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이 안 읽힌다. 찬 바람을 맞으며 문득 담배 한 대를 물고 과거를 회상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 보겠다며 많이 돌아다녔지만, 결국에는 목적지가 있었던 것 같다.
실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내게 가장 멋있어 보이는 사람은 문구점 주인이었다.
문구점 주인 아저씨는 넉살이 좋은 분이었다.
내가 백원짜리 다섯개를 들고 가면, 쥐포 두 개에 소세지 세개 그리고 서비스로 만두까지 하나 얹어주곤 했다.
그래서 내가 되고싶은 꿈은 문방구 주인이었다. 심지어 오락기도 가지고 있어서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보이는 일이었다.
그 뒤에 기억나는 건 2학년 때다. 위인전에서 골라집은 사람들 중 누가 제일 좋냐고 물어보면 뭣도 몰랐지만
에디슨이요, 장영실이요 했던기억이 난다.
그냥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멋있어 보였나보다. (그때 슈바이처를 좋아했더라면...)
어떤 일로 생활기록부를 떼서 보았는데, 그 때부터는 쭉 과학자로 되어 있었다.
과학이 공학이 무엇인지도,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배우는 지도 모르는 채로.
책보다는 게임을 좋아하던 평범한 시골 어린이였지만, 만화로 된 과학책을 좋다고 몇번이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에 올라가서, 친하던 형이 과학고등학교라는 곳을 가게 됐다고 했다.
과학이 들어가고 뭔가 공부 잘 하던 형이 가는 곳이라 멋있어 보였다. 그제서야 공부를 한번 해 보고자 마음먹었고, 뭐 결국 낙방했다.
그러면서 과학과 공학이 좀 다른 것이고, 사실 나는 공학자가 되고싶은 거로구나, 깨달았다.
고등학교 들어서서는, 문/이과의 선택의 길이 있었다.
뭘 하지? 사회에서 알아준다는 변호사? 의사? 이런 직업들도 있는데 좀 고민을 해 봐야겠다. 그냥 막연히 생각했다.
암만 생각해봐도 재밌어보이지가 않았다. 글을 달달달 외우는 것도 싫고, 뭔가 명쾌해보이고 쭉 멋있어보였던 이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3년 후 생물학 교재를 달달달 외우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는 꽤나 즐겁게 공부를 했다. 내가 지금 배우는 것들을 계속 배우는 인생을 살게 될 것 같았다.
늦은 밤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힘든 고등학교 생활이지만, 내가 하고싶어 하는 것과 다른 것이라는 괴리감이 없었다.
그리고 과학고에 간 친구들이 한다는 연구를 흉내내서 방학에는 이런저런 실험들을 선생님 도움으로 하기도 했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순탄하게만 흘러가지는 않더라.
고3이 되면서 성적은 때로는 올라가기도, 내려오기도 했다. 이공계 위기설이 한창 터지던 시기였고, 선생님들은 그냥 의대 가는것도 괜찮다고,
주위 친구들도 성적이 좀 되면 의대를 가려고 했다. 나도 그렇게 확신이 없었는지, 재밌어 보이는 공부는 조금이라도 더 높은 대학에 가려고
발버둥치는 일이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전전긍긍하며 하는 공부가 되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대학생이 되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학부과정을 마치기까지 꽤나 오래 걸렸다.
군대에 가기 전 까지는 고민이 아주 많았다.
석사, 박사, 그리고 포닥을 밟아 공학자가 되기까지의 길을 내가 정말 원하는 길일까?
열심히 공부했지만, 사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학부 나부랭이인 것 같고, 뭘 하면 좋을까?
대학에 오기 전까지 있던 확신들이 점점 더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군대에 다녀오고서, 졸업을 슬슬 준비할 때가 됐다.
졸업할 때가 되니 많은 친구들은 의전으로, 치전으로, 약대로 사라져갔다.
몇몇의 친구들과 함께 나는 학교에 남아 계속 공학자의 길을 걷기로 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담배를 한대 더 태웠다.
분명 어렸을 때 만큼의 자신감은 없다. 노벨상의 포부도, 에디슨이 되겠다는 꿈은 없다.
마찬가지로 공학자의 길에 놓인 많은 어려움들과, 환상과 다른 학계의 현실, 현실적인 제약들도 잘 알게 되었다.
대신에, 이것이 내가 하고싶은 일이라는 생각, 그리고 내가 노력해볼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있다.
내 연구를 할 수 있는 한명의 공학자, 그것으로 넓은 세상에 작은 주춧돌 한 조각을 놓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있다. 그건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노력하면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렸을때부터 나를 돌이켜 보면서, 계속 이리저리로 빠지기도, 방황하기도 했지만, 그 작은 벡터들의 합이 결국
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생각을과 방황 속에서도 실은 내가 바라는 이상이 있었다.
실험이 잘 진행되지 않을때도, 논문이 잘 안읽히는 날에는 한번씩 생각해 본다.
아직 홀로 설 수 없는 한명의 학생이지만, 계속 작은 이상을 지키며, 저 벡터합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 볼 생각이다.
부제: 논문이 안 읽히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