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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로 떠나는 여정이 아니라 현재의 과제로 돌아오는 귀환입니다꿈꾸는 백마강
'부여(扶餘)에는 상상력을 가지고 오세요.'
나는 당신의 전화를 받고 빈약한 나의 상상력을 내심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비내리는 구드래 나루에 서자 상상력을 가지고 오라던 당신의 주문은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비에 젖은 낙화암(落花岩)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백제의 역사가 선연히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다른 왕조의 수도와 달리 곳곳에 패망의 상흔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부소산성에서는 아무리 상상력이 빈약한 목석이라도 가슴속으로 흘러드는 그 애절한 사류(史類)에 젖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득 역사란 과거로 떠나는 여정이 아니라 현재의 과제로 돌아오는 '귀환'(歸還)이라는 당신의 글귀가 떠오르면서 당신이 주문한 상상력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주벌판의 광활한 부여땅을 잃고 쫓기고 쫓기며 이어져온 유민(流民)의 나라, 백제의 600년은 과연 우리에게 누구의 운명을 이야기해주고 있는가를 상상하라는 주문이었는 지도 모릅니다.
고구려ㆍ신라ㆍ백제의 3국 가운데 유일하게 천손시조(天孫始祖)를 갖지 못하고 서자(庶子)를 시조로 한 나라가 백제입니다. 서자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동명왕의 원자(元子)에게 쫓겨나 한강가의 위례성에 나라를 세울 수 밖에 없었고 그곳마저 지키지 못하고 다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고 마지막으로 이곳 사비(泗批)로 내려와 재기를 다짐하지만 결국 나당(羅唐)연합군의 침공으로 쓰러져갑니다.
백마강에는 그 마지막 123년의 세월이 말없는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습니다.
유람선이라는 마뜩찮은 이름의 뱃전에 앉아 다가간 백마강과 낙화암은 그 비극의 절정을 지금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당신은 3천궁녀는 궁녀가 아니라 대부분 쫓기고 쫓기던 병사와 민초(民草)들이라 하였습니다. 낙화암의 3천궁녀 전설은 애절할 정도의 아름다운 전설이지만 그것은 패배한 의자왕(義慈王)의 사치와 방탕을 조명하기 위한 교묘한 각색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진에 앞서 자기 손으로 처자식 목을 벤 계백(階伯)방군의 비장하지만 잔혹한 결단을 겨냥한 비난에 대해서도 잔혹하기는 오히려 어린 관창(官昌)을 희생의 제물로 삼아 신라군 사기를 돋운 김유신(金庾信)의 책략이 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제가 남긴 성(城)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방어를 위한 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백제고분벽화의 특징 역시 온화하고 부드러운 선에 있다는 당신의 지적은 백제인들이 지켜온 삶의 원리가 무엇이었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이러한 백제의 성과 벽화는 분명 평화로운 삶을 갈구하던 가난한 민초들의 소망을 상징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격정의 땅이었습니다.강력한 왕권을 수립하기 위해 6좌평(佐平)으로 대표되는 지배귀족세력을 제거하고 힘에 겨운 토목공사를 일으킨 권위의 땅이었으며 고구려ㆍ신라와 각축하면서 빼앗기고 빼앗기를 거듭하던 배반과 보복, 승리와 패배의 악순환으로 얼룩진 불행한 시절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쫓기고 쫓기다 최후의 지점인 절벽에서 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땅이며, 자기 손으로 처자식의 목을 베어야 했던 비극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 스산한 고도(古都)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고작 비극을 미화하는 감상(感想)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감상은 표면에 대한 감성(感性)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극미(悲劇美)의 조명이 아니라 승리든 패배든 그 이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더 큰 비극의 조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삼국의 쟁패와 통일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승자는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챙긴 당나라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거나 포로로 잡혀가고 광활한 영토를 잃어버린 거대한 상실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지배자로 들어앉은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혈흔이 채 마르지도 않은 창검을 들고 또다시 전장을 달려야 했던 민초들의 비극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어리석은 민족사의 복판에서 백제의 패망이 조명되고 민족의 비극이 반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모한 격정이 낳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어리석은 역사를 뉘우치지 않는 한 백마강의 비극은 더이상 과거의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백제의 역사는 엊그제 그끄저께에 있기'때문입니다.
지금도 8월이 되면 유왕산(留王山)에서는 제를 올려 당나라로 압송되던 왕과 1만수천여 포로들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백제땅에서 파내야 할 진정한 유적이며 교훈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비내리는 백마강을 오르내리며 당신이 가지고 오라던 상상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남아있는 유적들을 조립해 과거를 복원하는 상상력이 아니라 과거의 모습으로부터 현재를 직시하고 다시 현재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를 향해 우리 시야를 열어나가는 상상력임을 깨닫게 됩니다.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 물길도 겉으로 보기에는 잠든 듯 무심하지만 말없는 강물을 따라 흘러가보면 수많은 민초들의 한(恨)을 알알이 작은 금모래로 부수어 굽이굽이 백사장에 갈무리해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모든 쇠붙이는 가라'는 시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백마강에 누워있는 백마를 그려 보냅니다.
언젠가 서러운 강물을 박차고 일어나 평화로운 광야를 달려올 날을 목놓아 기다리는 당신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쫓기다 최후의 절벽에서 꽃이 된 산유화(山有花)의 영혼을 그려보냅니다.
-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