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11살 무렵부터 게임과 사랑에 빠져서, 여전히 게임을 즐기며 살고 있는 30대 직장인입니다.
게임을 사랑하는 분들이 참 많지만, 제 주변에서는 좀 유별난 편으로 꼽힙니다.
회사에 휴가를 내고 왕십리에 줄서서 디아3 소장판을 구매했고, 드레노어의 전쟁군주는 2셋 구매했어요.
콘솔게임도 좋아하지만 단 한번도 크랙으로 게임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아무도 안샀다(?!)는 메달오브아너:워파이터 디럭스, 콜오브듀티:고스트 콜렉터에디션+아트북 같은 것들을
제 책장에서 보시면 "이런 것까지 샀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네, 좋게 말하면 게임 매니아고, 요즘말로는 호갱이겠네요...ㅋ)
그렇다고 돈이 많아서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임을 모두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고요,
올해도 여름휴가 대신 오버워치 소장판과 굿즈들을 구입했습니다.
그냥... 단지 세상의 여러가지 다양한 활동들 중에 저는 게임이 참 좋았고, 지금도 좋습니다.
그런데 제 이런 취미생활에서...
'문제될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 때때로는 문제가 되더라구요,
바로 제가 여자라는 사실입니다.
제 주변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흔히 그런 말이나 글들을 듣고 봅니다.
"함께 게임하는 여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혹은 그런 커플이 부럽다"
"여자들은 게임을 못해, 운전 가르치는 것 만큼 힘들어"
"와이프가 게임하는 걸 이해하지 못해서 자주 싸워요"
"여자들은 게임하는 남자를 왜 싫어해? 맨날 나가서 술 먹는 것보다 훨씬 건전한데"
또 반면에 게임을 즐겨하는 여성유저분들도 정말 많이 계시고 (여성유저라는 말도 사실 좀 웃기지만),
요샌 방송도 하시는 분들도 많고 함께 게임을 즐기는 연인, 부부들도 많이 있죠.
아마 게구리님의 사건 또한 아실 겁니다.
왜, '여성게이머'라는 말이 있어야할까요?
[여성게이머의 종류]
왜 아직도, 여자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소비자이자 게이머로,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게임을 하기가 쉽지 않은 일일까요?
제 목소리를 듣고 여자라는 것을 알아채면 금세,
"여자? 얼굴 이뻐? 몇살? 어디살아?"
"이쁜 목소리로 오빠들 힘내요라고 말 좀해봐, 여자목소리 버프 받게"
"여자니까 메르시해"
"내가 이겨줄테니까 전화번호 찍어봐"
여기까지만 해도 제 생각엔 심각한데,
"여자 목소리 들으니까 흥분된다"
"(마이크로 신음소리)"
"기침소리도 섹시하네"
"우리팀은 보빨러 4인큐네, 니네 그럼 포썸하냐?"
"나 꼬추 큰데 나도 따먹을 수 있음?"
"나 이번에 잘했으니까 나도 대줘"
더이상 적고 싶지 않네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1라운드를 별 말없이 끝낸 즈음, 어떤 분이 마이크를 켜둔 채로 기침을 했는데, 여자분이었습니다.
갑자기 우리 팀 사람들이 그 분에게 쉴새 없이 말을 겁니다.
"님 여자? 이쁨?"
"말해봐요, 목소리 들려줘요"
"목소리 들려주면 내가 캐리해줌"
"키보드 치는 소리만 들어도 이쁠 거 같음"
그 중에는 제 지인도 있었습니다. 순간 저까지 얼굴이 화끈거려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상대방이 기분 나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팀은 "아니 왜 이게 기분 나쁜 말이냐?"고 저와 대화가 오갔고요.
만약 당시 그 여자분이 아무렇지 않으셨다면 음성이나 채팅으로 "아니예요, 괜찮아요"라고 하실 수도 있었는데,
"아..."하고 한숨을 쉬시더니, 게임이 끝날 때까지 아무 말이 없으셨습니다.
"그만 좀 해요, 기분 나빠할 수 있잖아요"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그런 말을 들어야 합니까?"
"여성유저를 물화(物化)하지 말아주세요. 여자는 물건이 아니예요"
"더 나아가면 성범죄가 될 수도 있어요"
라고 말하는 제게 돌아오는 답변은,
"기분 안나쁠 것 같은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어떻게 이게 성범죄ㅋㅋ"
"아니, 칭찬인데 왜 기분이 나쁨?"
"표현의 자유"
계속 언쟁이 오갔고 결국 게임이 끝날 때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죠.
저도 폭발했고, "쓰레기"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써서 제 지인에게도 상처를 입혔습니다.
어쨌든 게임이 끝난 후 제가 그 여성분께 귓말로
"제가 오지랖을 피워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ㅁㅁㅁ님(저의 지인)의 말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그것도 대신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말했어요,
그분의 대답은
"그냥 제가 여자인게 잘못인듯... (중략-답답하고 짜증난다는 내용) 혹시 마이크 끄는 법 아세요?"
그 때 그 분은 그 후로는 게임에서 만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초반부터 저와 게임을 했던 다른 여자분은 이제 마이크를 켜지 않아요. 다른 한분은 아예 게임을 접었구요.
저도 좀 더 어릴 때는 겜톡 같은 것을 하면,
단지 '여자라서' 듣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싫어서 마이크를 꺼두거나,
혹은 "변성기가 아직 안온 남학생이다"라는 거짓말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이젠 목소리도 늙었는지 사람들이 안속아요ㅠ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죠,
내가 내 돈 주고 구매한, 내가 즐겁게 즐기려고 하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취미인 게임인데, 왜 '나'를 숨기며 해야할까?
왜 내가 '나'인 게 불편해야될까?
아시아 서버가 불안정하거나, 좀 편하게 게임하고 싶을 때는 미국서버로 가서 플레이하기도 합니다.
제가 체감하기로는 아시아 서버보다 음성 대화를 하는 비율이 훨씬 높고,
여성분들도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고요, 때로는 팀에 여자가 더 많을 때도 있어요.
모두 똑같이 음성으로 대화를 나누지만 단 한번도 성별과 관련된 것으로 논쟁이 생긴 적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부러워요. 그 분위기가.
사실 제가 정말정말로 사태가 심각하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저런 말을 하는 사람,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함께 플레이하는 다른 유저들의 반응에 있었습니다.
"그냥 신경쓰지 말아요"
"요즘 애들이 싸가지가 없어서 그래요"
"급식충인듯, 그냥 무시해요"
"훌훌 털어버리시길" (신고 및 제제요청했더니 GM이 했던 말)
"그냥 미친X이다 생각해요"
그리고는 끝입니다.
누군가 어떤 언어폭력을 당하든, 성적희롱을 당하든 그저 한 판이 끝나면 잊으랍니다.
무시하고 침묵하랍니다.
주변 지인들에게 이야기도 해봅니다.
"여자라서 어떤 말을 들어야한다는 게 피곤하고 싫어, 기분이 나빠"
제 주변에서 게임을 좋아하는 여자분들은 이렇게 말했어요.
"나도 그래서 게임을 접었어"
"게임은 하고 싶은데 그런 것 때문에 사람들이랑 말하는게 싫어, 그래서 요즘엔 모바일이나 패키지 게임만 해"
"그냥 일부라고 하기엔 그런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
"남자들은 게임하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런 말도 거부감이 들어, 왜 게임플레이에 남녀 구분이 있어야하는지 모르겠어"
게임을 싫어하는 분들(남녀)은 이렇게 말했어요.
"그럼 그냥 게임을 하지마"
"내 남편도 게임하면 성격이 더 나빠지는 것 같아, 짜증도 많이 내고, 맨날 채팅으로 애들이랑 싸우더라"
"나는 왜 그런 쓸데 없는 곳에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어, 다른 좋은 취미도 많잖아"
"내 여자친구가 게임을 너무 좋아해서 나도 한번 해봤는데, 누가 내 여친한테 뭐라고(성적인 말) 해서 크게 싸움이 났었어, 그 후로 우린 게임을 거의 안해"
혹시나, 성별때문에 오간 대화들이라 공감이 안가시나요?
저는 misogyny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오버워치 경쟁전을 했습니다. 우리팀은 모두 솔큐였고요.
한 분이 마이크를 켜두었는데 숨소리가 좀 크게 났어요.
다른 팀원이 말하길 "숨소리만 들어도 돼지새끼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신나서 말합니다
"너 존나 뚱뚱하지? 몇키로냐?"
"백퍼 안여돼 덕후 새끼일듯"
"너같은 새끼들은 버스 지하철 좀 타지마라"
"게임 끄고 운동이나 쳐해라"
(그분이 몇마디 대답을 했지만 본인의 몸무게 등 그분의 개인적인 신상에 관련된 것이라 적지는 않겠습니다)
제발 그만하고 게임에 집중하자는 저에게는 "너한테 지랄하는 거 아니니까 신경 꺼라"
그리고 아무런 이유없이 언어폭력을 당하던 그 분은 경쟁전 중임에도 그냥 나가셨어요.
저는 생각해봅니다.
그냥 흔히 말하는 급식충, 싸가지 없는 어린애들, 요즘애들, 덜자란 어른, 인성교육을 못받은 것들 등등
그러니까 그냥 넘어가자고, 잊어버리고, 훌훌 털어버리자고,
그게 정말 옳은 걸까요?
저는 지금 온라인 게임상에서의 사건들로 2건의 형사고소를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장문의 글을 적는 이유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아주 작은 바람때문입니다...
제가 사회생활을 시작할때만 해도,
사장님의 재떨이는 아침마다 여자사원이 비우는 게 당연했고,
커피와 술은 여자가 따라야 맛있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요즘 회사라면 저건 큰일날 얘기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자가 화장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예쁘장하게 생기거나, 혹은 마른 남자들은
기생오라비라거나 남자구실 못할 멸치새끼, 호모새끼 등등 그런 말을 듣기도 했어요.
아직 모든 인식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그루밍을 하는 남자분들도 많이 계시고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이 줄어들지 않았습니까?
모든 사람이, 모든 것들이 바뀌진 않겠지만, 어찌 됐든 저는 그런 변화를 경험해왔고 지켜봐왔어요.
제가 앞서 한 이야기들 모두, 남자vs여자로 싸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게임을 사랑하는 모두가 다같이 차별과 편견에 맞섰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게 글을 쓸 용기를 준 기사와 예전 오유에 다른 분이 작성하신 글들을 링크합니다.
[인정받는 '오버워치'라도 여성 게이머는 괴롭다]
인기게임 오버워치, 게임 속 매력과 문화 "남자들도 게임 중 '남자냐'는 질문 매일 받나요?"
[여성게이머에 대한 시선...답답해서 적어봐요]
[저도 여성게이머입니다]
모두가 그저 '게이머'로서 즐겁게 게임하는 날이 오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이 긴 글을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정말로, 고맙습니다.