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닉언죄)Mav님께- 자지가 사라졌다(재업)
게시물ID : readers_265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스파게티조아
추천 : 10
조회수 : 1292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6/10/03 14:05:34
1.
 
자지가 사라졌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아침에 일어나 변기 앞에 섰을 때, 가랑이에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털 밑으로 물렁물렁한 맨살과 딱딱한 뼈가 느껴졌다.
 
"자지가 사라지다니..."
 
혼잣말을 해 봤다. 손으로 더듬대며 확인하느라 5분을 허비했다. 출근시간에 늦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당황스러웠다. 나는 얼른 면도를 하고 이를 닦고 일곱개의 남색 넥타이 중 하나를 골라 맸다. 아침으로 항상 먹던 삼각김밥을 생략했다. 오늘 먹으려던 김밥을 내일로 미뤄야할지, 아니면 내일 메뉴로 넘어가야 할지를 전철에서 고민해 봤다. 사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곽 차장이 나를 찾았다.
 
"오늘 일일업무성과 보고서 해 와요. 30분 내로."
 
나는 어제의 보고서 파일을 연 뒤 '흑백토너 30''컬러 토너 25'로 바꿨다. 그리고 '업무 중 특이사항' 란에 '자지가 사라짐'이라고 적었다. 그걸 그대로 컬러 프린터로 인쇄한 뒤, 구멍 두 개가 고정된 펀치기로 뚫어 서류철을 했다. 표지에는 '229일 업무성과 및 특이사항 보고'라고 적었다.
 
"왜 이렇게 항상 지적이 필요하나... 제발 어제 했던 대로만 좀 해와요. 다시."
"시정하겠습니다."
 
곽 차장의 질책을 듣고 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윈도우즈 메뉴로 들어가 10분 동안 핀볼게임을 햇다. 그리고 아까의 서류철을 그대로 들고 다시 곽 차장에게로 갔다.
 
"진작에 좀 이렇게 할 것이지... , 꼭 잔소리를 해야... ."
"죄송합니다."
 
곽 차장의 눈짓에 난 자리로 돌아왔다. 여적 화면에는 핀볼 게임이 떠 있었다. 시간초과로 게임 오버였다. 나는 게임을 끄고 연락처가 든 엑셀파일을 열었다.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를 들었다. 내가 아침에 제출한 업무성과보고는 곽 차장, 최 부장, 서 과장, 김 이사를 거쳐 오후 543분 경에 사장실에 들어갈 거였다. 서류작업을 또 할 게 아니면, 그 전까지는 컬러 토너 25개를 팔아놓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었다. 부지런히 번호를 눌렀다. 오전 실적이 영 꽝이라 점심을 걸렀다.
 
다행히 퇴근시간까지 토너 스무 개를 팔 수 있었다. 그 중 두 개는 흑백이었다. 나는 고객감사 이벤트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2장 인쇄했다. 그리고 흑백 토너 주문 건에 컬러 토너 1개씩을 추가했다.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 뱅킹으로 12만원을 회사 계좌에 넣었다. 이제 5개가 남았다. 운이 좋으면 평소보다 일찍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 대리, 잠깐 나 좀 봅시다."
 
곽 차장이 나를 불렀다. 그는 나를 최 부장에게로 데려 갔다. 최 부장은 우리 둘을 다시 서 과장에게로, 그리고 서 과장이 우리를 김 이사에게 배달했다. 20분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이사님, 서 과장입니다."
"들어오세요."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김 이사는 마침 화장을 고치는 중이었다. 그녀가 바르고 있는 립스틱은 새빨강과 버건디 사이의 어떤 색이었다. 금방 흘린 피와 저녁 노을이 동시에 생각났다.
 
"왜 이렇게 늦었죠? 벌써 퇴근시간이 지났네요."
"죄송합니다."
"박지원 대리가 누군가요?"
"이 친구입니다."
 
나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아랫배에 손을 모으고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김 이사님. 영업 2팀 박지원 대리입니다."
"업무성과보고에 보니까... 특이사항에 '자지가 사라짐' 이라고 쓰신 것 같던데..."
", 맞습니다."
"서 과장님, 따로 보고 받으신 건은 없죠?"
 
서 과장은 황급히 내 옆에 서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따로 보고받은 적은 없습니다. 저도 오늘 일일업무성과보고를 통해 알았습니다."
"그래요, 알았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서 과장은 나보다 두 살이 어린 김 이사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지금부터 대표님 뵈러 들어갈 건데... 일단 확인부터 해 봐야죠."
 
김 이사는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는 빨간 입술 끝을 보일락말락 말아올렸다. 그녀의 눈에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기이한 흥분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허리띠를 풀었다.
 
"이 사람이 지금!"
 
서 과장이 내 손을 붙잡았다.
 
"자네 지금 뭐하는 건가?"
"?"
"어른 앞인데 뒤를 돌아서 벗어야지! 사회 생활 기본이 안 돼 있어!"
"...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나는 뒤로 돌아 바지를 벗었다. 속옷을 내리려 허리를 숙이자 엉덩이가 유난히 시려웠다. 내 앞에 서 있던 내 상사들은 각자 자기 앞의 허공 어딘가만을 진지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뒤로 돌았다.
 
"정말이네."
 
김 이사가 또각또각-하며 다가오더니 내 앞에 쭈그렸다. 진한 샴푸냄새가 훅 끼쳤다. 나는 재채기가 나오려는 걸 참느라 귀가 빨개졌다.
 
"흐음... 이걸 어쩐다."
 
김 이사는 내 매끈매끈한 사타구니를 손으로 만졌다가는 이내 손톱을 길게 기른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봤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서 과장을 돌아봤다.
 
"일단은, 어쩔 수 없네요. 대표님께 이미 보고가 들어갔으니까... 정리하는 방향으로 진행하죠."
", 알겠습니다."
"박 대리라고 했죠? 팀 스피릿이 정- 말 부족하네요. 미리미리 '몇 월 몇 일에 자지가 사라질 예정입니다.'하고 보고하고 결재 올렸으면 이렇게 임원회의에까지 올라올 일 없지 않나요? 갑자기 업무보고에 이런 걸 올려버리다니, 일 처리가 참 더티하네요."
"죄송합니다. 저도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그런 걸 미리 캐치하는 게 능력인 거죠. 변명은 됐어요. 다들 따라오세요."
 
김 이사는 다시 또각또각 거리며 문 밖으로 나섰다. 나는 줄줄이 걷는 내 상사들을 맨 뒤에서 따라갔다. 곽 차장이 짜증섞인 눈빛으로 힐끗 뒤돌아 나를 봤다.
 
"대표님, 김 이사입니다."
"들어와."
 
임원들이 모인 사장실에서 또 비슷한 광경이 재현되었다. 나는 뒤를 돌아 바지와 속옷을 내리고 다시 뒤로 돌아섰다. 사장과 임원들은 뭔가 어수선하게 얘기를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사장이 '권고사직'을 언급하자, 곧장 모든 절차가 착착 진행되었다. 비서들이 준비되어 있던 사직서와 몇 개의 계약서를 갖고 왔다.
 
"이 일이 외부로 유출돼서 우리 회사 제품 이미지에 타격이 가면,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거예요. 거기 사직서 맨 밑에 이름 써 있죠? 그 옆에 서명하세요. 기밀유지서약서, 위로금 수령증에도 서명하구요."
 
김 이사는 내가 서명해야 할 서류들과 서명란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나는 바지를 벗은 채로 사직서와 또 월급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위로금 수령증에 서명을 했다. 내 고용계약은 매 6개월마다 갱신되어 왔으므로, 당연한 얘기지만 퇴직금은 없었다.
서명을 마치고, 또 뒤로 돌아 속옷과 바지를 올리고, 다시 뒤로 돌아 아랫배에 손을 모으고 꾸벅 인사를 했다. 경리가 40만원짜리 수표가 들어 있는 봉투를 가져다 줬다. 나는 경리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사장실을 나왔다. 그리고는 괜히 수표를 팔락팔락 흔들어 봤다.
 
"잠깐 내 방으로 들어와봐요."
 
김 이사가 나를 불렀다. 내 상사들은 인사도 없이 줄줄이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앞서가는 또각또각- 소리를 들으며 이사실로 들어갔다.
 
"우리 아빠가 신경 많이 써준 거, 다행으로 생각해요."
 
이사실에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풀썩 앉은 그녀가 대뜸 하는 소리였다.
 
"더 심할 수도 있었어요.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인줄 알아요."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 잠깐 뭐 좀 하고 30분 정도 후에 퇴근하니까,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내 집에서 시킬 일이 좀 있으니까 밤 스케쥴은 비워두고요."
"... 저는 이제 여기 직원이 아닙니다만."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요?"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참으로 이런 말도 못 알아듣냐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이사라는 직함이 대리보다 몇 단계는 위에 있다는 사실부터 상기시켰다. 그리고 대리 밑에는 사원, 그 사원보다 못한 것이 백수이므로 임원급 인사인 이사의 명령을 백수가 거절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얘기하고 또 꾸벅 인사를 한 뒤 이사실을 나왔다.
 
주차장에 가기 전에 사무실에 들렀다. 책상 서랍에 넣어놨던 모나미 볼펜 한 다스를 챙기기 위해서였다. 주변을 보니 직원들 전원이 업무성과보고를 따라잡기 위해 여적 분주했다. 나는 조용히 곽 차장의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곽 차장은 핀볼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한 번도 도달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점수였다. 나는 뒤에서 그걸 잠깐 감상하다가 곧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지하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서류가방을 든 손을 앞으로 모았다. 공기에서 텁텁하고 무거운 먼지냄새가 잔뜩 났다. 나는 그곳에 세워진 온갖 종류의 고급 수입차들을 둘러봤다. 그것들 또한 여기서 내가 마시는 더러운 먼지를 함께 마시고 있었다. 내가 평소에 딱히 열등감에 시달리는 인간인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가치있는 물건들이 나와 똑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 즐거워졌다. 그것은 이상하리만치 배설의 쾌감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 소리가 나더니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김 이사였다.
 
"가죠."
 
그녀는 조수석에 날 태운 채, 자기 입술 색을 담은 빨간 스포츠카를 운전했다. 펜트하우스는 회사에서 금방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가 대뜸 내게 옷을 다 벗을 것을 요구했다. 나는 뒤로 돌아 옷을 하나하나 벗고는 다시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그녀는 입술을 톡톡 만지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진짜, 꼭 한 번 해보고 싶었어."
 
그리고 그녀는 옷을 벗었다.
 
그날 밤 내가 한 일을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다. 그녀는 경험많은 야구감독이 선수를 다루듯, 구체적이고 명확한 지시로 나를 움직였다. 나는 주문된 시간과 강도, 그리고 순서에 따라 그녀의 몸 곳곳을 핥거나 만지거나 콕콕 찔렀다. 그녀는 중간중간 내 공백이 살고 있는 빈 자리를 핥고, 냄새맡고 쓰다듬었다. 한참을 그녀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고, 그녀가 내 허무를 쓰다듬은 끝에 그녀는 짐승처럼 크게 울부짖고는 이내 축 늘어졌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일어나, 내 여백에 코를 처박았고, 다시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세 번을 더 울부짖었다.
 
"오늘, 아주 괜찮았어."
 
샤워를 하고 나온 그녀가 내게 20만원 짜리 수표 두 장을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수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하나하나 옷을 입고, 마지막으로 양말을 신은 뒤 다시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수고하십시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펜트하우스를 나섰다.
 
밖에 나오니 신호등이 전부 노란색으로만 깜빡대고 있었다. 아스팔트에 부딪는 빛깔이 꼭 도마뱀의 눈깔 같았다. 나는 터덜터덜 걷다가, 멀리서 오던 택시를 잡아 탔다. 집으로 도착하자마자 냉장고에서 삼각김밥을 꺼내 먹었다. 그리고나서 샤워를 했다. 비누를 묻힌 때수건으로 내 사타구니를 빡빡 문질렀다. 새빨강과 버건디 사이에 있는 빨간색 립스틱 자국이 영 지워지질 않았다. 문지를수록 되려 빨간색 자국이 진해졌다. 그러다 팔이 아파 그만두고 말았다. 물을 잠그고 수건을 팡팡 턴 뒤 몸을 닦았다. 수건이 금방 젖길래, 하나 더 꺼내 머리를 털었다. 소독약 냄새가 나는 로션을 바르고 침대에 갔다. 눕자마자 잠들어버렸다. 꿈도 없는 잠이었다.
 
다음 날 아침엔 느지막이 일어났다. 변기 앞에 다시 서 봤지만 여전히 사라진 것은 사라진 대로였다.
 
-쿵쿵 박지원 씨!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티셔츠를 대충 입고 문을 열었다. 경찰복을 입은 사내 둘이 서 있었다.
 
"박지원 씨 맞으시죠?"
", 맞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봤다가 이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더니, 이런저런 법적인 내용이 적힌 종이를 한 장 건넸다.
 
나는 긴급체포당했다.
 
 
 
 
2.
 
"아니, 무슨 말씀입니까? 이해를 못 하겠군요."
"그러니까, 저는 강간을 못해요. 자지가 없으니까요."
"성능력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까? 그걸 의학적으로 증명하려면..."
"아뇨, 말 그대로 저는 자지가 없어요."
 
변호사는 말도 없이 가만히 나를 응시하더니 눈을 끔뻑거렸다. 나는 마주앉은 책상에서 일어나 뒤를 돌고, 바지와 속옷을 내리고, 그리고 다시 돌아섰다.
 
", 이거..."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이걸로 갑시다.'라고 했다. 애초에 강간이 불가능한 상황이니 쉽게 이길 거라고 했다.
 
"그건 안 돼요."
"안 되다뇨?"
 
나는 내가 썼던 기밀유지 서약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서약서에 있던 어떤 조항들에 대해서도. 유출될 때 내가 질 책임에 관한 조항들이었다. 구체적인 액수로 표시된 커다란 책임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지금!... 그게 그렇게 되도 불공적 계약입니다. 나중에 재판 가도 이길 수 있어요!"
"저는 재판을 할 돈이 없어요."
 
머리가 반쯤 까진 국선 변호사는 멍하니 날 바라봤다. 그리고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벗고 한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그러다 유죄판결 나오면 어쩌시려구요? 후회하실 겁니다, 분명히."
", 그러겠네요. 유죄판결이 나올 수도 있겠군요."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유죄판결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판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변호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부터 사건번호 881580 강간 및 유사강간,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상 특수강간에 대하여 피고인 박지원에 대한 공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나에 대한 재판에는 내가 없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변호사, 검사, 판사의 말을 듣기만 했다. 검사는 나의 무거운 죄에 대하여 열변을 토했다. 권고사직의 원한에 피해자 김연수 씨를 미행한다. 주차장에서 피해자를 흉기로 위협, 피해자의 집까지 운전하도록 요구한 뒤, 피해자의 업무용 숙소에서 피해자를 수 회 잔인하게 강간한다. 주차장에서 찍힌 cctv 캡처 화면, 피고의 상체에 남은 손톱 자국 등이 그 증거였다.
 
"여기 이 자료는 피고의 상처와 피해자의 손톱 모양이 일치한다는 내용을 담은 의학적 소견입니다."
 
그리고 그는 뚜벅뚜벅 법정을 가로질러 누런 서류봉투를 건넸다. 꼭 영화 속 정의감 투철한 신참 검사같았다.
 
내 변호사는 검사에게 cctv 영상 전체를 보자고 했다.
 
"안타깝게도 영상은 지워졌습니다. 복원할 수 있던 것은 이 사진 하나 뿐입니다."
 
내 변호사 한숨을 한 번 푹 쉬고, 이내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캡쳐본으로는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협박한다고 피해자가 숙소까지 운전했다는 것, 반항의 흔적이 고작 손톱자국 몇 개 뿐이라는 것 등이 이상하다고 했다. 검사가 제시한 증거로 최대한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은, 그저 피해자와 피고가 성접촉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이가 있는 두 성인이 단순히 서로의 합의 하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것 뿐이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오전 내내 검사와 내 변호사는 암호로 통신하는 스파이들처럼 법률용어를 주고받으며 교신했다. 증거력, 증거능력, 합법성, 불법성, 비합법성, 위법성, 강제력, 위계, 협박, 형법,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소의 제기, 판례, 동기, 수단, 분노조절장애, 샤덴프로이데,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공기 중으로 퍼지는 단어들이 한참동안 머리를 때렸다. 어지러웠다. 그것들은 말이기보다는 부호에 가까웠다. 군대에서 보초를 서던 때가 생각났다. 나는 소대장 몰래 무전기의 어떤 버튼들을 순서대로 누르곤 했다. 그러고나면, 그 버튼들을 누른 병사들끼리만 얘길할 수 있었다. 소대장이 가진 무전기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상한 기계음만 나왔다. 우린 그걸로 초소별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거나, 목청 좋은 말년 병장이 라디오 진행을 하기도 했고, 또 소대장이 순찰 나온다 미리미리 알려주기도 했다. 나중에는 결국 소대장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게 어쩌다가 들통났더라...
 
"어떻게 피해자 몸에서 정액도 한 방울 검출이 안 되었는데 강간이 됩니까?"
"그러니까, 사정한 콘돔을 변기에 흘려보냈다지 않습니까, 피해자가. 그리고 피해자 성기에서 피고의 타액이 나온 건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서로간의 합의 하에 이루어진 성적 자기결정권의 표현으로서 자발적인 의사에 바탕을 둔..."
그러다가 판사가 목에 핏대를 올리며 싸우던 두 어른을 뜯어 말렸다. 그리고는 점심을 먹자고 했다. 내게는 메론빵과 우유가 나왔다. 꽤 맛있었다.
 
오후에는 증인들이 나왔는데, 대충 곽 차장이 처음에 한 말처럼,
 
"피고는 아주 이상한 사람입니다. 업무능력도 좋지 못했고, 업무시간에는 핀볼 게임을 하고는 했습니다."
 
라는 말의 반복이었다. 서 과장은 거기에다가
 
"피고는 이사님의 앞에서 바지를 내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놀라서 제지했지만, 끝내 속옷까지 내렸습니다."
 
라는 말도 덧붙였다. 검사는 의기양양해서 내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
 
라고 대답하자마자 '저 질문에 대답할 필요 없다'는 변호사의 메아리처럼 뒤늦게 내 귀에 들어찼다. 나는 변호사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검사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리고는 또 한참 변호사와 검사가 버튼을 누른 무전기로 교신을 했다. 대충 오후 5시경이 되었고, 판사는 저녁을 먹자고 했다. 첫날 공판은 그렇게 끝났다.
 
호송차에서 내리자, 간수들은 원래의 유치장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덧대놓은 쇠창살들만 빼면, 여느 원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되려 내 방보다는 훨씬 좋았다. TV도 컸고, 화장실도 따로 붙어 있었다. 나는 프레임이 쇠로 되어 있는 침대 위에 앉아 TV를 봤다. 전문가 패널로 나온 백발의 변호사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귀족노조의 불법파업에 관한 어떤 비난이었다. 난 그걸 가만히 보다가 이내 채널을 돌렸다. 멈추지 않고 계속. 그리고 화면이 바뀌는 그 모습을 한참 감상했다. 딩동- 하는 소리가 들렸다.
 
-면회입니다.
 
곧 덜컥덜컥 하며 자물쇠 따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더니 사람이 한 명 들어왔다. 김 이사였다. 예의 그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채였다.
 
"마음에 들어? 예전에 아빠가 몇 번 묵었던 곳인데, 익숙해서 여기로 골랐어."
 
그리고 그녀는 곧장 옷을 벗었다. 난 계속 리모컨을 쥐고 있었다. TV에서는 자살한 두 자매의 사연이 비장한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행자는 두 사람의 죽음을 '의문사'라고 불렀다. 내 허리께 있던 김 이사의 머리가 점점 올라오더니 곧 내 얼굴을 덮었다. 체리향 얼굴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김 이사가 내 팔을 베더니, 며칠 전 아침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시댁에 모여 아침식사를 했다. 어쨌든 좋은 부부 흉내를 내는 게 서로에게 윈윈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 그 미련 곰퉁이가 밥상머리에서 철없는 행동을 했다.
 
"누군 좋아서 매리드 상태인 줄 아나. 지랑 나랑 갈라서면 곤란할 사람 한 둘이 아닌데... 아빠한테 혼나려고 작정한 것도 아니고."
 
남편은 이혼하고 싶다 했다. 시부모가 깜짝 놀라자 김 이사의 어깨를 까보이며 봐라, 다른 사내와의 흔적이다,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기가 막혔다. 오픈 매리지 상태로 있겠다는 게 그들끼리의 계약내용이었다. 그러나 문장에 섹스란 단어가 들어가면 왕왕 그 문장의 화살촉은 여자의 몸에만 박히는 것이다. 그게 그녀가 알고 있는, 이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어떡해. 기지를 발휘했지."
 
그녀는 대뜸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수치스러워 말 못했다. 나는 어제 강간당했다. 남편이 며칠 째 집엘 안 들어오니 이런 일이 생겼다. 오늘 아침도 이 자리에 오지 않으려 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가 사랑하는 시부모님과 남편 얼굴을 한번 더 보고 싶었다. 이제 인사를 드렸으니 여한이 없다. 그리고 그녀는 스테이크를 자르던 나이프를 들어 그대로 목을 겨눴다. 시부모는 크게 놀라 그녀를 말렸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라, 네 탓이 아니다, 어찌 그런 참혹한 생각을 하느냐. 그리고 남편은 그 자리에서 호되게 혼났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시아버지가 시키더라. 남편한테 너 얼른 네 사무실 들어가서 그 놈 잡으라고."
 
시아버지의 강권으로 남편은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연수원 후배인 검사에게 안부전화를 했다. 그녀도 그 후배에게 따로 식사대접을 한 번 했다.
 
"어쩔 수가 없었어. 이해하지?"
 
나는 이해한다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나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좋아'하고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옷을 입었다. 그리고는 핸드백에서 20만원짜리 수표 2장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달그락대며 자물쇠 잠그는 소리가 났다. 손에 쥔 수표를 팔락팔락거려 봤다. 그리고는 침대 옆에 있던 휴지통에 넣었다. 침대에 누웠다. 두 자매의 죽음을 파헤치는 프로그램이 끝나가고 있었다. 언니가 윤간당했다. 동생이 주선했던 일자리였다. 자매가 저들 손으로 차례차례 목을 매었다.
 
- 타살입니다.
 
진행자는 타살이라고 했다.
 
하얀색 천장이 참 높았다. 눈을 깜빡거려 봤다. 하양, 빨강, 하양, 빨강, 하양... 내 눈꺼풀 안쪽은 형광등 불빛에 색이 바랜 듯 했다. 김 이사의 립스틱 색깔만치 신선하질 못했다. 나는 내 공백과 허무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자리를 매만졌다. 아직도 많이 쓰라렸다. 손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아주 약간, 정말 약간 체리향이 났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잘 수 있었다.
 
 
 
3.
 
다음 날 공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더 이상 밝혀야 할 의문들이 없었다. 검사와 변호사는 또 암호를 주고받았다. 방청석엔 아무도 없었다. 법정에는 판사와 검사, 변호사, 청원경찰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 전부였다. 검사와 변호사가 한참을 싸우는데 판사가 또 점심을 먹자고 했다. 난 샌드위치를 먹었다. 다행히도 참치 마요 샌드위치였다.
 
점심을 먹고나자 판사가 선고를 내렸다.
 
"피고인 박지원의 .... 에 대하여 판결한다. ......를 하여 범죄사실의 입증이 ... 하므로 .....아니하다고 보지 않을 이유가 없으므로, 따라서 ...에 관하여는 합리적 의심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할 것이고 따라서 .........하여..."
 
그의 긴 판결문은 끊어질 듯 말듯 조사와 조사가 파도처럼 이어졌다.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그 유려한 문장이 방파제 너머로 철썩 내려앉았다.
 
"...이다. 따라서 피고인 박지원의 이상과 같은 혐의에 대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시한다. 강간 및 유사강간에 대하여, 유죄. 특수강간에 대하여, 유죄. 이에 본 법정은 피고 박지원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피고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없습니다."
 
나태함이 가득 찼던 그의 얼굴에 순간 보일락말락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면 이것으로 본 재판의 폐정을 선언..."
"잠깐 기다려 보이소!"
 
변호인이 번쩍 손을 들었다. 백발이 군데군데 섞인 그의 주변머리는 어제보다 더 숱이 없어 보였다. 개기름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이 얼굴에 번들거렸다. 그는 자꾸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 썼다.
 
", 재판장님. 그러니까, 피고가 마지막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없다지 않습니까?"
", 그러니까. 제가 대신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 피고가."
"변호인이 말입니까?"
", . 같이 앞으로 나와서요."
"해 보십시오."
 
내 변호사는 내 눈을 쳐다보더니 내 팔목을 잡고 법정 앞으로 나왔다. 판사와 불과 2, 3미터 거리였다.
 
",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
 
변호사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는 눈을 꼭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나를 딱 쳐다보더니 내 뒤에 섰다. 그는 내 허리께에 손을 가져가더니 훌렁, 내 바지와 속옷을 동시에 내렸다.
 
"피고 박지원은 성기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재판은 무효입니다!"
 
판사의 눈썹이 조금 찡그려졌다. 옆을 보니 검사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가리고 있었다. 입을 가린 손 틈새로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나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 진짜 없었어..."
 
법정 한 켠에 서 있던 경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손을 모아 자기 사타구니를 가리고 있었다.
 
"그래서요?"
"?"
"진작 얘기를 하지, 재판 다 끝나고 무슨 소용입니까? 그리고 성기가 있는지 없는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아니, 그게 딱 보기에도..."
"내가 의사입니까? 의학적 판단은 의사가 내려야죠. 눈에 안 보인다고 그게 있는지, 없는지 판사가 어떻게 판단합니까?"
", 그건..."
"사형 집행까지 며칠 말미가 있으니 그 사이에 의사소견 첨부해서 재심 청구를 하든가 하세요. 본 법정은 폐정합니다. 이상!"
 
판사는 나무망치를 세 번 땅땅땅 두드리더니 일어나 휘적휘적 법정 밖으로 나갔다. 나는 뒤로 돌아 바지를 올리고, 다시 뒤를 돌았다.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판사가 없었다.
 
"박지원 씨, 내일 아침에 의사를 들여 보낼테니 검사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 자료를 갖고 재심청구를 하시면 됩니다."
"변호사님은요?"
"저는 이제 더 할 수 있는게... 어쨌든 검사기록 갖고 재심청구하시면 됩니다. 일단 청구를 하면 심사가 끝날 때까지 형집행이 정지될 겁니다. 그 때 다시 국선 변호사를 새로 붙여달라고 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꾸벅 인사를 했다. 간수 둘이 다가와 양쪽에서 날 붙잡았다. 법정을 나서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검사와 변호사가 웃으며 악수를 하고 있었다.
 
"이야아- 선배님. 뭐 이렇게 열심히 하십니까, 국선에? 마지막엔 깜짝 놀랐습니다, 허허."
"아이고, 이기 뭐라꼬 참... 또 이래 얼굴보네. , 그래도 기왕 국선 뛰면서 열심히 좀 해 놔야 안카나? 요새 전관예우다 뭐다 말이 하도 많아가, 로펌 바로 안가고 이래해서 조건을 맞추는기다. 그리고 국선이래도 몇 번 이겨놓으면 난중에 연봉이 쪼매라도 올라간다 안카드나. 니두 미리 좀 알아두래이"
", 고생 많으십니다. 선배님두."
"그래, 오늘 소주 한 잔 안하나?"
"하하하, 오늘 제가 한 잔 사겠습니다."
"그래, 그래. 이따 보자고. , 근데 니 재판 참 잘하데. 니 지금 차장님 누고?"
", 지금 ... 님이 ....부서에..."
", 그래? 그러면... ...."
 
걸음이 느려지는 듯 하자 간수 둘이서 날 질질 끌고 갔다. 나는 햇빛이 화창한 법원 안뜰을 지나 호송차에 올랐다. 쇠창살이 덧대어진 창문 밖으로 노랑, 분홍 팬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4.
 
"오늘은 표정이 좀 밝네?"
 
저녁 때 찾아온 그녀는 생기발랄해 보였다. 남편과 얘기가 잘 되었다고 했다. 차를 바꿔주고, 남편과 그의 애인에게 용돈을 조금 더 주기로 했단다. 내년 쯤엔 아이도 한 명 가지기로 했댔다. 남편 애를 가질 지, 정자은행에서 받을지는 따로 특약사항에 추가할거라고 했다.
 
"남편이 되게 마음에 들어하더라. 그 친구, 아주 재미있던데. 하면서."
 
그리고 이내 우리는 헐벗었다. 몇 번의 울부짖음이 끝나고 그녀는 또 내 팔을 베었다. 나는 며칠 후 내가 사형을 당할 거라고 했다. 그녀는 알고 있다고 했다.
 
"유명해, 너 지금. 그 법 새로 생기고 처음이잖아."
 
그녀는 TV를 켰다. TV 화면에는 날 포함한 세 명의 사진이 화면에 떠 있었다. 나머지 둘은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인 사람과 제 아비를 죽인 아들이었다. 일주일 후 나는 그들과 함께 사형당할 예정이었다. 앵커는 이 새로운 '신속집행'이 얼마나 많은 국가 예산을 아낄 수 있을지에 대하여 열변을 통했다. 설득력 있는 논지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무서워, 죽는 게?"
"무섭지는 않습니다. 걱정은 됩니다."
"그래? 무슨 걱정?"
"사람들한테 보여주지는 않는답니다, 사형 장면을. 그러면 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그러니까, 제 죽음이 효과적이지 못할까 조금 걱정이 됩니다."
 
그녀는 갑자기 깔깔대며 웃었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켜 미소를 지은 채 날 빤히 쳐다봤다.
 
"남편이 왜 마음에 든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
 
그녀는 다시 내 팔을 베었다. 그리고 내 가슴에 볼을 대고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무서워..."
"... ..."
"... 산다는 게."
 
그날 밤은 20만원 짜리 수표 2장을 휴지통에 버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는 금방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그녀의 숨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곧 내 의식도 어두워졌다.
 
웬일인지 눈이 떠졌다. 아랫배가 좀 아팠다. 난 그녀의 머리 밑에서 조심조심 팔을 빼냈다. 병실에 딸린 화장실에 들어갔다. 괜히 시끄러울까 앉아서 일을 봤다. 화장실을 나오니 방안으로 햇빛이 가득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쇠창살 그림자가 굴곡진 그녀의 몸 위로 죽죽 검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마트에서 파는 포장육을 떠올렸다. 며칠 후면 내가 그렇게 될 것이다. 고작, 며칠 후면... 박지원이 아니라 박지원이었던 것으로, 바코드가 찍히고 포장될 것이다. 침대로 기어올라가 김 이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가만히 입술을 핥았다. 체리향이 났다. 내 허무를 채워줄 것은 아마 이것 뿐일거야. 나는 천천히 그녀의 몸을 핥으며 내 크나큰 죄를 속죄했다.
 
고르던 숨소리가 서서히 빨라졌다. 난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거기에 있는 어떤 것을 응시했다. 그것은 빈 공간이었다. 공백이고 허무였다. 다만, 그게 무언가를 이루고 있었다. 아직 그리지 않은 도화지의 여백처럼. 난 그제야 깨달았다. 난 정말 오만했구나. 내겐 허무조차도, 여백조차도 없었던 거구나. 비어 있는 것조차도 나는 갖지 못했었구나. 정말 빈 자리는 차라리 주변을 그릇으로라도 만들어줄 수 있겠지, 그러나 내겐 정말 아무 것도 없었던 거였구나. 없는 것 조차도 없었구나. 무엇이 되어 본 적도, 심지어 무엇이었던 적도 없었구나.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그녀의 골반을 꽉 붙잡고 거칠게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김 이사는 놀라서 헉하고 숨을 멈췄다. 이내 소릴 질렀다. 그러나 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아있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뾰족해진다는 것, 날카로워 진다는 것, 단단해진다는 것은 별 게 아니다. 그저 누군가를 상처 입힐 각오만 하면 되는 것이다. 참 쉬운 일이다. 참 쉬웠다. 왜 난 여지껏 어떤 이의 아픔도 하나 즐기지 못했을까 누구의, 손톱을 하나하나 뽑은 적 한 번 없었을까 누구의, 목을 잇몸이 바짝 들어갈 때까지 으적 깨물어 피를 마셔본 일이 없었을까 누구의, 눈을 후벼파고 꼬챙이로 쿡쿡 배를 찔러본 일이 없었을까 참, 아무도... 정말 아무도 죽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난 아파본 적이 없을까.
 
나는 몸을 계속 움직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의 볼에 내 볼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숨을 한 번 들이키고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죽는 것이 두렵죠? 죽는 것이 두려울 거예요."
 
상체를 살짝 들어 그녀의 얼굴을 마주봤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 환희에 찬 웃음이었다. 눈물이 베개를 늪처럼 적시고 있었다. 딩동-하는 소리와 함께 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사 선생님 검사 차 면회입니다."
 
주의사항을 읊어대는 웅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그락대며 자물쇠를 푸는 소리도 들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죽을 것이다. 어쨌든 죽을 것이다. 죽어야 했다. 내가 갖지 못한 허무마저도, 있다고 믿었던 공백마저도 이제 영 사라졌다. 난 살 수가 없다. 사는게 너무 무서웠다. , 이렇게 죄를 지어놓고 어떻게 내가 도축되기를 원하지 않을까. 짝짓기가 끝나면 잡아먹히고 마는 수컷 사마귀가 생각났다. 김 이사가 날 먹어줬으면 좋겠다. 욕지기 나는 이 육체가 사형장으로 가기 전에 굳이, 하나하나 잘라줬으면 좋겠다. 깨끗이 포장해 냉장고에 잘 넣어놨으면 좋겠다. 그걸 김 이사가 종종 먹어주었으면 좋겠다. 남편의 머리와 함께 내 자지를 먹어주었으면 좋겠다. 시어링이 바짝들어가게 구워서, 한 입, 한 입. 내가 아예 없었던 것처럼. 휴지통 속으로 사라진 20만원짜리 수표 두 장처럼.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경악에 찬 어떤 시선들이 느껴졌다. 다급히 다가오는 걸음들이 있었다. 그게 점점 느려졌다. 눈 앞에 어떤 시간들, 어떤 사람들, 어떤 말들이 쉭쉭 지나갔다. 그것은 요컨대, 이제 막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이 세상의 찐득찐득한 그림자 같은 것들이었다. 욕지기기 치밀었다. 내장 곳곳으로 그것들이 부풀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내 어깨를 붙잡으려는 손의 한 점, 아주 작은 한 끝이 살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바늘 끝같은 그 점이 날 건드리는 순간, 내가 내 안에서 터져나갔다. 따지 않은 치약을 밟은 것처럼 위아래로, 사방으로. 내 안에 있던 나였던 것들이 아니, 나였어야 했던 것들이 폭포처럼 터져나왔다. 그르렁거리는 낮은 울음으로, 찢어지는 듯한 새된 비명으로, 피 섞인 가래가 나오는 기침으로, 콧속까지 넘어오는 토사물로. 마치 막 태어난 아이가 내는, 내가 그러하길 바라는 어떤 첫 울음처럼.
 
"개애애애- 새애애애- 끼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그녀의 안에 사정했다.

출처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