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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습격
삶에는 기습이 있다. 한창 잘 돼가던 작업파일이 의문의 오류로 모두 사라진다든지, 새벽까지만 해도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의 부음을 맞닥뜨린다든지. 화창한 봄볕에 널어둔 빨래를 적시는 여우비나, 혹은 갓 대학 새내기가 된 청춘이 받아든 입영통지서처럼.
그래. 지금 내가 받아든 것도 일종의 기습이다. 그것도 아주 터무니없고 뜬금없는.
한 번 생각해볼 것. 내손을 떠나보낸 지 거의 10년이 다 돼가는, 옛 애인과 함께 맞췄던 2G핸드폰이 수취인불명이란 이름의 소포로, 그것도 일 년에 몇 번 없는 황금연휴가 다 끝나가는 시기에 때맞춰 회귀하는 것이 과연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에 대하여.
낯선 나의 것과의 조우. 이는 곧 옛 추억에 빠져듦을 의미한다. 그때로 돌아가고파 하는 실현 불가능한 욕망은 순식간에 뜨겁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고, 그것과 마주하는 순간 떠오르는 기억들을 되새기며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저울질하기 시작하는 못된 습관을, 나는 평생 경계해왔다. 하지만 때가 되면 어김없이 깨져버리는 스스로와의 약속.
경유가 어찌됐든 전화기는 액정도 큰 흠집 없이 깨끗하고 버튼도 잘 눌렸다. 배터리팩에 싸구려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걸 감안한다면 겉으로 보이는 상태는 대체로 양호했다.
‘이게 얼마 만에 만져보는 폴더폰이지?’
…… 뭐라고? 대관절,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감상평이다. 근 10년 만에 재회한 ‘내 것’에 대한 감상평이 고작 이런 거라니.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드는, 내 자신의 수준에 대해 의심함직한 생각. 좀 더 근사한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뒤늦은 후회가 잇따른다.
흠. 그래도 생각보다 멀쩡한데? 나는 서랍장을 열었다. 나름의 역사랍시고 마구 처박아둔 잡동사니들. 서랍 안에는 약 2년 단위로 줄줄이 은퇴한 지난 기수의 전화기와 충전기들이 어지럽게 뒤섞여있었다. 물론 그 속에는 이 녀석의 충전기도 들어있었고.
평생 쓸모없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닥 고치려 하지는 않았던, 나의 괴팍한 습관 덕분에 10년 만에 포식을 한 전화기는 아무런 문제없이 잘 작동했다. 그럴 수밖에. 이 녀석은 개통한지 반년도 되지 않아 내손을 떠났던 놈이니까.
스마트폰에 익숙해진 손 덕분에 나는 마치 처음 손에 쥔 기계를 만져보는 것처럼 한참을 서서 전화기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댔다. 나는 잠시 동안 회상에 잠겨 촌스럽기 짝이 없는 매뉴얼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전화번호부를 눌렀다. 그곳엔 연락이 뜸해진, 혹은 끊긴 지인들의 전화번호가 한가득이었다. 옛 친구들. 예전에 몸담고 있었던 회사의 동료들과, 지금은 사이가 소원해진 지인들. 내 기억에서 조차 사라져가는 이름들을, 녀석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10년이라는 세월동안 고스란히 지켜내고 있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이름들은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듯 했다.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리며 목도하게 되는 희미한 기억속의 이름들을 읽어 내려가며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불현듯 심한 현기증이 일었다. 한 이름이 눈에 들어와, 갑자기 위장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한 몸이 균형을 잃은 채 비틀거렸다. 빌어먹을. 나는 경솔해빠진 내 행동을 후회하며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애썼다. 기억의 태엽을 위태롭게 고정시키고 있던 망각이란 이름의 사슬은 힘없이 끊어져버렸다.
나의 기억회로 어딘가에 정지해있던 그녀는 열자리 숫자로 말미암아 다시 째깍째깍 움직이기 시작했다.
변기통을 부여잡고 토악질을 해댄다. 우웩! 오전 내내 건조했던 입속이 금세 시고 비린 위산과 음식물 찌꺼기로 흥건해진다. 망할.
‘장난치고는 너무 과한데.’
위산으로 범벅이 된 속이 메스껍다. 찔끔 새어나온 눈물을 슥 훔치곤 입안에 남은 찌꺼기를 모두 뱉어냈다. 토사물에는 핏덩어리마저 섞여있었다.
세면대를 부여잡고 거울을 바라본다. 눈이 붉다. 눈물로 퉁퉁 부은 두 눈은 거울 너머에 서있는 자아를 노려본다. 단 몇 분 만에 핼쑥해져서 더할 나위 없이 초라해 보이는 남자. 그게 나다. 계란 한판을 채운 지 오래임에도 이미 한 번 겪은 사실에 대해 태연히 넘기는 법이 없는…….
10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나를 덮친 기습은 잔악하고 거칠 것 없이 나의 마음을 발겨버렸다. 그 수많은 지인들과 소원해짐에도 태연하게 꾸역꾸역 살아가던 사람이, 고작 한 사람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아니 그보다는 비열하달까. 모든 사람들을 동일한 무게로 내 가슴속에 담아두지 못했다는 반증이니까.
일단 세수를 말끔히 하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본다. 내게 원한을 가진, 이렇게 지독한 짓을 저지를 만큼 원수를 진 사람이 과연 내 인생에 있었던가 하고 자문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사람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나는 법 없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착한 인간은 아닐지라도, 법치국가의 산하에서 만큼은 모범시민이다. 그래. 적어도 스스로 돌이켜봤을 때 만큼은…….
‘어쩌면 그저 우연일지도 모르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녀의 이름을 목도한 후, 머릿속에 모락모락 피어난 과대망상일지도 모른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면…… 전화기는 단순히, 그냥 내게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던 것일 수도 있다. 발신자를 찾아볼 필요도 없이, 그냥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인생의 흐름 속에서 아주 낮은 확률로 발생하는 특별한 사건. 다만 맞닥뜨릴 가능성은 존재할 정도의. 그런 사건의 연유에 대해서는 굳이 따지고 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라고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음. 이제 뭘 하지? 글쎄. 오늘은 아무 약속도 없는 주말이라서 그닥 할 일은 없는걸…… 일단 침대 위에 툭 던져놨던 휴대전화기를 닫았다. 그리고는 침묵. 숨을 가다듬으며 다시 응시.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맥박이 점점 빨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호흡마저 덩달아 가빠지는 것도. 손을 가슴에 얹고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심호흡을 시도해본다. 아주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끝내는 후회할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저지르고 만다. 그래. 거의 항상 그래왔다. 나란 놈은. 다 말라비틀어진 입속에서 마른 침을 삼키려 애써본다. 하지만 이윽고,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가 난 후……”
나는 피식 웃는다. 그래.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 않은가. 통신사와 계약이 끊긴지 10년이 다 된 전화기로, 그것도 말소되지 않은 것이 이상한 열자리 전화번호로 전화를 건다는 것은.
이것은 꿈이다. 그것도 지독하고도 악랄한 악몽이다. 이곳은 상식이란 어휘가 실재하는 세계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곳이다. 야속하게도, 자각몽이라는 낱말은 이 뒤늦은 시간에서야 떠오른다. 망할, 망할, 망할!
나는 이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창가로 다가가 블라인드를 내리고 불을 끈다. 암전. 이제 내 인생에서 짤막한 판타지를 겪게 해준 이 막은 끝이 난다. 나는 이불속에 몸을 밀어 넣고 안도와 아쉬움이 마구 뒤섞인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운다.
#2. 꿈속에서
나는 방안을 사정없이 울려대는 소음 때문에 잠에서 깨버린다. 벨소리가 미친 듯이 나를 깨우려들고 있었다. 감긴 눈마저 뜨고 싶지는 않아, 베개에 얼굴을 더 파묻는다. 오늘은 쉬는 날이란 말이야. 이런 날 만큼은 날 좀 내버려둬!
하지만 차츰, 나를 깨우는 소리의 낯섦을 자각한다. 낯선 벨소리로 말미암아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이건 내가 언젠가 들었던 소리. 나는 소리의 진원을 알아내려 스르르 눈을 뜬다. 아직도 꿈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걸까. 그 소리는 분명히 나의 오래된 전화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화기를 집어든 내 눈가가 꿈틀댄다.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인지 전화기 액정에는 그녀의 이름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부질없는 기대를 가까스로 억누른 채로, 나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전화기를 연다.
“여보세요?”
내 가슴은 철렁 내려앉고 심장은 점점 빠르게 박동하기 시작한다. 입안이 바싹 말라온다.
“여보세요?”
그녀는 재차 묻는다. 전화기 너머의 음성은 그녀의 것임이 틀림없다. 이게 정말 현실일까? 날 희망에 젖게 만드는 지독한 악몽 아닐까? 꿈에서 깨버리면 날 더 괴롭게 만드는.
“여보세요? 왜 말이 없어.”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어렵게, 아주 천천히 입술을 떼어본다. 마치 태어나 처음 말을 하게 된 것처럼, 단 한 마디를 내뱉기가 힘들었다.
“나야.”
“무슨 일이야? 부재중 전화 와 있길래.”
“아니, 별 건 아니고…… 뭐하고 있나 싶어서.”
“별로 하고 있는 건 없는데. 왜 그래. 너 지금 좀 이상해.”
“그냥. 보고 싶어서.”
내 뜬금없는 말에 전화기 너머의 그녀는 피식 웃는다. 젠장. 나 지금 진지하게 말하는 거란 말이야.
“우리 지금 만날까?”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어디서 말이야?”
“내가 집으로 갈까?”
잠시 고민에 빠진다. 그녀도 한참 오래전에 내가 이사를 했다는 것을, 그것도 여러 번에 걸쳐서. 그걸 알고 있을까. 나는 단 한 발짝이라도 그녀를 움직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만일 내가 그녀를 이곳으로 부른다면, 그녀가 다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서. 그리고 난 후, 그런 말을 했던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내가 그리로 갈게. 지금 집이야?”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달려 도착한 그녀의 동네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동네였던 이곳은 이미 수년 전 시작된 재개발로 인해 완전히 탈바꿈 돼있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낡은 저층 아파트가 즐비하게 주름잡고 있던 그 자리 위로, 지금은 마천루라 부름직한 고층 아파트들이 하늘을 드높이 찌르고 있다. 나는 가쁜 숨을 고르며 그 거리 속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의 집은 이곳에 없었다. 그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나였지만, 새삼 망연한 표정으로 그 거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그녀의 아파트가 있었던 곳을 향해 내달렸다.
그 앞에서 나는 전화기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지금의 내가 쓰고 있는 스마트폰뿐이었다. 망할. 급한 마음에 대충 주머니에 우겨넣었던 전화기를 어딘가에 흘린 모양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토록 중요한 순간에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야 만 것이다. 조금만 냉정해졌더라면 충분히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을…….
나는 초조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집으로 향해 달렸다. 제발 전화기가, 그녀가 내 인생에서 다시 사라져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빌며.
전화기는 현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아파트 복도에 떨어져 있었다. 전화기를 집어 들어 망가지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전화기는 여전히 별 문제없이 잘 작동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또다시 맥박이 점점 빨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가빠지는 숨도. 손을 가슴에 얹고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심호흡을 한다.
하지만 이윽고,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가 난 후……”
몇 번이고 다시 전화를 걸어도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제발, 전화가 연결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목소리라도 조금 더 오래 들어둘걸. 스스로를 원망하는 사이, 내 눈에는 눈물마저 고여 왔다.
왜 나란 남자는 이렇게 실수투성이일까.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바보가 돼버리는 걸까. 나는 얼마나 더 이런 후회를 반복해야 하는 걸까.
나는 전화기를 품속에 파묻으며 무너져버렸고 하늘은 화딱지가 날 만큼 새파랬다. 이런 나를 약 올리려는 것처럼. 나의 어리석음을 훈계라도 하듯.
늦은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나를 반기는 구역질. 변기통을 부여잡고 지난 밤, 안주거리 하나 없이 비웠던 독주를 남김없이 게워냈다. 거울 너머에서 나를 노려보는 붉어진 눈은 어제의 자신을 원망하다 못해, 증오가 가득 서려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인 오래된 전화기를 집어 든다. 그리고 어제의 기억을 재확인한다. 액정위로 선명하게 찍혀있는 그녀의 전화번호는 어제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다시금 나의 마음을 찢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또다시 무너져 내리고 나의 마음속은 후회 가득한 눈물로 차올라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통화연결음 사이로 빼곡히 채워진 정적은 나를 무겁게 짓누른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안내음은 내 가슴팍에 비수를 찔러 넣은 채 시시덕대고, 나는 겨우 그따위 것이 아파 견딜 수 없어 눈물을 글썽인다.
잠이 들면 잠시나마 이 감정을 외면할 수 있을까. 나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올려 꿈속으로 빠져들기 위해 눈을 꼭 감는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더욱 선명해지는 기억은 한시도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대로 간다면 내일 사무실에서도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때, 나의 오래된 전화기에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전화기 액정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틀림없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나는 잠긴 목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전화기를 떨어뜨려 만나러 가지 못했다는 바보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어, 짐짓 차분한 목소리로 둘러댔다.
“깜빡 잠들었어. 너무 피곤해서…….”
“그래? 많이 피곤했구나. 내가 갈 걸 그랬나…….”
이해심 넓은 그녀의 안타까움 섞인 목소리가 대답했고, 나는 조심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어때. 잠은 푹 잤어?”
“응. 개운해. 어제는 미안했어.”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많이 피곤했던 것 같았는데 다행이다.”
그녀의 말끝에는 진심어린 웃음이 묻어났고 머릿속엔 배시시 웃음 짓는 해맑은 그녀의 얼굴이 가득 차올라, 나의 가슴속은 요동한다.
“오늘은 시간 괜찮아?”
그녀의 질문에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망설임은 곧 큰 후회를 불러올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므로, 오랜 시간 침묵을 지키지 않고 곧바로 대답한다.
“지금 바로 나갈게.”
거리는 10년 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풍경으로 빼곡히 들어차있었다. 휴대전화 가게에서는 나의 것과 똑같은 2G 폴더 핸드폰을 진열해놓고 최신기종이라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영화관 앞에는 10년 전 영화들의 현수막을 내걸어 놓고 있었다. 나는 놀란 기색 없이 거리 속으로 섞여들었다. 나의 이질감으로 그녀에게 혼란을 안겨줄 수는 없으므로. 나는 차분히 기다린다. 그것이 나란 남자가 지금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므로.
이윽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온 거리 저 멀리, 수많은 인파 사이로 그녀의 실루엣이 아른거린다. 나는 가슴속 무언가가 요동치며 북받치는 것을 느낀다. 새하얀 웃음을 머금은 채로 나를 향해 다가온,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몰래 울음을 집어삼킨다.
머나먼 과거 언젠가는 너무나 당연했던 만남을 이렇게 어렵사리 이루게 될 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는데. 그녀의 까만 눈은 내 얼굴을 향한 채 살며시 웃으며 말한다. 보고 싶었다고. 그 말에 대답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 차올랐지만, 그 마음에 반해 입술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대신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고, 놀란 표정의 그녀에게 씩 웃어보였다.
그녀와의 이별로 인해 그녀와 나 사이에 겪어왔던 시간들이 완벽한 과거가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녀를 나의 시간으로 불러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행위는 곧, 또 다른 현실을 구축해내기 시작한다. 불완전한 기억. 그것을 더듬거리며 살아온 10년 동안 나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그래. 운명을 부정한 과거는 부정을 위한 부정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나는 꿈과 현실의 괴리를 나조차도 놀랄 만큼 빠르게 정리해나가고 있었다.
그녀를 잃은 후, 나는 여태껏 단 한 순간도 운명이란 낱말을 믿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살아왔다. 그것은 한낱 문학의 극적 요소를 살찌우는 허황된 낱말일 뿐이라고. 그렇게 여기며 꾸역꾸역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이제야 뒤늦게 운명이란 낱말을 신뢰하기 시작한다. 운명이라는 것은 인생을 가로지르며 아우르는 존재임을 깨달았으므로.
#3. 그리고, 현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는 8차선 도로 너머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바라보며 해맑은 표정으로 손을 흔드는 그녀에게, 나도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인다.
신호등에 파란 불이 들어오고 그녀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 나도 그녀를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뗀다.
그 순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묵직한 굉음이 들려온다. 검은 색의 무쏘 한 대가 빗길에 미끄러진 모양인지 아스팔트 위에 타이어 자국을 선명하게 남기며 성난 코뿔소마냥 맹렬히 달려오고 있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녀가 서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그녀를 향해 달린다. 하지만 오래된 SUV의 그것은 내가 감히 추월할 수 없는 속도였고, 내가 미처 도달하기 전에 그녀와 충돌해버린다.
슬로우 모션. 내 눈앞에서 그녀가 하늘위로 솟구쳤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 나버리는 것이 아주 천천히, 선명하게 목도된다.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선 채로 꿈쩍도, 한 발짝도 뗄 수 없다. 사지가 꺾인 채,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로 널브러진 그녀가 원망가득한 눈으로 내 눈을 노려보며 말한다. 왜 나를 구해주지 않았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나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미안해. 미안해. 널 구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그녀의 얼굴은 이내 사악한 웃음으로 돌변하고, 내게 다시 말한다. 그건 거짓말이야. 만약 정말 미안하다면 너는 나를 대신해서 죽었어야 해. 오늘 여기서 죽어야 했던 건 내가 아니라 너란 말이야. 이 모든 게 다 네 잘못이니까.
나는 변명하듯 악을 쓴다. 내가 성난 코뿔소보다 빨리 달리지 못한 것이 잘못일까. 코뿔소가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한 게 잘못일까. 하필 오늘 이곳에서 너를 발견한 것이 잘못일까. 아니면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너를 불러냈던 게 잘못일까. 아니면 내가 너를 만난 것이 잘못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잘못한 것은, 대체 뭘까?
그러고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내가 도저히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것이었다고. 고개를 떨어뜨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과거라는 것이 내손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낱말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때까지, 내게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아직까지도 병신처럼 기적을 믿고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자각한다. 그래. 이것은 꿈이다. 그것도 지독하고도 악랄한 악몽이다. 속이 또다시 메스꺼워지기 시작한다.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순식간에 식도와 위를 불태워버리고 뱃속을 온통 헤집고 다니는 것처럼.
그녀의 목덜미에서 흘러나온 시뻘건 선혈이 아스팔트 위를 흥건히 적시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나는 침대에서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식은땀에 흥건해진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린다. 입안이 텁텁하다. 전화기는 테이블위에 얌전히 얹혀져있었다. 또 하루만큼의 한숨을 집어삼킨다.
며칠 동안 전화기는 묵묵부답이었다. 배터리만 야금야금 좀먹어들고 있을 뿐. 출근길에도, 사무실 의자에 앉아 모니터에 고개를 처박고 있을 때도, 식사라기보다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섭생을 끝마칠 무렵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나는 그저 기다린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차분하게 비워낸다. 먼저 연락을 할 용기는 나지 않아서 마냥 기다리는 것. 그것이 나란 남자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니까.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양말조차 벗지 않고 창문 하나 열지 않은 방구석에 처박힌 채 담배를 꺼내 문다. 내 숨결이 섞여든 담배연기가 나의 작은 방을 점점 잠식해나가는 사이 공허한 웃음과 폐를 가득 메운 담배연기만이 아득해지는 정신을 파고들어 잡다한 생각을 지워나간다. 줄담배를 피워 몽롱해진 정신으로 그녀를 만나는 게 나의 유일한 낙이었으므로, 나는 담배연기로 그녀의 실루엣을 완성해내는 것에 집중한다.
담배연기로 만들어낸 그녀는 내 몸을 휘감아 더욱 몽롱하게 만들곤, 다시 휘발해버리고. 남은 것은 없다. 오로지 낡아빠진 전화기 한 대. 그리고 나.
그리고 하염없이 기다리던 나를 균열된 시간의 틈바구니 사이로 호출하는 전화기. 그녀의 맑은 음성에 나는 짐짓 담담한 목소리로 답한다. 퍼뜩 맑아오는 정신과, 그와는 반대로 아득해져가는 그녀와의 거리감. 그것을 좁히기 위해 안달하며 옷매무새를 다듬는 나.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 나는 오랜 시간동안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하여 생각한다. 식사와 수다, 산책. 서로의 눈을 마주하는 것과 서로의 체온을 공유하는 것. 그녀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들. 그리고 나의 고막을 상냥하게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그녀가 사뿐한 발걸음을 떼며 내게 다가온다. 나는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해사한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새어나오는 눈물을 가까스로 견뎌낸다. 이미 수차례 겪은 일이지만 10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갖게 되는 만남은 아직도 뭉클하다. 촉촉이 젖어드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인다.
함께 식사를 하며 그녀에게서 오래 전,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를 듣는다. 아니 그보다는 그토록 갈망하던 그녀의 목소리를 단 1초라도 더 기억하기 위해 애쓴다는 표현이 알맞을 것이다. 모순적이지만 그녀의 말은 나의 고막에 도달하지 못한 채 내 어깨 위로 툭 떨어져버리고 순수한 음성만이 내 귓가를 가득 채운다. 언제 또다시 홀연히 사라질지 모를 그녀의 까만 눈을 응시한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술잔을 기울인다. 별달리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관념이다. 10년 전에도, 지금도. 나의 태도와 그녀의 반응은 동일하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러한 존재였으므로. 우리의 만남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궤적을 그리며 서로의 손을 잡고 걸었다. 무미건조하고 보잘 것 없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나와 그녀의 방식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모난 구석이 없었던 그 시간들. 다만 저주스러운 특별함이 깃들어버린 것은 그녀와 나의 결말정도일까.
한 잔, 두 잔. 술잔은 채워졌다가 비워지는 것을 반복하고, 그녀의 두 뺨은 점점 붉게 달아오른다. 물론 나의 얼굴도 한껏 붉어졌을 것이다. 취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뒷덜미부터 시작된 열은 척추를 타고 내려가 온 몸으로 퍼져간다. 그녀의 게슴츠레한 까만 눈과 붉어진 귓불은 나의 시선을 천천히, 하지만 강렬하게 끌어당긴다.
테이블 위의 술병이 점점 늘어나는 만큼 그녀에게서는 허점이 여실히 드러나, 잘 가누지 못하는 몸과 다소 혀가 꼬인 발음으로 나를 더더욱 자극한다. 마음속의 천칭이 요동하는 것을 느낀다. 그녀의 까만 눈은 주변을 한 바퀴 슥 둘러보고 나의 몸을 훑기 시작한다. 가슴팍에 잠시 머무르다가 손끝과 손목. 팔을 타고 올라와 티셔츠에 반쯤 감춰진 쇄골을 거닐었으며 목젖을 지나 턱 끝을 넘어 귀를 바라본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은 나의 눈에 안착한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녀의 까만 눈 아래로 반 뼘, 붉은 입술이 나지막이 달싹인다.
“나 오늘 너랑 같이 있고 싶어…….”
그리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내 눈치를 살핀다. 그녀 스스로도 실소가 흘러나오는 클리셰.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얼마나 많은 고민과 용기를 바탕으로 그녀가 이 짧은 한 마디를 뱉어냈는지. 지금은 어느 순간보다 섬세해야 할 시간.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엷은 웃음을 머금은 채 차분하게 읊조린다.
“그래. 나도 같이 있고 싶어.”
혀를 섞으며 거칠어져가는 그녀의 숨소리에 섞여든 나지막한 신음은 나를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주 천천히, 그녀가 걸치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기자, 뽀얀 살결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그녀의 혀는 점점 더 강렬하게 나의 혀를 휘감아온다. 이윽고 속옷만이 남았을 때 그녀가 입술을 떼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너무 밝아…….”
조명을 낮추고 다시 그녀를 바라본다. 여실히 드러나지 않는 그녀의 실루엣은 나를 더 흥분시키고 뒷덜미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침대로 데려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눕혔다. 그리고는 속옷을 마저 벗기며 목덜미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해사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은 조금씩 일그러져가고, 나는 입술은 천천히 아래로 향한다. 점점 진하게 풍겨오는 살냄새를 맡으며 쇄골, 그리고 가슴, 옆구리, 배꼽과 골반. 그리고 두 다리 사이, 가장 민감한 자리로 가져갔을 때, 그녀의 신음은 더욱 거칠어졌고 그녀의 두 손은 나의 머리를 붙잡아 지그시 누르기 시작했다.
혀끝으로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음부를 파고들자 그녀의 파르르 떨려오는 두 다리가 나의 어깨를 짓누르며 조여 왔다. 더할 나위 없이 거칠어진 그녀의 신음은 내 맘속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두려움을 휘발시키기 시작하고, 뒷덜미에서 시작된 열은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갔다. 애무가 끝난 후, 물을 한 모금 삼키고 다시 오랫동안 키스를 나누었다.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지 못한 내 안에서 크게 부풀어 올라있던 것은 하잘 것 없는 욕망보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망설임이었다. 어느 순간에 사라지게 될지 알 수 없는 그녀의 해사한 얼굴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고만 싶었다. 고, 스스로를 속여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두려움과 본능을 저울질하던 천칭은 무너져 내리고, 내게 남은 것은 그녀의 몸을 게걸스럽게 핥는 탐욕이었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서서히 나의 성기를 음부에 밀어 넣었다. 살짝 찡그린 얼굴과 침대 시트를 비틀어 쥐는 두 손은 일말의 망설임마저 완전히 휘발시켜버렸다. 나는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녀의 두 다리는 나의 허리를 지그시 끌어안았다.
섹스가 끝난 후 바라본 창밖의 거리는 어느덧 안개가 자욱해졌고,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또다시 혼자 남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은 끓어올랐던 욕망을 잠식하여 스멀스멀 나의 목을 조여 왔고, 두려움은 어느새 눈물로 바뀌어버려 순식간에 턱 끝까지 차오른다. 나의 얼굴을 목도한 그녀는 놀란 목소리로 묻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나는 북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고백한다.
“오랫동안 지독한 악몽을 꿨어. 네가 내 삶에서 사라져버리는 꿈을 말이야.”
그녀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난 아무데도 안 가.”
그 말을 들은 나는 그녀의 품에 안긴 채, 인파 속에서 엄마 손을 놓친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한참을 섧게 엉엉 울었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뱉은 말이 자각 할 수 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손틈새로 그녀의 머리칼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나는 눈을 뜨지 않는다. 절대로. 오히려 더 질끈 감은 채로, 몇 분을 그렇게 기다린다.
어느새 그녀는 사라져버렸고, 눈앞에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나는 이제 너무나 익숙해진 일이라서, 놀랄 수도 없었다. 오로지 낡은 전화기의 통화목록만이 그녀와 내가 만났다는 것을 증명한다.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오로지 또다시 기다리는 것뿐.
그녀가 나를 찾아오는 꿈을 악몽이라 명명한 순간부터,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녀를 미치도록 그리워했다. 인생은 하룻밤 사이 일어난 지독하고 악랄한 악몽이다. 지난 나의 삶을 모두 돌이켜본다 해도,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순간보다 더 나은 지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 수 없는 삶이 나의 운명이라면, 스스로 미련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 불완전한 삶을 온전한 나의 것으로 만들어 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내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고정된 과거에서 또다시 나를 호출하는 전화벨이 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전화기를 집어 들며 심호흡을 한다. 통화가 연결된 후,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뗀다.
“여보세요?”
시대를 거슬러 올라온 거리 저 멀리, 수많은 인파 사이로 그녀의 실루엣이 아른거린다. 나는 가슴속 무언가가 요동치며 북받치는 것을 느낀다. 새하얀 웃음을 머금은 채로 나를 향해 다가온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그녀 몰래 울음을 집어삼킨다.
어쩌면 나는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꿈이라면 제발, 부디 영원히 깨어나지 말아다오. 내가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것이라면, 영원히 철딱서니로 살 수 있기를 염원한다. 나는 그렇게, 몇 번이고 되뇌고 곱씹으며 기도한다.
출처 | 김영하의 호출을 읽은 내 머릿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