위기상황에서 정말 오랜만에 혁명 전쟁 시기 자신 특유의 유연한 전술적 판단력을 발휘한 모택동은 자기 인생 최후의 국익적으로 유익한 외교 안보적 결단을 하게 된다. 바로 미국과 전격적인 관계 정상화를 통해 미국과 비공식 동맹을 맺고 동아사아 에서의 대소련 국제적 연합 전선을 구축하게 된 것이었다. 1972년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장관의 전격적인 중국 방문을 통해 이루어진 미국과의 대소련 비공식 동맹은 당시 중국 북방 지역에 가해지던 외교 안보적 압박을 크게 감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후 중국의 기적적인 경제성장과 산업화에도 결정적인 기반을 다지게 된다. 이 미중 관계 정상화 결단은 모택동 집권 이래 자신의 조국을 위해 한일 중 거의 유일하게 국익에 부합하는 잘한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이고 역사적인 정책 변경이었다. 또한 미중 관계 정상화는 중국 뿐 아니라 미국에게도 추후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침으로써 20세기 외교사에 대표적인 성과이자 윈윈 사례로 꼽히게 된다. 미중 관계 정상화 후 얼마 안되 26년 간 중국의 황제이자 살아있는 신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모택동은 결국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시대적 사명이자 시대정신이던 중국의 전면적 개혁개방이라는 역사적 과제는 오랜 기간 인내하고 기다려오다가 마침내 권력을 장악한 등소평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등소평이 집권 후 도시와 농촌 두 개 영역에서 동시에 추진한 시장경제 도입은 모택동이 죽기 전 결단한 미중관계 회복이 아니었다면 사실 그렇게 큰 탄력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미중관계 정상화를 통해 중국인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발달하고 발전한 서방 진영과 정상적으로 교류하고 무역 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마침내 만들게 되었고 이러한 고리를 통해 이루어진 투자와 기술 도입, 인재 유학, 최신 학문 교류를 통해 중국은 청조 멸망 후 70년 만에 마침내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전력 매진하는 첫걸음을 띄게 될 수 있었다. 쑨원도, 장개석도, 모택동 같은 중국 현대사의 거인들도 모두 실패한 현대 중국의 부국강병의 길을 드디어 등소평 때에 착수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1972년 베이징에서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하는 닉슨 대통령과 모택동. 훗날 데탕트라고 알려진 미중 관계정상화는 모택동 통치 기간 모택동이 한 일 중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국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외교적 결단이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당시 등소평이 추진한 개혁개방은 미중관계 정상화를 전제하지 않으면 실행 불가능 했을 정도로 대미관계는 중국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중국은 미국과의 비공식 동맹으로 소련의 안보 위협을 덜며 국가 대부분의 자원을 경제 발전 부문에 배치할 수 있었고 미국 등 서방으로부터 받은 투자로 인하여 생산한 물품을 다시 서방에 수출함으로써 국가 발전의 밑천이 된 소중한 외화를 축적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서방으로부터 받은 투자와 활발한 인적 교류를 통해 서방의 앞선 학문과 기술 수준을 흡수 하여 국가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중국은 이러한 무수한 이득을 얻는 대신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도와 대소련 동맹의 한 축을 담당하며 모택동 시절부터 중국 공산당의 공식 외교 노선인 공산주의 세계확산이라는 오래된 노선을 공식 폐기하였고 결정적으로 외교적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 패권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수그림으로써 당분간 중화의 부흥이라는 1세기 넘은 민족적 염원은 잠시 마음 한 켠 간직한 체 보류하게 된다. 한편에서 미국은 중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동아시아에서 냉전을 사실상 끝냄과 동시에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대소련 전선을 구축하였고 이는 추후 미국의 최종적 냉전 승리의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또한 중국을 최종적으로 서방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이후 3~40년 간 이어진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의 기틀을 마련하고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교묘한 라이벌 의식을 이용한 등거리 외교를 통해 이 지역에서 흔들림 없는 미국의 지위를 공고화게 만든다. 197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과 함께 본격화한 미중 협력시대를 통해 중국은 이후 약 30년 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와 가장 빠른 속도로 산업화를 성취하게 된다. 그리고 미국은 10여년 후 소련 연방의 해체와 함께 냉전의 최종 승리자로써 전 세계적 유일 패권을 달성하게 된다.



그 후 2010년대 까지 약 30여년 간 미중 협력시대는 그럭저럭 잘 굴러갔으며 그 동안 동아시아는 미국적 질서 속에 경제적 번영과 상대적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 사이 비록 냉전이 종식되며 미중 간의 비공식적 안보 군사 동맹은 종료되었지만 중국은 미국의 배려로 WTO 등에 가입하며 국제적 무역 질서 속에 더욱 깊이 편입되며 고도성장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미중간에는 천안문 사태에서 촉발된 중국 내 인권 문제, 티베트 독립 문제, 대만 해협 갈등 문제 등이 간헐적으로 불거졌지만 중국은 중국 입장에서 주권 사항인 이러한 국내 이슈들에 대해 미국의 적극적인 공세와 비판에 대해 대부분 수세적으로 반응했을 뿐 미국과의 전면적 갈등과 대립은 애써 회피하였다. 등소평의 후계자들은 등소평이 내세운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외교 방침에 철저히 따르며 갈등을 애써 피하고 조용히 힘을 기르는데 온 힘을 쏟았다. 냉전 종식 후 미국의 세기가 되고 유일 패권국인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명목으로 불량국가를 상대로 일방적인 전쟁까지 벌이는 와중에서도 중국은 튀지 않고 참을성 있게 주변국에 평화로운 이미지를 최대한 어필하며 묵묵히 경제성장과 외환보유고 축적에 매진하게 된다. 중국의 조용한 부상으로 서방에서 중국의 부상이 결국 난폭한 패권 추구 국가로 연결될 것이라는 경계와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중국은 항상 기회 있을 때 마다 자신들은 추후에도 절대 패권국가를 추구하지 않으며 중국의 부상은 오로지 평화와 번영만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식으로 해명하며 서방일각에서 제기되는 중국 위협론을 불식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911테러 이후 미국이 온 관심을 중동의 불량국가에 쏟는 동안 중국은 꾸준히 성장하였고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자 드디어 그 간의 오래 지속되었던 상황이 일변하게 된다.



2010년 중국은 드디어 공식적으로 일본을 추월하고 GDP 세계 2위 국가로 오르게 된다.



미국에서 2008년 터진 세계 금융위기는 이라크 전쟁과 더불어 세계 유일 패권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된다. 반대로 중국은 위기 상황을 맞이하여 그 동안 비축한 재정여력을 적극 활용하여 경기 부양을 극적으로 성공시켜 세계 경제의 구세주로 떠오르게 된다. 1997년 당시 중국 주룽지 총리가 위안화 평가 절하를 끝내 저지함으로써 얻는 명성에다 이번 2007년 금융위기 당시 세계적 경기 침체 탈출에 큰 기여를 한 중국 정부의 과감한 재정정책과 경기부양 정책이 더해져 중국은 큰 자신감과 함께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 대한 그 동안 우러러 보던 인식을 수정하게 된다. 그리고 2년 후 2010년 중국은 공식적으로 일본을 누르고 GDP 세계 2위 국가에 공식적으로 등극하게 됨으로써 드디어 흔히 말하는 G2 시대를 열게 된다. 강대국으로써 당연히 누려야 할 명망과 권위에 목말랐던 중국의 중화 민족주의는 이 때를 기점으로 드디어 폭발하게 된다. 중국 거주 일본인들이 집에서 못나오고 일본 공장들이 피해를 입으며 도요타 자동차가 길거리에서 파손되는 사태까지 초래한 반일 과격 시위가 이 때를 기점으로 분출하고 2008년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 때마다 중국인들은 세계 각지에서 그 특유의 호전성과 과격성을 보여 주게 된다. 안 그래도 공산당 정권의 민주적 합법성 결여라는 아킬레스 건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당국은 더 이상 자국민들의 민족주의적 열정을 억누를 수 만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거기에 더해 세계 2위 경제 대국이라는 자부심 까지 더해 이제 중국은 더 이상 조용하고 평화로운 부상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거의 10년간을 중동에만 신경 쓰고 있다가 갑자기 터진 금융위기를 극복하느라 계속 정신 없었던 미국은 금융위기가 어느 정도 지나가자 문득 태평양 맞은편에서 일본을 누르고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우뚝 썬 세계 1위 외환 보유국이자 세계 1위 인구 대국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처든 체 째려보고 있는 걸 갑자기 깨닫게 된다. 이대로 방치해서는 더 이상 안되겠다고 느낀 오바마 행정부는 드디어 동아시아에서의 미국 패권 유지와 대중국 포위 견제 전략인 아시아 회귀 전략(Pivot to Asia)을 공식 외교 전략으로 삼아 야심 차게 추진하게 되고 오바마 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그런 미국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가시화 될 즈음 해서 중국에서는 모택동 이후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야심만만하고 자신에 찬 시진핑이 중국 국가 주석 자리에 공식 취임하며 취임사에서"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을 자신의 국정목표로 대내외에 공식 천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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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목요연하고 아주 알차네요. 


좋은 공부가 되었기에 많은 분들 보시라고 공유합니다.  

출처 http://blog.naver.com/aahbee/2208386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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