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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사법체계.jpg+txt
게시물ID : history_269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여기는추워요
추천 : 12
조회수 : 2934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6/10/14 02:4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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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에 대해서는 어떤게 제일 확실한 효과를 보일까요?
매질? 사형? 감금?

사회와 격리시키는 구금과 돈으로 배상하는 벌금형이 일반적이였습니다만,
중세시대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줬습니다. 수치스럽게 만드는거죠.


P5131747.jpg
이 통은 술을먹고 행패부리는 사람에게 씌웠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쓴 사람을 발로차고 놀리고 막 그랬죠.
칼꽂으면 날아가는 해적 장난감이 생각나는군요.


DSCN4981.jpg
왼쪽부터.. 가면에 혀를 단겁니다. 수다스러운 여자에게 씌운 형벌이라는군요.
           가운데 또한 그러한 명예형의 일종인데..독일어인가..
           마지막은 발을 묶어둔겁니다. 옴짝달싹 못하고 조롱거리가 되었죠.

단순히 매질하는 것 보다는 효율적이였던거 같습니다.
생각보다 꽤 오래 유지된 형벌입니다. 그만큼 나름 명예를 중시했던 사회 같군요.
잡힌채로 똥오줌 맞으면서 조롱거리 되는게 좋을리도 없고...


저 시절엔 경비대가 순찰을 겸하면서 저런 난동행패자들을 잡아 가두고
언제 있을지 모르지만(당시 재판을 받는건 순전히 빽 아니면 운이였습니다. 공판 일자가 지멋대로거든요.) 재판을 받고난 뒤
저런 형벌을 받았죠. 재판관은 관할 영주가 하는경우도 있지만 국왕이 자신의 땅을 제대로 다스리기 위해
순회 재판관을 두기도 했습니다. 재판관이 안오면 죄수들은 하렴없이 갇혀있는거죠..

주로 현행범들이 잡혀갔고 사후 범죄는 피해자가 직접 불만을 재판장에게 호소해야했습니다.
물론, 피해자의 신분에 따라 얼만큼 잘 먹히는지 차이가 있습니다.
이후에 일부 법원 관계자(순회재판관,종교재판관 등등..)와 증인, 증언에 의해 형량이 결정됐습니다.
그래도 이때는 나름 인도적이였습니다.

후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재판이 속출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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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 당시, 고발 절차는 굉장히 간단했습니다.
손가락 하나면 가능했죠.
어떤 소년은 자신이 신의 사자이며 마녀와 악마를 구별하는 눈을 가졌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오쩌둥급 손가락 파워를 지닌 소년은 1년에 1300명을 고발하죠.
그 외에도 가난하거나, 종기가 있거나, 고름이 있거나 등등 여러 이유로 마녀고발을 당합니다.
미녀의 과부들도 종종 당했는데, 지역 유지가 어떻게 해보려다가 안되면
'저 여자가 남자도 없이 저렇게 오래 사는건 악마 인큐비와 붙어먹기 때문이다' 라고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23910676.1.jpg
아실분들은 아실 곽백수 작가의 트라우마 한 장면..


고발 다음은 수사단계죠. 그때 수사는 어땟을까요?


어떤 노부는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고 재판관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증명으로 수사관들이 온몸을 바늘로 찔렀죠, 마녀는 바늘로 찔러도 피가 안나온다고 했습니다.
노파의 몸 오만군데를 다 찔렀지만 한군데, 병변이 있던곳은 피가 안나왔고 결국 마녀로 화형당했습니다.

네. 수사방법이 독특하죠? 당시엔 수사법이 발달되지 않아서 현행범이 아니면 증언뿐이였습니다.
지금이야 증거 제일주의지만 그당시엔 그런 감식도구가 있는것도 아니니까요.
그럼 증언뿐인데..증언에는 자백도 있죠.

일찍이 성 아우구스투스는 '고문을 통해 죄인으로부터 참된 자백을 얻는것은 바보같은 생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384년 로마의 교회회의에서 고문자백을 금지시켰습니다. 꽤 이성적이죠.
하지만 이는 1400년대 마녀사냥때 교회에 의해 다시 부활합니다.
참 역사의 아이러니 아닐수 없습니다. 로마시대때 고문받은 크리스찬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대부분의 사회가 규문주의를 소송절차를 채택했고, 이 소송법 아래에서 고문이 합법화 되었습니다.
저게 뭐냐면, 수사관이 기소까지하고 고문까지 한번에 일사천리로 처리하는 소송절차입니다.

독일의 로덴부르크에 가면 범죄박물관이 있습니다.
사실 범죄박물관이라기 보다는 고문기구 박물관이라고 해도 괜찮을 정도입니다.
당시에 썻던 각종 고문기구들이 있죠. 친절하게 옆에 그림도 있어서 독일어 몰라도 잘 압니다.

P4147528.jpg

그 유명한 아이언 메이든도 볼 수 있죠.
아이언 메이든은 처형도구가 아니고 고문도구의 일종이였습니다.
빨리 안불면 이대로 닫아버린다고 협박하는 용도였습니다..만은 진짜 닫는 일도 왕왕 있었습니다.
가시가 인간의 급소에 팍팍 꽂히는 형태죠.

이러한 고문도구들을 이겨내지 못하면 강요된 자백을 하고 그대로 재판에 회부됩니다.
마녀면은 바로 화형이죠. 

그럼 고문을 이겨내고 끝까지 항변하면 어떻게 될까요?
종교재판관이 아닌 일반 재판관들도, 하늘의 뜻에 맡겼습니다.

일명 '시죄법'(신명재판) 이라고 하는것을 진행했죠.
물론 이건 마녀사냥 이전에도 존재했습니다. 다만 중세도 아주 막장은 아니여서 빠르게 사라졌습니다만
종교갈등이 심화되면서 재 등장한거죠.
뱀발로 시죄법은 도시,농촌 안가리고 사용됐으며 민사,형사 안가렸고
사제들은 '신께 맹세코 안했습니다'라고 퉁치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 당시 기준으로도 어이없었기에 금방 사라졌습니다.

440px-Water-ordeal.jpg
마녀를 물속에 담굽니다. 진짜 마녀면 그래도 살아있을것이고.
아니면 죽는거죠.

네. 각종 바리에이션이 많습니다. 절벽에서 떨어뜨리는것도 있고
불태우는것도 있고, 위에서 말한 마구찌르기도 있고, 몬티파이슨에 나오는 몸무게 측정도 있었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기록에 의하면 32kg의 성인 마녀가 있었다는군요.

이런 혼돈의 시기를 겪고 난 다음. 나름의 법시스템이 정비됩니다.
그래도 시죄법은 100년이나 이어나갔죠.

고전범죄학이 태동하기 전, 그래도 형벌보단 예방에 힘쓰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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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의 절반은 장님으로 보낸것과 다름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시대의 밤은 범죄에 취약하기 짝이없었습니다. 
뭐 그래서 불꺼놓고 할게없어서 인구수 증대에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만..
여튼 요즘처럼 가로등이 있는것도 아니고,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이면 니꺼내꺼가 됐죠

이에 프랑스 법학자 장 카르보니에는 밤이 법의 통치를 낳았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밤은 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법의 공백'이였으니까요.
당시의 풍토 또한 밤의 시간대에 무언가를 하는것은 불완전하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지방당국의 재판관이나 법정은 일을 저녁이 되기전에 서둘러 마쳤지요
하지만, 그대로 계속 놀려둘수도 없는 일. 야간순찰대를 조직해서 운용하기 시작합니다.

22307-3.png
렘브란트, <야간순찰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의 중대)>, 1642년
 
이들의 권위는 꽤 막강했습니다. 누군가는 밤의 행정관장이라고 비꼬기도 했지요.
낮의 순찰대원들은 체포권 뿐이였지만 야간순찰대원들은 광범위한 재량권을 가졌습니다.
아마 즉결 심판권도 있었던 모양이죠?

순찰대가 생기자 약식 재판소도 만들어 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위의 밤의 불완전성에 대한 믿음도 더해져선 밤에 저지른 죄는 꽤 엄중하게 다뤄졌지요.
같은 폭력사건도 단지 밤에 일어났다는 이유로 형량이 두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중세사람들이 그렇게 무지몽매하고 하늘의 권위에만 빌었을까요?
법리학적 증거는 없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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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특히 암흑시대라고 불린 시기의 대표적인 편견은
교회가 과학 발전의 앞길을 막았다는겁니다.
뭐 일부 그렇기도 했지만 아주 완전한 소리는 아닙니다.
천동설, 지동설 논쟁때의 갈릴레이 갈릴레오도 하~도 사람들 붙잡고 키배떠서 아니꼽게 봐가지고 책을 꼬투리 삼아 재판걸린거지
신성모독의 이유로 잡힌게 아니였습니다.

여튼, 1200년대에 교회 주도하에 법의학 중 하나인 부검이 재판에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1209년도에 첫번째 부검 사용 기록 입니다.

having surprised a criminal in the act of stealing religious articles from the abbey chapel, struck the would-be felon with a heavy farm implement. The thief fled, despite his wounds, but was finally overtaken by parishioners who dispatched him with swords and clubs. The chaplain, fearing that the blow he had struck might have caused the death of the culprit even if the additional injuries had not been inflicted, related his story to the abbot.

그러니까.. 한 교구에서 도둑이 절도행위를 하다가 목사님에게 정의의 몽둥이 한대 맞고 도망쳤습니다.
그 이후에 사람들이 추격해서 뚜까팼는데 죽어버렸습니다. 목사는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하여 두려운 나머지 범행을 고백했죠.

이후 재판에서 전문의사의 부검이 있었고, 목사가 막타친게 아니라고 해서 그는 살인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죠.

물론 이러한 의학과 법률 체계는 로마시대에도 있었습니다만 중세에 적용된건 조금 지나서입니다.
왜냐면 11세기 레콩키스타들이 중동에 나갈무렵, 이슬람 학자들과의 접촉으로 로마시대 문서들이 나온거거든요 (...)

그러한 법과 의학에 있어 선두를 달린 곳이 파리의 볼로냐 대학이였습니다.
그중에서 로마시대 히포크라테스 다음가는 의학자 갈레노스의 문서가 중동에서 발견되어서 제일 많이 연구했습니다.

Galen_detail.jpg

갈레노스.

이후 부검연구는 활발해져서 볼로냐는 나름 명문이 됐습니다.
시체를 도굴해서 시험하다가 사망한 학생을 완벽하게 부검해서 유명해진 여 학자도 있었죠.

She became most valuable to Mondino because she would cleanse most skilfully the smallest vein, the arteries, all ramifications of the vessels, without lacerating or dividing them, and to prepare them for demonstration she would fill them with various coloured liquids, which, after having been driven into the vessels, would harden without destroying the vessels. Again, she would paint these same vessels to their minute branches so perfectly and color them so naturally that, added to the wonderful explanations and teachings of the master, they brought him great fame and credit.

그녀가 엄청나게 부검을 잘했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성 역할에 대한 반기로써도 꽤 멋지죠.

여튼 볼로냐는 이렇게 부검의학의 '메카'가 되었고 법정에 자주 쓰였습니다.
만은, 이런 의학도를 불러서 부검의뢰까지 할정도면 어느정도의 돈과 힘이 필요한지는 아실거라 믿습니다.

일반 농민들은 피해당하면 지역 귀족에게 항의할 권리는 있었습니다.
경찰서라고 할만한 기관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가족,친구,촌장,기사,또 다른 귀족에게 잡아달라고 엄청 항의를 하면 수사가 시작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증명방법은 알아서 스스로 척척척이였지요. 지금도 힘든데 그때라고야 뭐 별수 있겠습니까.

영국같은 경우에는 배심원 제도를 두었는데, 현대의 배심원 제도랑은 다릅니다.
그냥 배심원으로 발탁되면 자기가 아는얘기를 재판장 앞에서 말하는것 뿐이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소문에 대한 얘기 집대성이였지요.
이를테면 '저 농부는 그날 밤 집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요.' 같은것
얼마나 취약한 일인지는 보이실겁니다...

덴마크의 경우는 조금 더 좋았습니다.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왕은 지방 영주에게 벌금을 책정할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영주는 살인범을 찾으려고 꽤 적극적이였습니다.
절도사건의 경우, 장물을 먼저 수색해야 했습니다.
만약, 그래도 안나오면 왕을 데리고 마을 전체를 수색할 권한이 주어집니다.
물론 유력 용의자가 있다면 맹세 후에 유죄라고 고발할 수도 있었죠.
베오울프에서도 나오는 내용이랍니다.
이게 Thing 의 유래였다..라는데 잘 모르곘네요.
thing etymology. Most amazingly, as counter intuitive I just found it, the derivation happened between Latin and French too : thing|causa/topic-of-matter -> object|ch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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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1

이단심문관에 의한 종교재판은 사실상 사형선고입니다.

그들의 수사방법은 매우 단순했는데, 소문을 듣고 불러서 증언을 듣습니다.

석연찮으면 그자리에서 '수사'개시죠.


사족 2

미해결 된 살인사건이 꽤 많았습니다.

왜냐면 항의할 대상자가 죽었으니까요. 살인자는 그냥 조용히 살거나 도망치면 됐습니다.

다만 사건이 일어난건 세금 걷는데 비는걸 보고 알았다고..




출처 책 :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https://www.reddit.com/r/AskHistorians/comments/2wyw0x/police_work_and_criminal_investigations_in_the/
Ynez Viole O’Neill, Innocent III and the Evolution of Anatomy, Medical History 20, no. 4 (1976): 429–433.
Was the Jury Ever Self-Informing? - Daniel M. Klerman - USC Gould School of 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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